지난 화 https://bb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read/3056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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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잔에 가득 찬 튼튼밀크에선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성아는 세 손가락으로 머그잔의 손잡이를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뜨거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이 무리한 허세를 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뜨, 뜨거워――!’
성아는 화들짝 놀라며 우유를 찻잔에 쾅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일 없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거만한 태도로 우유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았다.
“음, 이 집 맛집이네.”
“아하하.”
건너편에 앉아있던 마티에르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드가이 하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야, 저거 자판기 아니었어?”
마티에르는 웃으면서 그의 발을 꾸욱 짓눌렀다. 그녀가 입모양으로 “조금만 조용히 해주지 않으려나.”라고 말하자, 배드가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마티에르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러니까 리, 아니 하시랑은 정확하게 어떤 관계이신지……?”
“아아, 하시?”
성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별 건 아니고……”
‘……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요!’
그녀는 아닌 척했지만, 속으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저 눈앞에 마티에르라는 여자는 하시에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이토록 후한 대접을 해주는 걸까? 혹시 약점이라도 잡혔나? 아니, 애초에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일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기서 뭘 기다리면 되는 건데? 온갖 생각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인식은 조심스럽게 하시의 이름을 꺼내는 마티에르의 모습에 도달해 있었다.
‘…… 뭐가 됐든, 저 여자는 하시보다 서열이 낮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갑이다. 그러한 판단에 이른 성아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하시는 내 꼬붕이야.”
“푸흡!”
라란티스가 마시던 튼튼밀크를 내뱉으면서 폭소를 터뜨렸다.
당황한 성아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마티에르와 라란티스를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지, 진짜거든? 우리 집 메이드라고! 야아! 니가 거기서 웃으니까 아닌 것 같잖아!”
‘아니구나.’
마티에르는 속으로 후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래도, 그, 하시가 메이드이면 평소에 되게 편하지 않아요?”
그 말에 성아는 불쑥 고개를 내밀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최악이야! 왕짜증 메이드! 있지, 들어봐. 너도 하시를 알 거 아니야. 그 자식 맨날 이렇게, 이렇게 쭉 째진 졸린 눈 하고선 ‘아니요, 안 되겠는데요, 하지 마세요, 그것밖에 못 합니까?’ 그러면서 맨날 나 깔보고 무시하고 잔소리만 중얼중얼…… 그러다 지 뜻대로 안되면 그건 또 내 탓이지? 요즘은 뭐 하나만 잘못해도 바로 때리려 든다니까? 진심 나처럼 고생하는 아가씨도 없을걸?”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마티에르는 안다는 듯 소리 내서 웃었다.
성아는 방언이 터진 사람처럼 한참 동안 하시의 뒷담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이 한 문장 한 문장 끝날 때마다 마티에르는 비위를 맞춰준다고 안간힘이었다.
‘하시도 고생이겠는 걸.’
그녀는 성아의 나불거림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성아는 설분을 토해내다 말고 씩씩거리며 열을 식혔다. 그녀의 분풀이가 끝났다고 생각한 마티에르가 상황을 마무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 그래요. 그으…… 럼, 아, 마지막으로, 하시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야아――!!”
그러나 그녀의 착각이었다.
성아는 자동차가 급발진하듯 버럭 소리를 토해내고는, 이내 만취한 사람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놓았다.
“너나 잘하세요――!! 너 임마, 내가 고분고분 말을 들어주니까, 어, 내가 아주 만만하지? 지금은 그냥 말없이 참는 것 같아도, 너 그러다 나중에 진짜로 나한테…… 응?”
성아는 말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란티스야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었다지만, 이젠 마티에르나 사무소의 다른 직원들마저 못 참겠다는 듯 새어 나오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싸한 예감이 그녀의 뒷목을 더듬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진짜로? 진짜로 너한테 뭐요.”
하시가 성아의 머리에 덥석 손을 얹었다.
성아는 고장 난 기계가 몸을 돌리듯 삐걱거리며 하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성아가 가장 무서워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하, 하시야? 오랜만이야! 칼로스엔 못 온다더니 어쩐 일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보고 싶었어!”
“이미 늦었습니다, 이 아가씨야.”
“혹시 몰카였던 거야?”
“딩동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아의 머리가 전후좌우로 덜걱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미안해요, 잘못해써요. 사무실 바깥으로 튀어나온 성아의 비명이 골목 곳곳을 찔러대고 있었다.
수 시간 전, 비익시티에 도착한 하시는 곧장 백단숲을 향해 날아갔다.
“땡큐, 렉스.”
그녀가 기다란 리자몽의 목을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리자몽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얕게 털고는, 하시가 내려올 수 있도록 등을 바닥에 가깝게 했다.
“조금만 더 고생해 줘. 오늘은 여러모로 바쁘니까 말이야.”
하시가 펑퍼짐한 치마를 들어 올리며 살며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리자몽이 그녀의 등 뒤로 반짝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 왜?”
리자몽은 입가에서 흘러넘치는 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 돼, 살쪄.”
“꾸우……”
그러자 그는 실망한 듯 꼬리와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리자몽을 곁눈질로 쳐다보던 하시가 반짝거리는 포켓콩을 뒤로 던졌다. 리자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냉큼 그것들을 받아먹었다.
“좋아?”
“꾸엉!”
‘쉽구만.’
하시는 혓바닥으로 입을 쓰는 리자몽에게서 자신의 아가씨를 덧대어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녀는 곧장 고개를 돌려 엉망진창이 된 숲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쓰러져 제각기 게으름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숲은 더할 나위 없이 황량했다. 싱싱했던 나뭇잎은 때 이른 낙엽이 되어 바닥에서 고약한 질감을 이루었고, 진흙으로 뒤덮인 초본에선 스산한 물비린내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뭐 전쟁터도 아니고…….’
그녀가 호숫가 근처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기가 첫 번째 하이드로펌프…… 그런데 못 맞췄어. 아니, 피했나.’
그러다가 다시 숲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는 여기가 아니라 바깥에서부터 꺾여 들어왔어…… 아이고 라랑아.’
하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로는 흔적이 어지럽게 난무해서 좀처럼 머릿속에서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 모쪼록 갸라도스가 이래 놓은 거면 좋겠는데 말이지, 고우?”
그러자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있던 팬텀이 어둠을 뻗어 도망치려던 세 독침붕을 감싸고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깔린 낙엽들과 아직 무성한 나뭇잎들이 일제히 새빨간 눈동자가 되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이리저리 난분분거리며 제각기 방향으로 몸을 굴리다가, 독침붕들이 도망을 치기 위해 허둥지둥 발을 내디딜 때면 순식간에 모든 시선을 그들에게로 향했다. 역겨운 소름이 독침붕들의 전신을 훑었다. 어느새 검은자위로 변한 눈알들이 그들을 집어삼킬 기세로 몸부림치자 독침붕들은 꺄악 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거기 친구들?”
하시가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보아하니 아는 게 좀 있는 거 같은데?”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니요, 저희는 그냥……”
그러자 이번엔 리자몽이 자그마한 불꽃세례를 투 내뱉었다.
그 불꽃 덩어리는 빗나감 없이 둘째 독침붕의 머리를 향했으나,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수그린 탓에 뒤에서 머뭇거리던 첫째의 머리 위로 정확히 올라앉았다.
“…… 우와아아악!!”
“불, 불, 불이야!!”
세 독침붕들은 또다시 꺄악거리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리자몽은 헛헛거리는 아저씨 웃음소리로 웃어 보였고, 팬텀은 그런 그들이 시끄럽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가만히 찡얼거렸다.
첫째가 호숫물에 머리를 담그자 치익, 하고 옅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시가 그들에게 복분열매를 던져주며 말했다.
“어때, 이제 좀 말할 마음이 생겼나?”
“아…… 하지만……”
세 독침붕이 여전히 서로를 쳐다보며 머뭇거리자, 이번엔 리자몽이 화염방사를 내뿜었다. 화염은 호숫가로 향했기에 숲에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기세에 휩쓸린 독침붕 형제들의 더듬이를 바싹 곤두세우기에는 충분했다.
“흐응?”
하시는 이제 말없이 웃어만 보였다.
“시켜만 주신다면 태어나기 전에 알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독침붕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결국은 저 자식들 때문이라는 거잖아.’
미르시티로 돌아온 하시는 방금 전 들은 독침붕들의 증언과, 그리고 파괴된 백단숲의 모습을 떠올리며 천천히 복구 비용을 계산해보았다.
‘어림잡아도 억대는 깨지겠는걸…….’
소규모의 국지적인 전투였던 것 치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다.
그것은 대부분 나무 때문이었다. 땅이 뒤집힌 거야 굴삭기 몇 대면, 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지만, 나무들은 대부분 줄기가 잘려나가는 바람에 새로 심어야 할 판이었다.
‘거기에 벌금이랑 각종 보상금까지…….’
하시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의 안쪽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복사기와 타자기, 그리고 손에 든 종이 뭉치에 시선을 내리꽂은 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평범한 회사였다. 하시는 별 망설임 없이 사무실의 안쪽으로 향했다. 직원들이 시대에서 벗어난 펑퍼짐한 메이드복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으나, 하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실 안쪽 방의 문을 두들겼다.
“네, 들어오세요.”
너머에서 방의 주인이 그렇게 말했다.
방에 들어선 하시는 딱딱한 서류가방을 테이블 한 켠에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던 상대에게 얕은 절을 올렸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팬지 드 비올라님. 일전에 연락드렸던 프렌들리숍의 양녀, 하시 윤입니다. 말씀드린 후속 기사건으로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팬지는 그런 그녀의 예의가 퍽 부담스럽다는 듯 너그러운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편하게 팬지라고 불러주세요. 칼로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시 씨. 커피가 좋으시겠어요? 차?”
“커피로 하죠.”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팬지는 칼로스의 날씨나 분위기 등으로 말문을 텄다. 하시는 그것에 적절히 응수하며, 팬지가 거북해하지 않을 선에서 그녀와 호감을 살 만한 답변을 날렸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그야, 여긴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걸요.” 하시가 자신 또한 칼로스 출신이라고 답했을 땐, 팬지는 적잖이 놀란 듯 튀어나온 칼로스어로 반가움을 표했다.
“…… 칼로스 출신이시라니 놀랐어요. 그럼 성아씨도 칼로스 출신인 거예요?”
“아뇨, 그 녀석은 알로라 토종입니다.”
“그래요? 완전 아가씬 줄 알았는데.”
그 말에 하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촌놈이에요, 촌놈.” 그녀는 코찔찔이었던 어릴 적의 성아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었다.
성아의 얘기를 꺼내자 하시와 팬지는 할 말이 많아졌다. 서로는 서로의 동생을 칭찬하며 자신의 동생을 깎아내리는 데 급급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동생에 대한 고충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성아 씨는 대단했죠…….”
팬지가 이전 날의 배틀을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성아의 비비용이 진화하던 순간의 감회에 젖어있었다.
하시는 자신의 아가씨가 팬지에게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캐터피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이런 분위기라면 바로 본론으로 가도 되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팬지의 기사에 대한 칭찬으로 본론의 입질을 건네고는, 가져온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말씀드린 후속 기사 초안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편하게 수정하시면 되고, 아, 이건 간단한 권유 사항입니다.”
말만 그랬지 지시 사항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팬지는 그다지 부정적인 생각은 없었는지, 즐거운 눈으로 서류를 훑으며 하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하시는 다시 한번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긴 했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최소한 일이 틀어질 걱정은 없어 보였다.
“……?”
그러나 초안을 들춰 보던 팬지가 미간을 찡그리는 바람에 하시는 곧바로 그 생각을 거두어야 했다.
팬지는 하시에게 뭔가를 물어보려다 말고는, 어느 대목을 중심으로 종이를 뒤집으며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하시는 조용히 침을 삼키며 서류가방을 품 안에 가져다 대었다.
“…… 이건,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진 않는데요.”
“혹시 어딘가 설명이 부족했던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조금 당황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곁눈질로 하시를 올려다보았다.
“성아 씨가 복구 비용을 전액 기부한다는 기사를 쓰는데, 프렌들리숍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암시가 없어야 한다는 게…… 제가 지금 잘 이해한 게 맞나요?”
“문자 그대로입니다.”
팬지의 눈빛이 긴장의 색으로 짙어졌다. 그녀는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해 보이는 문제였지만, 무언가 복잡한 계획이 그 뒤에 자리하고 있다는, 그리고 자신이 그 계획의 한 축으로 휘말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불안한 예감을 알리는 기자의 촉이 그녀의 신경을 타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거기까지 눈치챈 하시가 서류가방을 열어 팬지 쪽으로 돌려 보였다.
“이건,”
그곳에는 단단히 묶인 현금다발들이 가방 가득 정렬되어 있었다.
“우리 회사가 아니라, 제가, 미르 출판에게 보내는, 작은 후원금입니다.”
그녀는 팬지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또박또박 단어 사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불행히도 이 가방은 아직 쓰일 데가 있어서, 후원금은 계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시가 다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팬지에게 건네었다.
이번엔 작은 USB였다.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어머니께서 계획하시는 작은 사업의 일환이고, 그 USB는 저희 측에서 보내는 성의의 표시입니다. 궁금하신 점은 그 안에서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남에게 위법의 짐을 지우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시기 때문이죠.”
“잠시만요, 그러니까 이건 결국 성아 씨를……”
하시는 말 없이 싱긋 웃어만 보였다.
팬지는 반쯤 일어나다 만 어정쩡한 자세로, 문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하시의 미소와 마주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전형적인 사교계식 가짜 웃음이었다.
“모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들어왔을 때만큼이나 당당한 자세로 미르 출판을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 업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아가씨가 소매치기를 당한 에테 에버뉴 안쪽을 걷기 시작했다.
“…… 활동 장소가 많이 바뀌었네.”
“뭐, 십 년 가까이 지났는데, 그럴 만도 하지.”
마티에르는 추억을 회상하듯 까르르 웃었다.
“아마 너를 기억하는 애들은…… 거의 없을 거야. 있다면 라울 정도? 대부분은 내 말 듣고 손 씻었거든.”
“어이구, 우리 대장님 큰일 하셨네.”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그러면서도 마티에르는 어느샌가 수화기에서 고개를 떼고 배드가이한테 윽박을 질러 보였다.
하시가 여전하다는 듯 웃었다.
“오랜만에 마띠 화내는 거 보니까 기운 돋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시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아무렴, 애 뒤치다꺼리하는 것보다 힘들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뒤치다꺼리잖아.”
“젠장.”
몇 번의 장난스러운 인사말이 오간 뒤, 마티에르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하시는 전화가 끊어진 이후에도 한참 동안 통화를 받는 척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 한 꼬맹이가 수상한 거동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일부로 찾아갈 필요도 없구만.’
미르 출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였다.
그녀는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 전화를 받은 왼손으로 고개를 바싹 기울인 채, 오른쪽에 든 서류가방을 좀 더 바깥으로 내밀었다. 이따금 골목 근처에선 걸음을 늦추고 사진을 찍어 보내는 척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길 땐 치마가 발에 걸려 자주 넘어지는 체했다. 그렇게 한 블록 반을 지나자 꼬맹이가 반응을 보였다.
‘옳지, 물어라.’
“…… 힛!”
“…… 아아, 내 가방!”
하시는 연약하게 손을 뻗으며, 히죽거리는 포푸니에게 가방을 빼앗겨주었다. 놈은 곧장 자신의 주인에게 가방을 건네고 몬스터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소매치기는 순식간에 골목 너머로 달아났다. 뒤따라가던 하시는 이내 발이 꼬인 척 바닥에 넘어지며 팬텀에게 속삭였다.
‘고우, 가!’
그녀의 그림자에 녹아 있던 팬텀이 순식간에 골목의 응달로 몸을 옮겼다.
바닥에 널브러진 하시는 끝까지 완벽하게 연기했다. 담벼락 높이 그늘진 골목을 서성이며 울먹이다가, 이내 경찰에게 전화하는 척 캐스터에 대고 중얼거리고는 택시에 올랐다.
‘월척이로구나.’
그제서야 사람들 속에 녹아 망을 보던 소매치기의 동료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니들이 날고 기어봤자 거기서 거기지.”
하시는 씩 웃으며 캐스터를 조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화면 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이동하는 붉은 점이 떠올랐다.
“요즘 시대에 gps정도는 의심해 볼 만 하지 않아?”
“아가씨, 어디로 가 드릴까?”
그러나 기사의 질문이 끝났을 땐 하시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기사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끔뻑이며 뒷좌석을 살펴보았지만, 고스트다이브를 통해 택시에서 빠져나온 하시는 어느새 로즈 광장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아마 이 방향대로라면 수로…… 택시보단 공중에서 쫓아가는 게 편하겠지.’
그녀의 예상대로 소매치기는 오톤 에버뉴와 에테 에버뉴 사이의 수로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리자몽이 도착했다는 표시로 짧게 울고는 좌표의 근처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무우마직이 그녀의 곁을 날며 다시 한번 고스트다이브를 준비했다. 하시는 회심의 미소를 자아내며 중얼거렸다.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둬라. 넌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다.”
그러고 그녀는 곧장 중력에 몸을 맡겼다.
연기처럼 흩어진 무우마직이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그림자의 공간으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시각, 소매치기 일당들은 하시의 예측대로 자신들이 낚아챈 가방이 미끼인 줄도 모르고 환희에 젖어있었다. 월척이다, 우습게도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 있는 돈을 마구 뒤집어 보았다.
“억? 이거 억 아닙니까, 사장님?”
“현금이라니?! 장물도 아니고, 현금으로 2억……?”
“내 저놈이 한 건 해낼 줄 알았다니까!”
“잘 했다 판토마! 이 정도면 회식이다, 회식!”
어두운 수로 구석구석 에이팜 같은 소매치기들의 함성이 쏟아져나왔다.
그들 무리의 리더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담배에 찌든 턱주가리를 후드티 소년의 볼에 부벼보았다.
“으유 판토마, 이쁜 것.”
“가, 감사합니다……!”
판토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기쁜 듯 얼굴을 붉혔지만, 그 표정의 한편에는 자신이 훔쳐 온 돈에 대한 두려움이 얕게 서려 있었다.
“저…… 근데요 사장님……. 이렇게 큰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면, 뭔가 위험한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요?”
“짜식아, 우리가 언제 위험한 거 안 위험한 거 가려가면서 작업했냐?”
“그거야 그렇지만요……”
소년이 자신의 수확물에 대해 자신 없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수그리자, 사장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팡팡 두드렸다.
“별게 다 걱정이야! 어떤 멍청한 부자가 요즘 시대에 이렇게 현금을 들고 다니냐? 그렇게 멍청한 놈이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우리한텐 지갑밖에 안 되는 거야.”
그리고 그는 가방의 뚜껑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설령 가방 주인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높으신 나으리라고 해도, 제 딴에 무슨 수로 여길 알고 찾아오겠냐……아?!”
“사, 사장님?!”
그러나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장은 바닥에서부터 튀어나온 구둣발에 턱을 얻어맞고는 공중으로 붕 떠올라 저만치 나뒹굴었다.
“으아악!”
그의 외마디 비명에도 불구하고, 바닥에서 거꾸로 솟아오른 하시는 곧장 자신의 무우마직에게 고스트다이브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라이라, 내가 좌표 잡는 거 연습하랬잖아. 갈피를 못 잡아서 한참 동안 그림자를 헤맨다는 게 말이 돼?”
“우우우……”
무우마직은 맹한 표정으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다.
그녀들을 둘러싼 소매치기들이 몬스터볼에서 포켓몬을 꺼내며 소리쳤다.
“너, 너 뭐하는 놈이야?!”
“사장님!”
소매치기들의 머릿수만큼 튀어나온 포켓몬들이 곧 그녀를 공격할 기세로 울어댔다.
그러나 한쪽 손으로 턱을 부여잡은 사내가 자신의 직원들에게 물러서라는 몸짓을 취하자, 그들은 주춤거리며 하시와 사내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기다려. 니들이 상대할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시는 그 광경에 감회가 새롭다는 듯 고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어, 라울.”
“…… 지금은 아르센입니다, 누님.”
“하, 새끼 하여튼 똥폼 하고는.”
하시는 그렇게 말하고서 무우마직을 볼 안으로 돌려보냈다.
라울이 다시 말했다.
“아무리 누님이라도 기본적으로 지키셔야 할 예의라는 게 있는 겁니다. 그걸 가르쳐주신 건 누님이었을 텐데요.”
“미안, 돈이 많아지니까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되더라고.”
“미리 연락이라도 하시지 그랬습니까.”
“너네 내가 연락해서 장물 빼라 그러면 순순히 넘겨 줄 거야?”
“상도덕의 문제 아닙니까.”
“살다 살다 날치기 입에서 도덕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하시는 또박또박 말을 내뱉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라울은 뺀질거리듯 빠진 턱을 끼워 맞추면서도 그녀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뇌리에 박힌 공포가 그의 입술을 마르게 했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을 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빨리 찾아서 가져가세요. 누님이니까 특별히 그냥 돌려드리는 겁니다.”
“원래 내 건데 개소리하네, 미친놈.”
그녀는 그러고서 라울 옆에 놓여 있던 가방을 가리켰다.
라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 없이 욕을 내뱉었다. 하시가 나타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니 그는 덜컥 짜증이 났다. 돈은 돈 대로 잃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남몰래 하시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 하아, 씨……”
라울이 그런 생각으로 공기를 씹으며 하시에게 가방을 건네자, 하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다그쳤다.
“…… 마띠가 그랬다며, 손 씻으라고.”
“빨리 꺼져요.”
라울은 듣기 싫다는 듯 화제를 집어던졌다. 어쩌면 그것은 마티에르와 하시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시는 그의 때늦은 어리광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모리스는 정신 차리고 마띠 밑에서 일한다던데, 넌 이게 뭐냐?”
“그냥 가요.”
“게다가 이게 나이 먹었다고 담배까지…… 울 대장님 까무러치는 소리가 벌써부터 귀에 선하구만.”
“누님!”
라울이 버럭 침을 튀겼다.
“그러는 누님은, 자기 동생을 죽이고 조직을 떠난 주제에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다니십니다?”
그 말에 하시의 광대가 움찔했다.
라울은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 압도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실언을 내뱉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지만, 그의 직원들이 하시에게 잔뜩 겁을 먹은 마당에 자신마저 꼬리를 내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욱더 고개를 쳐들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하시의 등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으랏차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가방, 그냥 내려놓으시죠.”
“좋은 말로 할 때 그 생각 한 번 더 바꿔.”
“내려놓으시죠.”
하시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맞받아쳤다.
“5일 전, 오후 네댓 시 경에, 저 포푸니 꼬맹이가 작업 친 가방이 하나 있을 거야.”
“……? 지금 날치기한테서 장물을 찾으시는 겁니까? 그것도 5일 전 거를?”
라울이 그녀를 비웃자 머뭇거리던 그의 직원들도 하나둘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아, 아니다. 기억이 날 것도 같군요. 그, 머리가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아가씨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장물 아저씨도 그런 건 촌년이나 매는 거라길래, 값도 제대로 안 쳐 주셨습니다. 지금이면 뭐, 어디 골목길에서 깨봉이 화장실로나 쓰이고 있겠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 뛰어오른 으랏차가 하시의 머리를 각목으로 내려쳤다. 라울이 빈정거리는 미소로 다른 포켓몬들에게도 공격 명령을 내렸다.
“아아……”
모두는 제각기 울음소리를 내며 하시에게로 달려들었고, 으랏차는 멋들어진 자세로 자리에 착지한 채 하시를 돌아보았으나
“감히……”
하시는 응달이 진 얼굴로 눈알을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 르아?!”
으랏차는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눈빛을 보았다.
“감히…… 감히 나의 아가씨를……!”
까드득거리는 그녀의 어금니는 이내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시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거칠어졌다. 그녀는 짐승이 낼 법한 그르렁 소리를 내며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려 하고 있었다.
“이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이이――!! 감히 내가 사랑하는 아가씨를, 아가씨의 가방을 뺐고 괴롭힌 것도 모자라, 감히, 감히 아가씨의 이름을 더럽혀――!!”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포켓몬들이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녀 뒤로 물러났다.
소매치기들은 자신의 포켓몬을 다그치며 꽤액 소리를 질러댔고, 라울은 그제서야 아차 싶은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며 하시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것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아, 그래. 나도, 나도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묶여있던 자신의 뒷머리를 풀어헤치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그림자를 밟고 있는 놈들은 살아나갈 생각하지 말아라.”
손에 쥔 머리끈에선 반짝이는 키스톤이 팬텀의 메가스톤과 반응했다. 라울의 등 뒤에서 떠오른 팬텀은, 그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어둠의 갈기를 뻗어 모두를 짓밟았다.
“우왓?!”
팬텀이 축 처진 눈매로 우왁스럽게 입을 벌렸다.
모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어둠에 대비해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나 그들의 몸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뭐야?”
찬찬히 눈을 뜬 소매치기와 포켓몬들은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을 떼 보았다. 그림자는 그들의 몸을 붙들지 않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모습으로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으, 으아악!!”
갑자기 무리 중 하나가 소리를 질러댔다.
모두는 그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그 비명의 원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루…… 루으……”
“으, 으랏차……!”
그들의 포켓몬이 하나둘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소매치기들은 절규하듯 그들의 이름을 외치며 포켓몬을 손에 담아보았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흙 덩어리는 이내 하수구에 섞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장님…… 사장님……?”
그들은 이제 미아가 된 것처럼 자신의 사장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라울 또한 자신의 부하들이 녹아 없어지는 환상을 마주하고는 벌벌 떨고 있었다.
“누, 누님……?”
그는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하시의 팔을 붙들었다. 하시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에게 가방을 건넸고, 황급히 가방을 받아든 라울은 허겁지겁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가방 속의 돈다발은 이미 그의 직원들처럼 천천히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아, 안 돼……!”
라울이 그것들을 한 움큼 쥐어 올렸지만, 질펀한 진녹색의 오물 하나가 그의 발치로 뚝 뚝 울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는 패닉에 질려 힘이 풀린 다리로 하수도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하시는 거품을 문 채 바닥을 구르는 소매치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혔다.
“…… 이건 뭐, 맥도 못 추리는구만.”
그러고는 여유롭게 그들 사이로 발을 내디디며, 그림자를 거두는 팬텀에게 명령했다.
“멸망의 노래.”
“고오…….”
뒷목을 뻣뻣하게 만드는 기분 나쁜 그녀의 장송곡이, 수로 이편으로 아득히 퍼져나갈 뿐이었다.
“…… 아이고 이빨아.”
하시는 피가 차오르는 어금니 구멍을 볼 밖에서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무우마직과 팬텀이 괜찮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시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이젠 화도 적당히 내야지……. 몸이 못 따라주고 있어.”
“고오……?”
팬텀이 성아의 존재를 되새겨주며 무슨 소리냐는 듯 울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장 머릿속으로 뺀질거리는 자신의 아가씨를 떠올렸다. 때마침 바로 전까지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라울을 있었어서 그런지 그 생생함은 더욱 배가 되었다.
“…… 하아, 내일은 사표를 쓰던가 해야지.”
때마침 그녀의 염뉴트가 또 다른 통로를 탐색하고선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하시는 그녀에게 포켓콩 한 움 큼을 쥐이며 가방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나름의 수확이 있을 거라 생각 한 그녀의 기대와 달리, 염뉴트는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일 뿐이었다.
“라울 그 망할 자식 진짜로 갖다 버렸나?”
딱히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지만, 무우마직은 하시의 물음에 잘 모르겠다는 소리로 울며 몸을 팔랑거려 보였다.
‘아니…… 저 자식 성격에 안 팔리는 장물을 그냥 처분했을 리는 없고……’
“우우우?”
“조용, 라이라. 정신 사나워.”
라울의 자린고비 같은 성격을 잘 아는 하시는 가방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바구니로라도 쓸 텐데 말이지.’
“우우우?”
“야, 좀 조용히 하라……”
하시는 말을 하다 말고 그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반짝거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쌔비냥이 앉아있었다.
“…… 고?”
“…… 떼껄루욱?”
하시의 머릿속에선 울먹이면서 중얼거리는 성아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게…… 쌔비냥을 따라가다 보니 그만…….’
그녀가 미소지었다.
“이봐, 꼬맹이. 이거 먹고 싶어?”
하시는 품 안에서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포켓콩을 꺼내 들었다.
쌔비냥은 벌떡 일어나 하시의 치마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듯 울어댔다.
“떼, 떼껄룩!! 껄룩!!”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그녀는 그러고서 성아의 가방이 찍힌 사진을 들이밀어 보였다.
“혹시 이 가방 본 적 있어?”
잠시 사진을 들여다보던 쌔비냥은, 문득 깨달았다는 눈치를 하고는 기쁜 표정으로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떼껄루욱!”
“따라가, 라이라.”
그녀는 또다시 그림자에 몸을 맡기며 무우마직에게 명령했다.
쌔비냥을 따라간 곳은 멀지 않은 수로 구석 중 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자잘한 옷가지를 쌓아 만든 쌔비냥의 둥지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성아의 가방이 가로로 눕혀 있었다.
“떼껄루욱.”
쌔비냥은 늘어지게 울며 그 둥지를 가리켰다.
하시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쌔비냥의 당돌한 모습에 소리 내어 웃었다.
“요 꼬맹이가, 저게 얼마짜린 줄 알고.”
그러나 쌔비냥은 관심 없다는 듯 포켓콩을 달라고 찡얼거렸다.
하시가 그녀에게 포켓콩을 던져주었다. 그러고는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포켓콩을 먹어치우는 쌔비냥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푸념을 늘어놓듯 가만히 중얼거렸다.
“저게 저래 보여도 삼억짜리 가방이란다.”
“푸흡!”
그 말에 쌔비냥은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콜록거리고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시가 후후 웃었다.
“쌔비냥, 이름은 뭐가 좋으려나. 앞으로 자주 부르려면 입에 잘 달라붙는 거로 해야 할 텐데.”
쌔비냥이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더러워진 성아의 가방을 바라보며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는 하시의 등 뒤로, 팬텀과 무우마직이 도망치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애, 애용, 히끅.”
“음, 역시 떼껄룩이 좋으려나?”
“애용, 히끅, 애용, 애요옹!”
“오케이, 떼껄룩.”
“애, 애요옹…….”
쌔비냥은 코찔찔이 소리를 내며 럭셔리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 이제 뒷골목 수색 부담은 좀 덜었구만. 기뻐하렴, 샐리.”
염뉴트가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울어 보였다. 그녀는 이 새로운 동료 고양이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인지, 하시에게서 럭셔리볼을 건네받고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우마직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볼을 앗아갔다. 염뉴트는 버럭 화를 내며 무우마직과 가벼운 손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팬텀은 그런 그녀들이 시끄럽다는 듯 낮은 신음을 내며 하시와 함께 성아의 가방을 수습했다.
그렇게 모두는 각자의 관심거리에 한눈을 파느라, 등 뒤에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포푸니를 눈치채지 못했다.
“……!”
아마도 하시의 반사신경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녀의 팔 전체가 포푸니의 갈퀴에 잘려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예기치 못한 기습에 그만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놓쳐버렸다.
“주디!”
판토마가 소리침과 동시에 고디보미의 염동력이 가방을 낚아챘다.
하시가 상처 난 팔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잡아, 고우!”
그러나 팬텀이 그림자를 밟기 위해 어둠을 뻗자, 고디보미는 자신과 자신 주인의 그림자를 싹둑 잘라버리고는 재빨리 수로 너머로 몸을 맡겼다.
하시는 지혈을 뒤로 한 채 캐스터의 gps를 켜 보았다.
그러나 지하에서 가방의 위치가 제대로 찍힐 리 만무였다.
“우, 우우우……?”
맹한 표정으로 그녀의 팔 언저리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무우마직이 따라갈 것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옆으로 다른 포켓몬들도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 아니, 됐어…….”
하시는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병원, 병원으로 가자.”, 다만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 하찌이……”
이야기를 다 들은 성아가 울먹이며 하시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 2억을 그냥 다 날려 먹은 거야……?”
“거기서 그게 중요합니까, 이 못난아.”
하시가 성아의 머리에 딱밤을 한 대 놓았다.
“당연히 가짜 돈이죠. 미쳤다고 거기에 진짜 현금을 들고 갑니까.”
물론 성아도 그것이 가짜 돈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괜히 하시가 다친 것 때문에 울고 있다는 사실이 낯부끄러워 그렇게 둘러대는 것뿐이었다.
하시의 붕대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자, 성아는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보를 그만 터뜨리고 말았다. 하시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울긴 왜 울어요, 바보같이.”
“하지만…… 하시…… 팔이……!”
“안 잘렸으니까 이상한 무드로 몰아가지 마요.”
“아하하.”
하시가 성아의 이마에 손날치기를 한 대 쥐어박았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티에르의 웃음에는 어딘가 우울한 기색이 드리워있었다. 머그잔을 만지며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라울은 어떻게 했어……?”
“뭘 어떡해. 경찰 불렀지.”
그 말에 마티에르와 성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시는 덧붙이려는 듯 말했다.
“너무 그 자식한테 마음 주지 마, 마띠. 본인이 선택한 거야. 그리고…… 아마도 그 꼬맹이 녀석이 구해줬겠지.”
“판토마라고 했던가.”
하시는 홍차를 호록 마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울이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좋든 나쁘든 크게 될 놈이야. 고우가 눈치채지 못하게 나이트메어를 연기한 것도 그렇고, 아예 팔째로 뜯어서 가방을 훔쳐가려고 한 걸 보면, 발상 자체가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어.”
“뭔가 신경 쓸 일이 대폭 늘어난 기분인데.”
“그거야 우리 에스프레님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나랑은 상관없을 테고.”
“따지고 보면 네가 벌집을 쑤신 거잖아, 하시!”
우유 잔을 덥석 붙잡은 채 장난스럽게 화를 내는 마티에르를 뒤로 하고, 하시는 명랑하게 웃으며 자신이 챙겨온 가방을 성아에게 넘겨주었다.
“자요, 가방.”
그때까지 성아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하시가 자신의 가방을 건네주려 하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 하찌이……”
“그만 좀 울어요, 정들라.”
하시는 기분 좋게 웃으며 가방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자신의 가방을 바라본 성아의 표정이 일순간 움찔거렸다.
“……? 왜요?”
“아니, 그게…… 으음……”
성아는 자꾸만 은근슬쩍 가방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녀의 반응을 잠시 지켜보던 하시가 가방을 조금 더 그녀 쪽으로 들이밀었으나, 성아 또한 그만큼 몸을 옮기며 가방을 만지지 않으려고 씨름질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잃어버릴 당시의 자신의 가방을 생각하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칼로스 최고의 디자이너가 손수 만든 세계 유일의 숄더백이 아니라, 꼬질꼬질하고 개털과 오줌 냄새가 스며든 빨기 직전의 행주 뭉텅이였기 때문이었다.
성아가 차마 거절하지도 못하고 하시의 시선을 외면한 채 머뭇거리자, 하시가 덥석 그녀의 고개를 돌려놓으며 말했다.
“…… 반대쪽으로 꺾어 드릴까요?”
“미안, 하시야…… 근데 진짜 너무 더러워……”
“…… 렉스.”
하시는 자신의 리자몽을 불러세웠다.
“저거 갖다 버려.”
“꾸엉.”
“……?! 잠깐? 하시야! 언니! 하시 언니?!”
성아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시는 그녀 특유의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아가씨를 리자몽의 양팔에 잘 붙들어주었다.
“지, 진짜로?”
“그럼 가짜겠어요? 가서 렉스, 하수구에 한 번 푹 담가 주고 와. 자기 몸이 이만큼 더러워지면 그때는 맬 마음이 생기겠지.”
“와, 저, 저 야만적인 년……! 라란티스? 마티에르씨?!”
성아는 자신을 구해달라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란티스는 리자몽한테 붙들린 성아의 모습이 우스워 계속해서 깔깔거렸고, 마티에르 또한 “아하하.” 하고 웃으며 성아에게 작별의 손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니지? 아닐 거야아아――!!”
그녀가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리자몽은 튀어나갔다.
쏜살같이 날아오르는 그에게 붙잡힌 채, 눈물을 가득 머금은 성아의 비명이 창공 너머로 멀어지고 있었다.
― 벌레 타입 포켓몬 트레이너 하는 소설 7화
Miss. Maid의 우스꽝스러운 하루
마침
연재는 매 10일마다(10일, 20일, 30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