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안개 속 탑 1 - 2
꿈을 꾼다. 그 안에서 나는 과거를 회상한다.
'그녀'가 다가와 나의 손을 잡아준다. 미소를 짓는다. 나의 팔을 끌어당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멀어진다. '아카데미'의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아니... 내려본다...
그들의 시선이 두렵다. 무섭다. 괴롭다. 나는 떨어진다. 물속으로 떨어진다. 깊이.. 더 깊이...
차갑다. 외롭다. 그녀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빛이 보인다.. 그곳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곳에.. 그녀가 있다.
눈을 뜬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요즘 들어 자주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그녀를 만난다.
수면이 필요하지 않은 '몸'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만나고 싶기에 잠을 잔다.
두 눈을 뜨고 가장 처음 한 일은 아트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트, 좋은 아침이야. '아이'의 상태는 어때?"
허공에 푸른 창이 나타난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다.
"좋은 아침이십니다. 카일님, 1번 실험체의 상태는 하룻밤 사이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몇 시간 안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번 탐색에서 수인 아이를 데려온 지 3일이 지났다.
아이는 그 이후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현재는 수면 상태로 의료실에 누워있다.
아이의 질병은 의의로 단순한 독감이었다. 단지 나이가 어려서 위독하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들'이 남긴 수인 종족의 정보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아이가 일어나면 사정을 설명하고, 고향으로 보내줄 준비를 해야겠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 속에서 무섭고, 두려울 것이다.
"추가로 실험체에게 언어교육기를 통해 기본적인 언어는 주입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카일님, 가끔씩은 진짜 몸으로 행동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면 "그 분"이 보신다면...."
정적이 흘렀다. 아트는 자신이 한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거 같았다.
'그 분'이라... 아트가 말한 사람은 '그녀'와 동일 인물이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인공자아인 아트를 만들고, 멋지게 평의회에 선택을 받아 수석 연구원이 된 존재....
나라면 발끝에도 도달할 수 없는 일반인을 초월한 존재다.
"아트, 내 몸 상태는 네가 체크해서 알겠지만, 한동안은 괜찮잖아? 오히려 이 몸은 식욕이나 수면욕도 없고, 엄청 편리하다구."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에너지 효율만 아니면 모든 것이 완벽한 '물건'이다.
특수합금으로 튼튼하지, 무기도 달려있지,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그려온 내 발명품이다. 효율이야 차차 고쳐가면 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아트, 내가 저번에 추가한 공식은? 게이트의 효율은 얼마나 개선됐어?"
아트에게 말을 이었다. 아트는 신체는 없어도 마음은 여린 아이다. 자기 실수로 마음이 뒤숭숭할 것이다.
"..... 저번에 말씀하신 계산식을 추가,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라 게이트의 유지 시간이 약 3분 늘어났습니다."
3분이라.. 무언가를 하기에 너무나도 적은 시간이다.
처음엔 게이트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도 되지 않았다.
3분, 2분, 1분씩 개선되고, 늘어나서 6시간이 되었다.
"후우, 분명 '모체수정'이 있을 때가 그립네. 아트, 난 재배실로 가볼게. 아이가 일어나면 바로 연락해줘."
"알겠습니다. 카일님, 좋은 하루 되십시오."
나는 방을 나와 걸었다. 의료실을 지났다. 아이는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운을 복돋아 주기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조금을 더 걸어 나는 재배실에 도착했다.
재배실이라 적혀있지만, 그냥 조그마한 텃밭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현재 재배실은 10%도 쓰이지 않는다. 시설에 밥을 먹는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다.
거기에 이 몸으로 지내면 더욱 식량이 필요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달랐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뛴다. 음식을 먹고,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처음 보는 존재가 주는 밥을 먹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이가 밥 한 그릇으로 안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요리라고 해봤자,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지만 말이야."
나는 야채 몇 개를 뽑았다. 우리 종족이 몇 번의 개량을 거친 물건이다. 기본적인 영양분 섭취는 충분할 것이다.
식당으로 향했다. 가져온 재료를 다듬었다. 썰고, 물을 부어 끓였다.
영양 수프가 완성됐다. 이거라면 나중에 간단하게 데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오려던 그때 아트가 연락을 해왔다.
"카일님, 실험체가 일어났습니다. 아직은 아무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만, 빨리 찾아가 보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나는 연락을 확인하고 다시 식당에 들어갔다.
수프를 그릇에 담고, 다시 식당을 나선다.
수프 그릇을 든 합금 기계가 의료실 문 앞에서 생각에 빠져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엄청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문 앞에까지 왔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 몇십 년 만에 말이 통하는 상대다.
거기에 어린아이의 상대는 금속로봇이다. 아이가 무서워하지 않을까. 울지는 않을까. 디자인이라도 멋있게 할 걸 그랬나 싶다.
하지만 여기서 더 지체하면 수프가 식을 거 같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나는 행동으로 옮겼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문이 열렸다. 방안에는 가지런히 정리 된 침대들 끝에 아이가 앉아있었다.
아이가 나를 바라본다. 이런 몸만 아니었다면 식은땀이 흘렀을 것이다.
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그대로 아이가 앉아있는 침대에 식탁을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수프 그릇과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수프를 바라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건 아이 쪽이었다.
수저를 집더니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량을 떠서 맛을 보더니 두 번째 부턴 수저 한가득 퍼먹었다.
나는 조용히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피부에 연갈색 머리, 그리고 그 위에 짐승의 귀가 달린 여자아이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다. 아이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이번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당황스럽겠지만, 숲에서 정신을 잃은 널 발견하고 내가 데려왔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르쳐주겠니?"
거짓말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던 여성에 대한 부분은 뺐다.
하지만 그건 아이를 위한 거였다.
아이는 시간 조금 흐르고 입을 열었다.
"나비. 누나. 아빠랑 살았다. 엄마. 나비 낳다 떠났다."
"나비. 살던 마을. 사람들. 병. 걸렸다."
아이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 아파했다. 쓰러졌다. 떠났다. 아빠 아팠다. 떠났다."
아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나비도 아팠다. 사람들. 무서워했다. 아픈 사람들. 쫓아냈다. 집 불탔다."
"누나. 나비 감쌌다. 사람들 나비 쫓았다."
"나비. 그 후 기억 없다."
"누나. 없다. 누나. 나비 떠난 거야?"
그 여성은 아이의 언니였던 모양이다.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병으로 가족을 잃고 자기도 병에 걸렸지만, 아이가 걸린 건 그냥 독감이었다.
어쩌면 아이와 모계 혈통은 항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족민들은 몰랐겠지. 그들은 그저 두려웠던 거였다.
"나비. 기억난다. 누나. 감쌌다. 사람들한테. 공격받았다."
"누나. 떠난 거지? 말해줘. 수호신님."
아이는 날 수호신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누나는 말이야... 잠시 먼 곳에 있을 뿐이야."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남을 속일 만큼 머리가 빠르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그저 울기 시작했다. 아마 아이도 알고 있는 거 같았다.
침대 시트에 눈물이 떨어지고 아이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차가운 몸으로 그 아이를 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래 몸으로 올 걸 그랬다.
아이는 더 큰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 아이를 보니 나와 많은 부분이 겹쳐갔다.
가족을 잃었다.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 그렇게 울었다.
나 또한 겪은 것이다. 그리고 난 한가지 결정을 하였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렸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장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의 붉게 물든 눈시울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름은... 나비 맞지? 분명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너는 강하게 견뎌내는구나."
"나비가 말했던 병이라면 내가 고쳤단다. 지금이라면 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만약 당장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살아도 좋단다. 하지만 말만 하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아이는 얼굴을 숙였다. 생각에 빠졌다. 그것도 당연할 것이다.
큰 고난을 겪었다. 눈을 떠보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경, 들은 적 없던 언어, 그리고 자신의 눈앞엔 금속으로 된 정체불명의 생물체가 있다. 아이의 입장에선 그게 연속으로 일어난 일이다.
이런 경우엔 보통 패닉에 빠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비'는 그렇지 않았다.
적응력이 좋은 걸까. 아니면 마음이 굳센 걸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이는 결정한 모양이다.
"나비. 여기. 살게 해줘. 수호신님."
"나비. 말 잘 들어. 착하게 살게."
아이의 말을 듣고 놀랐다. 확실히 처음 보는 환경에서의 경계심은 남아있구나.
나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이는 처음엔 놀란 거 같았지만 내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안심한 거 같았다.
"아트, 듣고 있지?"
말이 끝나자 푸른 창이 나타났다.
"부르셨나요, 카일님."
아이는 허공에서 나는 소리를 듣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이 아이, 아니지. 나비를 시설 멤버로 등록, 명칭은 실험체 1번이 아닌 '나비'야."
분명 아트라면 모든 걸 듣고 있었겠지만, 지금 내 판단을 좋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외부세계의 주민을 시설에 데려온다는 건 '평의회'의 허락 없인 불가능하고, 그 주민을 시설 멤버로 임명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평의회가 사라진 게 다행이었다.
"요청 접수. 실험체 개체 1번의 변경사항을 적용. 최고 관리자 카일, 승인을 요청."
"승인 완료. 나비, 너는 오늘부터 이 연구소의 두 번째 멤버가 된 거야."
나비는 처음 듣는 단어와 허공의 목소리 덕에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너무 경계하지 말렴. 너는 이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단다."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아마 아이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겠지.
옛날에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분명 '그녀'가 날 바꿔 가는 거겠지.
"자. 나비. 너에게 보여줄 게 너무나도 많단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나비에겐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설의 내부와 내 이야기, 아트도 말이다.
그리고 나비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나비와 그녀의 언니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지금은 나비에게 해줄 말이 너무나도 많다. 아이가 시설에 적응하게 되면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나비는 의료실 침대에서 내려왔다. 우선은 신발을 신기는 게 우선인 거 같았다.
그릇과 수저를 챙기고, 나도 일어섰다.
나의 손을 잡은 나비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의료실 문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