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아르실의 목소리에 렘 브란트는 내심 희망을 품었다.
남을 조종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이방인 아르실.
그녀가 나선다면 저 괴물을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렘 브란트는 희망 한 줄기를 품고서 아르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아르실 님, 아르실 님이라면 저런 짐승 군대 정도는 처리할 수 있으시죠?”
“응? 내가 왜?”
간절한 렘 브란트의 부탁에 돌아오는 아르실의 대답은 내리는 눈송이보다 차가웠다.
렘 브란트는 당황한 나머지 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네? 그, 그야 저 괴물 무리를 처리하지 않으면 다 죽으니깐…….”
“내가 저런 놈들에게 죽을 거 같아? 너 요즘 따라 나한테 대드는 거 같다?”
“아, 아닙니다, 제,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를.”
정신을 차린 렘 브란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아르실은 렘 브란트를 쏘아보며 경고했다.
“운 좋은 줄 알아, 옆에 가온만 없었다면 넌 여기서 끝이었어.”
“허, 허억.”
“얌전히 있어, 당장 죽기 싫으면 말이야.”
아르실은 그 말을 하곤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엎드린 렘 브란트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는 죽을 게 분명해!’
아르실이 나서지 않는다면 말튼 성은 함락당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르실을 설득할까 고민하던 렘 브란트의 시야에 가온이 보였다.
이유는 몰라도 아르실이 유독 아끼는 노예 소년이다.
저 녀석이라면 아르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이기에 렘 브란트는 망설이지 않고 가온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이름이 가온이었지? 네가 아르실 님한테 가서 잘 좀 이야기 해줘.”
“무슨 이야기?”
“알면서 뭘 물어 이대로라면 우리 다 죽는다고!”
“…….”
렘 브란트의 부탁에도 가온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가온의 무심한 반응에 렘 브란트는 당황했다.
“야야, 이러다가 다 죽는다니깐? 아까 숙소에서 내가 뭐라 한 것 때문에 그런 거냐?”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데 체면을 따질 정도로 렘 브란트는 바보가 아니다.
렘 브란트는 곧바로 눈이 쌓인 성벽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그런 거라면 내 바로 사과하마!”
렘 브란트의 사과에도 가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온이 입을 다문 몇 초간의 시간이 렘 브란트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잠깐이었지만, 가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몇 마디를 렘 브란트는 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가능성은 적어……이게 최선이라면, 차라리 정말로…….”
무슨 말인지 렘 브란트는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기다리겠지만, 당장 적이 성벽 코앞이었다.
렘 브란트는 가온의 어깨를 잡은 채 재촉했다.
“제발! 시간이 없다고!”
“알겠어.”
고민하던 가온은 결심이 섰는지 아르실에게 다가갔다.
다가오는 가온을 바라보는 아르실의 입술은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아르실 앞에 선 가온은 짧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실.”
“흥.”
“아르실.”
“싫어, 이런 귀찮은 일은 난 사양이야.”
평소의 아르실이었다면 가온의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실은 가온의 부탁을 거절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아르실은 불만 가득한 눈을 한 채 투덜거렸다.
“뭐 하러 이런 귀찮은 일에 끼어들어야 해? 애초에 너랑 난 상관없는 일이잖아? 가온 네가 괜히 일을 벌인 탓이라고.”
“…….”
“나랑 가온 네가 힙을 합해서 적을 쓰러뜨려도 사람들이 좋아할 거 같아? 아니 내가 이방인인걸 알면 날 경계할거고 가온 네가 노예인 걸 들키면 저들은 널 배척할 거야.”
아르실은 가온의 부탁을 완강히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아르실의 모습에도 렘 브란트로서는 별달리 할 게 없었다.
그저 가온이 잘 해주기를 빌었다.
가온은 다시금 아르실을 불렀다.
“아르실.”
“안 해, 안 할 거야, 재미도 없다고 이런 일은.”
“아르실.”
“으으, 알겠어, 알겠다고 나도 알아 미르 언니랑 관련된 일이라 이러는 거지? 하룬가 본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미르가 걱정 되는 거잖아.”
가온의 연이은 부름에 아르실의 표정은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아르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마음씨 착하고 예쁜 이 아르실 님께서 이번만 특별히 도와줄게, 당장 진군하는 저 군대부터 멈춰 줘?”
“부탁하려는 건 그게 아니야.”
“뭐야 설마 나 보고 이방인 하운드를 잡으라는 소리는 아니지? 아리따운 레이디를 적진 한복판에 내보낼 생각이라니 가온 너도 참 매정하다.”
“그것도 아니야.”
딱딱한 목소리로 부정하는 가온의 대답에 아르실은 이상함을 느꼈다.
가온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이방인의 조력을 얻었다.
자신의 조력을 받아 기뻐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가온의 표정은 소름끼칠 만큼 딱딱하고 차가웠다.
아무리 평소의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가온이라 해도 너무나도 이상했다.
쿵쿵!
높게 쌓인 눈을 헤치며 성벽을 향해 다가오는 병사들의 발소리 바로 앞까지 들려왔다.
렘 브란트는 사색이 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렘 브란트는 물론 다른 이들 또한 사색이 되었지만, 가온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르실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이방인 하운드가 랠리 숲에서 진군하고 있다는 말에도, 이렇게 군대를 모아서 나타난 지금의 상황을 봐도 가온은 놀라기는커녕 더욱 침착했었다.
아르실은 전부터 느낀 위화감에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가온,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소리야.”
“랠리 숲에서 쓰러지고 며칠이 지나는 동안 넌 바깥 상황을 알 수 없었어, 근데 지금 네 모습을 봐 너무 태연하잖아, 무슨 일이 벌어져도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침착하다고.”
아무리 고단한 일을 겪어 살아오며 대부분의 감정이 마모된 노예라도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르실 본인조차 이방인 하운드의 군세를 보고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온은 태연했다.
아르실의 추궁에 가온은 희미하게 웃으며 아르실을 칭찬했다.
“역시 아르실 넌 눈치가 빨라.”
“에헤헷, 내가 눈치가 좀 빠르지, 아니 칭찬으로 얼버무릴 생각 하지 말라고, 대체 랠리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부탁먼저 해도 될까?”
“치이, 또 얼버무리기야?”
아르실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이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거부하는 내색은 없었다.
당장 성벽에 접근하는 병사들을 막지 못하면 말튼 성은 끝이라는 걸 아르실 또한 알고 있었다.
아르실은 어깨를 으쓱이며 재촉했다.
“뭐든 말해 너무 귀찮은 거 만 아니면 다 들어줄 게.”
아르실이 흔쾌히 권하자 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병사들을 제압해줘.”
“뭐야 지금 진군하는 하운드의 병사들을 막아달라고? 내가 처음에 말했던 거잖아.”
“아니야, 놈의 군대 말고.”
“응?”
가온의 말에 아르실의 눈빛이 살짝이나마 흔들렸다.
아르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웬만하면 절대 놀라지 않는 아르실이 오늘만 두 번 놀랐다.
이방인 하운드의 군세에 한번 놀라고 가온의 부탁에 두 번 놀랐다.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인 말튼 성에는 두 진영의 군대가 있다.
말튼 성을 둘러 싼 하운드의 군대, 그리고 말튼 성에 남은 군대.
당장 성문이 뚫리고 말튼 성이 함락될 위기 상황에서 가온은 하운드의 군대가 아닌 다른 군대를 제압해 달라 했다.
아르실은 가온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또 다시 물었다.
“가온? 내가 귀가 좀 안 좋은가봐 다시 말해줄 수 있어?”
“그래.”
가온은 아르실의 흔들림에 확신을 심어주듯이 다시금 정확히 자신의 부탁을 시를 읊듯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말튼 성의 병사들을 제압하고 성문을 열어 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