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룬가의 병사들은 신속히 오툰을 들쳐 업은 채 도망을 계속했다.
유일한 방해꾼이 사라지자 칼 리보렌은 손을 들어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
칼 리보렌의 신호에 말보른 성의 병사들은 도망가는 하룬가의 병사들과 자유해방단원들을 쫓기 시작했다.
“살려줘!”
“끄으윽! 등에 화살이 꽂혔어.”
“으아아악!”
싸울 의욕을 완전히 잃은 채 도망가는 병사들과 그 뒤를 쫓는 말보른 성의 병사들.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말튼 성의 북쪽 벌판에서 때 도망가는 자들과 쫓는 자들 간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서쪽과 동쪽, 도와주러 오기로 했던 두 성의 지원군의 공격 소식은 곧장 샤로텐에게 알려졌다.
소식을 들은 샤로텐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발밑에 서 무릎을 꿇은 감독관에게 물었다.
“두 성에서 오던 지원군이 공격을?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영주님, 그리고 제가 봤던 서쪽의 브레이튼 성의 군대를 이끄는 건 이방인 하운드의 부하였습니다.”
“이방인 하운드의 부하라고? 대체 어찌 그런…….”
감독관의 보고를 듣던 샤로텐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힘겹게 고개를 든 샤로텐의 시선은 말튼 성의 동쪽 성벽을 포위한 적들을 향했다.
동쪽 성벽을 포위한 말보른 성의 병사들.
그들을 이끄는 건 샤로텐 자신이 가장 아끼던 기사 칼 리보렌이었다.
샤로텐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숨을 내쉬었다.
“두 성의 지원군이 변모하고 그 중 하나를 이끄는 게 내 기사라니.”
샤로텐은 충격이 큰 지 한동안 말을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랄드는 더는 못 참겠는지 성큼 성큼 다가왔다.
감독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하랄드는 감독관에게 물었다.
“말보른 성의 병사들이 우리 병사들을 공격했다고? 게다가 거의 다 전멸? 오툰! 그 놈은 지금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냐!”
“살아남은 병사들의 말로는 병사들이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홀로 적들을 상대하다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멍청한 놈! 제기랄 이럼 어쩌자는 거야.”
하랄드는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지만, 감독관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았다.
화풀이를 할 만큼의 여력도 없었다.
하랄드는 성벽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영주와 하룬가의 적자, 두 사람 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다 심각한 표정을 지은 하밀부르크가 감독관에게 조용히 물었다.
“대충 군세는 얼마나 되지?”
“제가 본 것과 살아남은 병사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못해도 오천은 될 겁니다.”
“오천……최악이군.”
하밀부르크는 고개를 들어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동쪽과 서쪽, 말튼 성의 양 옆을 포위한 채 대기하는 오천이 넘는 병사들.
저들이 지원군이 아닌 전부 적이라니.
그러나 하밀부르크는 앞의 두 사람처럼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샤로텐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충격이 큰 건 아시겠지만, 일어나셔야합니다.”
“알고 있네, 이럴 시간도 아깝다는 것도 알고 있어.”
고개를 든 샤로텐의 입술은 스스로 깨물었는지 피범벅이었다.
손바닥도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피멍이 들었다.
샤로텐은 피로 물든 입술을 닦곤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다친 부상자들은 내성 안으로 보내 치료를 시켜라! 그리고 주둔하는 모든 군을 성벽에 배치시키고 고드프리 경을 최대한 빨리 불러오도록!”
바로 정신을 차리고 명령을 내리는 샤로텐과는 달리 하랄드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제길 제길! 하필 이럴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가주님만 무사하셨어도.”
“하랄드 경께서도 빨리 남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셔야합니다.”
“닥쳐라! 내 부하들은 알아서 관리할 거다, 한낱 단장인 네 놈이 우리 가문 일에 관여하지마라!”
하랄드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주저앉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망할, 망할 하필 본가에 늑대 기사단만 있을 때, 하다못해 다른 이방인이라도 있었다면, 감히 적자인 날 두고 다른 놈들한테 가? 용서못해 용서 못한다고!”
하랄드의 푸념 섞인 혼잣말을 듣던 하밀부르크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룬가의 가주가 혼수상태인 지금 하룬가를 이끌 사람은 하랄드 밖에 없다.
그런데 이 모양이다.
당장 하룬가가 뭘 해주는 걸 기대하긴 힘들었다.
하밀부르크는 어느새 자신의 뒤에서 대기하는 자유 해방단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린 소수인 만큼 전투가 아닌 성내 불순분자 수색과 병사들의 지원에 힘을 쓰도록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단장님.”
“다친 부상자들은 내성 안에 있는 치료소로 보내도록 영주님께서 허락하셨다.”
“알겠습니다.”
단원들은 단장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흩어졌다.
하밀부르크는 다시금 성벽을 포위한 적들을 확인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군.”
적의 수만 봐도 당장 성을 공격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움직이지를 않는다.
적이 당장 공격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밀부르크는 가벼이 넘기지 않았다.
적들의 진형을 보던 하밀부르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형이 조금 이상하군 성을 포위하는 데 하필이면 동쪽 서쪽만? 말튼 성의 유일한 입구인 북쪽부터 포위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이상한 진형이었다.
양쪽을 포위한 채 성문이 있는 북쪽만 길이 뚫려 있는 게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 같았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하밀부르크에게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왔다.
아까 전 뛰쳐나간 자유 해방단원이었다.
단원은 급하게 하밀부르크에게 보고했다.
“단장님! 급히 보고 드릴게 있습니다!”
“보고해라.”
“단장님이 며칠 전에 보내신 정찰 임무를 맡은 단원이 말튼 성의 남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수상한 움직임?”
하밀부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튼 성의 남쪽은 길이 없다.
남쪽을 따라 쭉 이어지는 높은 산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초목도 거의 없고 절벽과 암벽으로 가득한, 사람은커녕 짐승조차 보기 드문 산에 수상한 움직임이라니.
하밀부르크의 물음에 단원은 망설임 없이 즉시 말했다.
“짐승들입니다! 못해도 수백 마리가 넘어가는 숫자의 짐승들이 말튼 성 남쪽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뭐?”
“게다가 행동도 이상합니다, 먹이를 구하러 온 것도 아니고 마치 말튼 성을 포위하려는 것처럼 말튼 성 남쪽의 모든 길을 막고 있습니다.”
단원의 말에 하밀부르크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아무 이유 없이 짐승들이 남쪽의 암벽 산에 나타났을 리가 없다.
분명 이방인 하운드의 짓이었다.
동쪽 서쪽 남쪽까지 포위되었다.
그럼 남은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밀부르크는 자기도 모르게 북쪽을 바라보았다.
북쪽을 바라보던 하밀부르크의 입가가 뒤틀렸다.
“제대로 한방 먹었군.”
“네?”
“북쪽을 봐라”
하밀부르크가 가리킨 북쪽 방향, 아직도 내리는 눈 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눈에 가려져 정확한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희멀건 인영이 점점 늘어나더니 어느새 수백이 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보라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 건 것은 짐승들과 인간 병사들이었다.
랠리 숲의 짐승들과 자유 해방단원들과 늑대 기사단 그리고 말튼 성의 토벌대 무리였다.
정체를 확인한 단원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하밀부르크에게 물었다.
“다, 단장님 저 놈들은 혹시?”
“네가 생각하는 놈들이 맞다, 하운드의 군대다.”
“맙소사.”
단원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았다.
몇 천이 넘어가는 군세가 북쪽에서 말튼 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북쪽에서 오고 있는 몇 천이 넘는 군세 앞에서 당당히 걷고 있는 하얗고 커다란 늑대, 이방인 하운드.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의 출현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고개가 숙여지는 적의 수장.
어느새 하운드와 군대는 말튼 성 근처에 당도했다.
랠리 숲에서 이방인 하운드가 짐승들과 군대를 이끈 지 5일째.
만 명이 넘어가는 하운드의 군대에 의해 말튼 성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