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어? 뭐야 갑자기 군사들이 들어오는데?”
“갑옷도 그렇고 다친 사람도 있는데?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피, 피가 흐르는데? 죽은 사람도 있어!”
“분명 며칠 전에 나갔던 하룬가와 자유 해방단의 군대 아니야? 어째서 이런 꼴로.”
심상치 않은 주민들의 말소리에 렘 브란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렘 브란트의 시야는 창문 바깥너머 마을 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장 눈에 보인 건 다친 병사들이 흘리는 피.
흘리는 피보다 더 눈에 띄는 건 패잔병보다 더 비참해 보이는 병사들의 표정이었다.
마을 주민들의 말대로 며칠 전 밖을 나갔던 하룬가와 자유 해방단의 병사들이었다.
그걸 본 렘 브란트도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어쩌다가 저렇게 다쳐서 온 거야?”
출정할 때만 해도 천이 넘던 병사들의 수는 이백 남짓이었다.
병사들을 이끌어야할 대장인 오툰은 피범벅이 된 채 수레에 실려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숨을 쉬는 정도였다.
병사들의 처참한 모습을 본 주민들은 공포에 질렸다.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설마 짐승 군대하고 싸운 거야?”
“거, 거짓말 분명 도망갔다 했잖아!”
며칠 간 찾아왔던 평화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거리는 혼란에 빠진 주민들의 공포어린 외침으로 가득해졌다.
이 모습을 창문 너머로 보고 있던 렘 브란트의 등 뒤로 가온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왔어.”
“뭐라고?”
뒤에서 나지막하게 말하는 가온의 말에 렘 브란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렘 브란트는 확실하게 느꼈다.
가온은 무심한 표정으로 군대 행렬을 보더니 렘 브란트에게 말했다.
“아르실을 찾아야 해, 내 몸이 움직이기 힘드니 도와줘.”
“도, 돕길 뭘 도와, 아르실이 오기 전까지는 여기 있어야 한다고.”
“어쭈, 나 없다고 이름으로만 부르는 거야? 정신이 빠졌다 너?”
“허, 허억?”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렘 브란트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은 채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렘 브란트의 뒤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아르실이 당당히 서 있었다.
아르실은 렘 브란트는 날카롭게 째려보며 말했다.
“분명 날 아르실 님이라고 부르라 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아르실님!”
“흥, 가온을 열심히 간호해서 봐주는 거야, 다음은 없어.”
아르실은 그렇게 말하고 시선을 홱 돌렸다.
가온과 눈을 마주친 아르실은 언제 냉담하게 대했다는 듯 가온에게 달려가 안겼다.
가온의 가슴팍에 뛰어든 채 아르실은 몹시도 기뻐했다.
“가오오오오온! 드디어 일어났구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나저나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야?”
“헤헤, 당연히 이 아르실님이 몸소 널 구했지! 라고 말하면 안 믿을 거지? 이상한 아저씨가 널 데리고 왔어,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르실은 병사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창문 바깥에 풍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는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 해, 지금 성벽 밖에서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볼래?”
화사한 꽃처럼 활짝 미소를 지은 채 제안하는 아르실.
가온은 그녀를 따라갔고 뒤에서 보고 있던 렘 브란트도 조용히 따라갔다.
세 사람은 난리가 난 거리를 따라 성벽 위로 올라갔다.
지키는 병사들이 있지만, 막는 이는 없었다.
아르실이 그들을 조종한 게 아니었다.
병사들은 반쯤 실성 한 채 성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거 꿈이지? 꿈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실성한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성벽 밖의 풍경을 본 렘 브란트가 내뱉은 첫 마디는 욕설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으로 덮인 말튼 성의 성벽.
병사들과 렘 브란트가 보고 경악한 것은 말튼 성의 성벽을 포위한 천 마리도 넘어 보이는 짐승들과 만 명은 족히 되는 병사들이었다.
며칠간 보이지도 않았던 이방인 하운드의 군대가 말튼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해질녘 노을이 지기 전, 말튼 성이 포위되기 몇 시간 전.
영주의 명령을 받아 정찰 중인 정찰대는 오늘도 어김없이 말튼 성 주위를 순찰 중이었다.
이제는 제법 말을 잘 타게 된 감독관이지만, 다른 기사들에 비해 여전히 속도는 느렸다.
가장 뒤에서 말을 타고 달려가는 감독관은 앞서가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천천히 좀 갑시다! 저렇게 빨라서야 원!”
“하하핫! 이정도면 천천히 가는 거라고!”
“며칠 만에 이제 말을 제법 타는 걸?”
“저 녀석 건들지 마, 이번 임무만 끝나면 무조건 내 후임으로 들어오게 할 거야.”
앞에서 웃으며 말하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난 힘들어 죽겠는데 장난조로 말하고 있네.”
감독관은 투덜거리듯이 말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기사란 작자들은 오만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다고만 들었던 감독관이었다.
실제로 하룬가에 있을 때 감독관은 기사나 기사생도로부터 온갖 모욕과 폭력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말튼 성의 기사들은 달랐다.
처음 봤을 땐 근엄하고 진지한 모습에 겁을 먹었지만, 며칠 간 지내면서 유쾌하면서도 정중한 이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고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감독관은 내심 이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임무에나 집중하자.’
감독관은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냈다.
그 사이 감독관과 기사들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시야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기사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감독관은 화들짝 놀랐다.
“이, 이런 이러다가 미아라도 되겠어.”
감독관은 말의 박차를 가하며 기사들을 따라갔다.
한편 선두에서 달리던 기사들.
기사 중 한 명이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본 기사들은 멈춰 섰다.
선두에 선 기사는 저 멀리 눈이 내리는 언덕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뭔가가 움직였어.”
“움직였다고?”
“그래, 짐승은 아닌 거 같은데 언뜻 형체를 보니 사람 같은데 숫자가 꽤나 많아.”
“지나가던 상인 행렬 아니야? 으음, 눈이 워낙에 많이 내려서 확인이 힘든데.”
임무를 시작한지 며칠 째지만, 그동안 한 번도 뭔가를 발견한 적이 없었던 정찰대였다.
평소 같았으면 이 자리에서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지만, 눈발이 심한 터라 확인이 힘들었다.
기사들 중 한 명이 재빨리 물체가 보였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갔는데도 안 보이다니 무슨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건지……음?”
달려가던 기사의 시야에 물체의 뚜렷한 윤곽이 잡혔다.
몇 천이 넘는 무장을 한 병사들의 행렬이었다.
기사는 재빠르게 병사들이 입은 갑옷의 문장을 확인했다.
서쪽의 브레이튼 성의 문양이었다.
문장을 확인한 기사는 기쁘게 외쳤다.
“지원군이다! 드디어 왔구나!”
며칠 간 소식 없던 서쪽의 지원군이 눈발을 뚫고 도착한 것이다.
기사의 외침에 다른 기사들도 몹시 기뻐했다.
“언제 오나 했는데 드디어 왔구나!”
“이제 됐어, 지원군을 성에 안내하면 된다!”
“우리도 어서 가자고!”
다른 기사들은 먼저 간 기사를 따라 달려갔다.
가장 뒤에 있던 감독관은 먼저 간 기사들을 따라가려고 애를 썼다.
“아니 이 사람들은 뭘 발견했기에 급하게 간 거야?”
눈발이 워낙 거세 어디로 갔는지도 확인이 힘들었다.
잠시 멈춰선 채 주위를 둘러보던 감독관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말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챙챙!
“응? 뭔 소리야.”
분명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였다,
귀를 기울이던 감독관의 근처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기사들이 타고 있던 말의 다리였다.
무언가에 깨끗이 잘려나간 말의 다리를 보곤 감독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이게 무슨?”
당황하는 감독관의 귀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도망쳐!”
“난 이미 낙마했어! 두고 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크아아아악!”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비명소리에 감독관의 몸은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감독관은 잠시 고민했다.
“도, 도망갈까?”
이전의 감독관이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관은 자신을 구해준 노예 꼬마의 자비로 변했다.
적어도 기사들의 생사를 알기 전까지 감독관은 도망가지 않기로 했다.
얼마 있지 않아 눈보라를 뚫고서 세 명 명의 기사들이 말도 없이 힘겹게 뛰어왔다.
두 기사는 팔이 날아가거나 다리를 잃었고 그나마 몸이 멀쩡한 기사마저도 온 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온 몸에 피를 흘리는 기사는 감독관을 보곤 소리 높여 말했다.
“시간이 없다! 도망가라!”
“네?”
“도망가서 영주님께 반드시 알려야한다! 서쪽에서 오는 브레이튼 성의 병사들은 함정이라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감독관은 기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말튼 성으로 지원하기로 온 게 브레이튼 성의 병사들이었을 텐데 그들이 함정이라니.
감독관은 기사들의 상처를 확인하곤 곧장 제안했다.
“상처가 심합니다, 일단 제 말에 타서…….”
“그럴 시간 없대도! 어차피 우린 부상 때문에 틀렸다 너라도 도망가야 한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가야 한다는 겁니까?”
감독관은 미처 다 묻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눈보라를 뚫고 온 건 기사만이 아니었다.
세 명의 기사들의 뒤로 나타난 브레이튼 성의 병사들.
그들을 이끌고 있는 건 브레이튼 성의 지휘관이 아니었다.
살짝 올라간 앞머리의 흔히 보기 힘든 머리 스타일과 떴는지 안 떴는지 모를 실눈.
그러면서도 올라간 입 꼬리가 마냥 웃는 것처럼 보이는 남성, 하룬가를 배신하고 이방인 하운드의 수하가 된 막심이었다.
막심은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다친 세 기사들에게 말했다.
“말도 잃은 너희들이 도망간들 얼마나 가겠어, 허튼 수작 말고 목이나 내놓아……응?”
막심은 앞에 있던 감독관의 얼굴을 알아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말 탄 놈이 하나 더 있었네, 빨리 처리 해.”
막심의 말에 뒤에 있던 브레이튼 성의 병사들이 움직였다.
랠리 숲에서 하운드에게 조종당하던 기사단원들과 자유 해방단원들처럼 초점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병사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사들과 감독관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살아남은 세 명의 기사 말고 다른 기사는 죽었는지 병사들의 검에는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세 기사들은 이를 악문 채 감독관에게 명령했다.
“말튼 성의 기사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도망가라! 우리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겠다!”
“제길, 이런데서 죽는 게 아쉽지만,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한 놈이라도 더 잡고 가겠다!”
“우리 생각 말고 도망 가! 너의 임무는 이제 생존이다! 말튼 성으로 가는 방향은 저기다!”
기사들은 그렇게 말하곤 감독관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겠다는 의지였다.
고작 며칠이지만, 기사들과 함께 지낸 감독관은 이들의 무슨 각오를 했는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감독관은 입술을 깨문 채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감독관은 말의 박차를 가하며 말튼 성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감독관의 등을 보던 막심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망가는 놈, 익숙한 얼굴인데, 이런 이럴 때가 아니지 뭐 하냐 빨리 저 도망가는 놈들을 잡아!”
막심이 손을 내리자 병사들 중 말을 탄 기마병들이 감독관을 쫓아가려했다.
그러나 내달리던 말의 다리가 베이며 눈밭에 엎어졌다.
앞을 막아선 기사들의 짓이었다.
“우리를 죽이기 전까지는 여기서 한발자국도 못 지나간다!”
“미련한 말튼 성의 기사 놈들, 이래서 기사 놈들이 싫어, 이놈들부터 처리 해.”
막심의 명령에 병사들의 칼끝은 기사들을 향했다.
승산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싸움이었다.
기사들은 곧 찾아올 죽음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마지막으로 한 마디 씩 했다.
“결혼도 못하고 가다니 귀신이라도 되면 총각귀신이 될 거야.”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쳇, 그 녀석 잘 도망가야 할 텐데.”
“말만 타면 토하기만 하던 녀석이 말의 박차도 가하는 거 봤잖아? 잘 할 거야, 우린 먼저 가도 그 녀석은 최대한 늦게 오도록 빌자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씩 남기며 기사들은 검을 뽑아들었다.
감독관이 안전하게 도망가게끔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서 기사들은 목숨을 장작으로 삼아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