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02일
여자가 된 지 이틀째. 솔직히 말하면 자고 일어났더니 꿈이었습니다-라는 전개를 기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부스스한 긴 머리칼은 그대로. 아직도 난 여자였다. 나는 살며시 볼을 쭈욱 잡아당겨 보았다.
“아파!”
현실감이 없던 탓일까. 볼을 예상보다 훨씬 길게 잡아당겼고, 곧 그 멍청한 짓의 대가는 침대를 구를 정도의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반. 마음이 심란해서일까.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가끔은 아침을 여유롭게 보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바로 침대에서 벗어났다. 아아, 동생의 매도를 듣지 않는 아침은 즐거워.
하지만 그런 즐거운 마음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와, 이거 뭐야. 이런저런, 형형색색의 토사물이 화장실 바닥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웬일이야. 화장실 청소는 내 담당이었기에 망연자실한 나는 곧 어제 아버지가 회식에 갔다 오셨다는 걸 기억해냈다. 아버지. 이런 귀여운 딸이....우웩. 아니, 가냘픈 자식이 청소해야 하는 걸 생각 안 하신 걸까. 조금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왜 화장실 청소를 맡았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
일찍 일어난 만큼 지금 싹 다 청소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귀찮다. 나는 물로 간단히 쓸어내고 학교 갔다 와서 완전히 청소하기로 했다. 씻고 부엌으로 가니 어머니는 한창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잘 잤어? 아니, 너 웬일이니?”
“뭐가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거. 소풍 같은 날 아니면 무조건 아슬아슬하게 일어나잖니.”
“가끔은 괜찮잖아요. 아침 아직 안 됐어요?”
어머니는 달걀을 뒤집으며 내 머리에 춉을 날렸다. 아팟! 요리 도중에 다른 손 쓰는 거 아니라고요! “일찍 일어났으면서 아침 타령이니? 아직 되려면 멀었으니까 기다려.”
“으, 시리얼이나 먹을래요.”
“얘, 시리얼 가지고 배가 차니?”
“괜찮다구요. 그리고 오늘은 학교 일찍 갈 거니까 빨리 먹어야 해요.”
그렇게 툴툴거리며 냉장고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동생이 서 있었다. 다만 아침엔 매우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나는 곧바로 투덜거렸다. “뭐야, 그 괴물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은.”
“언니가......일찍 일어났다고?!”
난 말 없이 동생의 뒤로 가서 꼭 껴안았다. 남자였을 땐 이런 짓 했다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겠지. 이상한 감상을 품고, 나는 상냥하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지영아.” “뭐, 뭐야?!” “언. 니. 의. 사. 랑. 의. 표. 현.” 말이 끝남과 동시에 턱으로 등을 짓누르고, 배를 감은 팔에는 조이는 힘을 최대한으로 주었다.
“으, 꺄악?! 어, 엄마앗!”
“밥하는 데 방해하지 말렴.”
“어머니는 저러시는구나 동생아! 오, 아니 언니의 위엄을 깨닫도록 해!”
내가 기고만장하는 순간 내 머리에 춉이 내려꽂혔다. 히끅! 소리를 내며 목과 팔의 힘이 풀렸고, 지영이는 그 틈에 빠져나갔다. 찔끔 눈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자 뒤집개를 든 어머니가 눈을 반쯤 뜬 채 서있었다.
“1절만 해.”
“넵.”
간단한 해프닝이 지나가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기분 좋게 아침 바람을 쐬며 학교에 오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교실은 텅텅. 나는 히죽 웃고 창가 옆 뒷자리로 갔다.
“......제자리로 가자.”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기시감을 느낀 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사실 내 자리는 맨 앞자리다. 교단 앞. 선생님과 마주 보는 자리다. 가끔 입을 크게 벌리거나 발음을 세게 하는 선생님이 있으면 침 세례가 쏟아지고, 멍하니 있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장소다. 나는 마치 라노벨처럼 성전환이 되었지만, 주변은 전부 그대로인 것이다. 소설 같은 전개도, 새로운 만남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변화도 없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곤 주변은 현실 세계 그대로.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몇 번씩이나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한지수?”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당황한 나는 일어서려다 책상에 다리가 걸려 몸을 휘청거렸다. 전력을 다해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려는 날, 목소리의 주인은 한숨을 쉬고 잡아주었다. 몸이 억지로 고정되며 걸린 다리가 얼얼해졌지만 넘어지지 않은 게 어디야? 나는 고개를 들어 누군지를 확인하고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영태야.”
목소리의 주인은 이 자리의 주인이기도 한 영태였다. 우중충한 내 친구 중에 거의 유일한 분위기 메이커. 대화의 맥도 잘 잡고 이끄는 것도 이 녀석이어서 얘가 갑자기 화장실이라도 가면 우리 그룹의 대화가 끊어지게 되는. 우리 그룹에서 엄청 중요한 녀석이다. 대부분 노는 약속을 잡는 것도 영태였다. 아, 그렇다고 다른 애들끼리 사이가 안 좋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줘. 그저 언젠가부터 영태가 중심이 되어버려서 그런 것뿐이니까. 아무튼 반에서도 인맥 최고인 얘가 우리 그룹에 있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녀석이었다. 영태는 이런 것 가지고 무슨, 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것보다, 웬일이야? 이런 아침부터 오고.”
“이 누님은 네가 생각도 못 할 심오한 생각이 있어서 이런 거라고.”
“아, 예. 중2병 아웃. 현실을 직시하자 한지수 어린이?”
“누가 중2병이야!”
도움을 준 고마움은 바로 잊어버렸다. 우리 둘은 옥신각신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남자였던 예전이나 여자인 지금이나 변함없이 패하는 쪽은 나다. 애초에 여자로 변하면서 이길 가능성은 마이너스로 추락했다.
“여자면서 힘으로 이기려고 하다니, 뭔 배짱이야 너......”
팔을 뒤로 꺾어 날 속박한 영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속으로 비참함을 느꼈다. 지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여자라고 비아냥 받았어! 열 받은 난 소리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남...”
“남?”
히끅. 아침의 소리를 다시 내며 나는 말을 간신히 이었다. “...자에게도 지지 않는 멋진 여자가 될 거라고!” 영태는 얼빠진 얼굴로 다시 질문했다. “근육질이라도 될 생각이야?” “시끄러!!!”
다시 사투를 벌일 준비를 한 순간, 영태가 엄지로 교실문을 가리켰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애들이 차차 등교하기 시작한 걸 깨달았고, 그대로 내 자리로 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교실은 자리가 차기 시작했고 곧 시끌벅적해졌다.
좋지 않아.
갑자기 졸려졌다. 그래, 일찍 일어났으면 졸린 게 당연하지. 나는 엎드려 잠을 청하기로 했다. 조회시간까지는 20분 정도 남았으니깐. 피로를 풀어야......
“어이, 한지수!”
“푸헉.”
이상한 소리 내버렸다! 그야, 자려고 긴장 풀고 있는데 등을 탁 치면 이럴 수밖에 없어. 지금 보이진 않지만 반 일동의 시선이 나한테 모인 게 느껴져! 고개 돌려줘 애들아! 하지만 그런 소리까지 냈으면서 계속 엎드려 있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 결국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어나 내 망할 친구를 보았다.
“오, 일어났다.”
“유진아? 아침부터 친구와의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니?”
내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가까이 있던 유진이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반 애들은 그런 나를 보다가 대화가 안 들려서 흥미를 잃었는지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걸 눈치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한숨이라니. 한숨은 쉴 때마다 행복을 날려버린대.”
“그 원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이 학교지!”
“아니, 너인데요.”
아까처럼 옥신각신할 수는 없으니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유진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 웃어댔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주 약간의 대화였지만 대화는 파업을 선언해버렸다. 시끌벅적한 탓에 둘 사이의 침묵은 더 크게 느껴졌다.
친구 사이에 침묵은 그리 달갑지 않다. 나는 구원을 바라며 영태 쪽을 바라봤지만 그 녀석은 독서를 굉장히 집중해서 하고 있었다. 이래서 우등생이란...!
다시 유진이를 보니 혼자서 두 검지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물론 머리칼을 비비 꼬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던 나에게 갑자기 좋은 대화주제가 떠올랐다.
“야,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남자였다면 어땠을 거 같아?”
하교한 나는 저녁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교복을 갈아입고 나는 세제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샤워기로 화장실 바닥을 물로 쓸어내고, 솔에 세제를 묻혀 박박 닦았다. 맘 같아선 락스를 쓰고 싶지만 왜인지 위험하다며 쓰지 못하게 했기에 세제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 5분 정도 그러니 깨끗해진 느낌이 들어 후련해졌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난 TV를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 어제 술 많이 드셨어요?”
“그건 왜? 아침에 아빠 힘들어 보였어?”
“아니, 그냥.”
“회식이긴 했지만 오늘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가볍게 마셨어. 한두 잔밖에 안 마셨는데 왜 그래?”
“어라? 그럼 화장실에 누가 토한 건......”
아버지는 자신에게 씐 부당한 오해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어젠 집에 와서 바로 잤으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게다가 취한 것도 아닌데 왜.”
미스터리하네. 결국 아빠는 범인이 아니란 건데. 방에 돌아온 나는 누운 채 베개를 꼭 껴안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곧 생각해봤자 쓸데없단 걸 깨달았다. 화장실 바닥에 토한 건 창피한 일이다. 그런 걸 당당히 말할 사람은 없겠지. 누군가 새벽에 속이 울렁거려 토해놓고 너무 졸려 그대로 잠자리로 돌아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것보다 생각할 건 따로 있었으니까. 오늘 아침.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아니 우리 그룹에서 여자는 나뿐이잖아. 내가 남자였으면 뭐랄까, 좀 더 자유롭게?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급히 생각해낸 변명이라 조악했다. 애초에 난 내가 ‘여자’로서 이 애들과 어떻게 놀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유진이는 괴악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날 당황케 했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어이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뭐 굳이 대답한다면 남자였어도 똑같을 거 같은데? 아, 다른 게 있다. 네가 남자였다면 온갖 농담이 쏟아졌을 거란 거. 애초에 너, 우리랑 엄청 스스럼없이 놀았잖아. 다를 건 없어.”
나는 그대로 침대에서 뒹굴뒹굴했다. 정말 다른 게 없을까. 내가 여자로 변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게 많다고 느꼈다. 어제야 가벼운 마음으로 넘어가 별로 느끼지 않았지만 오늘은 아침의 질문으로 나 자신도 신경 써서 세심히 관찰한 것이다. 물론 크게 바뀐 점은 역시 없었다. 하지만 세세한, 아주 세세한 부분이 달랐다. 이건 여자가 되어서 알아채게 된 걸까.
“그래도, 상관없는 거 아닐까?”
유진이는 다를 게 없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친구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리 고민은 불필요할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편안해졌다. 좋아, 이대로 열심히 살아보자! 아,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기도 그러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일기 쓰기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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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왜 그러시나요? | 19.05.17 2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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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현실적이라서 놀랐어요 ㅎㅎ | 19.05.17 20: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