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반에 맞춘 알람에 맞춰서 잠에서 깨어났다.
술을 먹은 다음날이었지만 내 한계주량보다 적게 그리고 일찍 잔 덕분에 숙취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우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응!”
술투정으로 퍼마시고 잠을 잔 R은 아닌 것 같지만. 나의 알람에 따라 일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R을 향해 말했다.
“더 자라. 난 1교시 수업 있어서 일찍 일어난 거니까.”
“으으으으응.”
꿈틀거리던 R은 다시 널브러졌다.
샤워를 하고 나온 후 냉장고를 열어 아침으로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간단한 반찬거리가 있었지만 술을 먹은 다음날이라 역시 국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옳지, 미역이랑 콩나물이 있었다.
“야. 미역국이랑 콩나물국 중에 뭐 먹을래?”
“……국.”
“뭐?”
“중립국.”
“…….”
R은 숙취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시답잖은 농담을 해야하는 녀석이었다.
뭐, 숙취하면 콩나물국이지. R도 얻어먹는 주제에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겠지. 아니, 이러쿵저러쿵 궁시렁 거리면서 먹겠지. 뭘 만들든.
콩나물국을 끓이고 얼려둔 밥을 해동하여 억지로 아침밥을 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밥은 거르지 않는 게 우리 집의 철칙이었다. 자취를 해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
아침밥을 비우고 설거지를 마친 후 옷을 입으며 시간표를 확인했다. 교수의 악의가 느껴지는 시간표가 보였다. 1,2교시 전공필수만 있는 날이었다.
책가방을 챙기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R에게 말했다.
“난 수업 들어간다. 밥 먹으려면 냉동실에 얼린 밥 있으니까 해동해서 먹고. 먹었으면 설거지는 잊지 말고 해둬라.”
R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니까 강의가 끝나고 와도 자고 있을 것 같다.
뭐. 상관없나.
나는 R에 대해서 신경 끄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로 가는 길. 나는 다른 사람과 혼동할 수 없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잠시 인사를 할지말지 고민하다가 어제 보여주었던 친근한 모습을 떠올리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나란히 걸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상대는 흠칫 놀란 듯 몸을 떨었다. 그러나 나를 발견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예, 안녕하십니까, I군.”
D교수님은 나의 인사를 받아주시는 중에 슬그머니 한손에 들고 있던 검은 봉투를 내 시야밖으로 숨기셨다. 하지만 냄새는 숨기지 못했다. 시럽과 크림, 사과잼 그리고 와플향기가 났다. 아무래도 교수님은 자신이 와플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시는 것 같았다.
나는 교수님께서 자신의 연구실에서 와플을 드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속으로 웃었다.
D교수님은 자신이 놀란 모습을 보여준 것이 민망한지 강철 장갑을 낀 손으로 턱밑을 긁으며 말하셨다.
“출근중입니까?”
“아뇨, 등교중입니다.”
“네? 아. 하하.”
어제 개인면담을 하기 전에는 상상도 못할 짓을 했다. 교수님께 농담을 하는 짓을 말이다. 고작 한 번 개인 면담을 한 거 가지고 너무 넉살맞게 농담을 구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교수님께서는 웃으시며 내 농담을 받아주셨다.
“학부연구생을 하시면 등교와 함께 출근도 하실 수 있는데 해보시겠습니까?”
농담을 호러로 답해주셨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따로 알바를 하는 게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그래도 나중에 생각이 있으면 말해주십시오.”
“염두에 두겠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원래 이 시간대에 출근하십니까?”
“아뇨. 원래는 더 일찍 출근합니다만 아직 퇴근을 안 해서 말입니다.”
잠시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 소름이 돋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일주일에 몇 번 퇴근하십니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어떤 대답을 들을지 두려워서 마음 속에 묻어두었다. 덤으로 절대로 학부연구생은 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셨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예. 늦잠을 자는 일이 없는 한 아침은 무조건 챙겨먹습니다.”
“좋은 습관입니다. 종족에 상관없이 뇌는 많은 열량을 소모하는 기관이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아침밥을 거르면 수업 중이나 연구 중에 머리가 멍해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는 거르지 않습니다.”
“와플이 아침식사입니까?”
“음.”
나도 모르게 지적해버렸다. 그리고 교수님의 얼굴이 붉어졌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D 교수님께서는 자신이 와플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았다.
교수님께서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시다가 말씀하셨다. 변명하셨다.
“어흠. 용인인 저에게 와플이 안 어울린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뇌는 포도당만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기관이지요. 와플의 빵 부분은 물론이고 와플에 뿌리는 시럽과 크림, 잼은 전부다 당으로 전환되어 충분히 뇌에 에너지원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잼과 시럽에 들어있는 시트르산은 피로회복에도 도움이 되어 피로가 쌓인 저의 몸에 적게나마 도움이 되지요. 여기에 혹시나 부족할 수 있는 단백질과 지질은 따뜻한 우유로 보충하고 또……”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종족에 따른 선입관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선입관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D 교수님도 그러한 선입관에 메여 사시는 분이셨다. 냉혹, 냉철, 엄격, 근엄, 진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런 용인의 이미지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는.
그리고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그런 모습이 D 교수님의 본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와 지금 이 순간의 대화로 나는 그것이 가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근히 소심하시고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배려하시는. 그리고 또한 와플을 좋아하시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는. 교수님께서 스스로 쓰고 계신 가면 속에는 더욱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이 숨겨져 있으리라.
D교수님은 주위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호감가는 분이셨다.
“……이런 장점을 미루어 보아 와플로 아침을 해결하는 것은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하여 구매하였습니다.”
교수님의 변명이 끝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교수님께서 빼먹은 한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그리고 맛있지요.”
“…….”
“저도 좋아합니다, 와플.”
D 교수님께서도 와플을 좋아하시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변명을 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와플을 사시지는 않으셨을 테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학교 후문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는 와플전문점에 가보십시오. 위치가 안 좋아서 사람이 적습니다만 특이한 방식으로 와플을 만들어서 아삭아삭하게 설탕이 씹히는 와플을 팝니다.”
“…….”
교수님께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너무 스스럼없이 굴었나? 내 멋대로 단정하고 교수님께서 피하고 싶은 화제를 이어간 건가?
이렇게 잠시 나와 교수님 사이에 침묵이 이어지다가 교수님께서 드디어 입을 여셨다.
“어흠. 저기. 그러면 I군 나중에 저와“I!”“
교수님의 말이 다른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나의 연인인 H였다.
H는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활기차게 나를 향해 달려와 나에게 팔짱을 꼈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늦게 D교수님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네. 안녕하세요, H양.”
“I랑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 그런데 데려가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가자. I”
나는 H에게 끌려가며 교수님께 작별인사를 했다. 교수님께서는 언제나처럼의 무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하셨다.
H는 캠퍼스 내 인적이 드문 벤치로 나를 끌고 와 앉혔다. 그리고 내 무릎 위에 다리를 벌려 앉고 내 양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미안해. 진짜진짜진짜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H는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사과를 했다.
어떤 것에 대한 사과인가 묻지 않았다. 나는 단지 H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H는 계속해서 사과했다.
“알잖아. 내 성격.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생각없이 단순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거. 진짜 미안해. 이 성격 고친다고 생각은 하는데 만날 까먹고. 미안해. 네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아니. 생각은 했는데. 훌쩍.”
나는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H의 코에 갖다대었다. H는 킁! 하고 코를 풀고 계속 사과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봤거든? 남자는 이런 거 좋아한다고 하더라구. 그러니까. 훌쩍! 연인이 있어도 다른 여자랑 자는 거 좋아한다고. 그리고 물어봤거든? 연인이 다른 여자랑 자는 거에 흥분하는데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하냐고? 그랬더니 전부 좋아한다고.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고. 응? 끅! 응? 그래서? 응. 너도. 너도.”
H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냈고 H는 그 사실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찾아보니 안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그 부류에 들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 상황이다.
나는 H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H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나는 H의 뾰족한 귀 뒤쪽과 등뼈를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내 품에서 훌쩍거리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에 반비례해서 H의 검고 풍성한 꼬리가 서서히 좌우로 흔들거렸다. 꼬리가 흔들리는 속도가 빨라져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자 H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인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H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대었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자 이번엔 H가 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이번 입맞춤은 방금 전보다는 길게. 그리고 좀 더 진하게.
다시 입술과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잠깐만. 뭔가 중요한 것을 까먹은 거 같은데.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09:03
“지각이다!”
나는 H를 안은 채로 일어섰다. 그러나 H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H는 얼굴을 붉히고 나에게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자체 휴강하면 안 될까?”
“전필인 거 잊었어?”
“아!”
H는 나에게서 떨어지고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방금 전의 야릇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가방을 둘러멨다.
“빨리! 빨리!”
H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H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강의실로 달려갔다.
1교시 강의가 끝나고 주어진 10분의 쉬는시간. 나는 D 교수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교수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H와의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깊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답장은 2교시 강의가 끝날 때까지 오지 않았다. 아마 강의나 연구 때문에 바쁘셔서 그런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