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적으로 꽤 예전에 작성된 1장을 열심히 뜯어고치고 있습니다. 부족한 졸작이나마, 부디 많은 평가 부탁드립니다.
◇ Blog : https://blog.naver.com/n_sousi
◇ 이 졸작은 바탕체, 14px로 작성되어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벚잎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저,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렇게, 단지 춤출 뿐인 꽃잎을 바라보았다. 그 풍경 속엔 슬픔도, 아픔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울지 않았던 것일까?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존재하는 구름과도 같은 풍성한 벚나무. 바람으로 하여금 흔들리는 담홍빛은 누구라도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지 그것 뿐의 일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싫증이 날 정도의 벚꽃 향기─아니, 벚꽃에 그 정도로 진한 향기 따윈 없었지─. 차례차례 사람의 손을 타며 움직이는, 차갑디 차가운 목재의 관.
5월, 봄의 끝을 고하는 것과 같이, 차갑게 식어버린 조촐한 관.
떨어지는 벚잎 아래에서 떠오르는 아버지의 시체는……단지, 추악할 뿐이었다. 내 사고 회로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떨어지는 시체와 같은, 벚나무에게서 떨어져 내리는 벚잎들을 대비시켜 주는 일 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침묵할 뿐의 고깃덩이.
검은 세계가 펼쳐진 관 안에서 응시하는 세계는 어떤 느낌일까? 나는 관을 옮기는 어머니에게 차마 묻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은 채 단지 벚나무의 숲 사이를 거닐었다.
시각으로 세계를 유린한 예술가.
그의 세계의 끝.
한규석 자신이 바라본, 캔버스에 그은 인생의 소실점.
벚나무 숲의 아래를 거닐며.
바람이 스쳐지나가──
──흐드러지듯 한 꽃잎이 흩날린다.
봄의 종말을, 담홍빛 꽃잎으로 물들여 간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장의장에 쏟아지는 꽃잎에 물들어진,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지켜보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관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손끝에 스치는 부드러운 벚잎의 촉감과 차갑게 내려앉은 그늘이 덮인 관의 나무질감. 그 위에 올려진 먼지의 한 올까지 속속들이 느낀다.
이렇게나 촉각이 민감했던 날도 없었는데,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몇 안 되는 조문객들과 장의 관계자만의 자그마한 장의 종료와 함께, 예술가 한규석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다.
자신의 가족이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그 세계의 소실점을 바라본 내 자신에게 눈물 따위는 흐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슬프다고 하는 감정 또한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대지를 밟고 있는 풍경으로부터 슬픔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이 이 장소가 죽음이란 것을 덮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슬픔이 당연한 장소이기 때문일까.
입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진동시키지 않은 채, 속으로 질문을 수십 번 던져보아도, 아무도 대답 해 주지 않는다.
모두는, 어떻게 생각할까.
역시 슬픔을 느껴 줄까?
마음이 아파와 줄까?
전부 슬픔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것뿐일까?
……슬픔이 당연한 장례식이라는 공간이 밉살스럽게만 느껴졌다.
단지……춤추고 있는, 흐드러지는 벚잎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좋든 싫든 생각해 버리는 것이 있다.
일순간 마음에 생긴 균열의 끝이 갈라짐을 멈추지 않고 소실점을 향해 달린다.
정지한 아름다운 세계, 절명의 일순간.
단지 투명하게 보일 뿐인 꽃잎을 흐드러지게 떨구는 늙은 벚나무는, 부패취(符牌臭)를 발하는 시체와 같아─투명한, 영원한 죽음과 같게 다가와서.
그것은 단지 아름답지 않고 추악하기 그지없어 보여, 죽음이란 의미 그 자체로써 내 안에 스며들어온다.
지금 이 장소로 하여금 보이는 풍경.
과거의 시간 수많은 담홍빛이 피어나고, 바닥으로 추락하고, 다시 피어오르는 이 숲의 아래에서 옮겨지는 한규석의 시체에, 자연과 같은 복잡한 양상 따윈 필요 없다.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대비.
아름다운 자연과 추악한 시체.
영속하는 자연과 멈춰버린 시체.
단지 강렬할 뿐인 자연과, 나약한 인간.
한창 피고 떨어지는 강렬한 자연의 향기와, 부패취를 죽이는 방부제 절임의 인간.
벚꽃의 숲 아래, 아버지의 인생 내내 그려진 수많은 회화의 다발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다소뿐이 생각했다.
그가 그린 벚나무의 향기는, 이 장의를 덮은 벚나무의 향기와는 다르기 때문이야말로, 그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빈자리를 확실하게 체감 할 수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상기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그렇게, 결론지었다.
예술가로써 세상을 감동시켜왔고, 예술로 하여금 자연에 도전했던 비범한 남자의 죽음은, 조촐한 장례식에서 종말을 맞이했다.
나, 한유진과 어머니 연화율은 결코 눈물을 흘리는 일 따위는 없었다. 적어도 내 자신은, 쏟아내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서녘으로 지는, 타오르는 것 같은 노을을, 황혼이 덮여가며 발산하는 강렬한 태양빛을 바라보는 내 왼쪽 눈을.
……담홍색보다 진한 진홍빛 꽃잎이 내려앉아, 눈물과 같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아직, 사람들이 활동하기에는 많이 이른 시간대, 그 시간의 숲은 굉장히 신기한 기운을 품어, 그 기운이 몸 전체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신비한 기운이 맴돌았기에,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장례식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일까.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예술가 한규석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리고 한규석이란 예술가가 바란 그의 소실점에는 어떤 광경이 있었을 것인가.
그런 과거에 파묻힌 생각과 뼈에 스며드는 새벽 봄의 한기, 신비로운 숲속의 기운에 몸서리치며 나는 계속 산길을 올랐다.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자연 속의 길, 하지만 그 길은 등산로나 산책로에 비해 조잡하기 그지없는……말 그대로 지나가기만을 위한 길이었다.
잡초가 뽑힌 엉성한 산길을 걸으며 드문드문 밟히는 나뭇가지 소리가, 정리되지 않은 길을 소리로써 표현하는 것 같은……
‘6년 동안이었지만, 역시 익숙해지지 않네.’
매년 한번씩, 꼭 산길을 오르는 내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여주는 숲이 있다.
불친절하게 깎인 산길을 올라, 내 발자국만이 남아있을 산길을 올라 나타난 것은──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연화율, 아버지 한규석이 깃든, 잠들어있는 묘지.
이제 곧 동이 틀 것 같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나란히 묻혀있는 묘비와 묘 뒤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존재감, 왕벚나무 다섯 그루가 웅장한 벚잎을 떨구고 있었다.
벚꽃나무가 풍기는 그 희미한 꽃내음을 마음속에 새기면서도, 사람이 죽은 증거라기엔 너무 아름다운 이 장소를 견문하며………
………조금은, 아주 조금은 울적한 기분이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아티스트……아니, 본인의 희망이니 예술가라고 해 줄까.
자신만의 감각적인 회화로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유명한 예술가, 아버지라기엔 부족했고, 예술가로써는 동경하다 마지않았던 한규석.
아버지만큼 유명하진 않았지만, 내 가슴 속에선 여전히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남아있는, 아름다웠던 어머니 연화율.
감각으로써 만인의 시각을 유린하고, 청각을 매료시켰던 두 예술가는,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아──자연의 곁으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유언이자, 어머님의 고집으로 심어진 5그루의 벚나무가, 그 짧았던 예술의 길을 애도하듯이 바람에 흔들린다.
자신의 몸의 일부─벚잎을 떨구며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그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 보이기도 하여,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가난한 천애고독 대학생의 명분, 다른 집들처럼 화려한 제사는 지내줄 수 없지만, 존경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일에 어울리는 대접을 해 줄서 없다는 사실이 비통했지만.
“………감사합니다.”
나는 돗자리를 펴고 절을 하며, 바닥으로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한 번 절을 하고 일어나, 두 번 절을 하고 일어나, 다시 반절 절을 하는 그 간단한 행위조차 삐걱거리게 되어─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의 장례, 어머니의 장례.
친부모의 두 차례 장례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한유진이라는 예술가 나부랭이……였던 내 자신은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미안함이었을까,
아니면, 두 부모의 고집으로 심어진 벚나무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그랬던 것일까.
………눈물을 막을 수 없기에.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자신이었기에─고개를 들지 못하고, 내 자신의 심한 얼굴표정을 보이지 못한 체 땅을 보며 그저 감정에 몸을 맡긴다.
마음속에 묻혀있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바보 같던 나는 비록 더 이상 유진이와 같이 있지 못하지만, 아들의 그림은 하늘까지 닿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너를 지켜볼 수 있을 거야.」
내 뇌리 깊숙한 곳에 묻혀있다 소생한 상냥했던 어머니의 한마디에, 목 뒤로 삼키던 우는 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잔뜩 오열했다.
나는 더 이상──회화(繪畵)를 그리지 않는 나는 더 이상, 따스했던 어머니에게 닿을 수 없기에.
묘비 앞에 놓아진, 숲속의 수분을 잔뜩 머금은 백합만이, 나와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
나 한유진은 오랜 과거, 예술을 그만두었다─회화를 그만두었다.
회화로써 완성되려던 인생을 접어, 다신 울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붓을 꺾어, 이 자리에 존재했다.
부모에게 얻은, 자기 자신이 얻을 위광을 전부 떨쳐내어, 회화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과거의 예술가는……사자(死者)의 앞에 잔뜩 약해져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나는 그녀의, 바이올리니스트 연화율의 묘 앞에 섰다.
화율의 묘 옆 한규석의 묘 또한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선 이 자리를 죽 둘러보니, 잔디와 잡초가 발자국 모양으로 눌려있었다. 그 묘비 앞에는 이슬이 맺혀 눈물처럼 흐르는 백합 다섯 송이가 놓여있었다.
“하하…아하하하하…….”
마른 웃음이 나왔다. 촉촉이도, 주변에 잔뜩 낀 안개와 정반대의 삭막한 웃음. 그 웃음은 아마 연화율 그녀가 남긴 악취미적인 부탁에 향해 있었다.
“벚나무도 백합도 전부 다섯 그루, 다섯 송이…. 떠난 뒤의 악취미에도 정도가 없구나.”
“아들에게 시키는 짓이 참…….”
나는 얼굴에 떠오르는 희미한 웃음을 담아, 묘 앞에 서 읊조렸다.
아마─이미 장정이 다 된─한유진, 그의 아들이 놓고 갔을 백합의 옆에 성주시에 만개했던……꺾어온 벚나무 가지를 두 아름 놓았다.
“저 벚나무보단 덜 아름답겠지만, 네가 좋아했던 성주시의 벚꽃이란다.”
사실 언어도단이었다. 저 다섯 그루도 성주시의 벚나무가 심어진 것일 테니.
그런 사실은 상관없이, 저 부부의 묘를 둘러싼 다섯 그루의 벚나무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득히 벚꽃을 에워싼 안개와 함께 희게 빛나는 벚꽃잎.
그 벚꽃잎이 참 얇기에 그렇게 느낀 것일까. 마치 안개가 벚꽃잎에 투과되어, 벚나무를 둘러싼 안개가 전부 벚꽃잎처럼도 느껴졌다. 아, 반대로 벚꽃잎이 안개와 같이 보인다고 하는 게 옳은 걸까.
안개처럼 내 몸을 둘러싼 벚꽃잎과, 안개와 같이 흩어져 뼈대만 앙상한 벚나무.
그것은 필시 같은 광경이지만 확실한 대비로 느껴지기에,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의 기일. 다시 만난 부부와의 사색을 즐기는 도중, 뒤에서 양복을 갖춘 중년의 남성이 다가와 말한다.
“외람되옵니다만, 슬슬 시간이…….”
“……….”
떠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을 가볍게 접어두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나직이 올랐던, 그러면서도 익숙해져가는 산길을 다시 내려갔다.
그래도 미련은 두고 오지 않는다. 대신, 내년에도 다시 오겠다는 확신의 의지가 담긴 벚꽃가지를 놓아두었으니.
나의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친구’, 한규석과 연화율에게 마음을 담아서.
◇◆◇◆◇◆◇◆◇◆◇
“……어. 별 일 없었고…응…됐네요 이 사람아. 고맙고, 수고했다.”
“그래. 여전히 잘 피어있더라. 여긴, 져가기 바쁘거늘.”
수화기 넘어 들리는 태훈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대답하던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태훈이 그 벚나무 다섯 그루에 대해 물어봤고, 드물게 들린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난 오늘 본 안개 속 벚나무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5월 초가 다 되었건만 아직 만개해있던 그 벚은 아름다웠다. 그곳이 서늘한 공간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한규석의 벚에 대한 집착이 사념이 된 탓 인가.
지지 않으려 애쓰는 꽃잎이 애처로운 미(美)를 자아내고 있었다.
한숨을 푹 쉬고 통화종료를 누른 나는 천천히 교문을 열었다. 아버지, 한규석의 기일이었던 오늘은 태훈에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대신 부탁하곤 할머니 댁이 있던 시골의 산까지 다녀왔다.
뭐 시골이라고 해봤자, 같은 도내 30분 거리의 작은 산골이었으니……굳이 멀리까지 다녀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눈물을 흘리고 온 탓일까, 몸은 날을 센 것 마냥 힘이 없고 피로에 절어있었다.
나름 장거리를 달려준, 규석의 유품 중 하나인 스쿠터를 주차장에 세워두곤 중앙현관으로 걸어갔다. 내 손을 타지 않은 교내는 깔끔히, 학생과 교원들을 맞아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 전임자신 전 숙직 전생님이 오늘 하루만 업무를 대신 해 주신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저 멀리 홀연히도 걸어가시는 전 숙직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담아 인사했다.
지하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니, 숙직실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이런 부분까지 꼼꼼하셨다. “굳이 닫아두실 필요까지야…”라고 구시렁거리며 열쇠로 숙직실의 문을 열면……
“……얼레? 신발 주머니?”
그것은 숙직실로 향하는 미닫이문, 그 바로 앞 신발장에 놓여있었다.
검은 색 바탕에 흰색 천, 붉은 색 리본이 붙은 생소하고 어여쁜 디자인의 실내화 가방이 현관 근처에 방치되고 있었다.
이 색배합과 디자인은……마치 선율이가 입고 있던 세미드레스의 디자인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도 같았다.
선율이가 들고 다니지 않으면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디자인이었다. 여하튼, 굉장히 고가의 물건이 아닐까? 6자리의 가격대를 자랑하는 주문제작품이라던가.
“……뭐, 쓸데없는 감상인가.”
코로 한숨을 “흐음”하고 고른 나는 그 실내화 가방을 손가락에 걸곤 천천히 생각했다.
녀석은 이 실내화가방이 여기에 있다는 걸 깨닫고 있을까?
아니 뭐……당연히 현관을 나설 때부터 위화감을 느낄 테지만, 여하튼 곤란할 것이다. 이게 여기 있다는 걸 모를 것도 그렇고, 이런 고가품(처럼 보이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니 만큼
허나, 지금 학교에서의 내 이미지는 완전히 나락.
단적으로 어제만 하더라도, 내가 그런 이미지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 아닌가! ………그 이미지에 대해 조금 심술을 부렸다는 것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여하튼, 실내화 가방을 가져다주는 모습을 다른 학생에게 들킨다면, 그녀의 이미지나 내 이미지나 단순한 농담으로 넘기기 힘든 기류가 흐를 게 분명했다.
다른 아이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만, 한창 뜨거운 숙직괴물 소재에 휘말려 크게 다칠 위기를 맞았던 선율이인 만큼 그녀가 내 모습과 함께 목격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뭐……운동도 할 겸.”
꼭두새벽부터 불친절한 산길을 올라갔다 온 사람이 할 대사는 아니지만.
나는 그녀가 당도할, 실내화가방 안쪽 태그에 붙어있던 5학년 6반의 교실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
어제는 마치 화과자를 잔뜩 펴두고 따스한 차를 마시는 조용한 다과회와 같은 날이었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상한 비유라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웠던 그 사람과의 마주침은……마치 그 사람과 꼭 만나야 할 일이었던 것처럼도 다가왔다. 가슴 속에 남은 놀라움의 조각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걸 아직까지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런 하루의 사건과 시간 덕에 마음의 정리가 좀처럼 되어있지 않아……무언가 자신의 마음이 고장이 난 것 같아 일기를 남길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 기억은 일기 따위보다 더 길게 남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물론 어제는 유진 씨에게 부끄러운 모습만 잔뜩 보여준 것 같지만.
그렇게나 직접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의 대화였는데, 그렇게나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의 대화였건만 울음을 터뜨릴 뻔 했다. 이상한 표정도 잔뜩 보여준 것만 같았다.
나도 알지 못하던 자신의 모습이, 그 표정이 유진 씨에게 파헤쳐진 것만 같았다.
으으, 죄 많은 사람.
내가 그런 푸념을 늘어놓는 도중, 교실의 뒷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벌써 학교에 온 친구들이 있을까?
호기심에 고개를 뒤로 돌아보았을 땐, 이미 나는 어떤 얼굴로 그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맹렬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아…아아아아…아저씨?!”
“……왜 있는 거야.”
아저씨는 언짢은 듯 말하셨다. 가시 돋친 말이지만, 그것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말의 목적이 확실히 보였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이 시간에 오는 거야? 설마?”
“보통……이, 아닌가요?”
보통은 아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당황한 나머지 핑계가 내 사고보다 빨리 입 밖을 떠났다.
아저씨는 말없이 시계로 시선을 향하셨다. 분홍색 원형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각각 7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관두자. 하아, 몰래 가져다 두고 내려가려 했더니만, 이렇게 이른 시간 의자에 착석해 계실 줄은.”
다소 불량한 듯 주머니에 손을 걸치고 빈정대는 아저씨. 속으로 그렇게 그리던 그 사람. 아저씨의 복장은 어제의 후줄근한 체육복이 아닌, 검은색으로 통일된 블레이저와 면바지를 입고 계셨다.
그런 유진 씨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스윽 훑어보곤, 그저 멋지다──라고 생각해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복장이……외출하시는 길이신가요?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가져다 두고 내려가신다 하신 것 같은데…
“아, 아니야. 외출에서 복귀하는 길. 이제부터 수면이 시작 될 예정이지.”
“피곤하실 텐데 어째서 저 따위에게……쉬시는 게 좋으셔요.”
“안 그래도 그럴 거야.……그리고 선율이 너 은근히 자기평가 낮지 않아?”
당황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쓸어내리곤 아저씨에게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배려해주시듯 말하셨고.
……그리고 조금은 망상에 빠졌다. ‘아저씨가 날 먼저 보러 와주셨구나’ 라는 생각에.
묶은 머리가 곱게 어울리시는, 다소 여성스럽게 정돈된 아저씨의 얼굴. 훤칠하게 크신 키를 주욱 내려다보면…익숙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엣, 그건……”
아저씨의 오른손에 들린 익숙한 물건. 실내화 가방이었다.
“아, 아아. 이게 주 용건. 나도 피곤하니 바로 쓰러질라 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곤, 주머니에 걸쳐있던 오른쪽 손목을 나를 향해 살짝 흔드셨다.
“현관에 이런 게 떨어져 있어서.”
“제 실내화 가방…”
“고등학교 때 바깥신발 계속 신고 있다 교실에서 혼난 기억이 잠깐 떠올라서……자.”
나는 운동장의 흙먼지가 광택을 바랜 구두를 의자의 사각으로 살짝 감추곤, 아저씨가 건네는 실내화 가방을 넙죽 받았습니다.
“감사해요. 원래 제가 가지러 갔어야 하는 건데.”
“응? 어차피 숙직실에 있었던 것도 몰랐던 거 아냐?”
“……흐으, 그렇네요. 분명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숨겼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아, 그래. 그렇게 생각했구나.”
아저씨 앞에서 긴장한 탓일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했다.
하지만 내 그런 모습이 재미있게 보이시진 않으셨는지, 피곤한 표정 위에 험악한 표정을 겹쳐 띠우시곤 무언가를 골똘해 생각하기 시작하셨다.
그런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비춰진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제의 그 일, 선생님께 말씀 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어?”
라고 말하시곤, 나는 “네? 아……” 라고 멍하니 답하며 어제의 기억을 소생시키기 시작했다.
유진 씨, 아저씨가 제 머리를 기분 좋게 쓰다듬어 주신 것. 울상이 다 되어 매달린 것. 한없이 부끄러운 제 자신을 보인 것……
“──────!!”
“엑, 왜 그래?”
“아! ……아뇨.”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 되는 거라구요!
하아……이런 것만 생각나고, 정말.
조금 더 기억의 시간을 뒤로 돌려, 아이들이 내 몸을 억압해 강제로 숙직실의 지하계단 앞까지. 그곳에서 폭언을 쏟아낸 것을 떠올렸다.
기억하기도 싫은 것들이었다. 당시엔 침착하여 감흥조차 없던 그 풍경이, 강렬한 불쾌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굳이 아저씨가 언급하신 어제의 일 뿐만이 아닌, 학교에서 기록된 기억들에 반짝이는 구석은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의지로 이 자리에, 학교에 와 있다.
그것이 학교에 대한 제 자신의 완전 부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또, 아저씨가 걱정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제 그런 일도 있었으니 애들도 조금은 잠잠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음.”
아저씨를 안심시키기 위한 근거 없는 변명 탓일까, 여전히 표정이 밝아지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런 겉치레의 말로 표정이 밝아지시길 원하는 내 자신의 무른 생각 그 자체가 원일이지도 모르겠지만…….
어제 말씀하신대로 아저씨는……유진 씨는 나와 굉장히, 신기할 정도로 닮은 구석이 많은 어른이셨다. 그렇기에,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부분까지 생각하여 신경 써주시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런 상냥한 아저씨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 상냥함에 의지하고 싶진 않았다. 저만큼 상냥하신 아저씨가, 제 걱정거리만을 품고 계시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에 기대어있을 것 같았기에.
“괜찮답니다.”
그저 편안한 표정으로 아저씨에게 대답했다.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부드럽게.
그 감정이 조금은 전해진 걸까. 단지 먼 곳에 시선을 두던 아저씨도 얕은 한숨을 흘리시더니 “그렇다면야……” 라고 말하시곤 천천히 뒤돌아 보셨다.
유진 씨와 대화를 나눌 땐 긴장도 되고, 말로 내밀어지지 않는 여러 가지 감정도 느껴졌지만, 단 두 가지 확신에 찬 감정 또한 존재했다.
“기쁘다… 두근거린다…….”
“어? 뭐라고?”
인기척 없이 문을 열고 나가시는 아저씨가 내 중얼거림을 듣곤 뒤돌아보셨다.
“아…아니에요! 그……저….”
으아으…또 이렇게 되어버리잖아.
이러지 않고 아저씨와 대화하고 싶어.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 아저씨가 나를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나도 아저씨를 편히 대할 수 있다면……
……아냐. 달라. 뭔가 달라.
아, 그래.
유진 씨와 대화를 나눠야 해. 걸으시는 옆자리엔 내가 있어야 해. 유진 씨가 나를 편히 대해주셔야 해. 나 또한 유진 씨를 편히 대해야 해.
잠결에 머릿속으로 외워지던 단 하나의 주문을 다시금 새겼다. 이 머리에, 마음에, 목에.
“아저씨.”
“어?”
“다시──다시 떨어져도 괜찮나요?”
말의 끝이 떨렸다.
그 떨림이 전해진 듯, 아저씨도 내 영문 모를 말에 묵시하듯 경청하고 계셨다.
나는 결국 그 상냥함에 기대어 말했다.
“다시, 숙직실에, 쭉, 찾아가도 될까요? 숙직실에서 봬도 괜찮을까요?”
이기심과 아집의 부탁. 영문 모를, 괜찮을 리 없는 부탁.
마음속으로 눈을 질끈 감고 말한 나는, 잔인하게 깔린 적막감에 전신을 굳혔다.
그리곤─
“뭐, 괜찮지 않을까. 너만 좋다면야.”
─라고, 무심히 말하시던 아저씨는 웃음을 참지 못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기대어버린 상냥함의 따스함과 같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셨다.
마치 눈물이 핑 돌고, 세상도 핑 돈 것 같았다.
설사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까, 솔직해서 탈인 목소리와 표정을 묶느랴 바빴던 나는 절제의 끝에 손짓하며……행복감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런 내─내 자신은 알 수 없을─표정을 바라본 아저씨는 그저 안심하신 듯 눈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그 눈웃음에 말하고픈 “───” 를 목 뒤로 삼키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이번에야말로, 유진 씨가 들을 수 없도록.
◇◆◇◆◇◆◇◆◇◆◇
“으음………”
“……”
“으으음………”
“……”
“흐으으으으음………”
“그만해.”
“거 참, 거기서 흐름을 끊어 먹냐,”
핸드폰 안의 목소리는 불만인 듯 투덜댔다. 물론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정겨운 목소리다.
“이미 다 읽어봤을 문제를 그렇게 질질 끌지 마시옵소서. 혜율 조장님.”
수화기 건너편에서 혜율이 키득키득 거리면서도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로, 내가 방금 완성시켜서 보낸 애니메이션 제작용 콘티를 보았던 참이었다.
“뭐, 네 콘티 퀄리티에 그 정도 시나리오 퀄리티니까 완성 그 자체에 의심을 하는 건 아니라구……그보다 대체 뭐야? 이 시나리오는. 소설인 줄 알았잖아.”
성능 좋은 그녀의 스마트폰 덕에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나리오를 팔락거리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났다. 정말 알 수 없는 조바심이.
“그럼 대체 뭐가 문제시길래 잡음이 길어진 겁니까?”
“요컨대,”
종이를 찰싹 펴는 소리가 났다. 아니, 뭔가로 종이를 찰싹 때린 걸까.
“이대로 만들었다간 규제당할 가능성도 있잖슴까. 우리.”
“없어! 단연컨데 없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듯 소곤소곤 말하는 혜율에게 윽박질렀다. 더하여 그녀의 뒤틀린 상상력에도 말이다.
“그 둘을 단순한 연애관계로 생각하는 네 두뇌를 먼저 규제해줬음 좋겠는데.”
“하지만 분명 시나리오엔 남주인공을 사랑하는 히로인 가로열고 12세 가로닫고 라고 쓰여 있었는걸요. 한유진 씨.”
“윽…….”
혜율의 정확한 지적에 반박해야 할 말을 잃은 건 내 쪽이었다. 마침 내 옆에도 내팽개쳐져 있던 콘티가 굉장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하자. 정확히는 그 콘티엔 내 크로키북 어딘가에 그려져 있던 여자아이의 이미지가 잔뜩 그려져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상대인 남주인공은 무려 12살, 띠동갑인 대학생이었다. 우연이라기엔 기구할 정도로 작가의 의도가 분명했다. 눈을 감으면 지그시 사촌동생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녀석의 흥미로운 듯 머금어진 얄미운 미소를…….
한소운 이 자식…….
“‘사랑에 나이 차이 따윈 상관없다’ 라는 말 자체는 훌륭하다 생각하며 부정할 생각 따윈 없지만 말이지, 우리나라는 일단 법치국가인 지라.”
“어차피 고작 애니메이션인데……게다가 서로 연인 관계가 된다든가 그런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도 없고. 능동적인 건 여자아이 쪽……”
“이 멍청아! 우리나라는 애니메이션이기에 탄압당하는 거라고!”
“아니, 어른의 사정 따윈 됐으니까……”
“이 멍청아! 우리는 어른이다!”
혜율은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어두운 일면을 한껏 들춰내며 일일이 내 말 하나하나에 따박따박 반응했다. 수고스럽기도 하지.
“어차피 과제 제출용 애니메이션이고, 너희들 시간 하나하나가 아까운 실상인데……이제 와서 시나리오 다 갈아엎고 새로 시작할 자신이나 있어?”
“네!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에 그녀 특유의 하이텐션으로 답장이 들려왔다. 역시 그녀도 어른이었던 것이다.
하이텐션은 둘째 치더라도, 조장으로써는 옳은 판단이었다. 안 그래도 시간도 부족하고 사람도 부족한데, 여기서 더 시간을 잡아먹을 판단 따위는 하지 않겠지.
이래 보아도, 혜율은 ‘리더’라는 직함 하나로 평가하면 유능한 편에 속하는 녀석이었으니.
“뭐……딱히 태클 걸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깐. 정말로 고맙게 쓰도록 할게. 정말 고마워.”
“이미 태클은 원 없이 걸었으면서……뭐 여하튼, 이렇게 진심으로 말해주면 머쓱하단 말이지.”
“정말, 너 같은 애들만 5명 있었어도 벌써 완성에 가까웠을 텐데. 어째 조원보다 도와주는 애가 더 해주는 게 많은 건지………”
“어차피 이제 셀 작업 들어가면 그때 도와줄 수 없으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해.”
유머 사이트에서 본 조별과제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시선의 유머글을 떠올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도 대답했다.
“이 정도로도 큰 힘이 되어줬어.”
혜율은 나의 힘이 빠지는 목소리와 대비되도록, 시원스레 대답해주었다. 그 작은 말이라도 힘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만약 도와줄 부분이 생기면 연락 해 주고. 유라도 좀 잘 챙겨주고.”
“그건 네가 잘 챙겨줘야지!”
“내가 그딴 말 하지 말랬……”
“하여튼 정말 고맙다!”
혜율은 일방적으로, 내가 태훈에게 했던 것처럼 전화를 끊었다.
언제나와 같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몸을 가볍게 씻어내고 앉아 있다 보면 시간은 3시 20분 주변이었다.
그 아이가 숙직실에 다시 떨어지…아니, 오고 싶다고 말했을 때의 그 표정. 난 선율이의 그 표정이 어떤 감정이었으며 무엇을 시사하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나 홀로 이리 머리 싸매고 앉아있다 한들 갑자기 선율이가 샤샥─하고 나타나 진심을 읊어주진 않는다. 아무런 계기도 없이 깨닫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 형편 좋은 일 따윈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아이를 이해할 시간이 내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 또한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가까워지는 도중 중단되는 관계만큼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선율이가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드문 아이이기에 그럴 것이리라 단정 지으며, 조용히 잡념을 받아들였다.
“슬슬 올 때가 되지 않았을라나.”
의미 없는 혼잣말을 뱉었다. 하지만 불현 듯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그 혼잣말은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왜 그 녀석을 기다리는 걸까.
뭘 기대하고?
애초에 나는 왜 그 아이에게 뻔뻔히도 “뭐 괜찮지 않을까” 라고, 속편히도 얘기해버린 걸까. 애초에 그녀는 숙직실에 또 와도 되냐 물어본 걸까? 내가 대체 어떤 대답을 들려주리라 믿고?
이른 스케줄과 감정곡선의 요동침으로 인한 몸의 피로에 뇌가 절여진 탓일까,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왜 그런 근본 없는 생각이 튀어나와 그 아이에게 전달하게 된 것인지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무언가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듯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위화감.
다른 아이들을 보았을 때와 다른, 그저 신경 쓰이는 아이……라던가, 구면이라던가, 그런 간단한 것들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위화감이.
그 위화감과 전혀 평범하지 않은 그 아이의 성격, 그리고 사고방식들이 자꾸 선율이를 평범한 5학년 여자아이로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선율이가 딱히 바라지 않는, 그 아이를 특별 취급을 하게 되는 사고가 조금은 싫었다.
그런 감정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든 때, 항상 공허하던 계단에 가벼운 구두발굽 소리가 조금씩 커져가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차, 머리 안 말렸는데.”
◇◆◇◆◇◆◇◆◇◆◇
“………음.”
“우응……….”
따사로운 햇빛이 비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밖의 상황과 다르게, 조금 침전된 듯 하는 분위기와 습도,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는 숙직실.
백주대낮……보다 한 3~4시간은 지난, 그런 늦은 시간에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반푼어치 일러스트레이터 한유진은 5학년짜리 초등학생 여자아이에게 온 몸을 수색당하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쓸데없이 장황한 표현일 뿐이지, 선율이는 굉장히 진지하고 힘이 들어간 시선으로 내 스케치북과 포트폴리오 일부를 가져와 정독(精讀)하고 있을 뿐의 단순한 상황이었다.
“………꿀꺽.”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하여, 마른 침을 삼키게 된다.
선율이는 밀폐된 숙직실을 울리는 내 침 삼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조금의 시선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천천히 스케치북의 페이지를 넘겨갔다.
………솔직히 이거 엄청 긴장되잖아! 누가 내 서브컬쳐 그림을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이렇게 세밀하게 정독해준 경험 따위는 조금도 없다고!
분명, ‘자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그림을 세심히 바라보고 그것에 대한 평가를 준다.’ 라는, 그 경험의 고귀함과 귀중함을 부정할 마음 따윈 1%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내 전라를 세심히, 진지한 표정으로 살피는 느낌인 것 같아서……까놓고 말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기.”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집중했나 봐요.”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윽.”
한선율은 다시 종이 속 세계로 종적을 감췄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녀는 쭈뼛쭈뼛 익숙치 않은 듯, 숙직실에 들어와서 그녀답게, 기품이 느껴지는 듯 앉은뱅이 탁상에 앉았다.
익숙치 않은 공간에서 시선을 잃고 방황하는 선율이의 안쓰러움을 보고 있기 어려웠던 것일까, 주방에서 금방 따뜻한 차를 준비해 오는데.
차를 준비하여 탁상 앞에 도착한 내 눈에 보이는 선율이는, 내 스케치북과 포트폴리오 몇 종류를 품에 안고서는 ‘봐도 괜찮나요?’ 라는 듯한 눈빛으로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반칙이라고. 그 눈빛은
결국 보는 것으로 닳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뭐 달라고 해도 줄 생각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하여간 가볍게 생각하고 넘긴 내 그림들이, 나에게 이런 수치심을 안겨줄 것이라곤 차마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저……아저씨?”
“에? 아, 응. 왜 그래? 다 봤니?”
“네. 주신 것들은요. 그래서 말씀인데……”
선율이는 포트폴리오 파일들과 스케치북을 절도 있게 접어, 원래 널브러져 있던 상태보다 더 깔끔하게 쌓아 탁상 위로 올려놓았다.
이후 선율이가 시선을 향하는 곳은 내가 아닌, 내 바로 옆자리에 던져져있던 작은 스케치북이었다.
“그것도 볼 수 있을까 해서.”
“뭐 그거라면 문제는 없……”
귀찮은 듯 스케치북을 잡고 건네려는 도중, 그 손을 급하게 다시 수거하여 품속으로 넣었다.
“아저씨?”
“이건……안 된다!”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럴 것이 이 스케치북은……이 스케치북 안에는, 선율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아무리 눈치 없고 안면인식 장애를 가진 사람이 보더라도 단박에 누구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수준의 스케치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네줄 뻔 했다. 위험했어……….
“………어째서입니까.”
선율이는 조금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까지는 아닌가, 여하튼 뭔가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기에 신기한 기분.
그것도 그렇다. 일방적으로 이유조차 없이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뭔가 납득할만한 이유라고 필요한 것이겠지.
하지만,
‘납득이 될 만 한 이유가………있나?’
간단히 정리하면……없었다.
이유야 한 가지 명확한 것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내 말도 안 되는 아집일 뿐이고, 밝힐 수 없는 정답일 뿐이기에 뭐라 대답할 구석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민하는 사이에, 선율이가 찻물을 홀짝 마시더니 코로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지으시고는……그 정도로 싫으시면 괜찮……”
“………어린애는 봐선 안 되는 것들이 그려져 있어.”
“에, 알몸이라던가 그런 것들이라면 저 스케치북에도 있었……”
“………외설적인 것들이 그려져 있………”
“……………”
“……………”
노골적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다시 보고 있던 스케치북으로 삐걱거리는 시선을 옮겼다.
나는 딱딱히 굳은 상태로, 수십 배로 불어버린 수치심에 몸을 베베 꼬며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스윽
그녀가 마지막권의 스케치북을 덮어 탁상위에 올려놓았다.
뜨거운 김을 남발하던 찻물. 찻잔이 전부 차갑게 식어버릴 정도로 긴 시간을 들여 스케치북을 정독한 선율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몸을 조금 뒤로 내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전~부 아저씨가 그리신 건가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나란 놈을 대단한 사람인 듯 바라보는 그 시선이 굉장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리라.
조금 놀랐지만, 스케치북의 내용물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인 것인지, 솔직하게 고개를 세로로 저어 긍정했다.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뭐………”
“아, 아니에요! 정말로 재미있게 봤어요.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시는 분은 처음 뵌 것 같아요.”
“과찬이야. 정말 쓸데없을 정도의 과찬.”
나는 손사래 치면서 말했다. 그렇게 대화를 넘겼다만, 그녀의 시선은 아직도 나를 향한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리고 있는 것은 선율이의 눈이었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은 알기 쉬운 오오라가 내 피부까지 닿고 있었다. 그만큼 선율이와의 마주앉은 거리가 짧았기 때문이리라.
“왜 그래? 뭐 물어보고 싶은 것이라도 있어?”
“엣, 물어보고 싶은 것 말인가요?”
선율이는 갑자기 알기 쉬운 흥미를 드러내며 고개를 올렸다. 시선은 내 두 눈동자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어……음, 그런 것 같이 보였다고 할까, 아직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네가 5학년 6반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엣흠, 크흠. 질문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괜찮을까요?”
다시 자세와 정신을 정돈한 듯 보이는 선율이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내가 너에게 보여주지 않은 스케치북의 내용물에 관해서……라기 보다, 그런 것 까지 물어봐야 하는 거야?”
“저는 생각보다 아저씨에 대한 것이 많이 궁금하다구요!”
“아니 그게……”
갑자기 나에 대해 많이 궁금하다고 해도!
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단지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일까 미묘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고, 이상하리만치 진지한 선율이의 표정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까지 느껴질까에 대해 호기심이 성장했기 때문일까.
“그럼 조건이 있어.”
“조건인가요……?”
“간단해. 내가 먼저 너에게 질문할 테니까, 답해주면 돼. ……그래서 질문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해?”
“질문 범위까지 물어보셔야 하는 건가요?!”
“나도 너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싶거든.”
“히에엑?!”
선율이는 알기 쉽게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얌전히 앉아있던 방석(겸 쿠션)을 머리위로 올려 달궈진 표정을 감췄다. 너무 알기 쉽기에 쿠션 뒤로 그 표정이 투시되어 보일 정도였지만.
참으로 괴롭히는 보람이 있는 아이였다.
스팀을 폭폭 뿜어내는 소리를 넣어야 할 것 같은 그녀는 다시 방석을 깔고 앉고는 시선을 스치듯 맞추며 이야기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되지 않을 수준의 질문이라면 괜찮아요.”
“참 알기 쉬운 기준이네.”
“아……아저씨는 어느 정도면 괜찮으신 건가요?”
“나는 뭐………그러게. 딱히 기준은 없어.”
“정말 아무거나 여쭤 봐도 괜찮으신 건가요?!”
“네가 그렇게 나오니까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어.”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허리를 꼿꼿이 펴며 말했다.
“그러면 만약……”
수려한 얼굴에 그늘을 띄운 그녀는 ‘나지막히’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를 내며 읊조리더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그리고 아저씨가 먼저 질문하실 차례셨지요?”
─이내 다시 밝고 꿋꿋한 그녀로 돌아와 말했다.
그 목소리의 온도는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하여금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기 힘들 그녀는 ‘질문’ 이라는 것에 화색하며, 놀라며, 얼굴을 붉히며, 감정에 그늘을 띄웠다.
대수롭게 느끼지 않을 수야 있겠다만, 나는 그 대수로움을 마음속으로 간직하며 내 앞에 있는 당돌하고 우아한 5학년짜리 초등학생에게 대답을 요구할 의문을 같이 기억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