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적으로 꽤 예전에 작성된 1장을 열심히 뜯어고치고 있습니다. 부족한 졸작이나마, 부디 많은 평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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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졸작은 바탕체, 14px로 작성되어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졸려 미치겠네…….”
천장 위에서 미친 듯이 들려오는 발구름 소리, 그 정신이 아찔해지는 소음 소리를 듣고 일어난 나의 첫마디는 저러했다.
분명 그 전날에도 전전날에도,
……아니, 사실 이 숙직실에서 썩기 시작한 날부터 저 초등학생 꼬맹이들의 발구름 소리는 적응이 될 듯? 하면서도 여전히 내 잠재 신경을 박박 긁어놓는 스트레스의 주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오후 시간 순찰인 아이들 하교 시간을 맞추는 데에는 저 발구름 소리가 잠든 나를 깨워주는 중요한 알람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하므로, 정말로, 애증의 관계란 이런 것이라 하느니라─
한숨을 쉰 나는 적당히 떡진 머리를 박박 긁었다.
사실, 오늘은 묘하게 저 발구름 소리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피곤? 숙직 업무와 같이 병행되는 아르바이트의 탓?
물론 그런 이유를 들라고 하면 들 수야 있겠다만, 나는 이미 이 갑갑함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그 이유는, 내 마음속이 정리되지 못한 것.
내 여러 가지의 감정이 솔직하지 못하게 이런저런 느낌의 감정으로 뒤죽박죽 섞임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다. 오늘 아침 8시 즈음에 잠들기 전날 있었던 2차 도주 사건(?)의 심적 여파로 꿈결에서도 잠을 설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확실히, 난 아직 후회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도망치는 것만이 최대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아직도 나 자신에 대해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 당시 느낀 것과 같이, 뭔가 마음 구석 한 부분이 뻥 뚫린 것 같이 공허한 느낌이다.
무언가 이끌리듯, 거리감은 멀어진다 인식하더라도 멀어지지 않는 몸과 마음.
묘하게 추상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손을 저어보아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라고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당연하듯,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무언가. 정말 무언가, 시끄럽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 내가 ‘덩그러니 존재한다.’ 라고 표현 가능할 정도의 꽤 넓은 방인 숙직실. 그럼에도 지하에 있기에 소리라는 요소와는 거리감이 있는 그런 숙직실.
그런 숙직실에도 들려올 정도의 소리라면 아이들 발 구름 소리 이외에 짐작 가는 요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발소리 이외엔 추리할 재료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하 진짜……이번엔 또 뭐야.”
말 그대로,
평소대로의 발소리도 확실히 섞여 들려왔지만, 발소리보다 약간 작게 들려오는 듯한 다른 소음.
무언가……평소보단 조금 더 고요하게…평소보단 조금 더 소란스럽게…
“…단순한 잡담 소린가?”
나는 다시금 추리했다.
확실히, 발구름 소리가 평소보다 작게 들려오는 이유는 잡담 소리에 묻혀 들려왔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확실히 통상 하교 시간은 지나간 시간…… 방과 후 수업시간의 종례시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
물론 추리고 뭐고 간단하게 “시계를 보면 되는 문제가 아니냐.” 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앉아있는 이 숙직실엔 시계가 없었다.
간단한 부엌부터 난방 도구까지 전부 존재하는 숙직실에 고작 시계 하나 없다 하는 것 또한 참으로 웃긴 일이지만, 내 핸드폰의 전원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까지 포함하여…… 지금의 나는 시간을 확인할 방법이 아예 없다.
“……생각해보니 굉장히 암울한데, 이 상황.”
매우……매우 암울한 상황이지만, 사실 이렇게 앉아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윽, 대충 씻을 시간도 없나.”
툴툴대면서도, 무표정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입고 있던 수면용 트렁크 대신에 나름 번듯하고 가벼운 작업복을 맞춰 입고, 적당히 떡 져 있던 머리를 정리하고 나서 그 머리를 대충이나마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쓴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준비법이긴 하지만, 역시나 떡 져 있던 덕분에 적당히 정리되지 않는 머리카락이 문제였다.
“으와아, 답답해라……”
모자에 가려져 밀봉된 듯한 머리의 갑갑함에 내 자신도 모르게 자동으로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갑갑한 느낌을 참지 못해 어느 정도 꽉 눌러썼던 모자를 적당히 정리하듯 띄워 쓰며, 굳게 닫혀있던 지하 숙직실의 문을 열었다.
나는 지금 굳이 말한다.
이 숙직실의 문을 여는 행동은, 나의 어떤 의도나 의심이나………뭐 복잡하게 얽혀있는 요소 따윈 아무것도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드르르르르륵─끼이이이익
섀시로 되어 있는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어 열고 신발을 신은 나는 경첩이 낡은, 강철로 만들어진 숙직실의 여닫이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여닫이문을 닫았을 때에는, 약간의 ‘엇나갔다’ 란 느낌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내가 숙직실을 나서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뛰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려왔었지만, 지금은 한 마디 두 마디 들려오는 소리가 전부일 뿐.
내가 나오는 그 사이에 전부 나가 버린 걸까……라고 실속 없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자, 그 작던 소리마저 더욱더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내가 한 발짝 한 발짝 계단을 오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지상 층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만 같은가.
확실히 이 상황은 보통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며 나는 하염없이 계단을 올라갔고 드디어 이 밖의 상황, 내 한 발짝 한 발짝으로 분위기를 바꿔가던 1층의 상황이 망막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공포에 질린 수많은 눈동자.
울상이 다 된 얼굴.
인외 생물을 목격한 듯하는 상체의 움직임,
맹수를 눈앞에 둔 것과 같은 후들거리는 하체.
마치 조금이라도 건드리거나 자극하면 터질 것 만 같은 플루토늄 폭탄을 눈앞에 둔 기분.
말 그대로, 나를 지하실 음지 괴물 취급하고 있는 작은 악마들의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생각해보자.
‘……그래, 시계를 보자.’
나는 급식실로 향하는 넓은 홀에 위치한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 2분…… 대부분의 초등학교 점심시간이었다. 이르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3~4학년 학생들은 열심히 밥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래, 보통의 하교 시간보단 덜 소란스러운 점도 그렇고……머릿속의 퍼즐 피스가 딱딱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내 현재 모습을 다시 자각해 보았다.
떡 져 버려서 상당히 뾰족하고 날카로워진 앞머리와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 어깨까지 닿는 장발머리, 살짝 떠있는 듯 써놓은 후줄근한 검은 모자와 짜증 난 듯 잔뜩 신경질적인 표정.
결정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창문 따윈 하나도 없이, 내 몸을 음흉하게 가려주는 지하의 어둠.
거기서 지상의 빛 약간만이 비춰주는 내 얼굴의 꼬락서니.
“………하하하, 하하, 하…………”
아이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랫동안 굳건하게 지켜오던 급식 줄을 가볍게 내팽개치고 쏜살같이 도망가는 소악마들.
“괴물이 나타났다!!” 라던가 “진짜가 나타났다!!!” 라는 괴성 따위를 내지르며 쏜살같이 도망친 그 작은 생물들은 기어이 2,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깐 거기! ‘진짜가 나타났다’는 뭐냐! 뭐냐고!!”
이상한 부분에 반응해 버렸다.
뭐……일단은 문자 그대로, 예상한 만큼의 열렬한 반응을 맞게 된 나는 무덤덤한 표정을 했지만, 가슴에는 크고 아름다운 비수가 꽂힌 기분이었다.
게다가 한 가지 추가, 이런저런 소문이나 괴담 취급이던 정도의 숙직실 괴물의 사건은, 수십 명의 작은 목격자를 남긴 채 현실이 되어가고 사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살기 싫다.”
그때 저 한마디만을 남긴 나는, 여태까지 살며 느끼지 못한 기묘한 감정들을 폭풍같이 입안에 머금곤, 끝없는 억겁의 쓴맛과 시큼함을 느꼈다.
허공에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내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고 느낀 적이 있기에 알 수 있었던 입안의 쓴맛이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거늘, 쓰디쓴 성수는 이미 엎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상태로 힘이 풀려 계단에서 조금 굴러떨어진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지금의 나에겐 전혀 아프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였다.
그리고 몇 분 동안, 그 자리에서 영혼이 빠진 사람 마냥 굳어있을 뿐이었다.
◇◆◇◆◇◆◇◆◇◆◇
“이리 오너라!”
“출구는 저쪽입니다. 고객님.”
편의점 문을 힘차게 박차고 들어오는 태훈에게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현 시각 오전 3시 21분의, 밖은 자연의 빛이란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새벽이었다. 빛이 약한 초승달이 떠 있는 덕분에 희미한 별빛조차 잘 보일 것 같은 검디검은 하늘.
그 어둠을 자동차 하이빔으로 지우며 이곳까지 찾아온 태훈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서 계산대 앞으로 들고 왔……
“잠깐. 간단한 요깃거리? 이게?”
“합계 29,400원입니다. 나으리.”
말하면서도 계속 POS기계에 바코드를 찍은 나는 그 화면에 나온 총합계 가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칫, 쓸데없이 정확해서 더 기분 나빠.”
총합 가격은 태훈이 불러준 가격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POS기를 조작해 30원의 가격을 추가했다. 무더기로 내려진 먹을거리를 바라보며…
“엥. 갑자기 30원이 늘었는데.”
“봉투값입니다. 도련님. 들고 가시라고.”
“필요 없어! 여기서 반절 처리하고 갈 거거든.”
“남은 반절은 어쩌려고.”
“네 뱃속.”
“필요 없어……”
나는 귀찮은 듯 태훈이 고른 요깃거리를 딱 반절 봉투에 담았다. 소세지, 핫바, 삼각김밥, 초코바, 우유……많기도, 다양하기도 했다.
“가져가. 비닐 봉투는 쟁여두면 은근 쓸 곳이 많다고.”
“예이~”
내 카운터 좌석 옆의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 앉은 태훈은 주머니에서 수성 라이너를 꺼내더니 봉투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자기 물건엔 언제나 이름을 써두던, 이름을 붙여놓는 태훈의 습관이었다.
하지만 수성이라 봉투에 잘 써지지 않았다.
“이리 줘 봐.”
“앗, 아. 야!!”
나는 그 라이너를 뺏어 들어 내 주머니에 있는 유성 매직과 바꿔 주었다. 그리곤 이 라이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라이너 팁의 부분이 단단한 곳에 눌러쓴 듯 다 해져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흰색 분진과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아까부터 연필로 드로잉을 하느랴 살짝 검게 변한 내 손에 희게 묻을 정도로.
“그 전씨 가(家) 도련님이 이런 쓰레기 물펜은 왜 들고 다니는 거야.”
“집 얘기는 하지 마. 그리고 쓰레기라고도 하지 마. 방금 전까지 제 몫을 한 기특한 아이라구.”
나는 번져 방울진 봉투의 펜흔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제 몫을 한 것 같진 않았다. 글씨란 걸 알아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 물펜을 돌려주며, 빌려준 유성매직을 받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
“내가 여길 하루 이틀 오는 놈으로 보여?”
“왜 하필 오늘이냐고.”
“그럼, 재미있는 일이 있으셨는데 와야지.”
나는 조용히 몸을 굳혔다. 태훈이 굉장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그 눈에는 모든 확증이 있는 듯한 눈빛이 어려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힘차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대답 없는 공회전만 계속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태훈이 나와 그 아이 사이의 도주 사건을 듣거나, 목격했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알고 있어야지. 너에 대한 건데.”
태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말했다. 이상하게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짓는 태훈에게 이상한, 기묘한 압박을 받았다.
……생각을 바꾸자고 마음먹은 것도 이때였다. 차라리 오랜, 편한 친구인 태훈에게 털어놓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그래. 말해줄게. 말해주면 될 거 아냐.”
당당한 듯, 그러면서도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태훈에게 나는 낭랑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약 일주일 전부터 그 아이를 지켜보게 된 것. 그 아이와 있었던 1차 도주 사건, 2차 도주 사건과 그 흔들린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근무시간 사고. 학교에서 가진 내 이미지까지 전부.
그 아이를 향해 생각한 것과 그 아이가 폭력적으로 아름다웠다는, 그런 중요하고도 쓸데없는 이야기는 제외했지만.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태훈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까의 미묘한 표정이 한껏 발전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곤 날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뭐, 뭐야.”
“아, 아니. 미안. 내가 예상한 말이랑 전혀 다른 식의 고백을 들어버렸거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
“당, 장, 나가.”
예상한 서로의 모습과 말은 크게 달랐던 모양이었다.
“아, 아니, 그게. 난 이제 곧 네 아버지 기일이시니까, 한규석 작가님 기일이니까 대신 편의점 근무라도 서 줄까 해서 말하러 왔지. 이른 아침에 갈 거지? 네 어머니가 항상 그러셨던 것처럼.”
“……….”
태훈은 허둥대면서도,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자신이 전하고 싶은 걸 또박또박 전하기 시작하여, 말이 끝나갈 때쯤엔……어머니 이야기 나올 때쯤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달조차 희미하게 빛나는 숙연한 하늘이 그렇게 시킨 걸까. 라며, 괜한 하늘 탓만 했다.
“뭐……그랬냐.”
“그래서, 편의점 대타 서줄까, 말까.”
“일단은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련님.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밤엔 잠을 조금 자 두고 싶은 기분이었거든.”
“날 이용해 먹겠단 소리냐. 이 로리콘.”
“로! 오, 야, 어. 뭐……?”
태훈의 분위기를 바꾼 한 마디에 난 언어 기능을 상실한 듯 더듬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한 마디라기보다 한 단어의 파괴력이 굉장했기 때문이었다.
“졸린 새벽에 정신이 확 들게 해 주시네. 해서, 대체 내가 왜 로리콘이란 건데?”
“직책을 악용한 여아 스토킹 및 위협.”
“잊어!! 잊으라고!!”
나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초코바를 까먹던 옆자리 쾌남의 멱살을 압아 사방팔방 흔들었다.
하지만 태훈의 표정은 여전히 방실방실 꽃밭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던 느낌의 표정이라더니, 무언갈 흐뭇하게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과 흡사했다.
“이럴 때까지 방실거리는 넌 참 여전히 기분 나쁜 놈이야.”
“고마워.”
거칠게 숨을 고르며 잡은 멱살을 풀고, 이긴 듯 의기양양하게 초코바를 먹는 태훈을 해방시켜주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그 녀석을 흔드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훈은 다 섭취한 초코바 껍데기를 자기 주머니 안으로 넣으며 한 마디 말을 꺼냈다.
“그거야 방실거릴 만하지. 행복할 만했지.”
“없어.”
“적어도 3년 동안은 쭉 감정이 죽어있던 네가, 빛이라곤 쥐뿔도 없었던 네 눈이 그 아이와의 사건을 얘기할 때 빛났거든. 아깐 내 멱살까지 잡아 흔들었고.”
“!, ………….”
아까와 같은 불가사의한 감정이 몸 안에서 피어올랐다.
아, 아니. 불가사의 따위가 아니었다. 이 감정은 아까도 느낀 바 있었다. 태훈이 하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때 피어오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강도가 달랐다. 아까는 조금씩 불씨가 보일 듯 말 듯 했더니, 지금은 기름에 스파크를 튀긴 듯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내……가?”
“그 아이를 보곤, 옛날의 네 모습이라도 발견한 거 아냐? 예전의……”
태훈은 자신이 은연중 잡고 있던 라이너를 꼭 쥐며 말했다.
“그림을 그리던 네 모습을. 캔버스에 시선을 쏟던 네 모습을.”
“뭔 소리야. 지금도 그림은 그려. 그만뒀다는 듯 말하지 마.”
“지금도 그리고 있다……라. 하하.”
계산대에 대충 널브러진 크로키 북 2개를 보며 태훈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애초에 뭐부터 알아야 할까, 그 단계부터 알 수 없었기에……
내 가장 친한 친우의 마음을, 마음조차 알 수 없다는 자신으로부터의 의문이 이 피어오른 불씨의 정체인가.
“나는, 난.”
“지금도 그려. 라는 대답보다, 다시 그릴 수 있어. 라는 말을 더 듣고 싶었는걸.”
“────”
웃으며 말하는 태훈의 얼굴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 웃음조차 너무나도 상냥했기에, 유라의 그 얼굴 또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태훈과 유라의 상냥함을 떠올리니, 태훈이 말한 내 죽어있는 모습이란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대비를……강렬한 대비를, 침이 식도를 넘어가는 그 순간 깨달은 것이다.
“……하아.”
본능적으로 나온 한숨이었다.
태훈은 가볍게 쿡쿡쿡 웃으며, 참을 수 없는 웃음이란 걸 훔친 그는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써준, 태훈의 이름이 적힌 편의점 비닐 봉투를 들고.
“넌 네가 울릴 뻔한 그 아이에게나 잘 해줘. 죽어있던 널 깨워줄지도 모를 운명의 그 녀석에게.”
라고 말하더니, 봉투 안의 작은 초코바를 꺼내 나에게 던졌다. 머리에 맞고 떨어지는 그걸 손에 받은 난 체념하듯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너에겐 좋은 자극이 될 지도. 넌 지금이라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게 어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온 나에게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난 태훈.
……대체 뭐라 대답해줘야 좋았던 걸까.
차를 끌고 사라지는 태훈을 보며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근무시간은 길게만 남아 있었다.
그리곤 크로키북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수많은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 아이와 똑 닮은……종이 안 소녀들의 얼굴을………
─너에겐 좋은 자극이 될 지도.
자극이라, 그 아이가.
태훈이 던진 작은 초코바의 포장지를 뜯으며, 태훈이 같이 건네준 그 작은 말을 천천히 곱씹기로 했다.
“……달콤 쌉싸름, 하네.”
끝없이 달콤하기만 한 초코바를 먹고 달콤 쌉싸름한 말을 느낀 난 다시 한입을 뜯으며, 달콤한 맛 안에 미약하게 대비되는 쓴맛을 느끼려 애썼다.
쓴맛을 얼마 느끼지 못했는데도 다 사라져버린 짧은 초코바에 원망을 쏟으며, 가벼운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의 새벽도 길어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