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원수를 위하여'입니다.
조아라나 문피아에도 연재를 하고 있었는데
자유연재 특성상 피드백을 받기도 힘들고
조회수같은거에 연연하지 않겠다 마음 먹었지만
아무래도사람인지라 글을 쓸때마다 마음이 계속 흔들리네요
내가 달리는 방향이 맞는지 정말 재미가 있는지
그냥 어둠속에서 마라톤을 하는 기분?
작가분들이라면 공감하실지도...ㅠ
15000자 정도입니다.
바람이 차갑고 안개가 짙게 낀 밤이었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은 쉴 새 없이 비를 뿌리고 있었는데, 늦가을에 내리는 비라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더 새파란 빛을 띠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고, 물기 맺힌 긴 주둥이에서는 연신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펜리스는 덤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나 진득한 끈기를 보이는 건 오직 자신뿐, 함께 몸을 숨긴 동족들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큰 사냥에는 큰 기다림이 필요한 법.
‘조용히 해.’
펜리스는 낮게 목을 울렸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챘는지 몇몇 늙은 것들이 나이만큼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며 목덜미 털을 곤두세웠다. 그 위협적인 모습에 나머지 젊고 어린 것들도 이내 얌전해졌다. 떨어지는 빗방울과 나뭇잎 소리를 빼고 다시금 정적이 찾아오자, 펜리스는 귀를 쫑긋 세우며 깊게 숨을 들이셨다. 축축한 공기에서 사냥감의 잔향이 은은하게 날라 오고 있었다.
‘강철…불꽃…죽음의 냄새가 난다.’
콧잔등이 저절로 씰룩거려질 만큼 불쾌한 악취였다. 게다가 그것들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숲을 가로지르며 접근하는 중이었다. 동족들 역시 그것을 감지했는지 무리 전체가 격한 흥분으로 술렁였다. 하지만 끙끙거리거나 숨을 거칠게 내쉬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사냥의 개시를 알리는 하울링(Howling)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울링은 오로지 우두머리만의 특권이었고, 그 누구도 ‘숲의 왕’ 펜리스보다 먼저 사냥을 나설 수 없었다. 튕겨져 나갈 화살처럼 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는 동족들을 보며 펜리스는 만족감을 느꼈다. 뒷발부터 빳빳한 정수리 털끝까지 사냥의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사냥을…시작한다!’
멀리서 들리는 수 백 명의 행군소리보다 더 위협적인 펜리스의 포효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하울링은 무리의 서열대로 이어서 계속되며 사냥감들에게 사냥꾼의 존재를 알렸
다. 생존을 위한 사냥이라면 하울링은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오늘은 사냥보다 유희에 가까웠다. 사냥감이 도망쳐야 더 재미를 볼 수 있을 터였으니. 숲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고, 동족들은 무리 속에서 모두 하나가 되었다.
"뭐지 이 소리는?"
"젠장, 어디서 들짐승들이 짖는 소리겠지. 신경 끄고 걷기나 해."
곧 피 흘리며 쓰러질 이들 또한 오늘이 어제처럼 지루한 하루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펜리스는 문득 궁금해 하며 땅을 더욱 힘차게 박찼다. 무리 중 아무도 펜리스보다 앞서나가지 못했다. 그의 양 옆에는 무리에서 제일가는 사냥꾼인 ‘억센발톱’과 ‘으르렁니’가 함께 나란히 달렸다. 반면에 가장 어리고 혈기 넘치는 ‘서슬갈기’는 애송이답게 시선을 끌고 싶은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무리의 머리 위에서 뛰는 중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가깝습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움직여라! 황제께선 이 숲이 불타길 원하신다."
"…옵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재앙이 다가오면 쥐는 굴을 떠나고 새들은 둥지를 떠난다. 하지만 인간은 너무나 오래 동안 자연으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인지, 둔함을 넘어 눈 먼 장님에 가까웠다. 그리고 사냥감들이 위협을 감지했을 땐 이미 펜리스 무리가 숲의 구렁에서 뛰쳐나온 뒤였다.
"놈들이…놈들이 왔다!"
"쏴, 쏴라! 어서 빨리 쏴!"
"사방에 괴물들로 가득합니다, 장군님! 저흰 포위됐습니다!"
"그럼 사방에 갈겨!"
자그마한 인간들이 손에 쥔 철 막대기에서 매캐한 불꽃의 냄새가 피어오르더니, 동족 중 몇몇이 진창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걷어차인 개새끼마냥 낑낑대는 모습이, 전사의 자격도 없는 추한 꼴이었다.
‘싸워라…! 죽여라…!’
면도날 같은 손톱을 드러낸 펜리스는 우두머리답게 제일 먼저 밀집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번쩍거리는 쇳조각이 두꺼운 가죽을 뭉개고 지나갔지만 아픔은 잠시에 불과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인간들을 향해 손톱을 휘두르자 버터처럼 잘라진 팔 다리가 사방에 튀었다. 뒷발길질 한 번에 인간 수십 명이 하늘을 날았고, 모두 나무에 부딪치거나 땅에 쳐박혀 목이 부러졌다. 야가 점점 붉게 물들어 갈수록 펜리스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한 놈도…살려두지 마라…!'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육편을 잘근잘근 씹으며 펜리스가 무리에게 외쳤다. 씹고, 뜯고, 찌르고, 꿰뚫고. 우두머리의 기대에 부응하듯 동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축제에 흥을 더했다.
“도, 도망쳐! 작전 중지! 작전 중지다!”
집단에게 공포란 전염병과 같아서 한 명의 이탈자가 생기자, 전열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아무리 날고기며 혹독한 훈련을 해 봤자, 실존하는 진짜 시련 앞에서는 소용없는 법이었으니.
“무슨 개소리야! 자릴 지켜! 도망치는 놈은 ‘비겁’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이다!”
군모에 멋들어진 깃털을 꼽은 장군이 권총을 뽑아들며 외쳤다. 그리고 펜리스의 무리가 아닌 도망치는 부하들을 향해 쏘아댔다. 하지만 너무 거기에 열중한 나머지 펜리스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르르륵….”
손톱에 목이 관통된 채, 장군은 허공에서 발길질을 하며 피거품을 물었다. 멀쩡히 붙어 있는 한쪽 손으로 방아쇠를 계속 당겨대도 찰칵찰칵하는 빈 탄창 소리만 날 뿐이었다. 죽어가는 사냥감의 심장박동을 충분히 감상한 펜리스는 그의 머리통을 움켜쥐고는 순식간에 뽑아 내던졌다.
장군의 멍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병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거추장스런 무기를 내던진 채, 마음 놓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사냥의 여흥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목덜미를 깊게 물린 사슴이 꿈틀대는 정도의 저항이랄 것도 없는, 순수한 놀이에 가까운.
펜리스의 무리가 저마다 숲 속으로 산개하자 비탄에 잠긴 절규와 흐느낌은 점차 잦아들었고,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숲은 언제나 그렇듯 다시 조용해졌다. 애초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S#1. 내부자들.
“누군가와 거래를 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할 거야. 반드시 결과가 뒤따르는 법이거든.”
-펜리스 ‘워그’ 울프릭.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눈썹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펜리스는 뻑뻑해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주변은 끔찍하게 어두워서 마치 실명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번 눈을 뜰 때마다 마주치는 익숙한 상황여서, 그는 당연하게 느껴야 할 공포 따위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또 살아남았군.’
꿈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허망한 꿈. 얼마나 생생했던지 아직까지도 꿈에서의 감각이 여전히 느껴졌다. 꿈속에서의 펜리스는 여전히 위풍당당한 숲의 왕이자 모두가 두려워하는 크고 나쁜 늑대였다. 그러나 꿈은 꿈에 불과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좋았던 시절의 추억에 불과할 뿐.
-절그럭
땀을 닦아내려고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 벽에 연결된 쇠사슬이 우는 소리를 냈다. 꿈이 아닌 진짜 현실은 잠시도 펜리스를 행복한 채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잠시나마 꿈에서 위안을 찾은 자신이 우스워져서, 허탈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절그럭
너무 오래 누워있던 탓인지 쥐가 난 것처럼 팔다리가 떨렸지만, 조금씩 몸을 움직여보자 뻣뻣해진 사지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동시에 펜리스는 지독한 허기를 느꼈다. 먹을 것이 필요했다. 사슬이 간신히 허락하는 곳에 놓인 밥그릇은 이미 며칠 분의 먹이가 잔뜩 쌓이다 못해 썩어가고 있었으나, 펜리스는 거기에 관심조차 없었다. 남이 던져주는 걸 먹는 건 개나 할 짓이었다. 그는 늑대였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냥이었다.
-찍찍
잠시 귀를 기울이자, 펜리스는 우리 안에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눅눅한 지하감옥 구석구석을 누비는 이 작은 존재들은 펜리스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손님이었다. 게다가 펜리스의 우리는 다른 곳보다 찌꺼기가 항상 넉넉히 남겨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살이 아주 통통히 올라있을 터였다.
‘하나…둘…’
펜리스는 심호흡을 하며 기척을 죽였다. 그리고 셋을 셈과 동시에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팔을 쭉 뻗었다. 철그렁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찌익-!하는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마치 바구니에서 제 물건을 꺼내는 양 아주 능숙한 솜씨였다.
“아, 인생이란 참으로 잔인하지.”
펜리스는 쉰 목소리로 쥐에게 말했다. 미치광이나 할 독백이었지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엔 그는 너무 오래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 할 테고, 넌…”
저항할 새도 없이 붙잡힌 쥐새끼는 아귀힘에 내장이 터졌는지 숨만 깔딱깔딱 내셨다. 금방이라도 멎을 듯한 그 심장박동에 펜리스는 사냥의 만족감을 느꼈다.
“넌…다시는 빛을 못 볼 테니까.”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최후의 저항에 펜리스는 침이 잔뜩 고이는 것을 느꼈다. 입속을 가득히 채울 풍부한 육즙을 상상하며 펜리스는 커다란 턱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 만찬을 음미하기도 전에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거북한 마찰음을 내며 울었다. 그리고 징 박힌 군홧발 소리가 신속한 속도로 또렷해졌다.
“죄수 이송 준비. 감방으로 이동.”
얼마 지나지 않아 오렌지색 횃불과 함께 희미한 그림자 수 십 개가 철창 사이로 드리워졌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환한 불빛에 펜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쪽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 사이에 잡혀 있던 쥐는 헐거워진 손가락 틈을 비집고 나와 쏜살같이 도망쳐버렸다.
“죄수 상태. 이상 무."
“생존 확인. 이상 무."
“쇠사슬, 수갑 상태. 이상 무.”
분명 순찰 시간은 지났을 텐데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이들은 군모와 군복, 군화, 각반, 완장까지 온통 시꺼먼 색이었다. 특히 들고 있는 강선 머스켓(Musket) 소총이나, 허리에 찬 세이버(Saber)를 보니 옥졸이라기 보단 누군가의 정예 호위병 같았다.
“죄수 이송 준비. 각자 위치로.”
펜리스가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 기습적으로 감방 문이 열리더니, 대기하고 있던 덩치 큰 병사 두 셋이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덮쳐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머지 병사들은 조준자세를 취했다.
‘젠장, 머스켓 소총…좋은 대화 수단이군.’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매질 세례에 펜리스는 머리를 감싸며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멈추지 않겠는가. 때리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었으니.
“그만하면 됐다. 끌어내.”
아까부터 지시하는 목소리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딱딱 끊어지는 어조였다. 펜리스는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핥으며, 그 ‘지휘관’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냄새나는 두건
이 덥썩 두 눈을 가려버렸다.
“신속하게 이동하도록.”
족쇄와 수갑,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 펜리스는 이곳에 들어온 날 이후 처음으로 걸음을 뗐다. 꼭두각시처럼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 혼자 걸으려 애를 써도, 두 다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어 바닥을 긁으며 끌려가는 꼴이었다.
“이봐, 오늘인가?”
펜리스는 나란히 걷고 있는 병사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지하 독방에 나가는 날이 바로 자신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뭐, 항상 운이 좋을 순 없겠지.’
감옥 모퉁이를 돌자 누군가 잘 가게, 라고 말하는 소리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펜리스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현실이 아니라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은 건장한 사내들이 펜리스를 마구 구타했고, 이어 영리하고 사려 깊은 사내들이 교묘한 질문을 던져댔다. 길고 긴 심문 과정에서 몇 번 정도 의식을 잃었지만, 차가운 물과 소금은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들은 펜리스의 궁극적 목표가 반(反)인류적인 종족주의 세력을 샤를로프 제국에 곳곳에 심으려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펜리스는 정치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 목표가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순순히 시인했다. 아주 잘한 일이었다. 나머지 한 쪽 눈이 성하게 붙어 있는 것은 그 덕분일지 몰랐다.
“1호, 3호 철문 개방. 죄수 이송 중.”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솜털까지 오싹오싹한 것이, 지상으로 올라온 게 분명했다. 덕분에 죽음이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사형을 집행할까? 밧줄로 목을 맨 다음 위로 잡아당기거나 발판을 치우리라…올가미가 목을 파고들며 죽음 속으로 밀어내고…눈앞이 흐릿해지며 그것으로 끝이었다.
‘목이 딱 꺾어져야 좋은데. 가는 길이 추해질까 걱정이군.’
펜리스도 어렸을 적 나무에 매달린 시체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시체에 돌을 던지느라 바빴지,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하지 못했다.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무언가 차일피일 미뤄오다 이루지 못한 것,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 인생이 한 번 더 주어진다면 완전히 다르게 살 텐데 라는 후회가 들 것이다.
하지만 펜리스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모든 상황이 무관심하게 느껴졌다. 마치 직접 경험한 것 같지 않고 책을 통해 읽은 것 같았다. 물론 책의 주인공이 죽으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새 책을 가져오면 그만이겠지만.
“…준비는 다 끝났나?"
“네. 벌써 도착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흠, 좋아. 시간을 딱 맞췄군.”
함께 이동하던 인원들이 멈춰 섰다. 그리고 양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억센 손길이 잠시 느슨해졌다. 펜리스는 이를 악물며 혼자 힘으로 서 있으려 애를 썼다. 이왕 인생과 작별해야 한다면 마지막만큼은 품위를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들여보낸다. 나머지 인원은 대기하도록.”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오히려 뜨끈한 공기가 훅 달라붙었다. 의아함에 잠시 주춤거리자 예의 그 억센 손길이 펜리스를 붙들고 가더니 의자에 강제로 앉혔다. 곧 목
덜미를 조일 올가미를 기대하며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씌울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두건이 벗겨졌다.
“명령하신대로 죄수를 대령했습니다. 별로 어렵진 않더군요.”
펜리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리고 뿌옇게 변한 시야에 초점이 돌아오는 순간, 그는 또 한 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의자 앞으로는 길쭉한 정찬 테이블 놓여 있었고, 뚜껑 덮인 은쟁반과 식기들로 가득했다.
시선을 돌리자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벽난로와 가죽 소파, 그리고 고풍스러운 책장이 딸린 널찍한 사무용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허리에 뒷짐을 지고 선 한 남자가 있었다.
“자리를 좀 비워줄 수 있겠나?”
우아함이 묻어 나오는 알테이아식 악센트였다. 함께 들어온 병사들은 곧바로 일사분란하게 방에서 퇴장했다. 하지만 몇몇은 남아 방의 네 모서리로 이동해 머스켓 소총으로 빈
틈 없이 펜리스를 겨눴다.
“갑작스런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부름꾼들이 혹 거칠지는 않던가요?”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제일 먼저 얼굴에서 입만 드러낸 하얀색 가면이 눈이 들어왔다. 나머지 복장은 이전까지 봐왔던 군인들의 옷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어깨에 달린 금술달린 견장이나 가슴의 번쩍이는 독수리 훈장들은 그에게 감출 수 없는 특별함을 부여했다.
“펜리스 블랙메인(Blackmane) 만나게 돼서 영광이군요.”
가면의 남자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펜리스를 관찰하듯 쳐다봤다. 오랜 감방 생활 덕분에 제멋대로 자란 그의 회색 머리카락과 수염은 확실히 지저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살기로 번뜩이는 호박 빛의 눈동자. 남성적으로 굵게 뻗어나간 콧날과 턱선. 진중한 성격을 드러내는 듯 굳게 닫힌 입술. 확실히 범죄자에게는 아까운 얼굴이었다. 물론 보름이 된다면 다르겠지만.
“넌…누구지?”
펜리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구요? 저는 보다시피 가면을 쓴 남자입니다."
“보면 알아. 그러니까 넌 ‘누구’냐고.”
“안타깝군요. 그렇게 뛰어난 관찰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가면에 조각된 표정 때문에 그는 실제로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가면을 쓴 상대의 정체를 묻는 게 역설적이라는 걸 못 느끼셨나요?”
밉살스러운 놈이군. 펜리스는 수갑에 묶인 양 손에 힘을 줘봤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의 목을 조르기엔 충분히 헐겁지 않았다.
“보아하니 감옥에서 꽤나 힘든 시간을 보낸 모양이군요. 물론 배도 고프겠지요.”
남자가 집게손가락을 탁 튕기자 병사 한 명이 다가와 펜리스 앞에 놓인 은 쟁반의 뚜껑을 열었다. 막 구워내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두툼한 서로인 스테이크와 고소하게 볶은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감자튀김. 그 자극적인 냄새에 펜리스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어서 드시죠, 저는 당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길 원치 않습니다. 물론 수갑 때문에 불편하긴 하겠지만 부끄러워 마세요. 전 격식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침샘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입안이 흥건히 젖어서, 먹고 싶다는 욕구가 폭발할 뻔 했지만 펜리스는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다잡았다. 대가가 따르는 음식. 그것만은 확실했다.
“‘착한 경찰’ 놀이라도 할 셈인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꿍꿍이라뇨? 이건 순수한 호의입니다.
“호의라. 그럼 거절해도 실례가 되지 않겠지? 우리 부모님은 날 막 되먹은 놈으로 키우지 않았거든.”
“하하…그건 좀 곤란합니다. 설마 제 입에서 ‘제발’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간청에 서툰 사람이라.”
남자는 사냥감의 이빨과 발톱 크기를 가늠하듯 펜리스를 훑어봤다. 펜리스는 속을 꿰뚫는 듯한 남자의 눈빛을 참을성 있게 견뎌냈다. 이 갑작스런 초대와 호의, 그리고 가면무도회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그렇게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무거운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좋아요, 좋아. 아직 살아있군요.”
뜻 밖에도 먼저 남자가 한 수 접고 들어가며 자신의 패를 뒤집었다.
“사실 거래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아주 아주 개인적인 용건이죠.”
“거래? 나한테?”
펜리스는 대번에 코웃음을 쳤다. 좀 전까지만 해도 군홧발로 짓밟던 놈들이 갑자기 이렇게 저자세라니. 설마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넌 멍청하거나 바보거나 둘 중 하나로군. 아니면 둘 다거나. 너 같은 놈이 열 명만 더 있었더라면 내가 이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우스꽝스런 촌극이라니. 대체 무슨 낭비지? 어서 기술자들을 들여보내. 할 일을 끝내라고.”
그러나 남자는 다시 손깍지를 낄 뿐, 펜리스의 도발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저도 ‘설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심해도 됩니다. 전 고문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물론 손톱을 몇 개 빼고, 힘줄을 잘라 내거나, 피부를 벗긴다면 훨씬 일은 간단해지겠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오는 건 대개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원하는 걸 얻어내는 사람이거든요.
남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어떻게 가지는지 아시겠습니까?”
펜리스는 남자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물결조차 치지 않아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초록색 늪 같은 눈동자를.
“저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남자가 어서 먹으라는 듯 접시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판을 열어줬으니 놀아주는 수밖에. 펜리스는 수갑을 요란하게 절그렁거리며 접시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꺼운 사전 같은 스테이크를 단 두 입 만에 끝내버리고, 감자튀김과 아스파라거스는 주먹으로 쥐어 양 볼이 미어터질 듯 우겨넣었다. 그리고 포도주 병을 반 쯤 비우며 1회전을 끝냈다.
다른 접시에는 맥주로 담근 돼지갈비, 꿀 소스에 저민 꿩 구이, 훈연향이 듬뿍 배인 닭다리 등 육식주의자인 펜리스의 취향에 제격인 메뉴들로 가득했다. 제대로 된 음식이 들어가자 한 번 입구가 열린 위장은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맛은 둘째 치고, 펜리스는 고기다운 고기를 먹게 됐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사실 익힌 것보다는 덜 익거나 안 익힌 육질을 선호했고, 살아서 버둥거리는 게 더 취향에 가까웠지만 그냥저냥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기쁘군요. 이제 배도 채웠으니, 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셨는지?”
펜리스는 대답 대신 포도주 병나발을 끝까지 불더니, 요란한 트림소리를 냈다. 어찌됐건 의사전달은 충분했는지 남자가 품속에서 작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러자 전처럼 병사 하나가 공손하게 그것을 받아 펜리스에게 전달했다.
“읽어보시죠. 아마 흥미로운 내용일 겁니다.”
닭다리 뼈로 이빨을 쑤시며 봉투를 뜯어 열자, 봉투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뭉치가 있었다. 펜리스는 신중한 태도로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갔다.
<종족 대전쟁 종전 10주년 기념 연설문>
<친애하는 신민 여러분. 저는 빛나는 오늘을 맞이하기에 앞서, 시계바늘을 잠시 과거로 돌려보고자 합니다. 10년 전, 우리는 무수히도 많은 적대 종족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셀 수도 없는 가혹한 시련이 우리를 찾아왔고, 그 때마다 우리는 당당하게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극악무도한 파르티잔의 지도자 ‘펜리스 블랙메인’의 몰락과 함께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엘프들은 우리의 영토에서 도망쳤고, 야만스러운 오크와 트롤은 날개달린 하피와 함께 그들만의 황무지로 돌아갔습니다. 그렘린, 드워프, 하플링과 같은 잔존 종족은 우리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샤를로프 제국은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평화를 구축해 왔지만, 저는 다가올 미래에 앞서 여러분이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길 촉구합니다. 어떤 시대건 항상 위기가 존재했음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류의 역사는 항상 사소한 다툼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오래 동안 지속된 불화를 제쳐놓고 국가적으로도, 종족적으로도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오늘 이후로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과의 전쟁 일으키지 못하게 합시다. 어떠한 저항 조직도 이 새로운 시작에 대항해 음모를 꾸미지 못하게 합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종족주의 세력과 결탁하지 못하게 하고, 인류의 모든 적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하게 합시다.
우리는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의 권좌에만 복종하는 체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좌에서 나는 그대들을 자랑스럽게 지켜보겠습니다. 그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펜리스는 혀를 차며 연설문을 구겨버렸다. 글로 사람을 잠들게 만들 수 있다면 이건 거의 수면제에 가까웠다.
“이걸 보니 내가 들었던 가장 지루한 농담이 생각나는군. 예전에 어떤 빨간 모자를 쓴 꼬마 계집애가 ‘어쩜 그렇게 이빨이 크세요?’ 라고 물어봤던 적이 있지. 나 참, 어쩌라고.”
읽는 사이에 술을 한 병 더 땄는지 남자는 포도주가 찰랑이는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다른 소감은 없으십니까? 이걸 전부 다 쓰는 데 정말 애를 먹었거든요. 아시다시피 황제의 취향은 까다로우니까요.”
“흔한 재능 낭비로군. 종이낭비고. 뭐 대중 앞에 나서는 건 황제가 제일 좋아하는 짓거리니 뻔한 노릇이지. 보나마나 황제의 광신도들은 좋다고 박수를 칠 테고.”
펜리스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이 망할 구덩이에서 아직도 10년이라니. 30년은 더 썩은 줄 알았건만.
“저도 어느 정도는 동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연설문을 황제가 읽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생겼거든요.”
“왜, 황제가 10주년 연설을 앞두고 너무 긴장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배탈이라도 났나?”
“아뇨, 황제의 신변에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단지 그분이 연설장에서 쓰일 ‘소품’ 하나가 배달되지 않을 ‘예정’이거든요.”
“허, 쇼를 위해 어지간히 공을 들였나 보군. 대체 어떤 소품이지? 황제가 스스로 연설을 포기하게 할 정도면 꽤 값나가는 물건 일 텐데.”
남자는 우아하게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펜리스의 궁금증을 단번에 해결해줬다.
“별거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목이죠.”
머릿속으로 그림이 대강 그려졌다. 광신도들로 가득한 광장. 이어지는 황제의 연설. 그리고 피날레를 장식할 창꽂이 의식. 항상 극적인 연출을 선호하는 황제의 취향다웠다.
“역시 황제다워. 왜 이제까지 날 살려뒀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아. 그런데 배달되지 않을 ‘예정’이란 말은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 목숨은 이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죠.”
펜리스는 남자의 이야기에 흥미 있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재미있군. 우리가 서로 합의를 볼 수 있는 말처럼 들려. 헌데 넌 황제의 사람이 아닌가?”
“저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편 가르기도 싫어하고요. 굳이 말하자면 제국의 편이라고 할 수 있죠.”
“황제의 비위를 거스른 자가 가면으로 정체를 숨기고, 말로 본심까지 감춘다라…나와 거래를 트고 싶다면 좀 솔직해 지는 게 좋을 텐데?”
펜리스가 짐승처럼 목을 울리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목의 핏줄을 불룩 세우며 주먹을 쥐자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거리고, 당장이라도 내면의 야수가 튀어
나올 것처럼 호박 빛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졌다. 순식간에 인간의 외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날 찾아왔으니 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누굴 마주하고 있는지 잊은 모양인군. 나는 ‘숲의 왕’이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병사들이 일제히 총부리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남자가 여전히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제지하자, 순순히 다시 뒤로 물러섰다.
“역시 짐승새끼랑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발포 명령을!”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그 거슬리는 말투의 ‘지휘관’이었다. 군인답게 바짝 밀은 머리에 완고해 보이는 이목구비와 두툼한 턱, 마치 충직한 사냥개를 연상시키는 인상이었다.
“총 내려라, 멍청한 년아. 나를 죽이려고 든 놈이 네가 처음인줄 아느냐? 너보다 더한 놈도 내 목숨을 노린 적이 있었지. 내가 사슬에 묶여있다고 너흴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 마라.”
‘야수’로 변신 직전까지 갔기 때문에, 펜리스의 목소리는 동굴처럼 저음이 됐다. 게다가 펜리스가 구부정하게 접은 어깨를 펴자 우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 몇 줄이 엿가락처럼 툭툭 끊어져나갔다. 그 광경에 권총을 잡은 지휘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네 상관과 아직 할 얘기가 남은 것 같군. 사실 너희들이 누구인지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아. 단지 너처럼 겁쟁이가 아닌 인간의 말은 들어줄 뿐이다.”
펜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를 노려봤다. 가면의 남자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미동도 않고 있었다. 소위 ‘크고 나쁜 늑대’를 마주하고도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린 아직 피를 흘릴 때가 아닙니다. 일러도 너무 이르죠.”
남자는 펜리스의 협조가 마음에 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면 너머의 초록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낮은 목소리로 본심을 드러냈다.
“나는 황제의 죽음을 원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펜리스는 방 안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체 몇 년 만에 웃게 된 건지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이거, 감방동료가 하나 더 늘어나겠군. 그래, 반역자여. 네가 이 정신 나간 거래를 생각하게 된 이유를 말해봐라.”
한참의 긴 광소 끝에 펜리스가 남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나라는 잘못됐으니까요.”
남자가 펜리스를 빤히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말의 본뜻은 알 수 없었으나, 남자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힘이 담겨있었다.
“저도 한 때는 이 제국이 위대하다고 믿었습니다. ‘아버지들’과 함께 등을 맞대며 싸우고, 당신과 같은 족속들을 셀 수도 없이 죽였죠. 그것이 제국을 더욱 빛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절대 믿어 의심치 않으며 순진하게 말입니다.”
펜리스는 팔짱을 끼며 남자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저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가려진 진실을 목격했습니다. 그 진실이란 더 이상 저의 조국이 위대하지 않다는 겁니다. 빛나는 과거를 뒤로 한 채 지금은 잔학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역병처럼 만연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하다 이 지경까지 됐을까요?”
‘조국’이란 말을 힘주어 발음한 남자는 펜리스의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양 쪽의 모서리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황제와 ‘아버지들’입니다. 날조와 선동, 선전으로 신민들의 이성을 공포로 마비시켰습니다. 당신네 '파르티잔'을 실제보다 더 거대한 악처럼 몰아가면서 말이죠. 두려움에 빠진 신민들은 황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가로 황제는 질서와 평화를 약속하며 침묵과 절대복종을 요구했습니다. 이제 제국은 황제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벽난로의 불빛을 등 진 탓에 펜리스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는데, 꽤나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제국은 다섯 살 난 아이의 손에 있는 권총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너무 멀리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펜리스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를 비웃었다.
“인간 중에 박애주의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건 뭐 그렇다 쳐도, 왜 내가 기꺼이 황제를 죽여줄 거라고 생각하지? 구실은 좋지만 똥 싸는 데 대신 힘줘달라는 소리로 밖에 들리
지 않아. 그리고 난 너희들만큼 똥이 마렵지 않거든.”
남자 역시 펜리스의 냉소적인 태도에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당신이 '파르티잔'을 결성했을 때, 모두가 당신을 비웃었답니다. 엘프는 너무 똑똑해서 멍청하고, 드워프는 너무 고집스러운데다, 오크는 지나치게 완고하죠. 누가 그들이 함께 싸울 거라 예상이나 했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을 한 깃발아래 뭉치게 만들었고, 황제와 아버지들은 오판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뤘죠."
시종일관 장난스러웠던 남자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착 가라앉혔다. 웃고 있는 가면도 묘하게 표정이 굳은 느낌이었다.
“이런 '지도자'로서의 역량뿐만 아니라, '암살자'로서의 능력 또한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예전에 당신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는데,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황제가 침소에 들 때 침대의 네 모서리에 근위병을 배치하는 건, 당신의 등장 이후로 새롭게 생긴 전통이라지요?”
꽤나 추켜 세워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답례로 펜리스는 박수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의 주장은 위험한 게임에 불과했다.
“너희 ‘아버지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박멸한 덕분에 파르티잔은 사라진지 오래다. 나도 이 꼴이 됐고. 그리고 10년 사이 황제는 더 높은 횃대로 올라갔지.”
남자는 말없이 품속에서 꾸깃꾸깃한 흑백사진 몇 장이 은 접시 사이로 흩뿌렸다. 현상 상태가 형편없어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모두 사람들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구도였다.
“이들이 바로 당신을 황제로 인도할 열쇠입니다. 말단부터 하나씩 처리해 나간다면 황제 또한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겠죠.”
사진 속 인물들의 모습은 안경을 쓰거나, 수염을 길렀거나, 얼굴에 큰 상처 나있는 등 제각각 개성이 남달랐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도 적잖이 있었다.
“이 나라는 성전으로서 정화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제 의지가 담긴 도구가 되는 겁니다.”
펜리스는 사진을 보여준 남자의 계획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남자가 ‘아버지들’이 죽길 원한다면, 그것 또한 자신이 원하는 바나 마찬가지였으니.
“열심히도 조사를 해놨군.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 이건가? 좋아, 이 제안. 마음에 들어.”
남자 역시 펜리스가 자신의 뜻에 동의했다는 걸 읽었는지, 경계 중이던 병사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 병사는 굳은 표정이 되어 잠시 망설이더니, 열쇠를 꺼내들고는 펜리스의 수갑과 쇠사슬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당신네 ‘파르티잔’과 우리 인간은 꽤나 오래 동안 원수처럼 치고 박았지요. 하지만 우리가 황제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서로를 위해 손을 잡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가면에서 드러난 입가가 주름진 것으로 보아 이번에는 웃고 있게 확실했다.
“그것을 위해, 저는 당신을 빼돌리려고 꽤나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답니다. 이 어렵게 잡은 기회,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허, 거물이다 이건가? 날 풀어줘서 고맙긴 하지만,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을 거다.”
펜리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목을 좌우로 꺾으며 뭉친 근육을 풀고, 양 팔도 자유롭게 움직여봤다. 쇠사슬과 너무 오래 한 몸처럼 있었기 때문인지, 되려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황제와 그 뭐냐, 아버지들의 엉덩이는 걷어차 주더라도 그 외에는 거래에 없던 내용이란 말이지.”
“상관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허나,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같은 중 범죄자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잡아들일 능력도 충분히 있다는 걸.”
남자의 목소리는 뱀이 또아리를 트는 것 같았다. 낮고, 사나웠으며, 위협적이었다. 만약 도망치면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와 같은 구구절절한 협박 따위완 느낌 자체가 달랐다. 뜨내기인줄 알았건만 제법 전문가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알아들으셨다면,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드리죠. 오늘 새벽. 수도 알테아로 떠나는 기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이미 당신을 위한 새 신분증을 발행해 놨답니다.”
손목을 걷어 올려 시계를 보는 남자의 모습은 왠지 모를 자신감이 넘쳤다. 이미 모든 것이 생각해 둔대로 착착 돌아갔다는, 확신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림이 클수록 붓질 한 번에 작품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펜리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알테아, 그리고 게토(Ghetto)로 가면 만날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옛 동료들과의 감동적인 상봉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게토라…거긴 아직 변한 게 많지 않겠지. 하지만 이 계획, 안 좋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만약 일이 틀어질 경우, 우리는 애초에 만난 적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당신을 찾아가게 될 수도.”
의미심장한 여지를 남긴 남자는 테이블 위의 잔 두 개에 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 잔들을 들고 펜리스에게 걸어왔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지휘관은 사색이 됐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그러나 당신처럼 영리한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말로 이어지도록 행동 할 거라 믿습니다. 황제에게 죽음을, 당신에게는 자유를.”
펜리스는 남자가 건넨 잔을 받아들었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펜리스보다 머리 하나 차이가 날 정도로 작았는데, 그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발산하는 기백이나 분위기는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나의, 또한 당신의 원수를 위하여.”
두 개의 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IP보기클릭)27.126.***.***
(IP보기클릭)180.71.***.***
평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초반부에 사건을 터뜨려야 겠다 생각을 해서 공을 들인 부분이고, 그걸 알아봐 주셔서 굉장히 기쁩니다. 공모전에 꽤 지쳐있었는데 덕분에 힘이나네요 | 16.08.01 03:01 | |
(IP보기클릭)221.155.***.***
(IP보기클릭)180.71.***.***
저도 처음에 구상했던 세계관은 기존과 아예 차별점을 두려했는데, 아주 다르게 가버리면 독자들이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아무래도 익숙한 소재를 적당히 섞어야 했습니다. 클리셰를 깨야 좋은 작품이 된다고 하는데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가 아닌 만큼 어느 정도는 어쩔수가...ㅠ | 16.08.01 03:03 | |
(IP보기클릭)221.155.***.***
(IP보기클릭)180.71.***.***
그냥 비가 내렸다 라고 표현하면 너무 밋밋해보여서 썼는데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네요 외국풍명도 쓰시가 왠지 거북해서...그리고 황제 반역 부분은 확실한 근거로 납득이 되도록 썼는데 뭔배짱으로 저러는가 라고 보셨다면 제가 부족했었나 보네요 | 16.08.01 03:05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180.71.***.***
사이드이펙트
스토리 전개 속도는 솔직히 어떻게 조절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늘어지지 않도록 쓰긴 했는데 좀 어렵네요. 앞으로 뻗어나갈 대략적인 스토리와 거기에 대한 근거와 설득력을 부여하려다 보니...그리고 누가 읽어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20, 30대 독자층을 노렸는데 그분들에게 제 글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인가요? | 16.08.01 03:08 | |
(IP보기클릭)180.71.***.***
사이드이펙트
확실히 뭔가를 안다고 소재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네요...무거운 주제를 잡지도 않았고 아예 다른 세계관을 쓰지도 않았는데 사이트의 성향을 고려하는건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ㅠ | 16.08.01 03:18 | |
(IP보기클릭)180.71.***.***
사이드이펙트
말씀하신 노멤버 레인은 읽어봤는데 확실히 다른 세계관이구나, 작가님의 필력은 뛰어난데 호불호가 갈리겠구나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 16.08.01 03:21 | |
(IP보기클릭)180.71.***.***
사이드이펙트
감사합니다. 비교를 해주시니 제가 문장에 너무 힘을 빡 주고 있었구나가 딱 보이네요...연재하시면서 이렇게 남의 글 감평해주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존경스럽습니다. | 16.08.01 03:27 | |
(IP보기클릭)175.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