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부터 보셔야 합니다.
“CDF의 자랑스러운 병사가 되시길.”
“여러분의 총알 한 발이 개척민들의 한 걸음이 됩니다.”
아침 식사마다 식당에 울려 퍼지는 이놈의 지겨운 목소리는 당최 줄어들지를 않는다. 존 페리. 대단한 영웅이고 존경할 만한 병사이지만 그도 아침마다 이놈의 캠페인을 반복해서 듣는다면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지겨운 소음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어차피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행성에서의 르레이 사냥도 이제 막바지였기에 다들 긴장이 풀려있었다. 대부분은 아침을 건너뛰고 어딘가에 처박혀서 디오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면서 흘러간 옛 시절 이야기나 하고 있겠지. 아침을 챙겨먹는 습관만 없었어도 나 역시 책이나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습관이란 건 당최 떨쳐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박 상병님, 식사 다 하셨습니까?”
가르시아 일병이 옆에서 애처롭게 쳐다보며 물었다. 전우조라고 데리고 와서 깨작깨작 먹고 있으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마지못한 척 일어서자 가르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세척기를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
저 몸짓 어디에 옛 영웅의 모습이 남아있는 걸까. 처음에 가르시아가 배정되었을 때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필리핀의 영웅. 제 2의 파퀴아오라고 불렸던 전설의 가르시아가 내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는 데는 2주도 걸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화면으로만 보던 복싱 영웅이 내 옆에서 저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될 줄이야. 몸은 돌아왔지만 세월이 앗아간 야수성은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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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긴장성 어깨통증 – 심리적 불안정 상태에서 오는 근육통으로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음]
아, 우울증 좋아하네. 통과. 어디보자, 스트레스성 관절염도 아니고, 퇴행성, 외상성도 아니면, 류머티즘인가? 방안에서 뇌도우미를 계속 돌려봐도 내 상상 관절염에 걸맞은 진단이 나오질 않았다. CDF의 최첨단 검색도 아직 갈 길이 멀군.
똑똑.
조장 더크 상병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오늘 우리 조는 우측 후방에서 경계를 설 거야. 아직 여유가 있으니 장비 챙기고 천천히 나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맥이 빠질 만하다. 승기를 잡은 전투 막바지에 후방 경계라니. 화끈한 걸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어지간히도 못마땅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선 손에 피 묻힐 일없으니 희소식이었다.
“아, 그리고.”
더크는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이번 전투 끝나고 행성 간 이동하기 전에 모함(母艦)에 한번 들를 거야. 자네도 나도 이제 몇 개월 안 남아서 특수 보직 교육을 받아야 하니까 미리 알고 있어.”
“저희 부대는 결국 보병으로 끝나는 거 아니었습니까.”
“형식적인 거지, 뭐. 평등한 기회 제공이라나.”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나 역시 큰 기대가 없었기에 납득했다.
“가끔은 말이야, ‘망나니 사냥꾼’으로 사는 게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더크는 미간을 과장되게 찌푸리며 농담을 던졌다. 잘 빠진 이목구비 덕에 그런 표정이 꽤 제임스 본드 같아 보였다. 그것도 황금기 시절의. 지난 생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예전에 그가 사진으로 보여준 지구 시절의 더크는 하루 온종일 소파에 붙어 TV만 보던 침울한 뚱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정말로, 지난번에 한번 계산을 해봤는데 전투 당 사상자에 있어서 보면 우리 수치가 CDF 평균보다 조금 더 낮더라니까. 물론 뭐 유령여단 수준이나 이런 건 아니지만.”
그는 짐짓 밝은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새로운 적들과 만날 일이 적으니 돌연사할 위험도 적고, 서로 전술을 꿰고 있으니 기습 위협도 적은거지. 그렇게 보면 우리는 땡보 부대 같지 않아? 저 바깥에서는 하루에도 수만 명씩 죽는단 말이야.”
가볍게 끄덕이며 순진한 미소를 지었지만 사실 그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더크의 말을 돌려 생각해보면 우리 ‘망나니 사냥꾼’들은 특별한 위험 없이도 CDF 평균 가까이 죽어나간다고 봐야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땡보 부대가 아니라 당나라 부대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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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맙소사 여기 이것 좀 봐라. 오늘은 운수 대통이네.”
[ 더크 상병님, 저 정말 경계 안서도 괜찮겠습니까? ]
가르시아는 불안한 듯 뇌도우미로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슬쩍 돌아보니 더크는 쉴 새 없이 눈을 돌리며 계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에게 경계는 이미 관심 밖의 일이었다.
[ 가르시아, 내가 책임질 테니까 제발 닥치고 잎이나 계속 따라고 ]
[ 예, 죄송합니다. 더크 상병님, 저, 이쪽은 거의 다 끝난 것 같습니다 ]
[ 아, 잘했어. 돌아와서 채집통에 넣고 1시 방향으로 다시 가봐 ]
경계 구역이 하필이면 디오 밭이라니. 우리 부대에 필리핀 출신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그들이 가르시아의 모습을 봤다면 더크 머리에 총알구멍을 내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나이들 먹고 이게 무슨 꼴이냐... 나는 그저 말없이 멀리 번쩍이는 섬광을 바라보았다. 저 곳에서는 오늘도 CDF 평균에 가까운 인원들이 죽어 나가겠지. 단지 몇 클릭 차이일 뿐인데 마치 화면으로 전쟁영화를 보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게 다시금 지긋지긋해졌다. 그나마 곧 모함(母艦) 리바이어던 호에 갈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얼마만의 복귀인가. 모함에 도착하면 병원부터 갈 테다. 그곳에는 분명 이 관절염에 대한 해답이 있겠지. 없다고 하면 생난리를 피워서라도 해답을 달라고 할 것이다. 어쩌면 운이 좋아 몇 개월 입실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거기에 기대를 걸 수 밖에...
[ 어어어!!! ]
갑자기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 가르시아! 뭐야!! 갑자기 ]
뇌도우미로 아무런 응답도 없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MP를 ‘소총’에 맞춘 채 1시 방향으로 겨눴다. 껌을 내가 어디다 뒀지...어디다 뒀더라... 생각을 하려던 그 때 가르시아가 MP를 든 채 수풀을 헤치며 마구 달려왔다. 아니 이 자식이 미쳤나... 순간, 그의 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멀쩡한 곳이라고는 얼굴 하나 뿐인 병사가 사지를 비틀며 가르시아를 쫓아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