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시나프스 베이 하이스쿨. 어제 있었던 사건 따윈 완전히 잊어버린 듯 교내는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마리 루이즈 롤랜드 또한 상쾌한 기분으로 하교 중이었다. 그녀의 옆엔 언제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로이드가 동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로이-. 문제는 내 생일에 갖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이거지."
"아 그러셔? 어째 넌 해가 갈수록 욕심이 늘어나냐?"
"욕심이 아니야. 당연한 욕망의 크기인거지. 나이가 먹은 만큼 키도 제법 커졌잖아?"
유유히 걷던 마리는 갑자기 멈춰 서서 로이드의 어깨를 잡았다. 로이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리를 응시하자 마리는 가만 있어봐라고 말한 후 까치발을 하며 그녀의 키를 로이드의 키에 비교했다. 머리끝에 올린 그녀의 손끝은 로이드의 관자놀이에 다다르고 있었다.
"후후후 어때? 이러다가 금방 너 따라 잡겠는걸? 난 말야. 슬로 스타터라고."
"발끝 세워서 잰 주제에.."
"피-. 웃기지마. 나보다 키 작으면 그땐 완전 구박해 줄 거야."
"제발 그러길 바란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던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마리는 분한 얼굴로 그의 뒤를 노려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로이는 모퉁이 옆으로 사라졌다. 그걸 본 마리는 한숨을 잔뜩 내쉬고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마리는 눈앞에 무언가 검은 것이 사각 밖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마리는 내딛으려는 발을 기민하게 내딛고 훌쩍 앞으로 뛰쳐나가 사각에서 부딪쳐 오는 무언가를 피했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마리만큼 민첩하지 못했다. 짤막한 비명이 마리의 뒤쪽에서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어떤 여자가 무릎을 땅에 댄 채 엎드려 있었다.
"괜찮으세요?"
쓰러진 여성은 짙은 갈색머리의 여성으로 화사한 색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 듯 손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마리는 그 여자가 찾는 것이 자신의 발치 아래 떨어진 선글라스인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주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선글라스를 받아 든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리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리는 강렬한 공명이 심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것은 무엇인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마리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눈 앞의 여성이 자신과 너무 닮았기에 그런 이상한 느낌을 받았구나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눈동자에서 자신이 느낀 것과 같은 종류의 경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리만큼이나 자신과 닮은 누군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란 듯 했다. 하지만 이내 놀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일어나 작은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갈색머리의 여성은 머리색만큼이나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인 마리와는 판이했다. 분위기도 생기발랄하고 힘이 넘치는 마리와 다르게 고아하고 기품 있는 귀부인의 자태가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워.'
마리는 멍한 얼굴로 갈색 머리의 여인을 바라봤다. 마리의 시선을 받은 갈색 머리의 여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니에요! 그보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니에요. 앞을 못 본 제 잘못이죠. 그런데 그쪽. 저하고 상당히 닮으신 거 같네요."
"네네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실례지만 성이 뭐죠?"
"네? 그건 왜?"
"혹시 먼 친척일 수도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며 갈색 머리의 여인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흘렀다. 그 미소를 보며 마리는 자신은 언제쯤 저런 기품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말했다.
"롤랜드에요. 마리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군요. 마리. 혹시 아버지가 군대 쪽에서 일하시나요?"
"아뇨. 아빠는 콜로니 공사서 일하시는데요."
"어머니는 계세요?"
"네. 집에 있어요. 왜요?"
"왠지 아는 사람 같아서요. 미안해요 쓸데없는 걸 물어서."
갈색 머리의 여인의 시선은 마리 너머에 머물러 있었다. 뒤를 돌아본 마리는 그제야 로이드가 둘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갈색 머리의 여인은 마리와 로이드에게 목례를 한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로이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로이드!"
"어이. 너 방금 그 여자가 누군지 알기나 하냐?"
"누군데?"
"루이즈 기번이잖아. 이 바보야."
"루이즈.. 기번? 그게 누구야?"
"어휴 진짜 방송 좀 보고 살아라. 어제 여기 온다고 방송에서 떠들던 여배우 있잖아. 너 다카르의 마타 하리 봤지?"
"아.. 그거.. 거기 나온 사람이야?"
"보고도 모르냐 이 바보는."
"정말? 나 연예계는 잘 몰라서. 그런데 그 사람 나 닮았던데. 진짜로 닮아서 깜짝 놀랐어!"
"니가 닮긴 뭘 닮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닮았다니까! 진짜! 그 언니도 깜짝 놀래서 물어봤다고!"
"거짓말 하지 마 호빵 같은 것이. 볼 살이나 빼고 말해라."
"너 진짜 때리고 싶다. 로이...."
"여자한테 맞는 취미는 없네요."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짜증나."
마리는 잔뜩 삐친 눈으로 로이드를 노려봤는데 갑작스레 그녀의 포켓에서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렸다.
"응? 누구지?"
마리는 교복 상의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투사된 화면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마리는 망설이다가 이내 전화를 받았다.
"안녕 마리. 나 기억해?"
들어본 것 같으면서도 낯 설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너 떨어뜨린 사람."
상대방의 정체는 에리카 스타이너.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리의 서류철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
"착각하지 마. 널 합격시키겠다는 건 아니니까."
에리카는 손에 든 막대과자를 입안에 밀어 넣고 우물거렸다. 마리는 연신 싱글거리며 에리카 옆에 붙어 서서 졸졸 따라다녔고 로이드는 두 여자로부터 한 발치 떨어져 귀찮다는 얼굴을 한 채 터벅터벅 뒤를 따랐다. 에리카가 봉투 안의 마지막 과자를 먹어치웠을 때 마리는 앞으로 뛰어나가 전방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것은 잘 정리된 정원을 앞에 둔 파란 지붕의 아늑한 집이었다. 에리카는 한 눈에도 집주인이 되게 성실할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흠. 이런 집에서 사니까 저런 밝은 성격이 나올지도.'
에리카는 결국 마지막 후보로 마리를 선택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파일럿 지망은 마리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파일럿은 그다지 인기 없는 병과다. 옛날에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모빌슈트라는 새롭고 강력한 병기에 매료되어 자신의 기량을 시험하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몰려드는 시절도 있었지만 몇 번의 대 전쟁 후 드러난 높은 사망률, 파탄 난 연방재정으로 인한 전몰자 및 상이용사에 대한 박한 대우, 열악한 근무조건, 전선에 있지만 오히려 승진은 느리다는 통계 등등 때문에 최근 들어 군에 지원하려는 인재들은 파일럿을 지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근직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을 얻거나 격오지 관리직에서 뒷돈을 받아 챙겨 줄을 잘 대 승진 하려는 얌체 같은 학생들만 늘어났다. 마치 현 연방군의 고위장교들이 했던 것처럼. 특히 기득권인 어스노이드 출신 아이들 중에 그런 애들이 많았다. 남는 티오는 자연스레 스페이스노이드 출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최근엔 스페이스노이드들 조차 지구의 동포들과 같은 경향을 보였다. 인사장교를 맡는 에리카의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지원자들의 편식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허투루 뽑을 순 없지. 파일럿 지망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뽑거나 하진 않겠어!'
꼼꼼한 완벽주의자인 에리카로는 자신이 한 번 탈락시킨 인재를 다시 뽑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에스테반과 대립각을 세워서라도 마음에 안 드는 후보를 뽑지 않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녀는 적어도 마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보고 어떤 아이인가 체험해보고 결정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마리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아마 오늘 부모님은 집에 안 계실 거예요."
마리는 문을 열며 말했다. 에리카는 말없이 마리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며 집안 구석을 눈으로 훑었다.
'흠. 지온 국기 같은 건 없네.'
애당초 마리가 떨어진 것은 사상검증에 실패해서였다. 한때 지구를 멸하려들던 샤아 아즈너블은 어스노이드들에겐 저주와도 같은 존재. 현재 지구권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반 스페이스노이드 정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상황은 해가 갈수록 악화되어 일각에선 티탄즈의 사상이 타당하다고 공적으로 내뱉는 인사까지 생길 정도였다. 상황이 이럴지 언데 스페이스노이드 출신의 아이가 드러내놓고 그런 위험인물을 존경한다고 면접에서 떠들어대면 당연히 탈락시킬 수밖에 없다. 에리카는 혹시라도 마리의 가족력에 지온의 잔재가 있을까봐 안내를 받으면서 구석구석 훑었고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흠.. 전부 전쟁하고 마키아벨리 냄새나는 책들이잖아. 여자애 맞아?'
그러나 특별히 문제되는 구석은 없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주로 전쟁사와 군주론 같은 고전 전쟁 및 정치학 서적이었고 스페이스노이드 독립에 관한 담론을 담은 책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핑크톤으로 귀엽게 꾸민 마리의 방에 지온의 모빌슈트를 본따 만든 장난감 모델들이 상당수 모여 있는 게 눈에 걸렸지만 연방군쪽의 피규어도 적지 않았고 병기 매니아들이라면 누구나 소장하는 것에다 법으로 금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빨간색의 모빌슈트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일단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너. 이런 건 왜 사 모으니? 여자애면서."
"좋으니까요."
"오타쿠녀."
옆에 선 로이드가 빈정거렸다.
한동안 마리의 방과 집을 돌아본 에리카는 서서히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리는 생각했던 거와 달리 평범한 애라는 인상이 점점 굳어진 것이다. 그녀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마음먹고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그러나 에리카의 권태는 마리의 권유에 못이겨 지하실로 내려갔을 때 망치로 세차게 후려친 듯 산산히 부서졌다.
"마리.. 이건.. 이런 게 왜 집에 있니?"
마리네 집의 지하실 한켠엔 군용 파일럿들이 쓰는 시뮬레이터가 덩그라니 자리잡고 있었다. 360도 스크린 구현은 물론 좌석 연동으로 피격이나 이동시의 흔들림까지 재현한 그야말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전투 체험기기. 파일럿 양성기관에나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그런 것이 민간인 집에 있다는 것이 에리카로는 믿기지 않았다.
'저거... 아무한테나 팔지도 않는데..'
하지만 마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빠가 고물상에서 공짜로 얻어왔어요."
'웃기지마.. 이런 걸 공짜로 주는 인간 따윈 어디에도 없다고.'
에리카는 여전히 경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런 에리카에게 마리는 보라는 듯 시뮬레이터 위에 올라탔다.
"일단. 보세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제가 얼마나 솜씨 있는 파일럿인지!"
에리카가 말릴 틈도 없이 구형의 시뮬레이터 개폐부가 닫혔고 벽 한 켠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 설정화면이 떠올랐고 이내 안의 마리가 조작하는 듯 데이터가 입력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화면을 보던 에리카는 다시 한 번 경악에 빠져들었다.
"제이간 3대를 상대로 레벨9라고? 그건.. 말도 안 돼."
레벨9는 시뮬레이터에서 최고 레벨. 인공지능이긴 하나 전쟁에서 수집한 데이터로 만든 베테랑들의 움직임을 베이스로 로직을 짠 것으로 신출내기 파일럿은 물론 베테랑 파일럿까지 애를 먹는 소위 사기적인 상대였다. 그런데 마리는 그런 적을 하나도 아닌 셋을 상대로 설정하고 있으니 에리카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에리카는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돼."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리가 탄 제이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에리카는 상세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기억에 잔상 속에 남아있는 것은 뭔가 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흔들리는 화면, 일격을 가하는 빔의 잔상, 그리고 폭발. 정신을 차리고 스코어보드를 보았을 때 소요된 시간은 1분 30초.
"...거짓말."
에리카는 자신의 눈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뒤에 선 로이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저 녀석. 밥 먹고 하는 게 저거밖에 없는 걸요."
그때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돔형의 시뮬레이터 개폐부가 열리며 마리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봤어? 로이드! 신기록이야 신기록!"
"니 게임기록 따윈 궁금하지 않거든. 소감은 저기 계신 중위님한테나 물어보지 그래?"
그제야 에리카가 있었다는 걸 상기해낸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에리카에게 다가갔다.
"저기... 중위님. 괜찮았어요? 제 솜씨..."
"아니..."
"...네?"
마리는 당황한 듯 에리카를 올려다봤다. 에리카의 얼굴은 돌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겨울바람차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어떻게 한 거야?"
"뭐요?"
"마리 루이즈 롤랜드! 너 프로그램에 뭔가 장난 쳤지? 그렇지 않고서는 레벨9의 제이간..."
거기까지 말한 에리카는 어느새 자신이 언성을 높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을 멈췄다. 마리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로이드 또한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왜 흥분하세요? 에리카 중위님."
로이드가 시선만큼이나 싸늘한 말투로 던지듯 말했다. 에리카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마리를 바라봤다.
"너. 잠깐 따라가자."
"어디요?"
"뱅가드. 연방군 전함 뱅가드에."
"왜요?"
"거기에 시뮬레이터가 있어. 만약 거기서 지금 같은 성적을 기록하면 두 말하지 않을게. 누가 뭐래도 합격시켜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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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
이쯤에서 등장인물 소개 들어가겠습니당.
1. 마리 루이즈 롤랜드
성별 : 여자
직업 : 여고생
헤어칼라 : 샤이니 블론드
아이칼라 : 다크그린
신장 : 155cm
체중 : 40kg
스리사이즈 : 86 - 57 - 83
특기 : 모빌슈트 조종
취미 : 프라모델
연애경험 : 없음
이상형 : 딱히 생각해본 적 없음.
소중한 사람 : 부모님.
성격 : 극악무도
2. 로이드 블루
성별 : 남자
-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