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미국의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 (1794 ~1858) 제독이 이끄는 미군 함대가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 해안 지역에 나타난 이후 막부는 국왕의 권한 없이 통상수교 를
하게 됨으로서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이를 보다못한 조슈 번 (오늘날 일본 야마구치 현) 과
사츠마 (오늘 가고시마 현 ) 도사 (오늘날 고치 현) 사가 번 등이 막부를 타도하고 오랜 세월
실추된 국왕 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을 받드는 바 동시 외세를 배척하자는 존황양이 사상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막부와 서부 지역 인사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국왕이 있던 수도 쿄토는 늘 칼부림과 피냄새가 지워지지 않았으며
여러 사건들이 터지게 되었는데 사건들중
그 대표적인 사건중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할 이케다야 사건 입니다.
1864년 여름 조슈 번 (오늘날 일본 야마구치 현 ) 과 도사 (오늘날 일본 고치 현 ) 의
지사 (나라 와 민족을 위해 큰 뜻을 품은 사람) 들은 교토의 경비사령관 이기도 했던
아이즈 번 (오늘날 일본 후쿠시마 아이즈카와마츠시) 의 영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1836 ~ 1893) 를 제거 하고 당지 국왕 이였던
고메이 일왕 (1831 ~ 1867) 을 하기 (오늘날 일본 야마구치 현에 있는 도시 ) 로
납치 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신선조에 의해 포착되고 마는데
1864년 5월 야마자키 스스무 와 시마다 가이 등이 중고상인 으로 일하고 있던
후루타카 슌타로 와 마스야 기에몬 등을 체포하게 됩니다.
이들에게서 무기 와 갑옷 및 조슈번 인사 들로 부터 주고 받은 편지 등을 입수
이들이 7월에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암살하고 고메이 왕을 납치 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면서 이들을 타도하기 위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이케다야 여관 터 )
그리고 1864년 7월 국장 곤도 이사미 (1834 ~ 1868) 는 신선조들 두 부대 로 나뉘어
출동하였는데 곤도가 이끄는 부대는 비록 소수 였지만 몇번 교전을 벌여 경험이 있던
베타랑 들이였고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1835 ~ 1869) 는 인원이 많았으나
베테랑 들은 적은 인원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곤도가 이끄는 부대는
당시 낭인들이 머물고 있는 이케다야 여관 을 급습하게 되는데
처음 이케다야에 들어서 여관주인 에게 공무가 있어 찾아왔다 알리자
여관주인은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합니다.
" 여기 신선조가 공무로 찾아왔습니다 !! "
이에 곤도는 소리를 질러 낭인들에게 상황을 알린 주인을 걷어차고
낭인들이 머물던 2층으로 뛰어 올라가 2층에 머물던 낭인 들을
공격 하게 됩니다 이때 곤도 를 비롯한 신선조 대원은 고작
5명 에서 7명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2층에 머물던
조슈번 낭인들의 수는 31 명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였습니다.
그러나 곤도가 이끄는 부대는 앞서 설명 했듯
엄청난 실력의 베테랑 들이였는데 오키다 소지 나카쿠라 신파지 토도 헤이스케
등이였기에 낭인들은 몇 합 겨뤄보지도 못하고 신선조의 칼에 쓰러져 갔습니다
이때 오키다 소지 는 날씨가 무척 더운탓에 지병 으로 인해 결국 싸우던
도중 퇴각했고 토도 는 이마를 보호하던 하치가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천에
철판을 덧댄 보호구 )
(이마를 보호하기위해 철판을 두른 방어구 하치가네의 모습 )
벗고 싸우다 그만 낭인이 휘두른 칼에 이마를 맞아 피를 흘린 탓에 퇴각했으며
이때 신선조 측에서는 오키타 소지 토토 헤이스케 등 부상 및 지병 으로 인해
퇴각힌 이들을 제외하면 오쿠자와 에이스케 란 곤도 이사미 소속 대원이 전사 하였으며
조슈번 소속 낭인 7명이 사망하고 남은 24명은 체포하게 됩니다.
이사건으로 인해 조슈 번은 교토에서 활동은 고사하고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고
이를 막아낸 신선조 는 그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 사태 를 뒤늦게 알아차린 쿄토 소사대 와 미마와리구미 등의 경비조직이 서둘러 이케다야 여관으로
향했으나 뒤늦게 도착한 히자카타 에 의해 막힘으로서 이 공은 신선조 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슈번 낭인들은 1864년 7월 19일
교토 황궁을 공격하는 이른바 금문의 변 사건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이는 결국 조슈 정벌 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만 .. 오히려 이는 막부의 권력만 몰락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근대화 를 퇴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때 당시 여관엔 근대화 개혁을 위한
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사망함으로서 근대화의 걸음이
물러서게 되었다 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 사건은 신선조 가 날조 해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 이 사건은 당시 납치되었던 후루카타 를 구하기 위해
회의를 주도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후루카타 가 고문에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을 한것이 아니냐 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결론은 이 사실은 후루타카
만이 알고 있었다 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케다야 사건으로 양이 지사 들을 자극하게 되어 근대화를 이뤘다는 주장도 있어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시대 를 넘고 넘어 다르게 평가 될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케다야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