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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귓가에 들리는 것은 익숙한 목소리.
"……유진"
그 목소리가 부르는 것은 자신의 이름임을 인식한다.
"서문유진!"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라.
그 요소가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정리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유진은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뭐해?"
"……어?"
그리고 보이는 것은, 역시 익숙한 모습.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은 성아린이 맞았다.
그녀는 교복 차림으로 책가방을 챙겨든 채 걱정인지 모를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유진은 거친 땅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자신의 꼴을 확인한다. 밤중에 나갔을 때의 차림 그대로 쓰러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머리가 멍한 유진은 보이는 것을 파악해나가기 위해 바로 질문부터 꺼내본다.
"아린이야?"
"뭐?"
"아린이, 맞지?"
눈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실물일까. 또 무언가에 정신을 농락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기에, 유진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확인했다.
"너 괜찮아?"
"나? 갑자기 왜?"
"아니, 너 어디 납치되어 있지 않았…"
"얼른 꿈이나 깨! 진짜 뭐하는 거래?"
진짜로 전해지던 손의 감촉은 정색한 아린에 의해 슥 빠져나간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짜임을 파악했으니, 이제부터는 자신의 처지도 파악할 차례였다.
짐까지 챙겨들고 길바닥에 자빠져 있는 것을 아린이 깨웠더니, 보자마자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등교 준비를 하다가 그런 것이라 넘어가기엔 교복도 책가방도 챙겨놓지 않았다.
스스로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 일련의 행동이 영락없는 추태였음을 확인하고도, 유진은 더 파악하기 위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몇 시야?"
"20분 뒤면 수업 시작이야. 그럼 나 먼저 간다?"
"엑!?"
이걸로 상황 정리는 완료.
역시 지금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아린이가 아닌 유진 자신이었다.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집부터 돌아가서 책가방을 챙기고 다시 학교로 향하는 것.
물론 20분 남았으니 전부 열심히 뛰어서 해야된다는 것은 당연지사다.
"으아아아아아아!"
"참나…"
바로 실행에 옮겨야 했기에, 유진은 어리둥절해하는 아린을 뒤로 하고서 급히 달려간다.
양치나 세수를 신경쓸 겨를이라고는 없이, 현관문을 뜯을 기세로 열고 들어오자 마자 급하게 교복을 걸치고 결코 가볍지 않은 책가방을 집어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복을 입고 나서는 건데,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려던 순간. 유진은 앗차 하고 잠시 멈춰선 뒤에 덱과 D-패드를 빼먹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유진에게는 계단, 가파른 길, 교문, 또 계단을 쉴 틈없이 뛰어다녀야 한다는 가혹한 여정이 남아있었다.
'다 그 새끼 때문이잖아! 이런 식으로 끝까지 멕이냐!'
그렇게 속으로 비난의 대상을 찾아대던 중에, 유진은 바로 직전까지 겪은 듯한 순간의 기억을 떠올린다.
죽어라 달리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는 일이 하필이면 또다시 죽어라 달려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거리를 뛰고 있는 자신은, 역시 멀쩡히 빠져나온 것이 맞으리라.
이미 며칠을 빠진 상태에서 지각까지 또 한다니.
어떤 징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해진 유진은 발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가다가 오토바이 태워줄 사람 없나? 없겠지! 그래, 나도 알아!'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듯한 만담을 벌이는 사이, 그 바이크가 이곳에도 있었더라면, 하고 유진은 현실감 없는 고민을 떠올린다.
탠덤할 만한 바이크도 없지만, 적어도 이곳에 흔들리고 무너지는 건물이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더욱 다행히도 거리에서 불러세우는 무언가도 딱히 없었기에 그는 무사히 교실로 입장할 수 있었다.
"…세이프!"
"에이 아깝다."
1교시가 되기 몇 분을 앞두고 계우 도착한 유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댄다.
평소 등교 시간을 생각하면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운동회에서 이어달리기를 하는 동안에도 이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린 경험은 없었으리라.
그런 폭풍에 휩쓸리다 오기라도 한 듯한 꼬락서니에 주변 자리에 있던 타다노가 비웃음으로 맞이해준다.
"근데 꼴이 그게 뭐야? 뭘 하다 늦었어?"
"듀얼 실컷 하고 왔지."
"에휴. 그런 열정으로 이겼어야 됐는데."
"뒤진다 진짜."
이기기는 많이 이겼다. 카드, 그리고 목숨이라는 보상이 확실히 있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기뻐할 수 없었던 자신이 있다.
유진은 자신이 급하게 챙기고 나온 덱을 확인한다. 분명 재버워키와의 결전에 사용한 카드들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로부터 빼앗고 교환한 끝에 완성된 덱. 그 덱이 있었기에 자신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은 그냥 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동안 개꿈을 꾸었던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다가 돌아온 것이다.
이 승리는 누군가에게 자랑할 거리가 아니다. 그저, 살아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뿐.
모처럼 좋은 카드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이 카드들을 쓸 때마다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소 착잡해져 왔다.
이제 새로운 고민에 직면할 차례라 생각하는 순간, 유진은 문득 떠올라 D-패드를 켠다.
"어…?"
무심코 지나칠 뻔한 시계 화면에 유진은 위화감을 느꼈다. 'ABC'를 시작한 당일. 그 월일을 그대로 두고 연도만을 현재로 옮겨온 듯한 날짜가 표시되어 있었다.
느낌이 쌔하다. 자신의 고생길을 시작하게 만든 문제의 대화 내역을 확인하기 위해 메신저를 들어가보았으나, 어쩐지 그 메시지들이 통째로 보이지 않았다.
아린 쪽에서 온 메시지 뿐이라면 모를까 유진 자신의 응답마저도 모두 사라져있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순간이 통째로 꿈이었다는 듯이.
적어도 결석도 지각도 안 했다는 점은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다가, 문득 자신의 컨디션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생각보다… 지치지는 않네?'
딱히 조깅이라도 하는 것마냥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달리지는 않았다. 그냥 전력을 다해 정신없이 뛰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호흡을 조금 보충한 것만으로 몸은 별다른 피로를 호소하지 않았다. 곧 있을 수업을 멀쩡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제 시간 안에 나왔던 동안에도 이렇게 심신이 말짱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말짱할 리가 없다. 수없이 걷고 달리고 얻어맞았다.
아지트 건물에서 휴식 시간을 취했다지만, 그 전후로 터진 어둠의 듀얼은 심신의 건강을 야금야금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유진의 머리가 어리벙벙해진다. 물론 배틀 시티가 알 수도 없는 데에서 벌어졌던 만큼 꿈으로 치부할 수 밖에 없다고 쳐도,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갔던 것은 틀림없는 현실의 기억이었다.
그러니 깨어났을 때의 자신도 밖에서 짐을 싸든 채 고꾸라져 있었으리라. 그 동안 용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유진은 주머니에 있는 감촉을 확인한다. 미지근해진 얇은 금속, 그리고 그걸 고정하고 있는 끈 감촉이 손끝에서 여전히 전해져온다. 낯설지 않고 익숙하기에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감각.
지금이라도 버리면 어떻게 될까. 유진은 여전히 그 의문을 그저 머릿속에서 물어보고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카나이 하츠카의 입으로 재버워키가 나눈 문답을 기억한다. 그런 게임을 또 저지를 것이냐는 리퍼의 물음을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더 이겨라, 즉 계속 싸우라는 조언 같지도 않은 말을 남겼다.
그 하츠카의 몸뚱이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대놓고 껍데기 취급하며 버린 셈이니, 필시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게임의 모든 것을 세팅한 주최자니까. 룰을 벗어나 무사히 쏙 빠져나가는 방법을 마련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사실을 딱히 숨길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라는 듯이. 오히려, 그것마저도 자신의 게임을 즐기는 한 방법이라는 듯이.
그러니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어떤 인생이 농락당할지는 알 수 없다.
숨이 다시금 턱 막혀오는 기분이다. 반강제적으로 목소리에 이끌려 게임에 참여한 끝에, 겨우 살아남아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그의 선물을 노려본다. 사정을 되짚어가며 전율하면서도, 그런 저주스러운 물건을 그는 결코 버릴 수 없다.
소중히 여겨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결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름 모를 청년의 충고를 머리에 새겨두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건 자신의 의지대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버린다고 안전을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재버워키가 여전히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면, 이런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비효율적인 악취미가 따로 없었다.
이윽고 조회 시간 종이 울리면서 유진은 서둘러 그 물건과 함께 덱, D-패드를 숨겨놓았다.
그 날, 몇 번의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을 거치고도 유진은 스스로의 고민에 저절로 졸음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이따금씩 주머니속의 디젠을 만지작대면서.
학생들이 늘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례시간이 지나고, 유진은 여전히 얼얼한 머리를 이끌며 교문 밖을 지나다 여느 때처럼 아린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린아,"
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맞이했다.
"어, 지각 안 했어?"
"덕분에."
"다행이네."
마침 다시금 만난 김에, 유진은 진즉 꺼내려 했던 질문을 마저 꺼낼 수가 있었다.
"그게…, 너 어제 집 가고 나서 뭐했어?"
"얘가 또 이러네. …남의 사생활을 왜 이렇게 궁금해 하는데? 넌 집 밖으로 나와서 뭐했어?"
유진은 뜨끔한 듯 눈을 잠시 돌린다.
"아니, 편의점 가려다 졸음이라도 왔나 봐."
"그런 짐을 싸들고?"
"어음…."
"내가 봤을 땐 여행이라도 갔다올 기세던데. 어디 가려고 했어?"
"……."
미처 대비하지 못한 예리한 추궁에 무슨 변명을 내놓아야 할지 곤란해진다.
"어, 어쨌든. 그냥 걱정되서 물어보는 거야."
"걱정? 뭘 새삼스럽게?"
그렇게 따지면서도 아린은 대답할 거리를 떠올린다.
"으음. 일찍 들어온 김에 빨래 널고, 가볍게 집안 정리 좀 하고, 하루종일 푹 쉬었지. 덕분에 아침 일찍 깼고."
"그게 다야?"
조용히 꾸짖는 모양새가 됐는지 아린은 살짝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게 다냐니? 평소 일과가 그런데."
"아니, 하루종일 잤다는 게 진짜야?"
"그래. 피곤해서 잤어. 사람이 자는 데 시간 좀 투자할 수도 있는 거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이상적인 일과 아냐? 수업 중에 자는 것보다야 낫지."
과연. 수업 시간에 꿈나라를 기웃거리다 혼 좀 나봤던 유진이 귀담아 들어 마땅한 발언이었다.
그녀의 성적이 유진을 한참 웃돈다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유진이 신경쓸 바가 아니다.
"자는 시간이 너무 이르지 않냐?"
"…그렇지? 요새 수면시간이 부족해서 그런가? 왜 그렇게 곯아떨어진 거지?"
갸웃거리는 걸 보면 뭔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모르나 보다.
어쩌면 흑막이 자는 동안 몰래 쳐들어와서 작업을 해놓고 갔을지도 모르는 일.
자기 자신이 늘어지게 자는 동안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기는 할까.
애초에 외부적인 요인으로 잠에 빠진 것은 아닐까.
유진은 더 걱정스러워진 나머지 계속해서 질문을 꺼내왔다.
"그 전에 어디 나가지는 않았어?"
"쭉 집에 있었지. 너랑은 다르게. 장 볼 일도 없었고."
"집에 낯선 사람들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고?"
"글쎄? 택배도 받은 기억 없는데."
"누가 왔다간 흔적이라던가."
"어… 왜 그래, 불안하게."
"폰에 이상한 기록 남은 건 없어?"
다그치듯 몰아붙이는 질문 공세에 아린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 말에 마지못해 D-패드를 키고서 화면을 넘기며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며칠 전 메신저까지 확인해본 끝에, 그녀는 고개를 희미하게 저으며 부정했다.
"딱히 없어보이는데."
"자세히 살펴 봐."
"그러니까, 오늘따라 왜 그러는데? 혹시 너한테 뭐 이상한 거라도 왔어?"
답답해하는 아린에게 '있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증거가 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누가 모르는 새에 건드려놓기라도 한 듯이. 그 이변은 꿈에 불과하다는 듯이.
대회가 끝난 자신을 원래 자리로 보내줬듯이, 아린에게도 같은 방법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재버워키가 패배의 최후를 맞이하고 순순히 사라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존재하지 않았다.
"……"
대답을 못하고 입만 오므릴 뿐인 유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맞을 것이라 짐작하는지 아린은 더 풀어진 태도로 질문한다.
"그렇게 걱정되면 연락이나 또 하지 그랬어?"
외부와의 통신이 불가능한 곳에 한동안 있다 왔다는 사실을 여기서 꺼낸다면 그녀는 믿어줄까. 그가 직접 체험한 끝에 알고 있는 사실을 대답해봤자 허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일말의 상식을 놓치지 않는 유진으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픽션 소재로도 못써먹을 재미없는 변명이라며 한 소리나 하지 않을까. 내심 미스터리 동호회원들의 발버둥이 다 헛수고가 되는 셈이 아닐까.
"…………"
여전히 표정만 심각해질 뿐인 유진을 골똘히 보던 아린은 한 번 한숨을 쉬고서,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에구구, 그렇게 걱정 되서 잠도 못 주무셨어요?"
"그런 거 아냐."
"악몽이라도 꿨어?"
"…그런가."
악몽. 지금으로서 유진은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 현실에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악몽. 그것을 얼마나 더 접해야 할까. 가족, 소꿉친구, 그밖에 다른 연이 있는 사람들을 그 악몽에 휘말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근심을 숨기지 못하는 유진을 아린은 잠시 지긋이 바라본다. 그 뒤, 나머지 한 쪽 팔도 안으로 굽히며 몸통을 꼭 끌어안았다.
"…뭐, 뭐해, 갑자기!?"
유진은 흠칫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밖에서 갑자기 안기는 것은 엄청난 부끄러움을 동반하는 것이니까. 아는 애가 보기라도 했다가는 놀림거리 확정이다.
물론 주변에 달리 지나다니는 학생의 시선은 딱히 보이지 않으므로 그녀 나름 상황을 봐가며 이러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 반응을 아랑곳않고 이번엔 아린이 질문을 꺼낸다.
"무슨 일 있었지?"
"…………."
그렇게 물어봐놓고 막상 질문을 들으니 대답을 꺼낼 수가 없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치사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진실을 알려줘봤자 좋을 것은 없다는 마음이 유진에게는 더 컸다. 어차피 자신의 어휘력으로 털어놔봤자 헛소리로밖에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
"응. 말하기 힘든 거구나. 그럼 다음에 언제든 얘기해."
끌어안은 어깨를 아린은 한쪽 팔로 토닥인다. 가늘고 작은 손의 여린 압력이 교복 너머로 전해져왔다.
그리고서 다시 잠시간 낯부끄러운 포옹이 계속되었다.
유진 본인도 충분히 자각은 하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친근감의 표현일 뿐. 다른 뜻을 품을 것까지는 없다.
나머지 한쪽 팔은 여전히 그 등을 토닥이고 있는 것을 보면, 보모가 잠 못드는 아이를 달래주는 행위와 다를 것 없을지도 모른다.
"혼자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럴까. 엄마 품이 그리워?"
"그럴 나이 지난지가 언젠데."
"언제 돌아오시는데?"
"이번 달은 못 오실걸."
"큰일났네, 우리 유진이 불쌍해서 어떡해."
또 토닥토닥.
나이도 같으면서, 거기다 몸집도 더 작으면서 아이 취급을 해대는 것이 유진은 살짝 껄끄럽기는 해도 차마 놓으라고 뿌리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만 더 이 순간이 이어져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제발 그 생각마저 읽지는 않았기를, 하는 생각이 차례차례 뒤따랐다.
그러니 그저 가만히, 두 팔과 가슴에 기대오는 고개를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기로 한다.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머리카락의 촉감이 묘하게 간지럽다. 뺨과 함께 양쪽 귀가 열이 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을 참으며 유진은 태연한 척 말을 받아쳤다.
"너는 혼자 지내는 데 하나도 무서운 거 없냐?"
"나야 충분히 다 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곧 있으면 어른이니까."
"나도 그렇거든."
"부끄러우면 부끄럽다고 말을 하지."
포옹하던 팔을 가볍게 놓는다. 자신에 비하면 아담한 저 체구가 몇 년 전만 해도 자신과 비슷한 크기였다는 것이 유진은 덧없을 따름이다.
자신보다 작아져 있는 체구를 앞으로 기울이며, 아린은 정색하며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근데 이상한 짓하는 거면 안 봐준다? 확 신고하는 수가 있어?"
그 갑작스런 태세 전환에, 유진은 헛웃음을 내뱉고는 표정을 풀었다.
"알았어, 알았어. 뭐 먹을래?"
"왜 먹을 것 부터 물어?"
"지금이라도 더 먹어야 다 크지 않겠냐?"
"신고한다 그랬지?"
"아, 뭐. 네가 말 꺼냈잖아?"
주먹을 드는 시늉을 하던 아린은, 갑자기 하품이 찾아오면서 기지개를 키기 시작한다.
"너무 일찍 깨서 그런가, 벌써 잠이 올라 그래."
"생활 리듬 어쩌려고 그래? 너 그러다 수업 때 잔다."
"난 누구랑은 다르게 수업은 꾸준히 챙겨듣는 편이거든요?"
그 말은 학업 성적이 뒷받침해주고 있으니 안타깝게도 유진이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병실에 있던 한없이 덧없고 무너질 것만 같던 그 아이가, 차마 내버려두기 힘들던 그 아이가, 이번에는 자신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느 샌가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지를 정도로 챙겨주고 있다.
그것이 한순간 유진의 마음을 복잡하게 어지럽혀온다.
이를 떨쳐내고자, 그리고 아린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미뤄주고자 유진은 큰맘먹고 제안해보는 것이었다.
"간만에 달달한 거나 먹자."
요새들어 밖에서 사먹는 비용이 가면 갈 수록 비싸져가고 있음을 유진은 체감한다. 그것은 하굣길 주변의 간식집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학생들이 주요 타겟층인 곳일 텐데도, 그런 학생들 용돈으로 감당하기엔 버거운 경우가 많을 것이 현실.
더구나 혼자 지내는 동안 웬만한 식사를 외식이나 가공 식품으로 때우고 있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전혀 사소하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하물며 평상시라면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카페라니. '달달한 것'이라는 말을 꺼낸 시점에서 각오해야 되는 결과였음을 유진은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괜히 왔나…. 차라리 다른 데 가볼걸.'
역시 뒤로 미룰 한탄이 아닌가 하는 망설임이었다.
이번 달에 벌써 카드 매장까지 두 번 들락날락거린 입장에서는 더욱 부담스러운 지출이 아닐 수 없다. 자칫하면 도시락은 커녕 정말 컵라면으로 때우는 나날이 늘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이 피어오른다.
저쪽만 사주는 거라면 모를까, 자신도 구색 삼아 그나마 부담이 덜한 메뉴를 시켜놓고야 말았다. 안 먹고 말지 하고 넘어가자니 가게 내부에 풍기는 향긋한 내음은 꽤 자극적인 것이었다.
"맛있냐?"
"맛있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한탄을 뒤로 미뤄보기로 한다.
검붉은 체리가 노란 커스터드 사이로 알알이 모여든 타르트를 흐뭇하게 우물거리는 아린의 모습을 보면, 그에게 온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끼니로 때우기도 애매한 것을 그 정도의 값을 내면서까지 먹어햐 하냐는 의문도 잠시, 이미 아린은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올린 허니 토스트 하나를 해치우고 입가심 삼아 저걸 먹고 있음을 상기한다.
저쪽은 정말로 끼니를 때울 생각인 모양이다.
유진은 그 도시에 들어갔던 편의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스낵 포장들을 떠올렸다.
그 내용물들을 한 아이 혼자서 묵묵히, 그것도 공짜로 우걱우걱대고 있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풍경이었지만 내심 무슨 맛일까 궁금했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결국 한 입도 대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떠올리자니 부럽기 그지없는 호사가 아니었나 싶다.
현실의 것이 아니었다 한들, 그 미각과 포만감은 현실의 것이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역시 그 때 하나는 먹어둘 걸 그랬나.'
그런 시덥잖은 아쉬움을 뒤로 하며 유진은 시럽 얹은 와플을 한입 가득 문다.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으로는 충분히 달콤하다. 바삭하고 끈적한 와플 사이에 무화과 알갱이가 톡톡 씹히는 식감은 꽤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이런 값이라도 해줘야 아까운 마음이 덜한 것이겠지, 라며 애써 자신을 다독여보았다.
"기분은 풀렸어?"
그런 유진에게 아이스티를 한 모금 축이고 난 아린이 대뜸 묻는다.
"풀리고 자시고, 풀어야 되는 건 네 쪽 아니냐?"
"아니, 달달한 거 먹자고 먼저 얘기 꺼낸 건 너잖아. 그 정도로 씁쓸한 일이었나 싶어서."
"네 말대로 그냥 악몽 좀 꾼 것 뿐이거든."
"얼마나 심한 악몽이면 외출 준비까지 다 해놓고 그랬는데. 몽유병 있니?"
"그런가 보다."
"흐~음."
미심쩍은 시선으로 쳐다봐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정도로 응수해줄 수밖에 없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가방엔 뭘 그렇게 챙겨놨어?"
"카드."
"다?"
"다라기 보다는, 뭐, 대부분."
"그럼 그 상태로 어디 듀얼하러 나갈 작정이었어? 심각한 듀얼 중독이구나, 너."
"응, 그런가 보다."
"누구하고 듀얼하려고?"
"꿈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나네."
본인이 생각해도 제정신은 아닌 광경이었기에 적당히 응수해주기로 한다.
그리고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툭 던지듯 그대로 꺼낸다.
"참, 혹시 게임 같은 거 만들고 있지 않냐?"
"게임?"
"응, 서바이벌이나 퍼즐 같은 거."
"글쎄~, 시나리오 같은 거 쓸 기회가 있으면 시도해볼 생각은 있는데…, 게임 규칙 같은 걸 떠올릴 머리는 아닌 것 같아. 컴퓨터도 잘 쓸줄 모르고."
"그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캐낼 것은 없다.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다친 곳도 없는 쌩쌩한 몸으로 꿈에서 깨어났으니, 잠자코 입이나 다물고 있다면 되는 일이다.
유진은 뜨뜻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차려진 것을 다 해지우고 가게를 나갈 무렵, 유진이 지갑을 꺼내기도 전에 아린 쪽이 먼저 꺼내더니 계산대로 향하려 들었다.
"네가 왜 내?"
"뭐? 이거 사줄려 그랬어? 진짜로?"
"엥?"
"아니, 먹으러 가자고 했지 사준다고는 안 했잖아?"
'아, 그런 거였냐….'
어쩐지 눈치 안 보고 막 고른다는 것에서 짐작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면 저번에 피자를 같이 사들고 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막상 자기가 내주겠다고 다시 말을 꺼내기가 곤란한 현실이 서글펐다.
"됐어. 그냥 너 시킨 거나 내."
"어음, 미안하게 됐다."
"안심하긴 일러. 호의는 천천히, 착실히 받아갈 거니깐."
얼마나 뜯어먹을 작정인 걸지는 제쳐두고 지금의 유진에게는 고마운 처사였다.
본인이 먹은 와플 역시 주관적으로 그리 싸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은 제쳐두고서.
아린이 가게 문을 여니 달랑달랑하는 깜찍한 종소리가 울렸다.
"내일 봐."
"응."
문밖을 나와 골목을 꺾는 것과 동시에 서로가 사는 터전을 향해 갈라지면서 헤어진다.
평소와 별 다를것 없이 긴머리를 늘어뜨리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유진은 괜히 불안해진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까. 여기서 굳이 불러세우거나 따라가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그런 불안을 무릅쓰고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내일도 비슷한 일상을 맞이하기를 기대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자처하는 꼴이 제발 아니기를 빌면서.
그녀를 건드리고 게임을 하라며 닦닥한 재버워키를 해치우는 데에 성공했으니, 어쩌면 우려하던 일이 당장 터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오늘 이 순간 만큼은.
지금은 이대로 쭉 돌아가서 못다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메신저로든 통화로든 전 날처럼 연락을 취해보도록 한다. 그녀 본인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하면서.
그렇게 남은 하루의 예정을 잡아두었다.
그 예정을 수행하기 위해 집에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순간이었다.
"훈훈하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하고 유진이 눈에 띄게 움찔거린다. 고개를 돌리니 또다른 아는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교복 상의 대신 후드 재킷을 걸치고 있는, 무뚝뚝한 인상의 소녀.
"뭐하냐?"
"마침 너네가 보이길래. 잘 있나 보려고."
현실에서는 어제 같이 듀얼 한 판정도 나눈 정도의 사이지만, 어쩐지 체감상으로는 몇 일 몇 주정도는 함께 지낸 것만 같은 익숙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보다 너도 학교 나왔었네. 무사히 빠져나왔구나."
"뭐, 어떻게든."
"학교 안 늦었어?"
"어떻게든."
혹시나 그녀 역시 지각할까봐 헐레벌떡 뛰어서 왔던 것일까. 다만 아린과 함께 정신없이 뛰어오면서 그녀의 모습은 유진에게 딱히 본 기억이 없다.
그저 놓쳐서 못 본 건지, 아니면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서 더 여유롭게 학교에 도착했을지. 또 아니면 지각 따위 신경 끄고 천천히 건너 왔을지. 적어도 지금 상황만 봐서는 알기가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던 유진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 오토바이 탈 줄 알지."
대답 대신 유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유진은 부러움을 느끼고 자신도 오토바이 자격증을 따놓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중, 이내 자전거조차 탈줄 모른다는 처지를 깨닫고는 내심 쪼그라들었다.
"참, 그 때 그 오토바이 뭐냐?"
"아, 그거. 가던 길에 찾아서 점찍어 둔 거야. 함부로 타고 다니다간 시선이 끌릴 수 있으니까. 정 급할 때 이용하려고."
그건 역시 훔쳐 탄 것이 맞았다. 주인이 없으니까 뭐라 할 사람 따윈 없었으리라.
"잘 타더라. 그것도 리퍼라는 애 능력이야?"
"아니, 자격증은 내가 땄지. 그 기술을 리퍼가 공유한 거고."
"그랬냐? 개쩌네."
"사실 더 좋은 바이크를 찾긴 했는데, 시체 옆에 있는 걸 고르긴 좀 그래서."
"그건 그래."
그 오토바이 옆 시체에 관한 진상은 역시 비밀에 부치는 게 좋으리라 유진은 다시금 생각한다.
"하나 장만하면 나쁠 것 없어. 안전만 챙기면. 너도 돈 모아서 하나 뽑지 그래?"
"안 돼, 카드 뽑아야 돼."
"유감이네. 소꿉친구 집 가는 길 딱 태워줘서 점수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녀가 방금 전까지 자신들을 지켜봤으리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한 유진은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 무슨 오해하고 그런 건 아니지?"
"무슨 오해?"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돼?"
그 퉁명스런 대답에 유노는 눈썹을 슬쩍 올리고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걱정 마. 난 그런 비뚤어진 시선을 가진 사람 아냐. 지극히 건전한 청춘을 누리고 있는데 뭐라고 해야겠어?"
"그러니까, 그게 오해라고."
"왜? 친구 사귀는 게 청춘 아냐?"
"………."
자신을 농락하는 것은 역시 한 두명이 아니다.
그렇게 당하기 쉬운 성격이 아닌지 유진은 스스로를 반성해봐야 할 것도 같았다.
"어쨌든, 아린이도 무사한가 보네."
"응. 나도 걔가 깨워서 학교 간 거야."
"그래, 다행이다."
말투가 너무 건조해서 진심인지 겉치레인지 분간하기는 힘들다.
"후유증 같은 건 없어?"
"딱히 없나 봐. 신체적인 쪽은."
"그것도 다행이네."
"길바닥에서 깨긴 했지만."
"그건 안 다행이고."
"넌 어디서 깼어?"
"나도 길바닥.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를 다 해놔서 망정이지."
그 때 받아온 수많은 데미지들은 모조리 환상.
직접적으로 몸에 남은 상흔은 없을지라도, 그 강렬한 충격에 대한 기억은 흉터가 되어 남듯이 뇌리에 잔존해 있으리라. 그게 정말로 다행인지는 알 수 없다.
언제쯤 되면 잊는다는 것을 할 수 있을까.
"그거, 진짜 끝난 거겠지?"
"ABC 말이지?"
"응. 그 재버워키라는 놈… 거기서 끝난 건가?"
"글쎄."
역시나 회의적인 대답이다.
"역시 아직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해. 너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게임 열린 게 처음은 아냐. 물론 도시 하나를 통째로 무대로 쓰는 건 처음이긴 하지만."
메신저에 남긴 기록을 떠올리자면 분명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 스케일을 보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재버워키라는 작자가 진짜 거기서 사라졌다고 해도, 제 2, 제 3의 재버워키가 나타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거야. 네가 겪은 것 이상의 스케일을 각오해야 될지도 몰라."
불길한 예상을 자신만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이 더욱 불길해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위저드도 이미 설명한 바가 있었다. 이미 게임에 참가하고 그 개최자의 디젠을 입수했음에도, 자신과 유노가 참가한 그 대회가 보란 듯이 열리고 말았다.
그 전의 대회에서도 아마 태스크 포스의 인물이 나섰을 것이고, 그 다음에 열릴 대회 또한 그럴 것이다.
"태스크 포스도 어지간히 힘든 일인가 보네."
"거기까지 안 가도 다른 어둠의 듀얼리스트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는 해."
"그런 일을 계속 하는 거야?"
"그래야겠지. 일이니까."
"앞으로도?"
"안 끝났으면 또 해야지."
대답을 들은 유진의 표정에 근심이 더욱 내비치는 것을 보며 유노가 달래듯 말한다.
"그 때도 말했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야. 후회 안한다고도 했었고."
"아니, 그래도 일단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거기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를 알아챘는지 유노가 말을 딱 자른다.
"유진아."
"응?"
"학교 생활 지낼만은 해?"
그러면서 내놓는 질문이, 어른들이나 내뱉을 법한 어색한 질문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송하면서도 유진은 솔직한 대로 대답한다.
"뭐, 그냥 그렇지."
"아린이하고는 잘 지낼 거지?"
"그런 일이 또 없으면야 어떻게든 지내겠지."
"없었으면 좋겠네."
유노도 동감하며 끄덕인다. 그리고는 다음 질문.
"듀얼은 계속 즐길 거야? 물론 '평범한' 듀얼."
"그렇지."
그런 대답을 태연히 할 수 있는 것에 유진 본인도 새삼 놀란다.
죽을 뻔한 승부를 몇 번이나 치뤘음에도 즐기겠다고 말할 수가 있다니. 그 정도로 유진 자신은 듀얼이라는 것에 여전히 애착을 가진 모양이었다.
잘못한 것은 그 듀얼로 이상한 짓을 시키는 놈들이지, 카드 게임 자체는 죄가 없으니까. 그런 논리가 듀얼이라는 놀이를 변호해주고 있다.
"그래."
그 짧은 대답을 통해 유노 역시 파악했을까.
"프로 듀얼리스트 자리는 계속 노릴 거고?"
"실력이 된다면야."
"응. 너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칭찬이 괜히 어색하게 다가온다.
"굳이 어둠의 듀얼 같은 걸 안 해도 듀얼리스트는 될 수 있어. 오히려 그게 정상이고. 제대로 알고 있구나."
"뭔 말이 하고 싶은데?"
질문에 또 질문.
"아니, 잘 지내라고."
"어디 떠나게?"
"반대야.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지도 몰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유진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이유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왜?"
"디젠은 아직도 갖고 있어? 엄밀히 따지자면, 못 버리고 있는 거겠지?"
"그거야…"
유진은 여전히 소지하던 펜던트를 손에 쥔다.
"그게 있는 이상 다른 디젠 소유자가 언제든 접근해올 가능성을 걱정할 수밖에 없어. 버린다고 무사할 거라는 보장도 없지. 어떻게든 되찾은 네 일상이 계속 방해받을 거야."
"그렇겠지."
"이런 걸 퍼뜨린 원흉을 찾는 순간까지, 어쩌면 그 뒤로도 그런 운명에서 못 벗어날지도 몰라. 그동안 네 마음이 바뀌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거고."
"……."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 동안 나, 아니, 우리가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네 일상이 침범당하는 일도, 내가 여유가 되는 선에서 조치해줄게."
설마 그 얘기가 영역 바깥을 나온 순간에도 계속되리라고는 유진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누가 일상의 방해꾼인지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러니까, 내 보디가드 행세라도 하시겠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지."
"그런 걸 누가 시키는데?"
"몰라도 돼."
실컷 물어보는 주제에 자신에 대한 걸 좀처럼 밝히려들지 않다니, 정보의 불균형이 따로없다.
"너무 불안해할 것 없어. 어둠의 게임이니, 다른 범죄 같은 비행만 아니라면야 네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 없으니까. 웬만해서는."
"웬만해서는?"
"응. 그러니까 그 선에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지내."
'퍽이나 되겠냐고….'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행동이 제한되어버리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알고 있으면서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녀석일까.
"그래. 그런 듀얼이야 나도 웬만해서는 하기 싫으니까, 도와준다면야 고맙기는 해."
"알아줘서 다행이네."
"그래서, 그 원흉이라는 거 찾는 일은 잘 돼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도 그 일의 일환이라는 걸 알아둬."
"나 따라다니는 거?"
"맞아. 어쨌든 넌 재버워키와의 듀얼에서 승리하고 게임을 클리어한 장본인이잖아. 거기다 위저드의 접근까지 허용했었지."
'허용'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랬… 지."
"돌아오고 나서 확인했는데, ABC에 동행했던 다른 멤버가 위저드라는 인물의 손에 당한 모양이야. 태스크 포스 창립 당시부터 있었던 카드 프로페서였는데, 그 사람이 사전에 남긴 메시지로 확인한 사실이야."
그 설명대로라면 적어도 어지간한 베테랑 듀얼리스트였다는 것만큼은 유진도 알 것 같다. 그런 인물을 이긴 작자를 상대로, 자신은 적어도 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정도로 자신이 성장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기억하다시피 개운한 결과는 영 아니었으니.
"그런 인물이 다른 컬렉터도, 하물며 태스크 포스도 아닌 너한테 직접 접근했어. 그러고도 살아남았다는 건 어쨌든 네가 그만한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었다는 뜻이야. 굳이 재버워키가 아니더라도."
"저기, 따지고 보면 난 그냥 일방적인 피해자인데?"
"알아. 그 때 사정 다 설명해줬잖아. 그런 일이 또 안 터지게 막아야지. 여기 돌아오고 나서 무슨 변화 같은 거 못 느꼈어?"
"변화? 글쎄…"
"아직 없는 거라고 해두면 되겠지."
의심받고 있다.
이런 식으로 심문을 시도한다면, 정말로 자신이 이상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줄리가 있을까.
유진은 그녀의 목적을 확신했다.
보디가드라고는 했지만, 다르게 표현하자면 감시받고 있는 셈이다. 자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혹은 미궁 입구에 뻗어있는 실마리 정도로 취급받는 듯 했다.
그녀가 말하는 자신에 대한 업무의 본질은 아마도 그러한 것의 조사겠지.
그녀가 말한 유진의 마음이 변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녀의 업무는 대상의 보호에서 배제로 바뀌어버릴지 모른다. 썩어가는 싹을 끝내 솎아내버리듯이.
굳이 자신 앞에서 제거 대상을 끌고 나와서는 끝내 처치해버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 임무를 수행해버릴 가능성은 있다.
"솔직히 좀 너무한 거 아니냐? 너보다 아는 것도 없고, 알아낼 만한 것도 없을 텐데."
"어쩔 수 없어. 넌 아마 네 생각보다도 이런 쪽에 크게 엮인 상태니까. 그에 비해서 한없이 무방비하고."
무방비하다는 말은 반박할 수가 없다.
그저 적이 닥쳐온다면 맞선다는 대책만이 있을 뿐, 어떻게 예방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태다.
그녀가 자신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조차, 만에 하나 듀얼 외의 방법까지 동원한다고 치면 무슨 시도라도 해볼 수나 있을까.
안심해도 될 순간 따위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언제 와줄지 역시 알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근심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린이는, 괜찮은 걸까."
유진은 그녀를 방금 전에 떠나 보내고 지나간 거리를 돌아본다.
그녀의 모습이 보일리는 없었다. 별 일 없는 이상 곧장 집으로 향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렇다. 별 일 없는 이상.
"나도 걱정이긴 한데, 그 애만이 아닐 거야. 네 주변 사람 모두한테도 말려들 가능성이라는 건 있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유진 혼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 하지만 남의 말로 직접 들으니 유진의 기분이 더욱 우울해진다.
마치 자신이 죽을 죄라도 저질러 버린 것만 같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만 같다.
그 침울한 반응을 읽었는지 유노가 다시 달래주는 무드로 돌아간다.
"돌아온 날부터 이런 소리해서 미안해. 그치만 네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줄 필요가 있겠다 싶었으니까."
"안다고 뭐가 달라질까."
"글쎄. 적어도 혼자 끙끙대느니 같이 고민해볼 사람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유노는 손을 내민다. 첫 듀얼을 치루고 난 순간과는 달리 저쪽에서 악수를 청해왔다.
머뭇거리며 손을 잡아보니 습기 하나 없이 건조해서 매끄럽기만 하다.
"앞으로 계속 알고 지낼 텐데 서로 좋은 모습 보여주는 게 좋겠네. 잘 지내보자."
"……그래."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의 접근이라도 구원의 손길로 여겨도 되는 것이겠지.
유진은 위로삼아 자신을 설득해 본다.
"아, 네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감시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마. 나도 다른 일이 있으니까."
"그건 다행이네."
"그치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줘."
"그건 경찰한테 물어볼 일 아니냐?"
"경찰은 디젠 같은 물건 알지도 못할 거거든. 우리 측에서 입을 다무는 이상."
다른 곳에 가서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으니 이런 대답을 대놓고 하는 것이겠지.
그 문제는 차처하되, 생각해볼 수록 이상한 일이라 유진은 느꼈다.
그런 일에 경찰이 관여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역시 다른 쪽의 조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적어도 그 중의 하나가 태스크 포스라는 곳이리라.
경찰 같은 공공기관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자경단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 정도로 배후 세력이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네 조직, 제대로 된 곳은 맞아?"
"글쎄. 그건 나도 솔직히 모르겠네."
그것도 모자라 일단은 성인도 안 된 사람을 멤버로 쓰고 있다. 그녀를 자신에게 보낸 것도, 대회로 투입시킨 것도 역시 조직의 지시겠지.
아무리 본인의 선택이라지만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된 곳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깊게 알면 다칠지도 모른다. 어쨌든 협조를 해준다니 그 동안만이라도 캐려들지는 말자.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은 유진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나저나, 어쨌든 너네는 업무의 일환으로서 듀얼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듀얼은 전부 리퍼한테 맡기고 있어?"
"전에는 그랬지만, 나도 구경하면서 이것저것 알아가는 중이야."
"그렇구나. 그럼 리퍼라는 애, 일반 대회같은 데에도 나가본 적은 있어? 코스프레만 안 하면 티는 안 날 거 아냐."
"아니. 실력 테스트로 태스크 포스 사람들하고 몇 번 대전해본 적은 있지만."
"그럼 어둠의 듀얼 말고 그냥 듀얼도 해줄 수는 있다는 거구나."
"그렇게 되겠네."
유진은 끄덕거리며 슬슬 아쉬운 소리를 꺼내보기로 한다.
"리퍼라는 애 지금도 있지?"
유노는 대답 대신 팔찌를 내보인다.
"지금 이 얘기도 듣고 있어?"
"본인이 들을 생각이 있다면 그렇겠지."
"그래. 그럼 듀얼 한 판 해보자고 하면 안 될까?"
대뜸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 것일지 유진 본인도 망설여지긴 했지만, 막상 안 하면 손해일 것만 같다.
"아직, 즐기는 듀얼을 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왜?"
"리퍼가 쓰던 그 덱은 입수한 뒤로부터 어둠의 듀얼 관련으로만 쓰여온 거야. 공식 정보가 비공개 조치된 것도 그런 일환일 거고."
"그럼 다른 덱을 쓰면 되잖아."
"리퍼 본인 문제도 있어. 도펠코프나 재버워키가 한 말 때문에 잠시 혼란이 생겼던 모양이야. 잠시라도 자극을 덜 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거든."
"그건, 그렇겠네."
어둠의 듀얼리스트를 제재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결국 어둠의 듀얼을 즐기고 있는 셈 아니냐.
자신이 뜻을 갖고서 임해온 신념의 근간을 뒤흔드는 발언이었다.
그 때는 즉답으로 부정한 그였으나, 생각을 곱씹을 수록 정체성에 혼란이 생길 법도 할 것이다.
듀얼이라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치만 그럴 때일 수록 즐길 만한 듀얼이 필요한 거 아냐? 이거하고 그건 다른 거다, 하고 마음먹을 계기도 되어줄지 모르잖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긴 했지."
쓴웃음이라지만 유노가 미소라는 것을 지은 사실이 유진에게는 새삼 놀라웠다.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러는 것일까.
목숨걸고 듀얼에 나서는 사람들이라고 엄격하고 진지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유진은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건 보통 정신으로는 힘든 일일 텐데.
"어쨌든 지금은 곤란할 것 같아. 적어도 해야될 일이 지금보다 더 정리가 된다면, 그 때 여유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물론 평범한 듀얼이겠지?"
"물론."
"응. 같이 생각해볼게."
"나야 뭐, 승낙만 해준다면 고맙고."
"너, 듀얼 진짜 좋아하는구나."
"그러니까 하는 거지."
"그건 그렇네."
지금도 미소는, 유노에게 완전히 떠나지 않은 듯 보였다.
◈
"아뇨,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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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왤케 라노벨 보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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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완결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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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나의 한 시즌이 이렇게 끝났군요. 다음 시즌도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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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그만한 끈기도 없고 열정도 없어져서 그런가 리부트 준비도 지지부진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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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왤케 라노벨 보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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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느낌이 맞는데수요 | 23.12.30 16: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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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는 언제 어떻게든 되도록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 | 23.12.30 17: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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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완결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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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2.30 17: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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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나의 한 시즌이 이렇게 끝났군요. 다음 시즌도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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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2.30 19: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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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그만한 끈기도 없고 열정도 없어져서 그런가 리부트 준비도 지지부진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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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하고 싶어질 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23.12.31 04:4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