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마시던 것으로 드릴까요?"
"네. 늘 마시던 것으로."
루나 시티의 밤, 정령이 자기 심기를 건들었다는 이유로 지독한 물고문을 당해 생각치도 못 했던 개고생에 마음이 심란했던 바르바스는 자신이 자주 들르는 바, "스패니시 에디"에 들러 평소에 마시던 것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있었다. 살다보면 개에게도 물리고, 뱀에게도 물리고, 벌레한테도 물리는 것이니 바르바스는 이번엔 진짜로 재수에 옴 붙은 셈치기로 마음 먹었다.
"그나저나 어처구니없네... 정령인지 뭔지 때문에... 참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자기 심기를 건들었다지만 그렇게까지 지독한 물고문을 가해야 속이 시원했던 것인가 싶었던 바르바스는 헛웃음 한 번과 함께 술잔 안의 술을 그대로 쭉 들이켰다.
"요즘이 참 말세는 말세입니다. 여기는 좀 덜한 모양이지만 정령인지 뭔지가 도시 곳곳에서 목격된다던데..."
"네. 간간이 목격되는 모양이더군요. 어쩌면 이 곳 어딘가에도 정령 하나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휴, 그런 소리 마십쇼. 저는 듀얼은 아주 잼병입니다."
바텐더 한 명이 여러 도시에서 목격되는 정령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고, 바르바스는 그 자신이 정령에게 호되게 당해 반정도는 죽다 살아났던지라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반응을 내비치고 있었다.
"저는 아직까진 정령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손님도 직접 본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한 번이었는데, 자기 욕을 했다지만 아주 사람을 죽여버릴 기세로 괴롭히더군요."
"젠장. 말 조심하지 않으면 정령에게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세상이라니.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바텐더와 바르바스 모두 현 상황에 나름의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
리나 시티에 위치한 현 시큐리티 포스의 소통 창구로서 활용되는 듀얼 카페, "카페 파라디소(Cafe Paradiso)". 지금은 고인이 된 말레우스가 자신의 돈세탁 창구 중 한 곳으로서 이용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현재는 순수하게 듀얼 샵 겸 카페로서 운영되고 있다. 카페 파라디소의 듀얼 샵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중인 조일영은 종종 단신으로 온 듀얼리스트들의 듀얼 상대를 맡아주는 역할도 함께 겸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런 일영의 눈에 가장 띠는 인물이 있었다. 짧게 다듬은 금발과 주황색 눈동자, 언제나 밝고 화사한 표정의 여성. 어림잡아 학생 정도의 나잇대로 보이지만 무슨 사연이 있어보이는 것이 분명한 인물. 오리피아는 이 곳 카페 파라디소의 단골 중 한 명이었다.
"어서오세요!"
"편의점에서 자주 봤었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입담이 좋으셔서 기억하고 있어요."
일영도 자신이 종종 들르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오리피아를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에 밝고 긍정적인 인물이었던지라 일영의 인상에 강하게 남은 사람이기도 했다.
"아하하. 제 얼굴을 기억하다니, 정말 놀랍네요. 그나저나 혼자?"
"아, 예. 어쩌다보니 꼭 혼자서 오게 되네요."
그리고 오리피아를 맡는 건 주로 일영의 몫이었다. 남녀 사이의 듀얼인만큼 묘한 기류가 흐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오리피아는 그 흐름을 웃음으로 무마하며 피해가고 일영도 귀엽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서비스직 종업자로서 그녀를 대하고 있었기에 그럴 일은 없었다.
*
"아으... 진짜 골치 아프네..."
오비탈리 시티 도심지 외곽에 위치한 어느 마천루. 저조한 입주율과 더불어 암흑 날개의 준동으로 인해 사실상의 폐건물이 되어버린 마천루의 텅 비어버린 펜트하우스를 불법으로 점거한 소년이 자신의 덱을 두고 그 갈색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열다섯 언저리로 보이는 소년의 곁에는 [왈큐레]의 구성원들이 일명 '메이드복'으로 불리는 인간 세계의 복장으로 환복한 상태로 모여있었다. 원래대로면 다른 세상의 정령계에 있어야 할 발키리들이었지만 그녀들이 있어야 할 정령계는 이미 초토화된지 오래였기에 현재는 소년을 새로운 주군으로 삼아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골치야, 골치... [왈큐레]는 다른 건 몰라도 타점이 너무 낮단 말이지... 그렇다고 엑스트라 덱의 몬스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니, 이러면 다른 덱을 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어휴..."
"죄송합니다, 마스터. 저희의 힘이 많이 모자란 탓에..."
본명은 알 수 없으나, 여기서는 [왈큐레 시그룬]이라 불리는 검은 머리의 발키리가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에게 그 약함에 대해 사죄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 짙은 청색의 눈동자를 발키리들에게 돌리고선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냐, 아냐. 너희 발키리들을 원망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단지... 기왕이면 너희를 서포트해줄 카드가 좀 더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 뿐이지. 그리고 나한테는 '스카일러'란 이름이 있어. 이름으로 부르래도."
"그럴 순 없습니다, 마스터.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아이고, 정말..."
스카일러는 [왈큐레] 덱을 어떻게해야 조금이라도 더 덱답게 운영할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자기 필드의 몬스터를 [왈큐레] 몬스터로 취급하게 만드는 카드라거나, [왈큐레] 몬스터의 화력을 화끈하게 개선해줄 카드라도 있었으면 했지만 없거나 발동 조건이 난감한 경우가 다수였기에 그로선 늘 고민이 많았고, 주군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 한다는 점에서 발키리 전원이 가슴아파했다.
"아, 모르겠다. 너희한텐 미안한데, 그래도 서브 덱을 어떻게든 좋은 걸로 갖춰놓아서 망정이야. 너희들이 힘을 쓰려면 일단은 돈이 필요하거든."
그렇게 말하던 스카일러는 [왈큐레] 덱을 내려놓고서, 자신의 서브 덱이자 실전용 덱이라는, 뭔가 모순된 위치에 있는 '드래곤 링크' 덱을 꺼내들어 카드를 펼쳐보았다. 한 물갈 조짐은 있어도, 그렇다고 마냥 힘없이 무너지는 덱은 아닌 그런 덱이었다.
"서브라고는 하지만... 저희보다 훨씬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왈큐레 브륜힐데]라 불리는 발키리의 말이었다. 스카일러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건 그래... 하지만 가지고만 있어도 마음이 놓이는 덱 정도는 있어. 너희가 내겐 그런 존재고."
객관적인 성능과는 상관없이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고맙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고, 거기에 발키리 전원이 자신들을 받아준 그에게 재차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암인지 암덩이인지가 망하고서 갈 곳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내가 미치지 않은 건 우연히 내가 발견한 너희들 덕분인걸. 정말이야."
스카일러는 자신의 어머니가 있었던 암흑 날개가 무너진 이후로 살 길을 찾아 여기저기를 해매던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아니었음에도 암흑 날개와 엮여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에겐 커다란 장애였고, 그로 인해 바로 아랫층에 살고 있는 쌍둥이 남매를 제외하면 인간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전무했다. 그렇기에 스카일러는 자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인 발키리들에게 큰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큰 힘은 못 되나, 앞으로도 함께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름으로 불러라, 좀."
"그건 무리입니다, 마스터."
하지만 스카일러 입장에선 다른 건 둘째치고 발키리들이 자꾸 자신을 마스터라 부르는 것이 좀 신경쓰였다. 뭔가 딱딱하고 형식적이어서 그의 입장에선 영 내키지가 않았다.
"정 그러면... 차라리 내 이름 뒤에 주인님이라 부르면 되겠네. 그걸로 타협보자."
"그렇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주인님."
"끝까지 이름은 안 부르는구나."
타협안을 내놓아도 꿋꿋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영 그렇지만 이 이상 말싸움을 벌이기도 귀찮았던 스카일러는 그들을 설득하는 일을 그냥 포기해버렸고, 양손으로 깍지를 낀 후 자신이 불법 점거한 펜트하우스의 바닥에 누워버렸다.
*
"오늘은 좀 어땠어, 알핀 오빠?"
"별로야. 엘피나 너는 그래도 여자라서 돈 좀 만진 모양이지만, 나는 어제 저녁부터 이상성욕자들이 꼬여들어서 고역이었어..."
'알핀'이라 불린 오빠인 쪽은 푸념과 함께 자신이 지하 듀얼 등으로 벌어들인 돈을 풀어놓았고, '엘피나'라 불린 여동생이 뒤이어 펼친 돈에 비하면 그 금액은 많아야 그녀가 벌어온 금액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지하 듀얼이라고는 했지만, 밤거리에서의 일인 만큼 그 외의 온갖 불법적인 일들이 엮여있어 자칫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매일 감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오늘은 본전도 못 건진 기분이야."
"무슨 소리야. 그저 오늘은 오빠가 운이 없었을 뿐인걸."
여동생의 위로에 그녀의 오빠는 그런 여동생을 끌어안아주는 것으로 고마움의 표현을 대신했다. 암흑 날개의 몰락 이후, 약 열살 전후로 살아남기 위해 이 곳 저 곳을 떠돌던 쌍둥이 남매는 오비탈리 시티에 거주 중이며,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암흑 날개의 여신도를 어머니로 둔 스카일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불법 점거한 펜트하우스가 위치한 마천루의 고층 지역에 자리를 잡고 숨어사는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빗소리가 들려오고 남매가 바깥을 살펴보니 오비탈리 시티 전역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빠... 우리,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아야하는 걸까?"
"몰라. 하지만... 함께 있으면 우리는 강해."
푸른 하늘을 논한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이지만, 알핀과 엘피나 남매는 서로의 손을 잡으며 오비탈리 시티에 내리는 비를 창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로 샤키르의 일곱 사생아의 간단한 신상들이 확인되었읍니다
과연 이 사생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 올 것인가?
그리고 일영쿤이 일하는 가게 이름을 정해준 것이 이번 화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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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려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부터 알아야겠는데 글을 제대로 본 게 아니어서 감도 안 옵니다(...) | 23.07.27 23: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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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12시간이라는 시간만 언급하고 정확히 몇 시에 시작되었는지 묘사를 안 하다 보니 이런 실수를... 일단 29화 후반부에서 시리우스가 마린이 거주하고 있는 빌라를 향해 출발한 건, 지구 시간으로 20시 30분 정도라고 설정해 놓았습니다. | 23.07.27 23: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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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저한테 맡기시죠 생각난 스토리가 있거든요 | 23.07.28 0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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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무슨 우연의 일치 2. 남녀 사이지만 과연? | 23.07.28 00:3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