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들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전할테니까
"오랫만에 와본 소감은 어때?"
"글쌔...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다."
자신의 운명을 바꿔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묵념의 시간을 가졌던 소년이 자리를 떠난지 5분 뒤, 남매로 보이는 두 명의 사람들이 '아케루스 파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모여있었다. 한 명은 평탄하다는 말이 어울릴 몸매와 양갈래로 묶은 금발과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까칠한 인상의 여성, 다른 한 명은 금발벽안의 귀여운 미소년. 하지만 사람들에게 굳이 밝히지 않은 사실이라면, 이 둘 역시 2년 전에 있었던 결전의 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아케르나'와 '알파드'. 세상은 그 둘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지만, 남은 사람들은 떠나버린 사람들의 몫까지 짊어지며 살아야하지. 이건 그 상징이라고 생각해."
"말은 참 고급지게도 한다니까."
마침 오늘은 방송 휴방일이기도 했었고, 예전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도 있어 잠시 짬을 내어 공원의 추모 공간에 온 두 사람은 이어서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있는 다양한 피규어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진행 담당인 거야. 누나는 몸개그 담당인거고."
"까불지 마, 임마. 너 그러다 진짜 맞아죽는다."
아케르나와 알파드는 가벼운 말싸움을 벌이면서 피규어들이 놓여있던 자리에 아케르나가 직접 3D 프린터로 제작하고 도색한 [사이버 엔드 드래곤]의 피규어를 조심스럽게 한 자리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나저나...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때 일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한 건 어째서일까."
"그거야, 뭐..."
아케르나의 말에 알파드는 평소답지 않게 잠시 진지한 표정이 되어있었고, 머릿속의 말들을 정리하고서 자신의 대답을 이어갔다.
"건곤일척의 승부였으니까. 승자독식...이라고 하면 좀 비정하려나."
비정한 말이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어둠의 신, [아스트라이모나드]와 빛의 신, [아케루스]의 최후의 결전의 승자는 자신의 이름을 인류의 역사 한 구석에 새길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패자는 승자의 이름을 새기기 위한 하나의 잉크가 되어 무너졌으니까. 자신들이 한 때 속했던 '애프터라이프'의 비정한 손길에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진 두 사람은 추모공간을 나와 노을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나락에 처박혔다가 다시금 오르막을 탔으니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인생이 어려운 거지. 설마 우리가 인터넷 방송으로 유명세를 타는 삶을 살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알파드의 말에 아케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일곱 눈'의 일원으로서 어둠의 신의 수족으로서 살아온 자신들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애프터라이프'를 등지고, 그 대가로 한 번 죽어야만 했던 자신들이 새로운 몸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며 자신들이 속했던 '애프터라이프'를 대적하고, 끝내 살아남아 결국 어둠의 신의 완전한 몰락까지 확인했으니 삶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었다.
"브레이크... 출세했네. 듀얼 역사에 굵직한 이름도 남겼으니 말이야."
귀가하는 길, 공원명의 유례를 알려주는 비석을 바라보던 아케르나는 자신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준 상대이자 자신에게 또 다른 길을 알려준 애증의 상대, 브레이크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패배한 기억은 물론 지금도 쓰라렸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우주의 먼지로 변해버린 수많은 애프터라이프의 일원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에 대한 아케르나의 반응은 복잡미묘했었다.
"그 녀석 이름을 보니까 문득 생각났는데,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 녀석을 따르는 광신도들이 어디선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래?"
비석에 새겨진 브레이크의 이름을 바라보던 아케르나의 질문에 알파드는 굳이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과 함께 대답했다.
"당연히 막아야지. 우리 방송을 위해서라도."
"그 녀석들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나도?"
"그걸 말이라고. 왜, 누나는 겁나면 도망... 아야야야!"
그리고 장난 한 번 잘못 걸었다가 옆머리를 쥐어뜯기는 알파드였다.
*
"죽은 놈들 추모한다고 그 놈들이 살아돌아오기를 해, 그 놈들이 감사해하기를 해?"
저녁의 아케루스 파크. 나잇대를 정확히 추정할 수 없는 작고 다소 마른 체격에 날선 눈매를 지닌 신경질적인 인상, 짧게 쳐놓은 회색의 머리카락과 황색의 눈동자를 지닌 한 남자가 공원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향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추모 공간의 입구에 침을 한 번 탁 뱉으며 자리에 들어섰고, 2년 전의 격전에서 명을 달리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의 아래에 인적이 뜸한 시점을 틈타 또 한 번 침을 탁 뱉어주고 있었다.
"죽은 놈들 명복빌면 뭐가 달라져. 내 가족, 친구들도 죽으니까 결국 그걸로 끝나버렸는데."
남성은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고자 세워진 비석을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그 반응에는 먼저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 그 가증스러운 빛의 신 어쩌고는 그 죽은 사람들에겐 아무 신경도 쓰지않는다는 것에 대한 자기혐오와 질투가 섞여있었다.
"하여간 이상한 놈들이야. 이런 짓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죽으면 그걸로 끝인데, 그 잘난 신이 그 죽은 놈들에게 뭘 해줬다고... 어이가 없어, 진짜."
마음같아선 2년 전의 영웅들에게 바치는 온갖 물건들을 때려부수고, 겸사겸사 추모비와 국화를 향해서도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굳이 눈에 띠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던 만큼 지금은 일단 참아주고 있었던 남성은 그럼에도 영 못마땅해 추모비를 향해 또 한 번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빛의 신인지 나부랭이인지, 그딴 걸 알면 뭐가 달라진다고."
질투와 자기혐오를 담아 죽은 사람을 욕하고, 산 사람을 저주하며 추모 공간을 빠져나온 남성은 공원의 이름의 유례를 알려준 비석을 알아보고는, 브레이크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또 한 번 침을 뱉어주었다.
"지 딴에는 무슨 영웅 놀음이라도 한다고 생각했나본데, 나같은 녀석들 입장에선 찢어죽여도 성이 안 찬다고, 이 새끼야."
지금은 와해되어버린 '애프터라이프'의 주신이자 아무 것도 남지 않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자신에게 살 길을 알려준 어둠의 신, 아스트라이모나드를 무너트린 브레이크를 향해 증오심을 드러낸 남자는 이어서 자신이 며칠이고 걸려 만든 [티아라멘츠] 덱을 꺼내들며 이 자리에 없는 브레이크에게 재차 증오심을 드러냈다.
"너같은 놈은 절대 몰라. 네놈이 천국을 믿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지옥 아가리에 대가리를 처박아본 적도 없었을 새끼가 영웅이랍시고... 엿같군, 진짜."
허울뿐이고 아무 도움도 안되는 장식에 가까운 신들과는 달리 자신같은 밑바닥 인생들에게도 눈을 돌려준 자비로운 어둠의 신에게 가증스러운 빛의 이름으로 파멸을 안겨준 브레이크와 그 일당들, 어둠의 신을 배신한 일당들의 목을 어둠의 신의 영전에 바치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만들어낸 덱을 집어넣은 남성은 다시 한 번 브레이크의 이름이 적힌 자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혹시 내가 엉뚱한 곳에서 쓰러져도 우리 '암흑날개'가 네 목을 노릴거다, 브레이크."
증오와 원한이 서린 저주와 함께 남성은 리나 시티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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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만에 후딱 써본 외전격 이야기입니다
차후 작가분이 써먹을 법한 애프터라이프 잔당의 이야기도 간단히 서술해봤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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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군요 다음에 또 삘 받으면 X2로 찾아뵙겠읍니다 | 23.04.05 08: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