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마관은 그 크기에 걸맞게 비밀스러운 문도 많았다. 굳이 정문이 아니더라도, 몇 개 알아두면 안팎을 드나들기 좋았다.
조금 전의 플랑은 기절한 마루를 짊어지고 그 출입문 중 하나로 드나들었었다. 문 근처에는 아직도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옅은 그림자가 이 하얀 발자국 위를 덮었다. 거대하지만 누군가의 왕래는 적은 홍마관의 특성상, 사람 형상의 그림자가 이곳에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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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은 전혀 못한 채 피하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은 움직임. 플랑은 마루의 움직임이 춤 같았다. 마치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진 소동물이 날뛰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스칠 때마다 플랑이 다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얼얼해진 팔의 힘이 풀린 찰나에 방어를 뚫고 명치에 충격이 꽂혔다. 마루의 어둑어둑한 눈앞에 우윳빛이 터졌다. 결국 마루는 가슴을 움켜쥔 채 거품 끼는 소리를 내면서 허물어졌다. 마치 바위로 얻어맞은 것처럼 몸 곳곳이 격통으로 뜨겁게 쿵쿵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짓이기는 기분이 들었지만, 숨을 안 쉬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플랑은 웅크린 채 움찔거리는 마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름대로의 칭찬의 표시였다. 날카로운 손톱이 목덜미를 살살 긁고 있는데도 마루는 호흡에만 집중해야 했다.
"옳지옳지, 아주 잘 피했어. 좀 나아졌으면 얼굴 좀 보여줄래?"
숨소리가 조금 편해졌다고 판단한 플랑은 마루의 어깨를 붙잡고는 가볍게 뒤집어버렸다. 벽과 바닥이 휙 돌고 나자 마루는 천장을, 뒤이어 플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흘러들어간 마루의 오른쪽 눈에 비친 플랑의 모습은 피를 뒤집어 쓴 귀신 같았다.
플랑은 날렵하게 마루의 상체를 깔아앉았다. 사냥감을 짓누르는 야수와 같은 모습. 인간과 흡혈귀의 관계도 이와 일치했다. 플랑이 한껏 허리를 굽히자 서로의 얼굴은 매우 가까워졌다. 내려다보는 눈은 느긋하게 굴러갈 때, 올려다 보는 눈은 도저히 갈 길을 못 잡고 있었다. 플랑은 그대로 느긋하게 마루의 얼굴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곧이어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힌 채 손톱이 이마의 상처를 후벼대자 마루는 온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온몸이 흡혈귀의 힘으로 짓눌린 상태에서, 신음소리라도 제대로 낸다면 그거대로 대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더욱 더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와 마루의 이마와 눈가를 적셨다. 넓게 흘러퍼지기 전에 플랑은 그걸 손으로 훑어내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구속이 헐거워졌는데도 마루는 얼어버렸다. 자신의 피로 찐득대는 손을 빨아먹는 걸 올려다본다면 누구나 이렇게 될 것이다. 어린 인간의 피냄새에 고양된 플랑은 더 참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 얼굴을 바짝 내밀면서 플랑이 말했다.
"상처는 침 바르면 낫는거 알지?"
마루가 격렬하게 몸부림치자 플랑이 조금 힘을 주었다. 온몸의 뼈관절이 으스러지는 기분에 마루는 축 늘어져버렸다.
송곳니가 돋보이는 입이 가까이 다가오자 마루는 눈을 감았다. 곧 시작될 일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
...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지만 마루의 시간 감각은 헝클어졌다. 플랑은 상처를 핥고, 이빨로 쑤시면서 마루의 피를 게걸스럽게 삼켰다. 쩝쩝대는 소리 속에서 중간중간 흘린 맛있다는 평가는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플랑의 식욕은 막 돋우어진 참이었다. 그리고 흡혈귀가 피를 먹는 법은 따로 있었다. 플랑은 그제서야 입을 누르던 손을 치웠다. 마루가 꺽꺽대면서 간신히 숨을 고르는 걸 내려다보면서 플랑이 말했다. 마루는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피냄새를 맡았다.
"미안. 너무 맛있어서 그러는데, 조금만 더 먹을게."
마루는 숨만 몰아쉴 뿐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플랑의 시선은 저 물 먹은 흐릿한 눈빛에서 작고 연약한 목으로 옮겨갔다. 물처럼 깨끗한 살냄새를 맡아보았다. 피부도 한번 핥아보려던 건 그만두었다. 정말 오랜만에 직접 피를 빨아볼 생각에 들떠 있던 플랑은 그제서야 주변의 변화를 감지했다.
아주 작은 불티가 플랑의 두 눈에 붙어 있었다.
굉장히 작고 미약했다. 플랑의 시선에서 교묘하게 벗어난 불티들이 방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벼락 다발 같은 섬광이 플랑의 눈에 쏟아졌다.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지만, 어둠 한 점 없는 이 방에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찢어지는 비명을 신호 삼아 마루는 플랑을 밀어 던지는 데 성공했다. 눈은 질끈 감은 채, 마루는 단편적인 기억에만 의존해 방문으로 달렸다. 어쩌면 지금 달리는 방향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루는 벽이라도 뚫을 각오로 들이박았다.
저 작은 체구는 기어이 문을 뚫고 나오더니, 그대로 충격에 비틀거리면서 굴러 쓰러졌다. 눈꺼풀 너머로 그림자를 본 마루는 곧바로 눈을 떴다. 바깥은 조명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너!! 잡히면 죽여버릴 거야!!!"
방금까지 당했던 괴롭힘에다가 폭발적으로 큰 주술까지 부린 탓에 마루는 머리를 짓누르는 피로감을 느꼈지만, 제대로 먹혔다는 사실에 기운을 얻어 다시 일어섰다.
방 안은 태양을 직접 바라보는 것 같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플랑의 양 눈에 붙어 있는 불꽃 또한 이것 못지않았다. 플랑은 욕설을 지르면서 온몸을 비틀며 날뛰고 있었다.
방금 전에 목을 물렸거나, 아니면 지금 플랑이 토해내고 있는 온갖 대가를 치르거나. 어느 쪽이건 마루는 더 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포식자의 사냥은 자연의 섭리지만, 피식자의 필사의 저항 또한 섭리니까.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설령 신이 아니라도 좋았다. 누구라도 이 기도를 듣고, 도와준다면, 마루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저 섬광을 계속 지속시키는 건 지금의 마루에겐 무리였다. 움직여야 한다.
절박함이 어두운 공간을 구름과 안개로 가득 채웠다. 빛이 사라지고, 사방에는 어둠과 흐릿함만 남아 있었다.
...
안개가 벽을 타고 흐르는 걸 보면서 마루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기댔다. 이 어둠 속에서 아주 또렷하게, 이 벽이 보였다. 지금 이 안개는 마루의 눈을 가리기는커녕, 어둠을 거둬주고 있었다. 가려진 건 오직 포식자의 눈뿐이었다.
무작정 뛰쳐나온 건 좋았지만, 갈림길을 열댓번은 거치자 마루는 이곳의 넓이를 직감했다. 엄청나게 넓었다. 게다가 자신 외의 인기척을 들은 마루는 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지금 이 자리에 멈춰야 했다.
해야 할 것은 두 가지였다. 플랑의 위치를 파악해서 피하고, 나가는 길을 찾는다는 참 간단한 일이었지만, 말로만 그렇다. 쿵쿵거리는 관자놀이의 맥박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덮었다. 입안이 건조하게 갈라졌다. 동요와 함께 안개가 흔들렸다. 스스로의 압박감에 마루는 기절할 것 같았다.
심장이 아프리만큼 뛰어대서 가슴을 꽉 쥐자 딱딱한 모서리가 잡혔다. 옷 너머로 잡힌 부적이 손바닥을 찌르자 마루는 평소에 자주 하던 걸 했다. 이 상황 속에서 굉장히 쓸데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지금 그에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보통 명상은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만 지금은 상황 문제 때문에 아주 짧게 이루어졌다. 최대한 길고 깊은 심호흡으로 마루는 머리를 식혔다. 흔들리는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두 가지만 하면 된다. 마루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거기 있구나!"
플랑도 추적의 입장에 있는 한 자신의 위치를 숨길수록 좋은데도 당당하게 외쳤다. 거만함? 여유로움? 어느 쪽이건 마루에겐 아주 결정적인 지표가 되었다.
벽, 천장, 바닥에 준비해 두었던 불씨들이 일제히 팽창했다. 안 그래도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플랑은 빛을 느끼자마자 앞을 가렸다. 방금 전처럼 눈을 노리는 건 불가능했다.
한번 당한 방식에 또 당해 주는 인심 좋은 사람은 인간 요괴 통틀어 굉장히 적다. 그리고 플랑은 아무리 봐도 그렇게 인심 좋은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루에게 두 번째 수를 구사할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끄으으응! 이건 또 뭐야!"
불꽃이 올가미처럼 사방의 벽에서 뻗어나와 플랑을 구속했다. 솜털 하나 못 태우는 불꽃은 흡혈귀의 힘으로도 쉽게 끊어지질 않았다. 부술 수 없는 걸 부수려고 하니 당연할 걸지도 모른다. 마루가 가까운 곳에 깔아둔 함정이 제대로 의표를 찔렀다.
안개에 왜곡된 빛을 신호삼아 마루는 최대한 빠르게 날았다. 하지만 길을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리 빨라봐야 무슨 소용일까.
불꽃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주 가늘고 미끄러운 실이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불이 사그라드는 걸 억지로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 한다. 어떻게든 벌어낸 시간은 허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다못해 애매한 실마리라도 찾아야 하는데.
'요괴가 산다고 해도 집이 이렇게 복잡해도 되는 거냐!'
악을 지르고 싶었다. 기억도 안 날 만큼 수많은 회전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마루의 조급함만 부풀어올랐다.
벽, 문, 벽, 문, 벽, 벽. 출구는 없었다. 이 집은 사람을 잡아먹는 미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의 심호흡으로 밀어두었던 생각들이 다시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려 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최대한 억누르던 중, 이 답답한 어둠 속에서 유독 강한 흐름이 마루의 가슴을 뻥 뚫었다. 눈앞이 밝아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 흐름을 똑똑히 본 마루는 무릎을 내려치고 싶은 기분과 목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을 동시에 느꼈다. 뒤에서 안개를 뚫고 날아오는 각양각색의 불빛들을 보자마자 마루는 오른쪽 갈림길로 향했다. 안개 때문에 플랑이 어림짐작으로 난사된 공격들은 애먼 벽에 끔찍한 자국을 남겼다.
'들켰어! 들켰나 봐! 그래도 뭔가 알 것 같아!'
"당장 나와! 봐주니까 이게 자꾸 기어오르고 있어!"
거리가 가까워지자 플랑은 마루가 흘리는 옅은 피냄새를 맡았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정확히 노리기가 난감했다. 게다가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그 빛을 숨긴 건지. 갑자기 플랑의 코앞에 나타난 불빛들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터졌다. 시끄러운 폭죽소리가 고막을 찍어대니 플랑은 마루를 놓칠 뻔했다.
지나가는 길마다 섬광과 굉음을 터지고, 불꽃의 올가미가 플랑을 잠깐 붙잡기를 반복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탈출의 갈피를 잡을 한 순간이라도 더 추적을 늦추기 위해 마루는 숨을 깎아내는 심정으로 불을 뿌렸다.
차라리 뜨거웠으면 뜨거웠지, 온갖 잔재주를 부리는 불꽃은 흡혈귀의 신경을 벅벅 긁어댔다. 플랑이 뿜어내는 화염과 광채가 마루의 등을 날려버릴 기세로 사방에 비산했다.
안개의 흐름이 더 거세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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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전이 발자국처럼 남긴 모습은 처참했다. 강한 충격을 받아 균열투성이인 벽, 고약한 탄내와 연기를 내뿜는 불꽃. 그리고 아무것도 태우지 못한 채 사그라드는 마루의 불꽃. 열기가 공기를 데워 안개가 요동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니 마루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주로 마루에게 닿은 건 화염보다는 비교적 정확하고 빠른 광탄 쪽이었다. 수 차례 스치고 얻어맞은 다리가 풀려버린 마루는 끝내 구름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곳곳이 욱신거리는 상태로 굴러대니 마루는 온몸을 칼로 저미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소매나 바짓자락을 살짝 걷어보면 끔찍한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곧이어 플랑 또한 땅에 발을 디뎠다. 마루는 저 멀리 안개 속에서 플랑이 유유히 걸어오는 걸 보았다. 불에 달군 것처럼 체온이 엄청나게 달아올랐는데도 마루는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거리를 둔 채 멈춰 선 플랑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후, 오랜만에 뛰어노니까 재밌네. 근데 너 진짜 인간 맞아?"
"아윽... 그건 왜?"
"굉장하니까! 어린애가 재주도 많고, 근성도 있고. 그 성격만 고치면 딱일 텐데."
처음엔 엄청 열받아서 죽여버리려고 했고, 실제로도 마루는 몇 번이고 죽을 뻔했지만 이 정도까지 버티자 플랑은 감탄이 나왔다. 그렇기에 플랑은 좀 더 노력을 할애하기로 했다. 장미 가시를 정리하는 것처럼, 매를 좀 베풀면 될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다 없던 걸로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갈까? 많이 힘들어 보이네."
"싫어!"
"줘도 안 받겠다고?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
"세상에 누가 이런 걸로 후회해!"
"으이구, 쬐끄만한 게 고집은 왜 이렇게 센 건지."
돌아가 봤자 결국 장난감 취급이라는 걸 마루는 알고 있었다. 저 정도 반항은 예상했다는 듯 플랑은 매를 들었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 얼마나 다치건 치료할 방법이야 윗쪽에 가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플랑의 낙관과 함께 손 위의 불덩이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마루는 여전히 일어서지 못한 채 플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이 공포로 떨리고 있었지만 마루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빨이 뿌득뿌득 서로를 긁어댔다.
마루에서 플랑 방향으로, 안개가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둘은 희멀건 눈보라를 보는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빗줄기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 플랑은 기분나쁘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후우우웅
실내인데도 바람소리가 들려 왔다. 안개가 움직이자 바람이 부는, 원인과 결과가 정반대인 일이 일어났다. 플랑은 마루의 소행이라 눈치챘지만 신경쓰진 않았다. 그렇게 세지도 않은 역풍이 불건 말건 서지도 못하는 표적을 빗맞출 일은 없었다.
공을 던지는 것처럼 단순하게 일직선으로 불덩이가 던져졌다. 이윽고 가스를 만난 것마냥 불길이 복도를 꽉 채웠고, 마루는 얼굴이 익는 기분을 느꼈다. 플랑은 정말 안 죽을 만큼 힘조절을 한 걸까. 아니면 이걸 받아내고 죽지는 않을 거라고 마루를 고평가한 걸까.
어느 쪽이건 마루는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야 했다.
불길에 맞서는 역풍이 순식간에 강해지고 자연히 안개가 불길을 향해 뛰어들었다. 마루의 의지에 맞춰 움직이는 안개가 거센 바람소리를 외쳤다. 안개가 일제히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플랑은 충격의 직전, 거대한 파도가 한껏 몸을 쳐올려 불길에 맞서는 걸 보았다. 불이 파도와 부딪치기까지는 너무 짧은 시간이 걸렸고, 플랑은 저 파도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떠오르질 않았다. 열과 급류의 접점에서는 이곳의 화염과 안개와 바람을 모아 일제히 터뜨린 것 같은 폭발이 일어났다. 묵직한 증기가 둘을 날려버렸다.
마루는 무모하게도 폭발 직전까지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청각을 담보로 걸면서까지 집중한 소리는 바로 돌풍에 덜컹거리는 문소리와, 공기가 좁은 환기구를 내달리면서 일어나는 독특한 바람소리였다.
길을 제대로 찾아왔는지, 큰 소리가 마루 바로 뒷쪽에서 들렸다. 처음에는 안개의 흐름, 그 다음에는 바람 소리. 이것만으로 길을 예상한다는 건 마루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강한 확신이 마루의 등을 떠밀었다. 나이에 걸맞는 아주 확고한 믿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구름과 불꽃으로 온몸을 감싼 마루는 충격파에 몸을 맡겨 뒤로 날아갔다. 구르는 기세를 타 땅을 박찬 마루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눈 앞의 커다란 문을 똑똑히 보았다. 두 개의 대문이 연결되어 있는 커다란 출입문이었다.
증기가 완전히 걷히자 플랑은 인내심이 팍 깎여나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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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 이미 나오고 있었다. 마루는 흐려지는 눈을 문지르면서 어떻게든 앞을 똑바로 보려고 했다.
문을 열고 나간 다음엔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희망이 구름을 밀어올렸지만, 한참이 지난 지금도 마루의 눈에 보이는 건 붉은빛뿐이었다. 온 힘을 다해 빠져나온 건 많고 많은 구획 중 딱 하나였다. 마루의 사력을 다해봤자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거리를 좁힌 플랑은 비행의 기세를 실어 그대로 마루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나동그라진 채 혼절한 마루를 깨운 건 뒤통수를 깨는 아픔이었다. 플랑은 마루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마루는 깨어나자마자 다시 기절할 것 같았다. 이번에도 플랑은 마루를 깔아앉고 있었으며, 한술 더 떠 멱살까지 쥐고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물어뜯겠다는 듯, 플랑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붉은 눈동자 속은 시뻘건 불꽃이 타고 있었다.
"이게 봐주니까 자꾸 기어오르네? 진짜 죽고 싶냐!"
몸이 찌릿거리면서 제대로 안 움직이는데도 버둥거림은 멈추질 않았고 부릅 뜬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플랑이 지금까지 마루를 살려둔 건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한주먹도 안되는 놈이 기세 하나는 도무지 꺾이질 않았다.
지금까지 파악한 마루의 특징들 중 플랑은 저 반항심 가득한 눈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짜-악
얼음에 살이 늘러붙은 것처럼 뺨이 얼얼했다. 알아챌 새도 없이 한 번 더 짜악하는 소리. 얼얼했던 뺨은 이내 피부를 벗겨낸 것처럼 쓰라리고 뜨거워졌다. 마루의 눈빛이 꺾이자 만족스럽다는 듯 플랑은 계속해서 양 뺨을 후려갈겼다.
뺨을 치는 것치고는 너무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양팔이 묶여 있는 마루는 고개라도 비틀어가며 저항했지만, 그럴 때마다 플랑은 그의 앞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후려쳤고, 머리카락이 몇 가닥 떨어져나갔다.
때리고 또 때렸다. 하루종일이라도 해주겠다는 것처럼. 플랑은 마루가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열심히 때리는 방식을 구상하고 바꾸기도 했다. 마루는 눈이 질끈 감겼다. 최소한의 저항도 못한 채 귓구멍도, 눈꺼풀도, 어금니도 꽉 닫은 채 마루는 플랑의 손을 받아아먄 했다.
드디어 플랑이 듣고 싶던 소리가 나오자 잠시 찢어지는 소리가 그쳤다.
"으으으...! 흐으으윽...!"
"어이구, 울어? 그렇게 아파? 뺨 맞는게 그렇게 서러워?"
플랑이 살짝 마루의 눈꺼풀을 문지르자 그 사이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나왔다. 플랑의 손바닥이 그걸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거 잘됐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맞자!"
짜-악
눈물이 묻은 손바닥이 더 격렬하게 살갗을 유린했다. 재차 흘러나온 눈물은 손바닥을 거쳐 마루의 뺨으로 돌아왔다.
플랑은 지금까지 쌓인 분이 싹 풀렸다. 여기에 짠물까지 흘러나오자 새로운 재미가 더해졌다. 때리면 때릴수록 몸 속에서 뜨겁게 구불거리는 쾌감이 느껴졌다. 여러모로 보통 인간보다는 특별한 것 같았지만 단순한 싸다구 몇 번에 이런 꼴이 됐다는 것에 플랑은 아이러니한 재미를 느꼈다.
마루는 흥건한 눈꺼풀을 꽉 닫은 채, 우는소리를 씹었다. 채찍질 같은 소리가 마음을 찢어발겼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터지려는 소리를 참는 것뿐이었다. 소리를 지르면 뭔가가 완전히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둘 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한창 재미를 보고 있던 플랑은 갑작스럽게 떠밀리면서 마루의 위를 벗어났다. 하지만 자유를 얻었는데도 마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마루는 뺨을 때리는 환청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마저도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마루는 누군가의 부축에 이끌려 그곳을 벗어났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이제서야 마루는 불안에 떨리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게 자신의 숨소리가 아니라는 건 조금 뒤에야 알아차렸다.그 누군가의 손끝이 뺨에 닿자 마루의 온몸이 고통으로 경련했다. 경련에 놀라 물러났던 손은 다시 용기를 내어 마루의 얼굴로 다가갔다.
여전히 쓰라리게 아프긴 했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조금도 해하려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원함에 뜨거운 통증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마음은 포근해졌다.
눈을 뜰 용기가 생겼다. 지금 옆에 있는게 누구건, 마루는 친구의 옆에 있다고 확신했다. 정신이 돌아온 마루는 저 푸른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기가 묻어나는 조용한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네가 왜...?"
치르노는 마루와 마찬가지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루가 눈을 뜨자 아주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숨결이 안면에 닿자 마루의 불안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나중에 물어보자, 라고 생각하면서 마루는 친구에게 기댄 채 처음으로 쉬었다.
인간과 요정은 함께 어느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 흡혈귀의 넓디 넓은 저택에서, 이곳이 마루가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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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내년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