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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간결하고 부담없이 보기 좋은 리뷰를 했음에도 더 상세한 리뷰를 원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서 자세히 씀.
이 애니메이션이 무엇이었는지는 후반으로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걸 알기 위해 우선 결말 부분부터 보자.
그 때 지로가 하는 말은 처음 봤을 때의 "나오코!"와 떠나보낸 뒤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아리가또!"뿐이다. 동시에 지로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는데, 이 장면을 제외하면 지로가 눈물을 흘리는 건 작품 전체를 통틀어 나오코가 각혈했던 순간밖에 없어, 지로에게 나오코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어 준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없다.
처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이미 결핵이 있어 결혼 전에 치료부터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고원 요양원을 더 빠르게 권장한다는 선택지를 의식조차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병세가 심각해져서 그때에라도 요양하게 된 나오코의 치료를 오히려 포기하도록 했다. 의사의 재능도 자격도 애정도 의지도 있었던 지로의 동생이 그걸 지적했지만 지로는 그마저도 외면하고 도망쳤다. 만약 동생이 못 미더웠다면 다른 의사에게 물어보거나 동생의 인맥 소개라도 받아볼 수 있었을 텐데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질 못했다'는 후회도 없고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늘릴 수 있었다'는 반성도 없다. 진심이 드러나는 지로의 심상세계에서조차.
이를 통해 지로에 대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인과관계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모습 그대로 끝내 정신을 못 차린 상태가 이 애니메이션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해, 아름답게 연출된 분위기와 달리 지로는 피해자가 아니라 아내에게 '가해'를 해서 죽게 만든 주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직접적인 폭력이 아닐 뿐, 가해의 범위를 아무리 줄여도 고원 요양원의 공기를 마시지 못하게 된 아내를 곁에 두고 담배를 피워 간접적으로 아내의 수명 단축에 가담했다는 가해만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이는 지로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외면하는 지로의 멍청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가해의 결과물을 마주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만 보려는 시선이 지로에게 있었어야 할 반성까지도 가려 버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곁에서 보려는 지로의 고집이 없었다면 지로의 가해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더 없이 선명하게 지로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심상세계의 음악과 배경과 분위기를 통해, 지로의 실체는 자신의 잘못조차도 미화해서 보는 간접적 가해자였음이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셈이다.
아무리 정치적 스탠스가 극단적이라도, 심지어 일본제국을 사랑하며 침략이 정당하다는 관점으로 모든 가해를 부정하려 한다 치더라도 이 아내에 대한 가해만은 가릴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지로의 일관성을 비판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 러브스토리는 필요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할 말이 아리가또 뿐이냐?'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작품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서, 초반의 관동대지진 시퀀스에서는 지진 효과음을 사람 입소리로 대체한 것을 통해 우선 이 작품의 '소리'가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현장에서 같이 있던 일본인이 휘말렸다는 걸 확인하고 함께 구명 작업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프로니의 그림을 보자마자 지로는 상상 속에서 물 위의 카프로니가 한가하고 평화롭게 비행기를 띄워보는 장면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관동대지진의 불길이 아직 꺼지지도 않았음에도.
뿐만 아니라 카프로니가 상상 속에서 말한 "아직 바람은 불고 있는가, 일본의 소년이여?"에 대해 지로는 현실에서 관동대지진의 피해를 막으면서 "네,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어요"라는 혼잣말로 대답한다. 지로에게 상상과 현실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는 걸, 관동대지진의 재난이 주변 사람과 재산을 불태우는 와중에도 스스로 그걸 수습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한가하고 아름다운 상상이나 하고 있다는 걸 초반부터 분명히 드러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작품이 아직 초반부일 때, 상당 시간 비행기 제작에 돌입하고 그 시험비행 실패까지 확인한 이후쯤 시점에서, 카스텔라를 한 명에게 줘 봤자 위선밖에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밖에는 굶주린 아이들이 잔뜩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나라는 왜 이렇게 가난하지?"라는 말을 한다. 이 때에 더욱 가난한 식민지 한국 식량 사정을 의식해야 한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지로는 지로가 직접 접하지 못했던 타국 사정만이 아니라 지로가 직접 접했던 은행 파산 사태까지도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언급도 추측도 없이 넘어간다. 지로가 비행기 제작에 돌입하기 전 시점에서 타고 움직였던 차의 이동 경로를 방해받으면서까지 자기 눈으로 그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에서 돈을 못 찾으면 더욱 가난해지는 결과에 영향은 주겠지' 같은 일차적인 인과관계조차도 떠올려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라는 걸 120분짜리 영상물의 초반 45분 시점에서 한 번은 짚어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 이후에 독일 견학이 시작되고, 비행기 제작자로서 본격적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전후관계를 파악하려면 할 수 있었던 단서들은 전부 이 시점부터 주어진다.
그중에서도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낭만적이라는 평을 받는 이 작품에서 지로든 시청자든 간에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장면으로, 독일 길거리에서 도망가던 독일인을 단체로 구타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 주목한다면 그건 잔잔하다는 분위기로 넘어갈 수도 없고, 낭만적이라는 감상으로 넘어갈 수도 없다. 지로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연애사에 필요한 장면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갔던 비행기 격납고에 얻어맞는 그 남자도 있었다'는 친구의 발언을 통해 독일 비행기 업계의 어딘가가 폭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은 추측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지로는 "뭘까?"라는 말만을 남기고 그냥 지나갈 뿐이다. 한 다리 넘어서 전해듣는 정보가 아닌 구체적인 폭력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직접 경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인지 이후에 파편적으로 얻게 되는 정보들도 전부 그냥 넘어가게 된다.
- * 융커스 박사는 독일 견학에서 지로를 막지 못하도록 한 마디 도움도 준 사람이고, 지로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독일의 비행기 개발자다. 하지만 정부와의 대립으로 인해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 * 융커스를 쫓는 독일 정권은 깡패 집단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중국과의 전쟁도 잊고 만주국 창설도 잊고 국제 연맹 탈퇴도 잊고 세계를 적으로 만든 것도 잊은 일본은 파멸할 것이라고 하면서, 독일도 파멸할 것이라고 유사한 성향으로 묶어서 표현하는 이야기도 듣는다.
- * 융커스 박사처럼 지로 역시 특별고등경찰(사상범 전문 비밀경찰)에게 쫓기게 된다. 그럼에도 지로는 자신이 왜 쫓기는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 맥락에선 사족 같은 것이지만 근대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가 운전수에게까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 * 지로와 이야기를 나눴던 위의 카스토르프라는 독일인도 쫓기는 입장인데, 지로는 위의 일을 겪은 이후에도 '카스토르프 씨는 왜 쫓기는 걸까?'라는 의문만 제기할 뿐 인과관계에 대해 아무 추측도 해보지 못한다.
- * 일본도 독일도 파멸할 거라는 이야기는 독일이 또 전쟁을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최후반부 친구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일본도 중국, 소련, 영국, 네덜란드, 미국과 전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로 스스로도 '파멸이군.'이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까지 시청자가 앞뒤를 따져본다면 확실하게 '독일같은 일본은 독일처럼 사상범을 뒤쫓기도 하고 독일처럼 전쟁하다가 독일처럼 파멸한다'고 묶이게 된다. 그럼에도 지로에겐 위 정보들이 손톱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내적인 고뇌나 반성조차도 하지 않는 성격임이 점점 분명해진다.
동시에 음악을 통해 이 작품의 '분위기 연출'은 지로의 심상과 일치한다는 것도 점점 분명해진다. 시종일관 한가할 뿐 아니라, 관동대지진 때의 골절과 독일에서의 집단구타 등 타인의 불행 장면에선 전혀 재생되지 않는 음악이 나오코가 각혈할 때에만 더없이 슬프고 애절한 음악으로 바뀌는 등 지로의 심리만을 반영한다는 걸 판단할 수 있는 상황 조합이 다양하게 반복되기 때문.
그렇기에 이 작품의 분위기는 관객을 자연스럽게 몰입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분위기 연출의 중심이 된 지로를 분위기에 휘말리지 않은 타자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도록 유도된 측면이 있어, 대충 잔잔한 분위기의 러브스토리 등을 중심으로 본다면 결국 재미없었다는 평가가 나오게 되는 원인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작중 '현실'에서 지로의 마지막 모습은, 자기 전투기가 비행 성공한 순간에 멍하니 허공을 보면서 상사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다가 상사가 억지로 잡아끌어 몸을 돌려준 이후에야 바로 앞까지 걸어온 조종사와 악수만 하게 되는, 세상을 너무 외면하다 보니 혼자서는 인생 살기도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반면 이어지는 지로의 내면세계에서는 파괴된 자기 전투기를 인정하는 듯 그 위를 걸어가다가도 곧 그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 잔디만이 넓게 펼쳐진 들판에 도달하고, 자신의 전투기를 탄 조종사에게 멋있게 인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직전 현실에서 보여준 모습과 비교하면 '사회 부적응자의 망상' 비슷하게 욕을 먹는 상황과 매우 유사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기 내면세계에서 카프로니 백작에게 '비행기는 아름다워도 저주받은 꿈이야'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전투기를 만들었음에도 전투기가 아닌 비행기라고 뭉뚱그리고 있고, 그게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의 인과관계도 전부 외면한 채로 '비행기가 다 그렇지'비슷한 위로의 말만 스스로 되새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 언급한 나오코와의 재회 부분으로 이어진다.
생존에 치열한 요즘 사람들에겐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어서 따로 강조하자면, 지로는 나오코와 결혼하기 직전에 상사로부터 진중한 목소리로 '그녀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고원 요양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비행기를 포기하고 그녀의 곁에 있어줘야 한다'며 그걸 거부한다. 상사에게 '그건 사랑이 아닌 이기심 아닌가?'라는 노골적 비판을 듣고서도 재차 그걸 거부한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할 수 있는 걱정과 달리, 이 경우 지로가 일을 하지 않으면 생존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거부하는 게 아니다. 직장 상사부터가 '일을 때려치지 못하겠다는 건 이기심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빈부격차상으로 지로도 나오코도 압도적으로 부유한 계층이라 먹고 사는 것부터 문제가 생길 걱정은 없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지로는 '물러서기 딱 좋은 명분'을 눈앞에 두고도 끝끝내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과 독일의 유사성'에 대한 파편적 정보를 거의 다 얻은 뒤임에도 불구하고.
지로의 맨 마지막 심상세계까지도 끝나는 시점에서 뜨는 자막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캡쳐할 수 없는 넷플릭스 대신 다른 폰트로 비슷하게 옮겨 놓은 것인데, 예고편에서 공개한 것과는 글 구조가 조금 다르다.
호리코시 지로
호리 타츠오 에게 경의를 담아
라고 나열되어 있어, 호리 타츠오에게 경의를 담은 건 확실하지만 호리코시 지로에겐 경의를 담은 것 맞나? 하는 의문이 사라질 수 없는 구조로 글자가 적혀 있다. 호리 타츠오의 '바람이 분다'라는 소설에는 호리코시 지로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나오코와 매우 비슷한 결핵 여성 세츠코가 한 소설가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담겨 있을 뿐이라고 하기 때문에 호리 타츠오에게 경의를 표한 것만으로는 호리코시 지로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작중의 호리코시 지로가 자신과 비슷한 이야기를 소설화한 호리 타츠오에게 경의를 표했다'라는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한 텍스트 구조가 나와 있는 것이다. 작중 현실에서 마지막으로 완성된 기체는 구시단좌전투기(1935년 2월 초도비행)고, 호리 타츠오의 소설 '바람이 분다'는 1936년12월에 처음 발표되었기 때문에, 제로센이라면 시기가 안 맞지만 작중의 완성품이라면 그런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와 달리 예고편에는 '호리코시 지로'와' 호리 타츠오에게 경의를 담아'라고 '와'라는 한 글자가 더 추가되어 있는데, 호리코시 지로의 이름이 뒤쪽이었다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게 확실하겠지만, 앞쪽이라면 호리 타츠오에게만 경의를 표했을 뿐 호리코시 지로는 경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껴넣기만 했다는 해석도 불가능하진 않다.
넘어가기 쉬운 작은 단서라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본작의 메시지를 이해한 이후라면, 이 작은 차이도 그냥 대충 넘어가진 못하게 된다.
'호리코시 지로에게'라는 명확한 지칭이 왜 안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이 작품은 그 시대를 다뤘음에도 반전주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다. 대신 이 작품은 지로의 인생을 통해, 실상을 외면하고 머릿속으로 미화하려는 사람의 의식을 비판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게 세상을 외면했기 때문에 간접적 가해자가 되었음에도 자각하지도 못하고 반성하지도 못하는 한 인물의 정신세계를 비판하고 있고, 또한 감독의 과거 역시 그런 정신세계였다는 고백과 비판을 동시에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그 시대를 아름답게만 본다는 것은 분명 단서 정도는 잡을 수 있었던,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야 했던 여러 가지를 외면하는 것이다'라는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그리고 또한 (아마도 일본의) 관객에게도 그걸 전달하기 위해, 대충 보면 아름다워 보인다는 감상이 느껴질 수도 있는 지로의 주관적 낭만을 가득 채운 형태로 이 작품을 완성해냈다. 그럼에도 독일의 집단 폭력, 당시의 일본이 히틀러 정권과도 같다는 발언과 정황들, 지로의 가해 장면 같은 것도 짧지만 분명하게 언급해 놓아서, 끝까지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보인다는 감상을 남기려면 그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해야만 하는 작품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호리코시 지로가 외면하지 말았어야 하고 감독 자신도 과거에 외면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들을, 이 작품을 보는 관객 역시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전하기 위해 지로의 주관적 낭만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문제의식의 편린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밟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모순된 미화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더 깊은 내막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2013년 일본은 대충 분위기에 휩쓸린다면 우익들이 주장하는 여론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결국 간접적 가해를 했다는 인과관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이중구조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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