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수정란이 분화하는 과정 같다.
신지는 보완을 거부했다. 거대 레이의 날개는 사라지고, 대신 초호기에게서 빛의 날개가 새롭게 돋아난다. 보완을 주도한 것은 신지의 의지를 업은 아담+릴리스였으나, 그 보완의 끝을 맺는 역할은 신지가 탄 초호기가 행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모은 검은 달이 쪼개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발하여 지구 전체에 영혼의 빛을 흩뿌린다.
역할을 마친 거대 레이의 육체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아담과 릴리스의 영혼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영혼을 잃은 육체는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조각이 나 지구로 추락하게 된다.
거대 레이가 그 형태를 잃고 땅으로 추락한다.
초호기의 입에서, 코어를 통해 융합한 롱기누스의 창이 도로 빠져 나온다. 초호기는 양손으로 창을 잡더니, 그 형태를 바꾸는데, 이 부분의 묘사가 분명하지 않아 해당 장면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품의 초기 기획안을 통해서인데, 본래 이 장면은 ‘초호기가 롱기누스의 창을 파괴’하는 부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신의 도구를 에반게리온이 파괴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아서일까, 본편에서는 이 설정이 파기되었으나, 어떻든 여기서도, 초호기의 이 행위를 통해, 양산기가 지니고 있던 복제 롱기누스의 창이 소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획 초안과 크게 다른 설정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창의 바뀐 형태도 ‘매듭’에 가깝기 때문에, ‘봉인 의식’의 일종이 아닌가 싶다.
복제 롱기누스의 창도 파괴
복제 롱기누스의 창들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자. 대본에서는 ‘창이 LCL화 되어 터진다.’고 표현해 놓았다. 자세히 보면, 창들이 소멸하기 직전에, 아주 잠깐, 릴리스의 육체와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연출 때문에, 복제 롱기누스의 창이 실은, 분실한 줄 알았던 릴리스 세트의 롱기누스 창을 제레가 극비리에 9개로 나눈 것이라는 가설도 나왔다. 일리는 있으나 다른 근거는 없다. 그러니 단순하게, ‘리린이 만든 창’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연출로 보는 게 무난하다. 리뷰 13편에서 양산기의 창들이 롱기누스의 창을 카피한 것임을 밝혔으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작품 내의 최소한의 묘사는 필요했을 테고, 그게 바로 이 부분이라는 거다.
양산기의 최후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저 창들이 파괴되었냐는 것이다. 어차피 그 안에는 영혼도 없는데 말이다. 연출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창의 소멸과 함께 양산기의 코어가 변색하고 육체의 부식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인데, 그런 과정이 왜 필요한 것일까? 아마 초호기가 창의 변형으로 그렇게 만든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나는 이 모든 게,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기존에 존재하던 에바를 포함해 ‘신에 필적하는 도구’를 영구히 봉인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양산기뿐만이 아니다. 의식의 마지막에, 초호기는 스스로 날개를 접더니, 이내 양산기와 같이 육체의 빛을 거둔다. 그 안의 유이와 함께 영원히 잠이 드는 것이다. 그녀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일까, 레이가 초호기를 가만히 주시한다.
그리고 이별
그렇다면 그 ‘봉인 과정’은 어째서 필요한가? 롱기누스의 창으로 말하자면, 우선은 ‘시조 민족’에 의해, 아담과 릴리스 등 ‘생명의 시조’를 제어하기 위한 도구였고, 그 활용 방법으로는 AT 필드의 무조건적 조절과 보완 기능 등이 있었다. 결국 초호기가 신의 도구인 롱기누스의 창을 파괴한다는 것은, 신지가 살게 될 새로운 지구에서는 타의에 의한 보완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자 선언인 셈이다.
생각해 보자. 이제 지구에는 검은 달도, 하얀 달도 없다. ‘임팩트’의 원인은 ‘1행성 1씨앗’ 원칙을 어긴 데서 나왔고, 결국 여태 지구에서 발생한 모든 재앙은 두 씨앗의 ‘금지된 병존’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사도와 인간은, 그러니까 아담과 릴리스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과는 별개로, ‘신이 허락하지 않은 관계’였던 셈이다. 그러나 엔드 오브 에바를 기점으로, 지구에는 어떠한 달도, 마음을 제어할 롱기누스의 창도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지구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존재의 정당성’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아담이든, 릴리스든, 전혀 다른 존재이든, 그 누가 지구에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밑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것은 에반게리온이 담는 ‘실존의 메시지’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동시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의 ‘에바 없는 지구’가, 어쩌면 엔드 오브 에바에서 신지가 아픔을 딛고 진정 원하게 된 바로 그 세상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초호기의 이 의식은, 신지가 ‘현실과의 대면’을 위해 ‘꿈과의 완전한 이별’을 추구하는 과정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넓게 보면 엔드 오브 에바는, 신지가 에반게리온을 영원히 떠나 진정한 의미의 현실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따라서 에바에 다시 탑승할 여지를 남기게 된다면 그것은 꿈과의 결별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또 하나, 신지에게는 레이 또한 꿈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꿈의 끝’은 ‘레이와의 작별’도 수반해야 한다. 아픈 이별이 되겠지만, 그녀를 곁에 두면 신지의 지구는 완전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이는 이제 ‘I need you 시퀀스(이하 파이널 시퀀스)’에서 그에게 잠깐 얼굴을 비출 때 빼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존재의 소멸, 아마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녀는 시간과 공간을 거스를 수 있기 때문에 죽는다는 의미 자체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최소한 상징적인 선에서라도, 신지 곁을 떠나는 것 같다. 리뷰 9편에서 밝힌 대로, 아마 아담의 영혼과 함께 말이다.
이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가, 엔드 오브 에바의 초안(6차 원안)에 나오고 있다. 초안은 엄밀히 완성작과 다르기 때문에 작품 해석에 남용하면 곤란하지만, 감독의 생각과 연출 의도를 추리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은 될 수 있기 때문에 짚을 필요가 있다. 초안에서는 이 부분에 추가 장면이 있었다. 신지가 마지막으로 레이와 대화를 나누는데, 꿈의 끝에 선 신지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왜 우냐는 레이의 말에 신지의 대사.
“네가 내 곁에 있어서야. 아직 레이가 내 옆에 있잖아.”
신지의 말에 당황한 레이는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라 말한다. 그 때 2대 레이의 환상이 등장하여 그녀에게 ‘웃으면 된다.’고 가르쳐 준다. 장면 마무리.
결국,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신지가 꿈에서 깨기 위해, 아픔을 각오하고 레이와의 작별을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로 거룩한 성장임을 알기 때문에, 레이도 기꺼이 웃으며 그를 보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레이 "진실은 마음 속에 있어."
카오루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말이지."
레이 "그 새로운 이미지가, 상상하는 힘이, 인간의 미래를,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 가니까."
카오루 "단,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어."
레이 "그러니까, 잃어버린 자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는 거야."
유이 "걱정할 것 없어. 모든 생명에겐,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어. 살아가려는 생각 하나면, 어디든 천국이 될 수 있단다."
"왜냐하면, 살아 있잖니! 행복의 찬스는, 어느 곳에나 있단다."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가 있는 한, 괜찮아."
현실을 맞이하기 위한 의식의 끝에서, 레이, 카오루, 유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에반게리온 주제의 핵심이라 해도 좋다. 그 의미 또한 워낙 구체적이고 분명하여 따로 짚을 필요도 없는 수준인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해석하려는 많은 이들이 이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어 주의를 주고 싶다. 곧 다룰 파이널 시퀀스가, 괴리를 느낄 정도로, 시각에 따라 어둡고 기분 나쁜 장면일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작품 초안은 의도적으로 기분 나쁘게 묘사하려는 성격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짧은 장면의 시각에 매여 이 길고 장대한 에바 여행의 ‘결론’을 무시하는 것은 작품 감상에 있어 결코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인류를 위해 스스로 존재를 포기한 어머니 릴리스가, 아버지 아담이,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는 엄마 유이가 ‘괜찮다.’고 했다. 그 소중한 메시지를 무시하고 엔드 오브 에바를 파이널 시퀀스 때문에 비극으로 칭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를 마음에 새겨 둔 채로, 드디어,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으로 향할 시간이다.
해석 여행의 마지막 얘기를 나누기에 앞서,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하나, 이 장면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지 말라. 엔드 오브 에바에서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섰던 부분이며, 작품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장면인 만큼 그 중요성은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다른 장면과 같이 중요할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한 감상이 다른 장면에 대한 감상을 엎어 버리면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둘, 다시 설명할 부분인데, 이 장면은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 자체’에 가치를 담고 있다. 간혹 ‘하나의 답’에 집착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짚고 간다. 에반게리온을 떠나 모든 미디어, 모든 예술에는 무수한 답이 있을 수 있다. 이 짧은 시퀀스 안에도 당연히, 여러 갈래의 해석이 있고, 필자가 제시하려는 견해 또한, 상당히 많은 시각을 융합해 놓은 것이다. 답이 많을 수 있는 수수께끼에 열린 시각을 가져 줬으면 한다. 바로 시작하겠다.
파이널 시퀀스를 해석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다. 파이널 시퀀스란, 구체적으로는 영어 부제 ‘I need you’ 컷에 이어, 컷 넘버 461A에서 시작해 481컷까지 이어지는 장면을 말하며, 간혹 컷 넘버로 표시하지 않는 마지막 ‘종극’ 부분도 포함한다. 다행히 긴 장면이 아니기 때문에 컷 넘버와 캡션 모두 참고하여 꼼꼼히 다룬다.
#461A. 거대 레이의 얼굴 반쪽과, 땅에는 나무 기둥들이 여러 개 박혀 있다. 캡션은 이 기둥을 ‘묘지 기둥과 같은 나무가 여럿 서 있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묘지 기둥이란, 보통 죽은 사람의 무덤 위치를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다만, ‘묘지 기둥이 서 있다.’가 아니라, 굳이 ‘묘지 기둥과 같은’이라 표현한 것으로 볼 때, 단순히 보기만 해서는 그 나무 기둥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애매한 연출을 한 것 같다. 실제로 6차 원안을 보면, 본편 스토리 보드와 달리 ‘묘지 기둥이 서 있다.’고 확실히 표현한다. 즉, 감독이 수정을 거쳐, 최종적으론 일부러 우리가 저 나무 기둥의 정체를 알 수 없게끔, 노린 셈이다.
이 컷을 자세히 보면, 중앙의 기둥 하나가 부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캡션 또한 ‘그 중 하나는 부러져 있다.’고 명시해 놨다. 이유가 뭘까? 어두운 분위기 연출을 위한 것이란 설명이 가장 무난한데, 사실 이 부분도 초안에서 커다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원안에 따르면, 그 ‘무덤 기둥’에는 주요 캐릭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스카가 등장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무덤 기둥을 발로 차 버리는 씬이 있다. 즉, 이 부러진 기둥은 원래라면, ‘아스카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이 컷의 기둥들이 ‘무덤 기둥’이라 확신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덤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생각하고 이 장면을 ‘결국 아무도 신지 곁에 오지 않는다.’는 절망의 암시로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방금 원안을 통해 짚은 대로, 이 기둥들은 오히려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의 상징’에 더 가깝다. 당장 아스카가 부활하여 스스로 그 기둥을 존재의 표식으로 삼지 않았는가. 물론 무덤 상징은 겉으로 보면 누가 봐도 기분 나쁜 생각이 들게 만들며, 결국 이 장면은 마냥 희망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마냥 절망이라 보기에도 애매한 컷이 되었다. 아마 안노는 누구에게도 이 컷이 ‘확실한 희망의 증거’나 ‘확실한 절망의 증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바로 그 이유로, 최종 완본에서는 나무 기둥의 정체를 흐릿하게 숨기려 했던 것이다.
#461B. 나무에 걸린 미사토의 십자가이다. 장면 캡션은 ‘십자가에 녹이 슬어 있다.’고 적고 있다. 십자가에 담긴 상징이라면 역시, 카츠라기 박사에게서 미사토에게, 또 그녀에게서 카지의 유지와 함께 신지에게 전해 왔던 ‘사랑’과 ‘삶의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목걸이가 파이널 시퀀스에서 신지 곁에 남아 있다는 것은, 신지의 마음에 다시 한 번 타인과 맞서고 싶다는 ‘용기’가 숨어 있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저 목걸이는, 혹시 미사토가 신지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희망의 상징이 된다. 솔직히 필자는, 굳이 말하라면, 미사토는 귀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이미 할 일을 마쳤고, 보완이 아닌 방법으로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굳이 이 삶에 미련을 남겼을 것 같지 않다. 대신 그녀가 생전에 한껏 담은 소중한 진심이, 십자가로 신지 곁에 가장 먼저 복귀한 것 아니겠는가.
다만 한 가지, ‘녹이 슬었다’는 점이 걸린다. 우선은, 보완 이후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거란 예측의 근거가 되기도 하며, 상징적으로는, 영원히 반짝일 거라 믿었던 희망이, 차가운 현실 앞에서 조금씩 변색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파이널 시퀀스는, 희망과 동시에 절망의 여지도 남겨 두고 있으며, 특히 이 십자가는,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담고 있는 셈이다.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십자가 그 자체에만 주목할 수도 있겠고, 십자가에 서린 녹에 더 주목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당신이 지닌, 해석의 자유이다.
#460. 목 잘린 양산기의 모습이다. 캡션에서는 ‘지구로 추락한 에바 시리즈가 고대 유물과 같은 상태로 변해 있다.’라 표현하고 있으며, 목이 잘린 것에 대한 멘트는 없다.
#464. 드디어 신지와 아스카의 모습이 보인다. 가까운 곳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를 강조하려는 듯 465컷을 할애하여 두 사람의 손만 따로 묘사하는데, 캡션에서도 ‘두 손은 서로를 만지지 않는다.’고 따로 명시하고 있다.
먼저 이 공간에 대한 얘기를 좀 한다. 물결이 밀려오는 해변, 하나의 물가를 끼고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는 두 사람. 리뷰 26편에서 언급한, 카지의 대사 ‘여자와 남자 사이의 넓고 깊은 강’과 대비를 이루는, ‘서로의 이해에 대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두 사람은 마음의 단절을 겪고 있다. 이렇게 희망의 공간에서 절망을 그리는 식으로, 감독은 다시 한 번 두 가지 이미지를 한 곳에 담아 놨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하늘을 보는 두 사람에게 주목해도 좋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두고 말 한 마디 없는 두 사람의 침묵에 주목해도 좋다.
다시 한 번, 레이의 상징인 달을 비춘다. 그 때 갑자기 물 치는 소리와 함께 신지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 워크가 하향, 신지의 놀란 얼굴.
#468. 물에 서 있는 레이의 모습이다. 아까 설명한 대로, 신지와의 작별 인사로 보인다. 동시에, 이 시점에서, 신지는 진정한 의미로 꿈과 결별하게 되었다. 꿈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모든 달콤한 것을 잃게 되는 아주 따끔한 순간이다.
신지의 시야에 흐릿하게 아스카의 가슴 부분도 보인다. 역시 캡션에서 따로 명시해 둔, 의도적인 연출이다. 신지에게 아스카의 가슴이란, 본능적인 욕구의 대상인 동시에 지금은 죄책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가 아스카의 몸을 똑바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470. 이제 레이는 없다. 꿈은 완전히 끝났다. ‘진짜 현실’에, ‘완전한 타인’이 신지 곁에 있을 뿐이다. 꿈의 마지막 자취를 느끼려는 듯 잠깐 몸을 일으켜 세워 한동안 바다 너머를 바라보던 신지는, 이제 아주 천천히, 옆에 누운 아스카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471B. 다시 한 번, 붉은 바다. 두 마음이 변화를 보이려 한다.
#472. 저 멀리 거대 레이의 손이 보인다. 보완 당시 레이가 신지에게 물었던 것. “그 손은 무엇을 위해 있는 거야?”라는 대사를 생각해 보라. 신지의 손은, 이제 무엇을 할까?
#473. 신지의 두 손이, 아스카의 목을 조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배경에는 캡션이 지시하는 대로, 양산기의 모습이 보인다. 보완 당시의 세계와 보완 후의 현실을 미묘하게 배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을 주는 장면 구성이다.
#475A. 목을 조르는 동안 신지의 표정은 일부러 가려 놓았다. 캡션은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시해 뒀다. 474컷에 아스카의 얼굴이 나오는데, ‘고통을 느끼고 있으나 저항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점이 흥미롭다.
다시 찾은 '너'라는 감촉
#476. 그렇다면 아스카의 손은 무엇을 하고 있나? 붕대를 감은 오른쪽 손이 서서히 들리더니, 신지의 뺨에 그 손을 갖다 댄다. #477. 아스카의 손이 신지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크게 놀라는 신지의 얼굴.
#478. 아스카의 목을 조르던 신지의 두 손에 힘이 빠진다. 흐느끼기 시작하는 신지. 그가 흘린 눈물이, 아스카의 뺨을 타고 흐른다.
#480. 차가운 눈으로 울고 있는 신지를 보는 아스카. 그리고 481컷의, 아스카의 대사.
“기분 나빠.”
파이널 컷. 흰 배경에 검은 두 글자. 종극(終劇).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신지는 왜 아스카의 목을 졸랐는가? 우선 이 질문에는, ‘신지는 이미 성장했던 것 아니었나?’와 같은 의문이 함께 담겨 있다. 즉, 신지가 여기서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게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신지가 보완 과정을 통해 ‘타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을 풀어 쓰면, ‘신지는, 분명히 성장한 줄 알고 있었는데 왜 여기선 여전히 보완 이전과 같이 아스카의 목을 조르고 있는 거야?’가 되겠다.
성장은, 쉽지 않다.
그 질문에 대해 필자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사실 신지는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다.’가 된다. 이것을 불완전하고 애매한 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겠지만, 사실 이런 게 바로 현실이다. 성장에는 그에 응당한 아픔이 필요한 법이다. 신지가 보완이라는 경험을 통해 단번에 성장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마음의 성장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에반게리온은 ‘보완을 거부하고 현실을 마주하게 된 신지는 행복할 것이다’란 우리의 기대를 한 번 꺾음으로써,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 그리고 성장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떠나, 사실 신지는 ‘타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적이 없다. 그가 깨달은 것은 ‘타인은 공포가 아니라 희망이다.’가 아니라(작품도 그렇게 말한 적 없다.) ‘타인은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내 의지에 따라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신지 또한 성장 여부와는 별개로, 타인이 공포의 대상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제, 그것을 과거와 달리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이며, 아직 신지는 그런 부분에서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감상자가 보기에는 아주 부적절한 행동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보완 이후로 처음 만난 타인이 아스카였다. 소중한 꿈과 작별하고, 차가운 현실에 미처 적응도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또 생각해 볼 부분이, 신지가 미사토에게 어른의 키스를 받았던 장면 말이다. 에반게리온이 신지의 성장을 아주 쉽고 간결하게만 그리려 했다면, 아마 미사토의 십자가를 보며 큰 용기를 얻고 굳은 의지로 초호기에 탑승하여 아스카를 구하러 나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신지의 아픔이라는 게, 또 타인에 대한 공포라는 게, 그렇게 말 몇 마디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님은,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현실의 고통으로 2번이나 죽음을 결심한 소년이다. 미사토의 진심을 건네받고도, 신지는 아픔을 극복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미사토의 노력이 헛된 것이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실제로 보완을 거부한 신지에게 가장 큰 힘을 줬던 게 바로 십자가, 미사토의 의지였으니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대개 이런 식이다. 우리 가슴에 씨앗으로 뿌리 내려 아주 천천히 자라는 것 말이다. 결국 파이널 시퀀스 또한, 신지의 ‘피할 수 없는 마음의 정체(停滯)’를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단계 성장한 것은 맞지만, 신지가 정말로 그 깨달음을 체화하기 위해선, 보다 현실적인 아픔에 맞설 필요가 있다. 잔인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 통과 의례가,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를 진부한 설교가 아닌 진정한 성장의 한 단면으로 만든 것이다.
동시에 신지의 목 조르기는, 보완에 대한 남은 미련이기도 할 테다. 결국 같은 말이다. 신지가 보완 당시 느꼈던 깨달음을 확실히 터득하고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현실은 꿈과 다르다. 신지는 여전히, 타인에 대한 공포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 사실 이 ‘마음의 정체’는 TV판의 파이널 시퀀스에서도 다룬 바 있다.
신지 "하지만…다들 날, 싫어하는 거 아냐?"
아스카 "너 바보야?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신지 "그치만…난 내가 싫은 걸.
난 비겁하고, 겁쟁이고, 교활하고, 나약하고…."
"하지만,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여기 있어도 좋을지도 몰라. 그래, 나는 나야. 나로 있고 싶어!"
"나는 여기에 있고 싶어, 나는 여기 있어도 좋다구!"
과연 에반게리온의 주제 의식을 정확히 관통하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엔드 오브 에바에서 그가 레이에게 물었던 질문, ‘여기 있어도 돼?’에 대해 신지 스스로 내린, 값진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 메시지가, 단순히 ‘나는 여기에 있어도 돼.’가 아님을 잘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내가 싫어. 하지만 좋아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어차피 나는 나야. 내가 나를 허락하면 괜찮은 거야.’ 이 메시지는 단순히 ‘나는 내가 좋아.’로 귀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극히 현실적이며,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신지는 여기서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깨달았을 뿐, 여전히 그 스스로에 대해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보완 이후 현실에 눈을 뜬 신지는 여전히, 아니 당연히,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었을 테다. 마음 아주 깊은 곳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의 씨앗만 심어 두었을 뿐, 여전히 그는 자신이, 또 타인이 두려웠다. 그래서 남을 상처 입힌다. 카오루가 경고한 대로이다. 그리고 신지는 이미 그것을 각오했다. ‘상처 입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도 그런 현실을 견딜 자신이 있어서’였다. 아주 중요한 차이이다!
신지가 유이와 작별할 때 뭐라고 했던가. “아직, 행복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 아주 솔직한 대답이다. 행복은, ‘다른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입에 착 붙는 쉬운 말 한 마디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한 건 진짜 타인의 ‘진심’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우선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게 현실이고, 그런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진짜 행복이니까. 그래서 신지의 이 ‘잠깐의 정체’는,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꼭 필요한 과정이겠다. 신지가 다시 이 세상을 선택한 이유가, ‘아프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파도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임을 잊지 말자. 그래서 신지의 이 선택이 더욱 용감하고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진정한 가치를 우리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소년의 마지막 ‘실수’는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신지의 이 실수는, 완전한 타인인 아스카의 ‘진심’을 받는 것을 통해, 소년의 진정한 성장으로 이르게 된다.
신지는 왜 하필 아스카의 '목'을 졸라야 했을까?
신지의 목 조르기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핵심은, 신지가 왜 하필 아스카의 ‘목’을 조르느냐를 추리하는 데 있다. 이미 다양한 경로로 설명했으나, 신지의 이 ‘두 번째’ 목 조르기는, 보완 직전의 ‘첫 번째’ 목 조르기와 연계하여 이해하는 게 좋다. 실제로 장면 구도 또한 의도적으로 거의 동일하게 배치해 놓았다.
쉽게 말해, 신지의 ‘두 번째’ 목 조르기는, 보완 직전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마저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이 부분에서 아까 언급한, 신지의 ‘보완에 대한 미련’을 엿볼 수 있다. 신지 입장에선,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게 곧 보완의 시작이기도 했지 않은가. 이제 막 꿈에서 깨어 현실을 마주한 신지에겐, 시야에 잡힌 아스카, 즉 완전한 타인의 공포가 크게 두려웠을 법도 하다. 레이도, 카오루도, 엄마도 없이, 이제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됐으니까.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완에 대한 남은 미련을 발현한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하나 더. 신지의 목 조르기는, 아스카의 마음에 대한 ‘신지의 오해’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목 조르기 장면에서, 신지가 보완을 선택하게 만든 건 바로 아스카였다. 실제로 아스카는 명백히 보완을 거부하고 있었음에도, 신지는 그녀가 거부한 게 다만 ‘자신의 마음’이라 치부했고, 결국 아스카 역시 보완을 원한 것이라 착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보완 중에 아스카가 했던 말이, 신지에게 큰 충격을 줬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너하고만은…죽어도 싫어!"
많은 감상자들이 해당 대사에 대해 오해한 것과 같이, 신지 역시 꼭 같은 오해를 품고 있었다. 아마 안노가 일부러 노린 것일 테다. 아스카의 입장에서 저 말은 사실, 신지에 대해 타인으로서의 미련을 표시한 건데, 신지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도 같았다. 아스카는 그저 너와 나의 경계를 잃는 게 싫었을 뿐인데, 신지는 아스카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부했다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이 해변은, 말하자면 그 사건 이후, 두 사람이 인간의 형태를 찾고 처음으로 다시 마주한 공간이다. 신지는 아마, 아스카가 여전히, 그를 증오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존재하는 우주에서 그녀를 지우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까 언급한 대로, 이 컷의 캡션은 아스카가 ‘저항하지 않는다.’고 명시해 놨다. 첫 번째 목 조르기 때에도 그랬다. 아스카는 신지에게, 왜인지 목을 졸릴 때만큼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AT 필드가 미처 회복을 마치지 않은 탓일 수도 있고, 결국 신지의 뜻에 따르겠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지 입장에서는, 그녀의 무저항이, 그의 오해를 확신으로 만드는 것과도 같다.
저항하지 않는 그녀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말이다. 이 시점에서 신지가 정말 바란 것은, 아스카의 ‘저항’이었던 게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는, 아스카가 저항하는 걸 보기 위해, 일부러 ‘목’을 조른 게 아닐까? 신지가 첫 번째로 아스카의 목을 조를 때, 그녀가 저항하지 않은 것은, 신지 입장에서는 곧 ‘보완의 당위성을 부여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혼자 뜻으로 보완을 거부한 신지는, 아스카에게 한 번 더, 그 때와 같이 ‘대답’을 요구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아스카가 저항한다면, 그의 시각에서 볼 때, 그녀가 신지와 함께 있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자, 그렇다면 아스카는, 그런 신지에게 무엇을 줬는가? 저항? 아니면, 죽음? 둘 다 아니었다. 그녀가 신지에게 선사한 것은 바로, ‘어머니의 손’이었다.
신지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레이 말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스카를 보러 온 것일 수도 있다. 레이는 아스카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고,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마저 다할 수 없는 ‘어머니 역할의 부여’란 걸 설명한 바 있다. 파이널 시퀀스에 복귀한 아스카가 눈과 팔에 붕대를 매고 있는 건, 물론 양산기와의 전투 이후 본인의 회복을 상상한 이미지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실제로 같은 부위(방향은 반대)에 붕대를 맸던 소녀가 또 바로 레이였기 때문에, 이 장면은 레이의 유지가 그녀에게 전해져 있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주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신지가 들고 있는 미사토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하며, 아스카가 지니고 있는 레이의 붕대는 ‘어머니의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스카는 얼핏 레이의 뜻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결국 이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주 감동적인 방법으로, 레이가 그녀에게 부탁한 어머니의 역할을, 조용히 수용했음을 우리에게 귀띔해 준다.
눈물을 흘리는 신지
아스카의 그 손길에, 신지는 비로소 자신이 여태 지녀 왔던 모든 생각들이 한심한 오해였음을 깨달았을 테다. 가장 먼저는, 첫 번째 목을 조를 때의 그 아스카가, 실은 지금 내 앞에 누워 있는, ‘완전한 타인’인 아스카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실제로 당시의 아스카는, 정확힌 신지의 마음에 존재하는 아스카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차갑게 신지를 거절한 이유는, 신지가 스스로를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아스카가 전부라 생각했던 신지는, 지금 자기 옆에 누운 아스카 또한 동일 인물이라 여기고 목을 졸랐던 건데, 명백한 타인인 아스카는 오히려, 그에게 어머니의 손으로 볼을 쓸어 주었다. 괜찮은 거니, 하고 마음으로 물어 주었다. 타인은 공포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희망에 더 가까운 존재였음을, 이렇게 멀리 돌아서, 이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던 거다. 성장한 소년은 과거의 실수가, 또 깨달음을 얻은 이 부끄러운 방식이 안타까운 나머지, 끝내 오열하고 만다. 그 눈물은 아스카의 볼에 닿았고,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나눠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안노는 이 감동 일로의 상황을 아스카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또 한 번 비틀었다.
"…기분 나빠."
얼핏 알 수 없고 이상한 대사로 보이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이 마지막 대사에는, 굉장히 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데, 몇 가지 짚어 보겠다.
우선은 죽기 전에 신지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장소, 병원에서의 자위. 신지의 그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을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각인, 양산기의 잔혹한 겁탈 행위와 그 고통이 떠올랐을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던, 그러나 결국 와 주지 않은 신지에 대한 증오도 섞여 있을 것이다. 보완 직전에, 신지가 자신의 목을 졸랐던 때의 괴로움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완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자신의 마음과 하나가 된, 타인들에 대한 불쾌함도 잊을 수 없다. 아주 오랜 잠에서 깬 아침과 같이, 이렇게 부활하여 현실의 바람을 쐬는 기분도 편치 않다. 신지에게 진심을 건넨 방법도, 진심을 받은 방법도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걸 떠나 지금 이 순간, 볼에 닿은 눈물의 감촉이, 기분 나쁘다.
타인은 공포
그러나 사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신지가 보완을 거쳐 바로 옆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여전히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겠다. 아스카는 최소한 신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그래서 솔직한 마음을 담아 위로를 건네려고 했던 건데, 바보 신지는, 그 마음도 모르고 목을 조르려 했으니, 그녀 마음이 어땠겠는가. 아팠을 것이다. 굉장히 기분 나빴을 것이다.
유명한 일화인데, 이 대사는 원안에서는 ‘기분 나빠’가 아니라, ‘너 같은 녀석에게 죽는 건 질색이거든.’이었다. 대사만 남은 탓에 연기의 뉘앙스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단순한 증오는 아니겠고, 자신의 진심을 모르는 신지에 대한 ‘투정’을, 그녀의 자존심이 살짝 걸러 낸 표현일 것이다. 오히려 이해하기 쉬운 쪽은 원안의 대사이나, 역시 가슴을 콕 찌르는 뭔가가 없다. 아스카 성우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대사를 수정한 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기분 나빠…."
"기분 나빠…."
사실 이 ‘기분 나빠’라는 대사는 신지가 1화에서 처음으로 LCL에 입수할 때 느꼈던 감상이기도 하며, 아스카가 22화에서, 미사토와 신지가 쓴 욕조 앞에서 말한 대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교류하는 것에 대한 두 아이의 성장을 강조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이 대사는 앞서 레이가 보완 중의 신지, 정확히는 우리 모두에게 물었던 질문, ‘기분 좋아?’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기분, 좋아?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긍정이 아닌 부정으로 처리하여 작품을 마무리한 데 대해 이상하게 여길 사람들도 있겠으나, 거듭 말한다. 에반게리온이 외치는 것은 ‘세상은 기분 좋은 곳이다.’가 아니라, ‘세상은 기분 나쁜 일도 잔뜩 있지만 그래도 살 가치가 있으며, 살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어디든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스카의 마지막 대사는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안노의, 어쩌면 우리 모두의 ‘솔직한 감상’이며, 동시에 그것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기분 나쁜 게 현실임에도, 세상에는 아스카의 손길과 같은, 또 신지의 눈물과 같은 ‘희망’이 있으니, 함께 살아 볼 만하지 않겠냐는 거다.
정리하면 이렇다. 신지가 두 손으로 아스카의 목을 조른 것은, 너무나 당연히도, 아직은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신지의 ‘마지막 실수’이며, 다른 말로는 ‘보완에 대한 미련’이자, ‘타인에 대한 남은 공포’가 된다. 사실, 신지는 아스카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게다. 카지의 죽음에 대해 알린 것도, 그녀 앞에서 자위를 한 것도, 보완을 위해 목을 조른 것도. 모두 다 그가 아스카를 떳떳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아스카는 신지가 가장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희망을 새로 품고 왔음에도, 유일하게 그 앞에 온 사람이 아스카라니, 굉장히 가혹한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아스카가, 신지에게 한 손으로 따뜻한 위로를 건넨 것은 어떤가. ‘레이가 남긴 모성의 발현’이자 ‘신지에게 진심을 건네는 수단’이며, 그에 대한 ‘용서’인 동시에, 스스로 ‘타인에 대한 희망’이 되는 일이었다. 레이가 꿈을 통해 신지에게 희망을 가르쳐 줬다면, 아스카는 현실 속에서 그에게 희망을 보인 셈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신지의 곁에 있던 세 여자, 미사토, 레이, 아스카는 모두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였다.
엔드 오브 에바의 파이널 시퀀스는, 단순히 ‘희망’을 담은 장면이라 보기엔 너무도 어둡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 또한,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를 위해, 꼭 필요한 연출의 일부라 생각한다. 계속 강조한 대로, 에반게리온이 말하는 건 유치한 꿈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며, 중요한 건 우리가 그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현실을 나쁘고 싫다고 말하는 건 네 마음이야.
-현실을 진실로 바꾸고 있는 네 마음이야.
-현실을 보는 각도를 약간만 바꾸어도 마음은 크게 변해.
-진실은 사람의 수만큼 존재하지. 그러나 너의 진실은 하나야.
-맑은 날은 기분 좋음.
-비가 오는 날은 우울.
-그렇게 배웠다면 그렇게 믿어 버려.
-비 오는 날도 기분 좋을 수 있는데 말야.
파이널 시퀀스를 보고, 어떤 사람은 ‘절망이다!’라 해석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희망이다!’라 설명하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답은 많다. 그 자체가 에반게리온의 주제와도 같다. 안노는 작품을 볼 수 있는 방법과 여지를 충분히 많이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내가 이 리뷰에서 에반게리온의 희망을 강조하는 까닭은, 그게 바로 나의 시선이며, 나의 소망이며, 내가 생각하는 에반게리온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레이가, 카오루가, 유이가, 또 신지 스스로가 괜찮을 거라고 했다. 당장 극의 제목이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다.’며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그 메시지를 거슬러 ‘엔드 오브 에바는 절망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건, 내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난센스에 가깝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가자. 대체 종극 이후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얼핏 보면, 지구 멸망이 따로 없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신지의 결론이 ‘희망’이었다는 점에서, 감독은 이미 줄 수 있는 최대한으로 힌트를 남겼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태 에반게리온이 우리에게 보여 줬던 희망의 경로에선 한참 벗어난, 찝찝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붉은 바다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부활한들 뭘 어쩌겠는가.
그러나 필자의 리뷰를 자세히 보고 또 여러 경로에서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사실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잘 알 것이다. 두 사람의 주변에 있는 LCL의 바다는, 말 그대로 ‘가능성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의 주요 설정인 영혼과 LCL의 관계, 그리고 인지론 기반 양자 역학의 개념이, 그 유효한 근거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애초에 그렇게 생겨 먹은 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세상이라고 견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엔드 오브 에바 이후 모든 인류가 LCL로 리셋이 되었다는 건, 인지론과 양자 역학을 함께 응용하여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소리가 된다. 단순히 ‘사람이 본래의 형태를 찾는다.’는 것을 훨씬 초월하여, 그 마음이, 그 상상의 힘이, 모든 세상을 구성할 수 있다. 기존 세상에 대한 고정 관념이 없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세상이든 열릴 수 있다. 잠깐 신이 된 신지가, 그 가능성을 모두에게 선물한 것이다.
역으로 이를 통해, 어째서 파이널 시퀀스가 그렇게 절망적인 느낌으로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도 조리 있게 설명 가능하다. 아직 신지에게는 타인에 대한 공포와, 아스카에 대한 죄책감이 남은 탓에, 그가 구성한 세상은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게 당연하다. 다행히 신지 곁에 아스카가 등장하여, 공포가 아닌 희망의 상징이 되어, 그의 성장을 도운 덕분에, 이후의 세상은 ‘정말로 알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가능성은, 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을 나누는 순간 증폭되었을 게 분명하다. 노련하게도, 그 즉시 안노는 ‘종극’이라는 표현과 함께, 그 모든 여지를 우리의 상상에 맡겨 놓았다. 성장한 두 사람이 재구성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시간이 더 흘러 새롭게 부활한 사람들이 참여한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당신이 에반게리온을 보고 느낀 것이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절망이었다면, 그 세상은 꼭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을 테며, 누구도 그 세계를 부정할 수 없다. 안노가 절망의 여지도 열어 뒀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에반게리온을 보고 느낀 게, 필자와 같이 희망이었다면, 그 이후의 세상은 당연히, 밝은 미래를 담고 있게 된다. 그 생각 또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안노는 희망의 여지 또한 확실히 열어 놓았다. 나머지는 개인의 자유이다. 안노가 극 이후의 세상을 표현하지 않았던, 아니 표현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와 같다.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는 철저히 희석되고 만다. 그 새로운 세상은 당신만이 알고 있어야 하니까. 에반게리온을 보고 느낀 사람들의 숫자만큼 존재해야 하니까.
새로운 가능성이 연출한, 또 하나의 영화
응?
TV판 26화의 ‘새로운 세계’ 말이다. 단순히 ‘가능성의 세계’라며 웃고 말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안노는 그 세계 또한 ‘하나의 완성된 결말’로 문을 열어 놓았다. 겐도우가 보는 신문 날짜를 보면, 꽤 구체적으로, 2016년 9월이다. 왜 하필 9월인가? 서드 임팩트는 2016년 1월에 발발했고, 그 이후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면, 저 시기가 딱 적당한 때가 아닐까 싶다. 보완에 참여하지 않은 겐도우와 유이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가린 것을 비롯해, 안노는 분명히 이 소위 ‘평행 우주 시퀀스’를 ‘엔드 오브 에바 이후의 세상 중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해 놨다. 그러니 이 부분도 감상하는 당신의 자유에 달렸다. 혹은, 그 새로운 세상이란 건, 신극장판이 묘사하는 세상일 수도 있겠다.
BGM The Heady Feeling Of Freedom
끝으로, 신지가 레이에게 물었던 그 질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나는, 여기에 있어도 돼?” 레이는 당시 그 물음에 ‘무언’으로 답했다. 이는 그 질문의 답이, 다른 사람이 아닌 신지 스스로 구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또 어떻게 보면, ‘답이 없다’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우리가 존재하는 건, 애초에 당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이 담는 실존에 대한 얘기이기도 한데, 우리가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 그런 건 물론 없다. 허락을 받을 문제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존재하고 있고, 내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게 이 세상이다. 모든 건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게 현실이다.
TV판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지는 자신에게 미안하다던 아버지에게, 끝내 ‘고맙다’는 인사로 답해 주었다. 신지는 이제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면, 그는 이 세상에 있어도 좋다. 혹시 스스로가 싫다고 해도,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이다. 그 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천국이 될 수 있는 세상이거든! 이제 신지가 세상에 존재하는 건 절대 ‘죄’가 아니다. 에반게리온이라는 꿈이, 인간을 원죄에서 구원했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 에바와 작별하여, 오직 인간만이 존재하는, 인간만을 위한 세상에서, 신지는 단지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에게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자신에게는 에바 외엔 아무 것도 없다던 신지와 아스카가, 에바 없는 세상에서, 서로의 진심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그 행복의 가능성. 에반게리온이 심어 둔 가장 커다란 메시지였다.
타인은, 현실은, 이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두려운 것이지만, 그 안에는 진짜 행복도 숨어 있기 때문에, 공을 들여 알아 갈 가치가 있다. 끝내 배신을 당한다 하여도, 우리가 진심이라면, 언제든 어디서든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그 믿음, 그 희망. 그러니까, 이 세상은 기꺼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 마땅히 ‘나’로 있을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것. 당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제 에반게리온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여기에 있어도 좋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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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본편인 만큼 스크롤,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썼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어차피 이제 제 글 볼 날도 얼마 없어요. 천천히 읽어 주세요. ㅋㅋㅋ 그리고, 정말로, 정말로 다들 감사합니다. ^^ 하지만 오늘이 끝은 아니죠. 우리에겐 에필로그가 남아 있어요. ㅋㅋㅋ 에반게리온에 대한 몇 가지 남은 얘기도 다룰 것이니, 종강 파티도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ㅋㅋㅋ 음, 딱 48시간 뒤에, 에바 구판에 대한 자잘한 얘기와, 후기와 함께 찾아 뵙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다시 한 번, 서비스,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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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신극장판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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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EVANGELION ...그리고...! REBUILD OF EVANGELION I CAN (NOT) WAIT REVIEW 해주실거죠.... 리뷰...?!! ㅠㅠ (진심을 교수님에게!) 지금까지 감사드렸습니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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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인환, 고마워요 안녕, 에반게리온 구판 그리고 모든 루리웹 유저들에게 축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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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느님의 리뷰 5편 이전까지만 해도 댓글에는 비난과 조롱의 느낌이 가득했는데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보니 압도적인 찬양과 경탄뿐...... 정말 엄느님의 손길덕분에 지적쾌락을 마음껏 향유했던 3개월이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많았고 수고하셨습니다. -------------------------------------- 주인공의 성장을 다룬 작품은 이제껏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차고 넘치는 장르인데 대부분 보면 무슨 RPG 게임도 아니고 레벨업하고나면 이전에 했던 고생은 마치 인생에서 없던것처럼 되어버리게 표현되곤 하는데 에바는 어느정도 성장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이전에 했던 실수도 하고 똑같은 내용으로 계속 고민하고 하는 모습들이 정말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놀랍기만 합니다. 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도 가끔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의 모습을 수많은 퍼즐과 함께 표현해놓은 역작의 리뷰를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이 시간이 너무 좋네요. 생각해보면 이런 작품은 보통 '비운의 명작'으로 불리며 묻히기 마련인데 이런 작품이 일본 TV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 흥행작이라는게 정말 기적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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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신극장판 논문! | 13.03.01 0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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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리뷰도 아닌 글을 들고 왔으니 처음 보신 분들이 꽤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그 땐 제가 루리웹에 적응도 채 못한 때라 그래서 더 용감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ㅎㅎ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 고마워(스마일) | 13.03.01 12: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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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드디어 보시나요? ㅋㅋㅋㅋ 좋은 말이든, 욕이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13.03.01 13: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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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느님의 리뷰 5편 이전까지만 해도 댓글에는 비난과 조롱의 느낌이 가득했는데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보니 압도적인 찬양과 경탄뿐...... 정말 엄느님의 손길덕분에 지적쾌락을 마음껏 향유했던 3개월이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많았고 수고하셨습니다. -------------------------------------- 주인공의 성장을 다룬 작품은 이제껏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차고 넘치는 장르인데 대부분 보면 무슨 RPG 게임도 아니고 레벨업하고나면 이전에 했던 고생은 마치 인생에서 없던것처럼 되어버리게 표현되곤 하는데 에바는 어느정도 성장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이전에 했던 실수도 하고 똑같은 내용으로 계속 고민하고 하는 모습들이 정말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놀랍기만 합니다. 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도 가끔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의 모습을 수많은 퍼즐과 함께 표현해놓은 역작의 리뷰를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이 시간이 너무 좋네요. 생각해보면 이런 작품은 보통 '비운의 명작'으로 불리며 묻히기 마련인데 이런 작품이 일본 TV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 흥행작이라는게 정말 기적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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