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제의를 받은 시점에서 기획은 어느 단계였나요?
'수성의 마녀'는 원래 캐릭터 디자인 원안을 담당한 모구모 씨와 본작의 설정협력으로 참가하신 HISADAKE 씨 유닛 모리온 항공이 만든 기획서에서 출발한 작품입니다. 제목인 '수성의 마녀'도 캐치카피로 사용한 '그 마녀는 건담을 탄다'는 문장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기획서에 있는 몇가지 요소를 반영해서 이야기를 짰는데 내가 거기에 추가한 것는 크게 세가지 요소입니다. 그것은 '마녀란 무엇인가?' '마녀가 사역하는 건담은 어떠한 존재인가?' 그리고 '건담이나 모빌슈트가 병기로서 쓰이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런 점들을 고민하고 구축했습니다.
이 경우의 '마녀'는 동화나 옛날 이야기의 '마법사'가 아니라 종교사에 있어서의 '이단자' 탄압당하는 쪽, 규탄당하는 쪽이다라는 발상으로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 세가지 요소는 계승하면서도 작품의 내용 자체는 당초랑 비교해서 크게 변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원물이 아니라 내 취향을 반영한 소위 포스트 아포칼립스 느낌의 황폐한 지구의 대지를 무대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 '이야기가 알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고 '새로운 고객층을 겨냥한 건담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최초의 요구에 알기 쉬운 이야기라는 추가요소를 감안해서 '학원물'로 노선을 전환했습니다.
장르물로서의 카테고리가 붙게 되면서 가령 건담에 흥미가 없더라도 어떤 애니메이션인지 상상하기 쉬워질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학원물로 바꾸면 테마를 선보이는 방식도 확 바뀌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오히려 그점은 정반대였습니다. 앞서 말한 세가지 테마를 정리하면 '마녀'란 탄압당하는 마이너리티한 쪽의 존재이며, 그렇다면 건담도 체제에서 배제당하는 쪽의 모빌슈트가 되죠. 그러면 모빌슈트가 병기로서 운용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까?
기존의 건담 작품에서는 많은 전쟁을 그려왔는데 현실의 우리들로 말할 것 같으면 작금의 SNS의 보급으로 인해서 세계 각지의 전쟁이나 분쟁을 실감할 기회가 현격하게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건 '체감'이 아니죠. 전쟁을 정보로 밖에 알지 못합니다. 체감으로 경험하지 않은 우리들이 전쟁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점은 '학원물'로 장르를 바꾸기 전부터 커다란 과제였고 또한 민감한 문제이기에 명확한 해답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여기에 학원이라는 요소를 적용하게 되면서 하나의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무대는 평범한 학교가 아니라 우주 개발 사업의 한축으로 병기를 만들고 있는 회사가 경영하는 학원이다. 그리고 병기를 만든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그 병기가 실제로 전쟁도구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아스티카시아 고등전문 학원의 학생들은 전쟁과 무관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전쟁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전쟁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 우리들은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가속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는 코로나라는 상황에 놓이면서 체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경제로 세계가 유통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바이러스가 그렇게나 세계에 만연하게 되었죠. 마찬가지로 경제와 전쟁도 서로 연관이 없을수가 없습니다.
사소한 생활을 위한 경제활동이 세계 어딘가에서 분쟁의 불씨로 변화합니다. 그런 전쟁에 대한 우리들의 '실감'과 '체감'의 불일치를 학원 밖 전쟁의 존재를 알면서도 남일처럼 느끼고 있는 아스티카시아 학생들과 겹쳐 보이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제작 사정이나 기술적인 제약을 감안해서 '학원물'로 녹여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극중에서는 '사회적 분단' 또한 중요한 요소로 그려집니다.
이건 코로나 영향이 큽니다. 코로나의 확대에 맞춰서 서구권에서 부머 리무버라는 단어가 한때 유행했죠. 부머는 단카이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그걸 제거한다=리무브하는 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가치관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연한 초기 무렵에는 나이 든 사람의 치사율이 높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을 감안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늙은이들을 배제시켜 주는 것으로 인해서 젊은 세대가 다음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무척이나 배타적인 단어입니다.
극단적인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전면적으로 부정할수는 없었어요. 내가 취직 빙하기 말기 세대라는 이유도 있지만 '윗세대가 남긴 부담을 왜 우리 세대가 짊어져야 하지?'라는 심정이죠.
거기서부터 발전한 '그렇다면 나쁜 구조를 만든 윗세대 인간을 배제하면 된다'는 가치관은 극중에서 샤디크가 물려 받게 됐습니다. 샤디크의 가치관은 내가 코로나 때 본 '부머 리무버', 요컨대 우리들한테 부담이나 억압, 부정적인 재산을 강요하는 앞세대...그걸 극중에서는 '저주'라고 표현했는데, 그것들을 배제하고 우리들의 세계를 만든다,는 발상입니다.
어시언과 스페시언의 분단 뿐만이 아니라, 세대간의 분단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근데 우주와 지구의 분단 자체는 건담 시리즈의 한가지 스타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있는 젠더, 인종, 종교, 문화의 여러 문제를 정밀하게 조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가공의 설정으로 치환해서 이야기로 묘사하죠. 이건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해서 이번에도 모방했습니다.
'이단'에서 파생해서 젠더, 인종, 종교, 가문, 인간관계, 직장의 문제, 자신의 진로, 부모와 자식 등...세상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팍팍함을 '저주'로 강요하는 지난 세대의 부채. 그 부채로부터 구제받기 위해서 주인공 일행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그 도전을 하나 그려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이 스트레이트하게 '학원생활'이나 '부모와 자식 관계'를 그린 점이 새롭게 건담을 접한 세대한테 어필한 하나의 포인트 아닐까 싶습니다.
옛날부터 '학원물'이라는 명확한 장르가 있었고 어느 정도 그러한 템플릿을 재탕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새롭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신선한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기존의 장르물을 '건담으로 했을 뿐'입니다.
물론 젊은 시청자 중에는 본작으로 처음 '학원물'을 접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학교라는 커뮤니티는 일본에 의무교육이라는 제도가 있는 이상, 누구나 반드시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숙한 무대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부모와 자식 관계는 그것 자체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녀=이단자, 마이너리티 쪽 건담과 그걸 둘러싼 캐릭터들한테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여러가지 팍팍함을 겹쳐 보이게 해서, 그 살기 힘겨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어떻게 구제를 하는지. 제 이상을 말하자면 그곳에 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결과적으로 '부모와 자식 관계'로 집약, 축소화되어 보이게 된 점은 커다란 반성점입니다.
참고로 슬레타는 건담 TV시리즈 최초의 여성 주인공입니다.
나는 여성이 주인공인 점에 아무런 위화감도 거부감도 없었습니다. 건담이라는 작품은 초대 시절부터 여성 캐릭터가 많고, 각각이 명확한 자아를 지녔고, 남성한테 종속되기는 커녕, 스스로 솔선해서 행동합니다.
그리고 40년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캐릭터성의 폭이 풍부합니다. 또 애니메이션 전체로 따지면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아주 드문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앞서 얘기한 '학원물'과 마찬가지로 건담으로 처음 여성이 TV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었을 뿐이지 신선한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캐릭터를 만들 때 남성이니까 이렇다, 여성이니까 이렇다하고 젠더로 퍼스널리티를 구상하지는 않습니다. 예를들어 이야기의 전제로서 내 젠더에 뭔가 망설임이 있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면 그 경우에는 젠더에 좌우될지도 모르겠지만요.
작품을 끝마친 감상은 어떠신가요?
결말에 찬반양론이 생길 거라고 각오는 했어요. 그 라스트는 '권선징악' 다시말해서 '나쁜 짓을 한 인간은 처벌 받는다'는 이야기의 철칙을 아주 말랑하게 만들었으니까요.
프로스페라는 결국 콰이어트 제로의 죄를 자기 혼자서 짊어지지 않았고, 슬레타와의 문제도 용서를 받으며 끝나버렸죠. 사람을 죽인 슬레타나 퀸 하버에 파괴적인 손해를 입힌 미오리네도 그렇습니다. 왜 이런 엔딩으로 만들고 싶었는가.
건담 뿐만 아니라 엔터테이먼트 작품은 뭔가 죄를 범한 사람이 그 응보나 속죄로서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10년, 20년전 감각이라면 그래도 문제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작금에는 SNS로 잡다한 가치관이 너무 많이 범람해서 매사에 옳고 그름을 공유하기 어려워졌어요.
그렇게 되면 사법에서 벗어난 주관적인 정의나 제재행위가 횡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시대에서 뭔가 하나라도 죄를 범한 인간은 제로섬으로 다짜고짜 사법적인 처벌 이상의 죄, 마녀 사냥이나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건가 싶었죠. 그건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물론 슬레타 일행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각각의 방식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편에서 '죄를 갚는 행위' 그 자체는 그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벌을 받아야할 인간이 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그점에 분노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이야기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상, 찬반양론으로 갈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델링이나 프로스페라의 죄를 죽음으로 갚으며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소피나 노레아에 대해 추궁하시면 반론을 할 수 없지만요.
그리고 살아가는데 힘겨움에 대한 구제와 죄를 갚는 방식에 추가로 또 한가지, 세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주인공 프로스페로가 보여준 '용서'를 그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어른인 우리들조차 답답하다고 느끼는 시대이자, 아이들의 부담도 점점 더 커졌죠.
완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장래에 행복한 비전이 보이지 않을 때, 뭔가 한가지 잘못을 저지르면 평생 짊어져야만 하는 페널티를 부여하는 사회는 너무 무섭습니다. 용서하는 게 반드시 최선은 아니지만, 그 선택지가 전혀 없는 사회를 허용할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템페스트에서는 용서를 얻지 못한 칼리번=슬레타가 수성의 마녀에서는 마지막에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었습니다. 그것도 한가지 과제였습니다. 결과 모두가 행복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슬레타나 미오리네, 샤디크가 건강한 정신으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프로스페라나 베네리트 그룹의 어른들이 저지른 죄를 짊어지는 결단을 한 셈이니까, 결국, 앞 세대의 부채를 짊어지게 만들고 말았죠. 그녀들을 삶의 고단함에서 구제하기는 커녕, 훨씬 고난의 길을 걷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점이 면목없다고 해야할지, 커다란 반성점이라고 해야할지...역시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네요. 달성한 목표와 크게 반성해야 하는 과제, 그게 이 작품에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실세계의 여러 문제와 겹쳐보려고 한들, 세상은 가차없이 변화합니다. 사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사람의 가치관이나 리터러시, 상식도 크게 변화했고, 전쟁마저 예상과 다른 변화를 했습니다.
분명 앞으로도 예상 못할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10년후, 20년후 수성의 마녀가 어떻게 보일지. 아주 낡아빠진 가치관으로 가득한 작품으로 보일지, 아니면 다소는 아까 말한 과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누군가한테 제시하는 에센스를 가지고 있을지.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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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20년 후에 긍정적으로 재평가 받는 날이 온다면 그 세상은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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