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울라의 버일러/한 부잔타이는 17세기 초엽부터 누르하치와 경쟁을 하기 위한 방안의 모색에 들어갔다. 그 결과 부잔타이는 조선의 변경 안팎에 거주하는 번호 세력들을 공격하여 그들의 물자를 약탈하고 그들의 인신을 확보하여 군병과 노동력을 충당하며 동시에 조선과의 협의를 통해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얻고 물자를 얻어내는 전략을 확립했고, 곧 해당 전략의 실현에 들어갔다.
부잔타이는 번호의 세거 상황과 조선의 변경 상황을 파악하고, 또 무력충돌 없이 조선과 번호 관련 문제를 협의를 할 수 있다면 그 방향으로 일을 진척시키기 위해 휘하의 장수 만도리를 조선 변경으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만도리는 온성에서 공격을 위해 정탐한다는 의혹을 받아 조선군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와 함께하던 울라 호위병들도 모두 살해당했다.1이는 당시 조선이 1600년에 있었던 온성 전투에 울라가 개입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울라가 파견한 인물인 만도리를 첩정을 위해 나온 자로 판별했기 때문이다. 만도리가 살해당한 이후 몇 해가 지난 뒤 부잔타이는 해당 사건을 표면적 명분으로 삼아 조선을 공격하는 동시에 번호들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울라의 본격적인 번호 공략 시도와 그와 결부된 조선과 울라간의 본격적인 충돌은 1603년부터 발생했다. 이 때 울라는 조선보다는 번호들을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1605년 음력 3월 동관을 함락할 때에, 부잔타이는 명백히 조선을 공략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 부잔타이는 조선에 대한 압박수위를 끌어올려 조선으로부터 자신이 얻고자 하는 바, 즉슨 직첩과 그를 매개로 한 교역로를 얻어내고자 했다.
부잔타이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은 동관을 공격한 부잔타이에게 군사적 응징을 가하려 했으나 당시 조선에는 현실적으로 울라를 원정할 능력이 없었고, 원정을 한다 하더라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울라의 전진기지 겸 중간거점이었던 건퇴를 공격하게 되었으나, 조선군은 역으로 울라군의 기병대에 상당한 손실을 강요받으며 패퇴한다.2
건퇴 전투로부터 얼마 뒤 부잔타이는 조선에 서신을 보내왔는데 그 서신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며 조선에 직첩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3 시기를 보건대 이 서신은 부잔타이가 건퇴 전투에서 자신의 부대가 승리를 거둔 것을 파악하기 이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동관 전투의 승리를 기반으로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당 서신에 기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 중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부잔타이가 스스로와 스스로의 세력을 고려계라고 칭한 것이다. 이 때 기자헌의 보고에 의하면 부잔타이는 선세에 오랑캐4를 토벌하러 갔다가 그 곳에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한다.5 즉슨 부잔타이는 자신과 자신의 세력의 오랜 조상이 본래 여진인이 아니고 고려계이나 여진 정벌에 참여하던 도중 여진의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여진에 동화되었다고 설명했다.
부잔타이가 말한 '선세의 오랑캐 토벌'은 여러 부분을 추합해 보건대 고려시기 윤관의 대(對)여진 공세라고 판단된다. 이 때 참전한 고려군 중 일부가 고려로 돌아가지 않고 여진땅에 남으면서 일족을 이루었고 이후 여진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었으며 그 중 일부가 부잔타이와 울라인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봉유설에도 간략히 언급된 바인데, 이에 의하면 군병 수백명이 복귀치 않고 여진땅에 남아 정착해 부락을 이루었고, 그 후손중 하나가 홀온의 수장 하질귀라고 하는 이야기이다.6홀온이란 본래 '훌룬'의 음역이나 여기서는 훌룬의 후계세력 '울라'를 지칭하며 하질귀는 '하스후 버일러' 부잔타이를 지칭한다. 지봉유설의 이러한 서술은 부잔타이가 보낸 서신의 이야기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지봉유설의 찬술 시기(1614년)를 생각해 보자면 합당한 추론이다.
부잔타이의 말, 그리고 지봉유설에 실린 이야기가 명확한 사실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부잔타이의 선조로 어느정도 인적확인이 가능한 인물중 가장 오래된 인물은 훌룬의 시조 나치불루와 그 부친, 조부대이다. 그런데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활동 시기가 윤관의 여진 공격 시기와는 꽤 시기 차이가 난다. 나치불루의 활동시기와 윤관의 여진 공격 시기는 못해도 25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조부대라고 하더라도 200년은 족히 차이가 난다. 고로, 부잔타이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계가 나오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부잔타이와 그의 백성들의 조상대에 고려인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 자체는 존재한다. 윤관의 여진 공격은 부잔타이의 시대로부터 무려 5백년전의 과거일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고려계로서 여진땅에 정착한 이의 피가 부잔타이의 가문에 한 방울 정도는 섞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부잔타이가 실제로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느냐면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부잔타이가 조선에 보내는 서신에서 스스로를 '고려인의 후예'라고 자처한 의도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당시 부잔타이는 조선 조정에 자신의 승전을 선전하고 위세를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자신의 혈통-그것이 사실이던 아니던-을 내세우며 자신과 조선의 밀접함을 강조했다. 그것은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여기서 직첩을 받는다는 것은 조선의 신하로서 조선을 섬기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직첩을 매개로 조선과 교역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울라의 군주로서 차후 누르하치와 경쟁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즉, 부잔타이가 조선측에 자신을 고려인의 후손이라고 알려온 것은 고려인의 혈통으로서 다시 조선에 충성하겠다거나 하는 거창하고도 장렬(?)하기까지 한 이유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선전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15일
2.이상까지 필자가 작성한 1605년 부잔타이의 동관 함락과 조선의 건퇴 공격(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4528751 외) 참조
3.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15일
4.여진을 지칭한다.
5.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9일
6.이수광, 지봉유설 권 2, 제국부 북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