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그중에서도 진시황 시기의 통일전쟁기를 배경으로 한 만화로 <킹덤>이란 게 있다.
최근에는 뭔가 나사 빠진 전개 때문에 팬들한테 혹평을 받고 있다지만, 어쨌든 판매 부수도 높고 애니화에 실사화까지 한 인기 작품으로,
코에이 삼국지에서는 아예 삼국지 12에서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특수 시나리오 <전국칠웅>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전국시대의 장수가 일부 등장할 뿐, 전국시대를 완전히 재현하지는 않았다)
그 <킹덤>은, 실제 중국사를 배경으로 삼곤 있지만 '역사만화'보다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년만화'의 구성을 띄고 있다.
장군이 죽으면 전투가 끝난다거나, 장수 간의 일기토를 메인으로 삼고 있다거나 같이,
중국 전국시대의 전투보다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전투 양상을 띄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실제 역사의 내용을 100% 반영하고 있지는 않으며,
만화 내에 등장한 실존 인물들을 살펴보면 실제 역사와의 행보가 괴리되어 있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중에서 방난이란 인물이 있다.
만화 내에서는 조나라 최강의 대장군 3명을 뜻하는 '삼대천'의 한 사람으로, 작중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며 스스로 무신으로 자칭하는,
대충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여포나 항우 같은 '그다지 똑똑하지는 못하지만 무력만은 최강' 포지션의 캐릭터이다.
최강이란 설정치고는 왕기한테 털리거나 표공한테 한 팔이 아작나거나
강한 자와 싸우는 걸 좋아한다면서 당시 중화 최강인 한명에게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등,
약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해서 팬덤에선 조롱거리로 전락하긴 했지만 하여튼 넘어가고.
이 방난이란 인물도 실제 역사와 만화 내의 설정이 크게 상이한 캐릭터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의 방난은 어떨까?
일단 사기 내에서 방난이 언급된 곳은 <조세가> <연소공세가> <염파인상여열전>이다.
三年,龐煖將,攻燕,禽其將劇辛。
3년, 방난龐煖이 장수가 되어서 연燕을 공격해 그 장수 극신劇辛을 잡았다.四年,龐煖將趙、楚、魏、燕之銳師,攻秦蕞,不拔;移攻齊,取饒安。4년, 방난龐煖이 조趙ㆍ초楚ㆍ위魏ㆍ연燕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진秦의 최蕞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으니,(군대를) 옮겨서 제齊를 공격해 요안饒安을 취했다.<조세가>
劇辛故居趙,與龐煖善,已而亡走燕。
극신劇辛은 옛날에 조趙에 살며 방난龐煖과 친했는데, 나중에 연燕으로 도망쳤다.燕見趙數困于秦,而廉頗去,令龐煖將也,欲因趙弊攻之。연燕은 조趙가 몇 번이나 진秦에 시달렸으며, 염파廉頗가 떠나고 방난龐煖을 장수로 삼는 것을 보고 조趙의 피폐함을 이용해서 이를 공격하고자 했다.問劇辛,辛曰:극신劇辛에게 물어보자 극신辛이 말했다.「龐煖易與耳。」「방난龐煖은 상대하기 쉽습니다.」燕使劇辛將擊趙,趙使龐煖擊之,取燕軍二萬,殺劇辛。연燕이 극신劇辛을 장수로 삼고 조趙를 공격하자 조趙는 방난龐煖을 시켜서 이를 반격하니, (방난이) 연군燕軍 2만을 사로잡고 극신劇辛을 죽였다.<연소공세가>
居二年,龐煖破燕軍,殺劇辛。
2년 뒤, 방난龐煖은 연군燕軍을 무찌르고 극신劇辛을 죽였다.<염파인상여열전>
이상, 사기 내에서 방난의 언급은 극히 적다.
옛날 지인으로 언급된 극신을 격파한 것, 최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것이 인생의 전부이다.
하지만 전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사기가 전부가 아니다.
전국시대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전국책>을 비롯해서, 제자백가의 학자들이 쓴 각종 서적은 물론이고,
<열녀전> <설원> <수신기> 같은 책에도 전국시대의 기록이 흩어져 있다.
그런 책 중에서 하나, 제자백가의 한 명이었던 도가ㆍ법가ㆍ병가에 대해 연구하던 학자 할관자가 남긴 책이 있다.
龐子問鶡冠子曰:
방자龐子가 할관자鶡冠子에게 물었다.“聖人之道何先?”“성인聖人의 도道는 어떤 것을 우선합니까?”鶡冠子曰:할관자鶡冠子가 말했다.“先人。”“사람을 우선한다.”龐子曰:방자龐子가 말했다.“人道何先?”“사람의 도道는 어떤 것을 우선합니까?”鶡冠子曰:할관자鶡冠子가 말했다.“先兵。”“병兵을 우선한다.”<할관자鶡冠子> <근첩近叠> 中
(할관자 이 새끼 근첩이었네;;)
할관자 내의 방난은 제자백가의 한 명인 할관자와 문답을 나누는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할관자의 제자인 도가ㆍ병가ㆍ종횡가 계통의 학자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저 위의 문답에서는 방난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고 단순히 방자龐子라고만 나오니 성씨만 같은 인물로 볼 가능성도 있지만…….
卓襄王問龐煖曰:
도양왕卓襄王이 방난龐煖에게 물었다.“夫君人者亦有為其國乎?”“무릇 임금 된 사람은 그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龐煖曰:방난龐煖이 말했다.“王獨不聞俞跗之為醫乎?已成必治,鬼神避之,楚王臨朝為隨兵故,若堯之任人也,不用親戚,而必使能其治病也,不任所愛,必使舊醫,楚王聞傳暮𡫴在身,必待俞跗。”“왕께서는 유부俞跗의 의술에 대해 듣지 못하셨습니까? (병이) 생기면 반드시 치료하기에 귀신도 그를 피했다고 합니다. 옛날 초왕楚王이 조정에 임해 병사를 다루었는데, 요임금堯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본받아서 친척을 임용하지 않고 반드시 유능한 사람을 사용했으며, 병을 치료하게 하는데 총애하는 사람을 임용하지 않고 반드시 경험 많은 의사를 사용했으니, 초왕楚王은 몸에 병이 났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유부俞跗를 불렀습니다.”卓襄王曰:도양왕卓襄王이 말했다.“善。”“알았네.”<할관자鶡冠子> <세현世賢> 中
……이런 식으로, 아예 방난의 이름이 언급되는 편도 있다.
할관자는 총 19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7편에 방난(혹은 방자)의 이름이 남아 있다.
요컨대 킹덤에서 묘사하는 단순히 무력만 강한 바보가 아닌,
학문에 통달한 백가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거다.
일단 킹덤의 방난도 업 전투 마지막에 보였던 구도자로서의 면모를 보면,
실제 역사의 방난이 도가 계통의 학자였던 것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종횡가, 병가로서의 면모는 딱히 집어가주진 않았다.
그런 것까지 보여주기에는 애초부터 근간이 되는 설정이 전혀 다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여기까지 읽고, 다시 제목을 보자.
'노장 방난'이라 되어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모두 실제 방난이 킹덤과는 달리 지식인이었다는 것에 중점을 뒀으므로,
방난이 노장이란 근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이 밑으로는 '노장 방난'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중요한 근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시 '할관자' 내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사기 내에서도 언급된 '극신과의 친분'이다.
할관자 내에는 방난과 무령왕武靈王의 대담에 관한 파트가 있다.
여기서 무령왕은 조나라의 무령왕,
즉 군제개혁 호복기사를 통해 조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킨 명군을 말한다.
방난이 본격적으로 장군으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기원전 242년경.
반면 무령왕이 죽은 것은 기원전 295년으로, 약 54년의 차이가 있다.
요컨대 방난은 무령왕이 죽기 바로 직전에 대화를 나눴다고 쳐도, 본격적으로 장군이 되어 활약할 무렵에는 70살 이상의 노친네였던 셈이다.
또 하나의 근거는 극신과의 친분이다.
여기서 극신에 대해 자세히 알고 가자.
극신은 연소왕이 제나라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몰렸었던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전국에서 인재를 구할 때, 조나라에서 달려온 인재로,
법가서적 '처자', 공손룡의 견백동이설과 나란히 언급되는 '극자의 말' 등을 남긴, 역시 백가 출신의 장군이지만,
학자로서 남겼다는 저서들은 모두 유실되어 지금은 한나라 때의 기록으로 '저런 게 있었다'는 것만 찾아볼 수 있고,
장군으로서의 커리어도 '방난에게 발려 죽었다' 외에는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은 불쌍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극신이 연소왕을 섬기기 위해 찾아온 사건은, 각종 역사서적 내에서 '기원전 311년'의 일로 나온다.
동시기에 극신과 함께 연나라에 찾아온 인물로는 삼국지를 읽어봤거나 코에이 삼국지를 해본 유게이라면 알고 있을 명장 악의가 있다.
그리고 극신이 방난과 싸워 죽은 전투는 기원전 242년에 있었다.
요컨대 이 인물은 약 69년 동안을 연나라에서 살았던 셈이 되며,
조나라에 살던 시절의 극신과 친분이 있었다던 방난도 기원전 311년 이전부터 극신과 교류가 있었을 테니,
친분이 있던 시기를 약 20살 무렵으로 잡아도 두 사람 모두 80대 후반~90대 초반의 개틀딱 노친네가 된다.
심지어 극신은 기원전 242년에 죽었지만,
방난의 기록이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건 <한비자>인데, 기원전 236년 업 전투 당시에 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침 킹덤의 방난도 업 전투에서 죽었다. 킹덤의 작가가 사기 외의 기록물도 살펴보고 있는 걸까?)
참고로 킹덤 내에서 방난과 극신의 '친분'은
그냥 극신이 옛날에 '방난처럼 구도자를 자칭하는 이상한 놈들을 여럿 죽여봤다'로 각색돼서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됐다.
하여튼 간에,
요컨대 실제 역사 속의 방난은 킹덤에서 묘사된 '젊은 무신'이 아니라
중국에서 노익장하면 떠오르는 황충이나 염파도 한 수 접어줄 정도의,
90살을 넘긴 노구에도 직접 장군으로서 전장을 뛰던 노익장 of 노익장인 것을 알 수 있다…….
(극신도 노장이긴 한데 전투 경험 1번에 그것마저 ↗발린거 보면 노익장은 무리인 거 같다.)
덧붙여 煖이란 한자는 난 / 훤 두 가지의 발음으로 읽을 수 있지만, 사기의 주석본인 <사기색은>에 따르면,
煖音況逺反。
煖의 음은 황況과 원逺의 반절음(ㅎ과 ㅝ에 ㄴ을 합친 훤 발음)이다.
라는 주석이 있으므로, 방난보다는 방훤 쪽이 옳바른 발음일 듯하다.
근데 워낙 방난이 입에 익숙하므로 그냥 방난이라고 쓰고 방난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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