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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다른 곳이 그렇듯, 저녁이 되면 번화가 외곽에 위치한 중화 레스토랑 역시 발길이 잦아지고는 한다.
화교 출신 주방장이 몇 십년째 운영하는 이곳은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그만큼 음식 맛은 보장이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건물 한 층을 통째로 차지한 가게의 간판에는 금박으로 된 한자가 중앙을, 기다란 용이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다. 붉은 등불이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게 내부에는 사람들이 각자 테이블에 앉은 채 저마다 식사와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식 사진을 찍거나, 개중에는 같이 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내일을 위하는 사람도, 뭔가 토론을 하다 시비가 붙을 기세인 사람들도 보인다.
단체로 오는 일이 많은 식당이지만 혼자 식사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창가 끄트머리의 예약석에 있는 숙녀도 그 중 하나.
우아한 여인이 4인석을 혼자 차지한 채 테이블에 차려진 요리를 묵묵히 젓가락질 중인 모습은 어쩐지 괜한 상상이 가게 하는 광경이었다.
약속 상대가 안 오기라도 했나. 아니면 파토나서 아쉬운 김에 한 끼라도 때우고 가는 것일까.
둘 다 아니었던 그녀는 그저 묵묵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아직 그릇을 비우지 못한 그녀는 잠시 입을 달래고자 우롱차 잔을 기울인다. 얼음이 입술에 잠시 부딪힌 뒤에야 그녀는 잔을 내려놓았다.
메신저 친구가 추천할 만한 퀄리티라고 확신하면서도, 가격이 센 탓인지 양이 그에 비례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탓에 혼자 해치우기는 다소 부담이 가는 수준이었다.
물론 남긴다는 선택 따위는 없다. 또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런 선택을 고려할 수 없는 법.
그런 눈 앞의 문제에 잠시 눈을 돌리듯 그녀는 테이블에 내려놓은 D-패드를 켜본다.
이렇다 할 소식이 뜬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습관 같은 개념이 되어 있었다.
별 일이 없거든 이곳 인증샷이나 올리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하려는 순간,
"실례합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마자 잽싸게 화면을 바꾼다. 그리고 돌아보니 역시 낯선 사람이 찾아와 있었다.
확연히 외국인으로 보이는 외모와 듬직하고 큰 체구는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런 위압감을 안긴다. 그런 남자가 자신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담고 있다니.
"누구시죠?"
"시간 있으신가 해서."
뭐야, 이 인간. 숙녀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설마 하니 헌팅 따위의 목적이라면 누가 됐던 사양이다.
"없어요."
"그러시구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는 태연히 반댓편 자리에 앉는다.
"뭐하시는 거에요?"
"아, 죄송합니다. 제 쪽에서 볼일이 있어서."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자 남자는 필요 없다며 돌려보낸다.
"무슨 볼 일?"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태스크 포스 쪽에서 이쪽 주변을 정찰하고 다닌다던데."
여자도 충분히 알고 있는 정보지만, 상대가 마찬가지로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일단 신고는 보류. 확실히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식사를 멈추지는 않기로 했다.
"이런 데에서 태연히 식사 중이라니 간이 참 크시구나 싶네요."
"언제 한 번 와야겠다 싶었으니까."
젓가락으로 카오위를 뜯어 한입. 잉어 살점에 깃든 자극적인 향미와 혀를 찌르는 듯한 매운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식은 탓인지, 아니면 혀가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살짝 맛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불청객이 찾아온 탓일까.
"그리고 여기 돌아다녀서 뭐 어쩌라고? 덤빌 테면 얼마든지 덤비라지."
"역시 배짱이 넘치시네."
"당신도 컬렉터야?"
"글쎄. '위저드'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여자는 다시 D-패드 화면에 눈길을 돌린다.
캔필드한테 전달받은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는 어느 비공식 듀얼 이벤트에 나간 이후로 소식 불명이 되었을 터. 적어도 이렇게 사람들 있는 곳에 불쑥 나타날 만한 처지는 아니다.
잠시 후 남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의심의 눈초리였다.
"글쎄. 굳이 대답해야되나 싶네."
"뭐 어때요? 다들 본인들 얘기로 바쁜 모양이던데. 남의 사정 이야기 따위 지나가는 소음에 불과한 법이겠죠."
말투는 대충 비슷한 느낌.
"듣던 대로구나."
"아직 남은 모양이니까 기다려 드리죠."
이번에는 마라샹궈 한 젓가락. 그 다음 밥 한 술.
어쩐지 더더욱 입맛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 상태로 뭔가를 목으로 넘겨야 한다니.
물론 이 남자에게 한 입이라도 줄 일 따윈 없다. 애초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다행히도 남자 쪽은 자기가 식사하는 모습을 꿋꿋이 지켜볼 생각은 없는지 카운터 주변에 위치한 벽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는 중년 남성 서너명이서 전자동 작탁 주위에 몰려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이쑤시개 따위를 입에 문 채 기계가 세팅해준 패산을 주섬주섬 만지작거리며 사담을 나눈다.
"혹시 게임 좋아하세요?"
"무슨 게임?"
다음 판에 들어가기에 앞서 남자들은 지갑에서 잔돈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저것이 이번 판돈이겠지.
그런 그들이 시선을 인지하려나 싶을 쯤에 남자는 다시 여자 쪽에게 눈을 돌렸다.
"그냥. 아무거나 걸고 하는 거."
"아무거나라, 저만한 푼돈 갖고는 할맛도 안 나겠는데. 기왕이면 통크게 가야되지 않을까?"
"잃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그럼 애초에 하지를 말아야지."
"맞는 말이네요."
멋쩍은 웃음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갈 사람이라면 눈길도 주지 말아야겠죠."
그녀의 접시가 조금씩 비워져가는 사이에도, 남자가 던지는 말에는 딱히 영양가라 할 것이 없었다. 흘려들어도 그만인 사소한 이야기, 즉 평소 메신저 화면 너머로 들여다 보던 메시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내용이던 것이다.
적당히 받아주면서 어느 새 드디어 혼자 난관을 해치운 여자는 얼음이 녹아 없어진 우롱차를 마저 비우고 있었다.
"다 드셨으면 슬슬 일어납시다."
"뭐야, 따라오려고?
"이야기는 아직 남았으니까."
그냥 꺼지면 안 되나. 여자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가방을 챙긴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뒤를 따라온다.
"역까지 가실 예정이죠?"
"글쎄. 오늘따라 오버한 것 같아서 속이 부대끼네. 좀 걸어야겠어."
"잘 됐네요."
굳이 따라가시겠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뜻이겠지.
역시 거슬리는 놈이다. 여자는 생각한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거리를 걸어다닌다. 이따금씩 피로를 풀듯 깍지를 끼는 모습에는 무방비함마저 엿보인다.
비어있는 스케줄 동안 산책에 나서 본 관광객, 아니면 그냥 건달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참 많아요. 앞으로 몇 시간만에 텅 빌 거라고는 전혀 안 보이네."
"원래 목적이 있어서 오는 장소잖아. 밥먹을 사람은 밥먹으러 오고, 물건 살 사람은 물건 사러 오고. 일할 사람은 일하러 오고. 아니면 이런 데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지."
그들은 알아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중이었다.
다리 하나 건너는 것을 기점으로 가로등이 비교적 적은 곳에 다다르면서 주변은 더욱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낮까지는 그럭저럭 산책과 조깅하기에 좋은 강변 길이지만, 밤이면 멍하니 앉거나 누워서 별 구경하기 좋은 잔디밭이 되어주기도 하는 곳이다.
단지 지금은 별이 유난히 보기가 힘들어졌을 뿐.
"슬슬 목적이 뭔지 물어도 될까?"
"아까 여쭈시지 그랬어요?"
"여긴 사람 없잖아. 확실한 대답을 들어야겠거든."
"과연."
그 말을 들은 즉시 남자는 발걸음을 멈춘다.
과연. 무슨 속셈이든 기꺼이 넘어가 주겠다는 자신이 엿보이는 발언이었다.
"그럼, '위저드'라는 인물에 대해 묻고 싶은데."
여자의 발도 따라서 멈췄다.
"그걸 뭐하러?"
"컬렉터라는 족속을 그나마 서로 교류하게 만드는 작자 아니던가? 당신은 당연히 알고 있는 눈치였고."
그리고는 한숨.
대놓고 귀찮아 하다 못해 싸늘한 반응이 돌아와도 남자의 입가는 웃음을 띄고 있을 뿐이다.
반면 눈동자는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여인은 놓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자신을 속였나?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단 말인가?
성가신 듀얼 태스크 포스 같으니. 이것들은 밥도 못 먹게 끼어드는 귀찮은 족속이구나.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답해주었다.
"근데 그게 다야?"
"경우에 따라서는."
대답에 돌아오는 것은 코웃음.
"당돌한 양반이네. 그러려고 이런 으슥한 데까지 따라오셨다?"
"만약에 진짜로 모른다면 다른 컬렉터 얘기도 좋아."
"그걸 알려줘야 될 이유가 있어?"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감 잡았을 텐데?"
"그러니까 더 안 되는 거지."
남자는 나름 납득한 듯 으음, 하는 시늉을 취했다.
"그건…, 그런가. 오케이. 제안이 있어."
"제안?"
"서로 만난지도 얼마 안 됐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잖아. 아직 선택이라는 것을 할 권리가 있단 말이지."
스토킹을 해놓고 선택이라. 주변에 좀 떨어져 있는 시선들을 감지한 시점에서, 그가 말하는 '선택' 하나로 끝날리가 없으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기만도 정도껏 해야지.
"당장 대답할 게 없어도 머릿속에서 말할 거리가 천천히 떠오를지 누가 알아? 조금이라도 우리한테 협조한다는 선택을 해주면 인생이 그나마 나아질지도 몰라."
"무슨 근거로?"
"당신이 어둠의 듀얼리스트, 그것도 컬렉터라는 것을 특정한 이상 우리(태스크 포스) 쪽에서는 계속 당신에게 정보를 요구할 거거든. 저항하는 것보다 순순히 협력하는 게 서로 편하지 않겠어?"
"정보로 들어서 뭘 어쩔 건데?"
"더 많은 어둠의 듀얼리스트, 나아가 그 힘의 근원이 되는 어둠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쌓아가는 거지."
"나같은 사람한테 그게 알려줄 이유가 될 것 같아?"
"어쩌면 그 작은 공헌이 세상을 구할 수도 있을걸? 지금이라도 당신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야."
잠깐의 여유를 줘도 다시 코웃음치기도 귀찮아하는 듯한 반응에 남자는 알았다는 듯 살살 끄덕인다.
"싫으시다?"
남자는 D-패드를 꺼내더니 잠시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난 조금이라도 평화롭게 끝나길 원하는데."
"그냥 꺼지는 게 어때?"
"안 되지. 여기까지 온 목적이 달성 안됐잖아."
"내 알 바 아니야."
"난 알아야겠어. 지금부터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은 두 군데야. 나는 그 중에 둘 다 편하게 끝날 수 있는 방법을 추천하는 거거든."
"힘이라도 행사해 보시던가? 잘할 것 같은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돌아온 시선은 난감한 듯, 혹은 귀찮아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과연, 그것도 편한 방법이긴 하겠네."
여자는 해 볼 테면 해보라는 시선으로 답할 뿐이다. 애초에 저쪽도 말과는 달리 남자를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어보이니까.
어지간히 짙게 느껴지는 에너지를 보건대 웬만한 힘으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시적인 싸움을 시도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닐 터.
"…그런데 말이지, 웬만한 현대 사회에서 결투라는 건 용인되는 개념이 아냐. 일방적인 폭력은 더더욱 금기시되고. 결투를 모방한 오락 정도라면야, 나도 평소 같았으면 찬성이기는 한데 딱히 여기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네. 재미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남자는 허리춤에 손을 넣는다. 덱케이스를 고정한 홀스터가 멀쩡히 손에 잡혔지만 아직 꺼내지는 않기로 한다.
그 동작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여인이 다시 말을 꺼낸다.
"오락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된 거 아냐?"
"무슨 뜻이지?"
"얘기 들을 때마다 계속 궁금했거든. 어둠의 듀얼을 때려잡으러 듀얼을 하는 인간들이 어떤 느낌인가. 당신도 어엿한 듀얼리스트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럴지도."
"흐음, 그럼 듀얼의 맛이라는 걸 안다는 뜻이네."
"그렇지."
"그래. 엄연히 게임이잖아. 일보다는 즐거움 쪽에 초점을 맞춰야 되지 않겠어?"
"즐거움이라."
남자는 귀에 들어온 키워드를 곱씹듯이 중얼거렸다.
듀얼의 맛=즐거움일 텐데 저 생소하다는 듯한 반응이란. 듀얼리스트라는 '직업'에 매몰되어 있다 보면 저렇게 되나 하며 여자는 코웃음쳤다.
"그런 거에 취미 이상으로 접근할 생각까지는 없거든. 일로서 대할 수밖에 없는 당신네들하고는 다르게 말야."
"취미라.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여기서 가볍게 듀얼 한 판 치르면 협조를 해주는 걸로."
"그걸로 되겠어?"
"매치전이라도 원하나?"
"아니, 단 한 판이면 충분해. 모든 걸 걸어서."
여인이 드디어 입꼬리를 올리면서 또박또박 꺼내는 말에,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여태까지 한 말이 이해 안 가시나?"
"사람은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 그 순간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거든. 나머지는 그걸 위해 희생한다고 봐도 좋아."
"딱히 반대하는 의견은 아닌데."
"그런 의미에서 당신 말야, 나, 아니, 이쪽 사람한테 그 순간이 뭐라고 생각해?"
"듀얼이겠지? 엄청난 것이 걸린."
"알고 있네. 그런 사람한테 그냥 듀얼이 의미가 있겠어?"
"그 자체로 즐길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걸지 않은 승부에 무슨 가치가 있지? 무슨 즐거움을 느끼라고? 이 복잡한 게임에 머리를 써야될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시구나."
푼돈 거는 도박 따위에 눈길도 주지 않는 여자 답달까.
남자는 기막힌 심정으로 다시 품에 넣어놓은 덱 케이스를 꺼내든다.
"신기하다니까. 그런 듀얼을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지금도 그렇게 할 준비가 돼있을 텐데, 어떻게 그냥 듀얼에 만족할 수가 있는지."
"뭐, 즐거움이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거고,"
그리고는 이미 굳어있다고 생각했던 표정이 더 굳어가기 시작했다.
"난 선을 구분할 줄 아니까. 누구하고는 다르게."
"무슨 선?"
"즐길 게 있고 안 즐길 게 있다 이거거든."
"그렇게 나누면 무의미한 시간이 생길 뿐인데 의미가 있나? 그쪽은 어차피 둘 다 하고 있으면서."
그러나 뭔 소리냐는 듯한 시선에 남자는 대답을 보충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다면야 누구나 즐겁겠지. 근데 남의 눈치를 봐야한다면 꼭 그런 순간만 있을 수는 없잖아. 즐거운 순간을 기대하는 동안에는 썩 재미없는 일을 해서라도 버티고 살아야 하는 순간 역시 있는 법이야.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던가."
"오호라?"
"댁이 즐기는 듀얼이 나한테도 즐거운 건 절대 아니라는 말이지. 그래서 나도 두고볼 수가 없어."
"나도 두고볼 수가 없네. 인생의 낙을 방해하는 사람."
여인 역시 덱 케이스를 꺼내들더니 바로 먼저 D-패드에 부착한다.
"역시, 관용이라는 게 안 통한다니까."
남자 역시 손에 들린 덱을 D-패드에 부착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동작을 신호삼듯 주변은 밤의 어둠을 뛰어넘는 칠흑으로 변해간다. 그녀가 자신을 무사히 보낼 생각이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낯선 남자가 대뜸 찾아와서 관용이니 뭐니 떠들어봤자 기분만 나쁘거든."
"딱히 익숙한 남자가 그런다고 기분 좋아할지는 모르겠네."
"그러게. 이름은?"
"조브 하스웰."
"풀네임으로 가야 되나?"
"마음대로."
"'러미(Rummy)'라고 불러줘."
"럼 좋아하시나?"
"재미없거든."
역시 본명이 아니다. 어차피 확보에 성공한다면 그녀의 신원은 까발려질 테니 진짜 이름 정도는 전해들을 수 있으리라.
"오케이. 약속대로 얼마 안 걸리게 가자고."
선공을 차지한 것은 조브 쪽이었다.
[조브 하스웰: LP 8000, 패 5장]
[러미: LP 8000, 패 5장]
"그럼 내 턴."
우선 상대의 반응을 살핀다. 그 시점에서 뭘 준비하고 어떻게 나올지를 캐낼 수 있을 테니까.
아직 짜증이 가시지 않은 상대의 얼굴에서는 여유로움이 엿보인다. 마치 자신이 뭘 하든 짓밟아버리고 나아갈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패에 있는 '썬더 드래곤'을 묘지로 보내고 효과 발동. 덱에서 '썬더 드래곤'을 원하는 만큼 가져온다."
[조브 하스웰: 패 6장]
"흥, '썬더 드래곤'이라."
이 카드가 드러난 시점에서부터 무슨 덱을 쓰는지는 상대도 예측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상대는 벌써부터 코웃음을 드러냈다.
"그럼 '드롤 & 로크 버드'로 체인. 이제 이번 턴에 양쪽은 덱의 카드를 패로 가져올 수 없어."
[러미: 패 4장]
시작부터 그를 밟기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너무하는구만."
"패는 아직 남았잖아? 계속 해 봐."
설마하니 다른 견제책이 또 패에 남아있을까. 패에서 발동하는 유발 효과를 가진 카드는 '드롤 & 로크 버드' 뿐만이 아니다. 여러 듀얼을 이겨내 왔을 그녀라면 분명 적지 않은 가짓수로 투입되어 있을 터.
더한 위험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여유를 놓지 않는 저 태도가 계속해서 조브에게 의혹을 안겨주고 있었다.
'막힌 것은 서치와 드로우. 그렇다면….'
그래도 조브는 피해가면 그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모종의 예감이 있었기에 그는 일부러 덱에 있는 '썬더 드래곤'을 전부 들고 나온 참이다.
지금은 남은 자원을 아낄 처지가 아니었다.
"'태양전지맨'을 소환. 효과로 덱에 있는 번개족 몬스터를 1장 묘지로 보낸다."
[태양전지맨: 번개족 / 빛 / 레벨 4 / ATK 1500 / DEF 1500]
"묘지에서 빛 속성인 '썬더 드래곤', 그리고 어둠 속성인 '뇌수룡-썬더 드래곤'을 제외하고, 패에서 '혼돈의 창세신(카오스 크리에이터)'를 특수 소환. 여기에 번개족 몬스터가 특수 소환되는 순간 '태양전지맨'의 ②의 효과가 발동된다. 내 필드에 '전지맨 토큰'을 특수 소환."
[카오스 크리에이터: 번개족 / 어둠 / 레벨 8 / ATK 2300 / DEF 3000]
[전지맨 토큰: 번개족 / 빛 / 레벨 1 / ATK 0 / DEF 0]
[조브 하스웰: 패 4장]
"여기에, 제외된 '뇌수룡'의 ②의 효과 발동. 덱에서 '썬더 드래곤' 몬스터 하나를 특수 소환하지."
![[팬픽] 유희왕 D-GEN TURN-39_6.jpg](https://i2.ruliweb.com/img/25/10/23/19a0f5b728a20b132.jpg)
[뇌전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어둠 / 레벨 5 / ATK 1600 / DEF 1400]
"패에서 번개족 몬스터의 효과가 발동한 턴에, 필드의 번개족 몬스터를 릴리스하면 이 카드를 특수 소환할 수 있다. '뇌전룡'을 릴리스. 나와라, '초뇌룡-썬더 드래곤'!"
[초뇌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어둠 / 레벨 8 / ATK 2600 / DEF 2400]
먹구름처럼 어두운 몸뚱아리의 '뇌룡'이 필드에 나타나자 그녀의 표정은 더욱 뚜렷하게 찡그려진다.
이것까지는 당연한 반응일 테니 패스.
그리고 이 카드를 꺼내는 과정에서 '뇌전룡'이 묘지로 갔으니 ②의 효과로 덱에서 다른 '썬더 드래곤' 몬스터를 가져올 수 있어야겠지만…
"'드롤'의 효과 잊지 마."
"나도 알아."
그 수단이 막혀버린 이상 지금은 소재를 충당했다는 점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패에 있는 번개족 몬스터, 그리고 필드의 번개족 융합 몬스터를 1장씩 제외하고 다른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 '뇌신룡-썬더 드래곤'!"
[뇌신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빛 / 레벨 10 / ATK 3200 / DEF 3200]
[조브 하스웰: 패 3장]
'초뇌룡'을 매개로 삼아 한 층 더 상위의 몬스터가 나타난다. 주변에 번개를 일으키며 나타난 몬스터의 생김새는 그야말로 머리가 셋 달린 '썬더 드래곤'.
"이어서 '카오스 크리에이터'의 효과를 발동하지. 제외된 몬스터 3장 중 1장을 골라 내 필드에 특수 소환하고, 나머지는 덱으로 되돌린다."
[썬더 드래곤: 번개족 / 빛 / 레벨 5 / ATK 1600 / DEF 1400]
"물론 '초뇌룡'의 소환 조건은 이번 턴에 갖춰진 상태니까 또다시 꺼낼 수 있다는 말이거든. '썬더 드래곤'을 릴리스하고 특수 소환하지. 그리고 '태양전지맨'과 '전지맨 토큰'을 소재로 '아이:피 마스카레나'를 링크 소환."
[초뇌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어둠 / 레벨 8 / ATK 2600 / DEF 2400]
[아이:피 마스카레나: 사이버스족 / 어둠 / LINK-2 / ATK 800 / 링크 마커 ↙↘]
이어서 매개체가 되어 사라졌을 '초뇌룡'까지 필드로 귀환했다.
결과적으로 최상급 번개족 몬스터는 3체. 본래대로라면 여기서 더 뽑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뇌전룡'의 효과가 막혀버린 시점에서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짜증나네."
"그럼. 이 정도도 극복을 못해서야 이 바닥에서 못 살아남잖아? 더 하고 싶은데 패가 모자라니까, 이 쯤에서 마치는 수밖에."
"흥."
[러미: 패 5장]
[조브 하스웰: 패 2장]
"'초뇌룡'은 드로우가 아닌 다른 덱 서치를 막는 카드. 성가시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런 때에 더 써줘야 되지 않을까?"
"과신은 금물이야. 패에서 '무한포영'을 발동. 이걸로 '초뇌룡'의 효과를 무효로 한다."
"어이쿠."
'무한포영'은 아마도 방금 드로우했으리라 조브는 추측했다. 첫 패에 잡혔으면 진작 썼을 테니까.
"이어서 '천배룡 파이도라'를 소환."
[천배룡 파이도라: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1700 / DEF 1000]
[러미: 패 3장]
'천배룡'. 확실히 후공으로 시작해도 전혀 걱정할 것 없는 테마다.
아니, 오히려 후공에 들어가면 빛을 발하는 강적이었다.
"소환된 '파이도라'의 효과로 덱에 있는 '찬환' 마법 하나를 내 필드에 세트하지. 그리고 세트한 필드 마법 '배만의 찬환장'을 발동!"
용 한 마리가 나타난지 얼마 안 되어 뒷편에 돌기둥 세 구가 솟아난다.
각 꼭대기는 하나같이 술잔 모양이 되도록 오목하게 파여있었고, 이를 제단 삼듯 제각각의 색을 띄는 봉화가 꼭대기에서 피어올랐다.
이윽고 그것에 반응하듯 주변에 스파크가 몰아치더니 공중에서 마작패처럼 생긴 네모난 물체 하나가 나타난다. 저 물건을 아티팩트 삼아 무슨 의식이라도 치러질 법한 광경이었다.
"아아, 잠시만. 그럼 '마스카레나'의 효과로 체인. 이 타이밍에 링크 소환을 실행한다. 자신과 '다크 크리에이터'를 소재로, '에스:피 리틀나이트'를 링크 소환.
[에스:피 리틀나이트: 전사족 / 어둠 / LINK-2 / ATK 1600 / 링크 마커 ←→]
"'리틀나이트'의 효과. 링크 몬스터를 소재로 하고 나왔으니까, 필드의 '찬환장'을 제외한다."
그러다 웬 닌자 소녀가 조브 필드의 맨 앞으로 나타나더니, 찬환장의 기둥을 향해 수리검 세 자루를 던진다. 돌로 된 기둥에 보기 좋게 하나씩 박히자, 이윽고 찬환장이라는 무대 자체가 필드에서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배만의 찬환장'은 '천배룡'을 패로 가져올 뿐만 아니라 메인 페이즈 동안 효과 내성까지 부여하는 성가신 필드 마법. 조브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치워주는 것이 이득이었다.
"역시 짜증나."
"그럼 견제할 카드를 또 잡으셨어야지."
"아직이야. 필드에 드래곤족 / 화염 속성 몬스터가 있으니까 패에 있는 '천배룡 츈도라'의 효과를 발동."
물론 다른 성가신 카드가 찾아오는 것 또한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리틀나이트'의 효과로 체인. 체인 있으신가?"
아직 할 일이 더 있다는 듯 '리틀나이트'가 검집에 손을 갖다댄다.
다시 속행하려던 전개에 방해가 들어 오니 러미는 또다시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조브로서는 저러다 주름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칫."
"오케이. 그럼 '리틀나이트' 자신과 '파이도라'를 이번 턴 동안 제외."
"'츈도라'는 패에서 특수 소환."
[천배룡 츈도라: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1500 / DEF 1000]
[러미: 패 2장]
'리틀나이트'가 '파이도라'를 향해 뛰어든 직후,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진 순간 두 몬스터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우듯 새로운 용이 러미의 필드로 나타났다.
만능 용병이라 할 수 있는 '리틀나이트' 덕분에 저쪽의 싱크로 소재를 하나 덜어낼 수가 있었지만, 흐트러짐이 없는 상대 모습을 살펴보며 조브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 배틀 페이즈. 속공 마법 '찬환 카이멘'을 발동. 효과 2개를 다 사용하지. 먼저 덱에서 드래곤족 / 화염 속성 몬스터 하나를 패로 가져온다. 그리고 패에 있는 드래곤족 / 화염 속성 몬스터를 특수 소환할 수 있지. 나와라, '천배룡 파도라'!"
[천배룡 파도라: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1600 / DEF 1000]
"그리고 패에 가져온 '환록의 천배룡'의 효과. 이 카드를 튜너로 취급하고 특수 소환한다."
[환록의 천배룡: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0 / DEF 1000]
[러미: 패 0장]
방금 것으로 러미의 패는 소진. 하지만 저 덱으로서는 충분히 판이 갖춰졌을 것이다.
"배틀, '파도라'로 '초뇌룡'을 공격. 이어서 데미지 스텝 개시시에 '츈도라'의 효과를 발동한다. 덱에서 레벨 4의 드래곤족 / 화염 속성 몬스터를 특수 소환."
[천배룡 파이도라: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1700 / DEF 1000]
털이 홍염처럼 일렁이는 용 한 마리가 먼저 조브의 '뇌신룡'에게 달려든다.
아무리 봐도 명백히 더 강한 상대를 향해 들이받는 꼴밖에 되지 않았지만, 용의 돌격과 함께 새롭게 나타난 또다른 용에게는 이를 커버해줄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천배룡 파도라'가 있으면 내 드래곤족 / 화염 속성 몬스터는 전투로 파괴되지 않아. 여기에 '파이도라'가 있으면 전투 데미지도 0. 안심하고 공격할 수 있단 말이지."
두 마리의 격돌로 인해 주변에 스파크가 발생한다. 아무래도 더한 체급의 용을 무찌르는 것은 무리였는지 불무리같던 '파도라'의 몸이 떠밀려났지만, 사라지지는 않은 채 멀쩡하게 버텨낸 용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럼 나머지 '츈도라', '환록'도 전부 '초뇌룡'에게 공격!"
이어서 나타난 두 드래곤의 공격 역시 마찬가지. 전부 튕겨나가고는 목숨을 부지한 채 자리로 돌아갈 뿐이었으나, 정보가 있는 조브는 그 의미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츈도라'의 ③의 효과를 발동. 자신을 소재로 싱크로 소환을 실행한다."
온다. 호전적이기 그지없는 '천배룡' 테마의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
"레벨 3 '파도라'에 레벨 4 '츈도라'를 튜닝. 싱크로 소환, 발(發)과 중(中)이 자아내는 소삼원(小三元), '찬환승룡 바이덴트 드라기온'!"
[찬환승룡 바이덴트 드라기온: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7 / ATK 2600 / DEF 2000]
"그리고 싱크로 소환된 '바이덴트'의 효과를…."
"미안하지만 또 끼어들어도 될까? 패에 있는 '뇌전룡-썬더 드래곤'의 효과를 ①의 효과 발동. 덱에서 '뇌전룡' 1장을 패에 추가."
조브가 새 카드를 가져오는 것에 반응하여 '뇌신룡'의 온몸이 번쩍인다.
"…패에 하나 더 있었다고?"
"그럼. 그리고 패에서 번개족 몬스터의 효과가 발동한 순간, '뇌신룡'의 효과도 따라서 발동할 수 있다. '바이덴트 드라기온'을 파괴."
곧 빛을 이루고 있는 전기는 하늘로 거슬러오르는 벼락이 되어 솟구치더니 이내 방금 전에 등장한 두 머리의 화룡을 향해 내리쳤다.
"'바이덴트'의 효과를 처리. 묘지에 있는 드래곤을 부활시킨다."
[천배룡 파도라: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1600 / DEF 1000]
[조브 하스웰: 패 2장]
"어설프게 끼어들어봤자 소용없어. 이번 턴에 '천배룡'이 실행한 공격은 3번. 즉 묘지에서 '바이덴트'의 효과를 발동할 수가 있지. 필드로 부활!"
[찬환승룡 바이덴트 드라기온: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7 / ATK 2600 / DEF 2000]
화룡 '바이덴트 드라기온'은 그대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금세 불길과 함께 필드로 귀환한다.
아직 적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라지만, 이 덱에는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파도라'의 ③의 효과를 발동. 마찬가지로 싱크로 소환을 실행하지. '바이덴트 드라기온'에 '파도라'를 튜닝. '소삼원'에 발을 더한 '초삼원(超三元)', '찬환초룡 트랜센드 드라기온'!"
[찬환초룡 트랜센드 드라기온: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7 / ATK 3000 / DEF 3000]
"'트랜센드 드라기온'이 싱크로 소환하면 상대 필드의 몬스터는 강제로 공격 표시가 된다."
신나게 필드를 전개하던 러미는 그제서야 수비로 대기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일어서는 것을 확인한다.
잠깐 멈칫한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라 조브는 파악했다.
"그럼 '트랜센드 드라기온'으로 '초뇌룡'을 공격'!"
'초뇌룡'은 묘지의 번개족 몬스터를 대신 제외하는 것으로 파괴를 면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발동하는 효과가 아니므로 '트랜센드'의 효과를 무시하고 적용할 수 있었겠지만, '무한포영'에 맞아버린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
그렇게 '트랜센드 드라기온'의 세 머리로부터 뿜어져나오는 불기둥이 무력해진 '초뇌룡'의 몸뚱이를 불살라버린다.
[조브 하스웰: LP 8000 → 7600]
하지만 그 뿐. 공격력이 더 앞서는 '뇌신룡'을 건드릴 수는 없었기에, 저절로 양쪽 필드에 세 머리의 용이 마주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에이스 몬스터가 남아 있는 것에 조브는 잠시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이상하네. '천배룡'은 분명 후공 원턴킬에 특화된 테마라고 들었는데."
"큭, 아직이야!"
배틀 페이즈에 싱크로 소환이 가능한 '천배룡' 덕분에 러미에게는 아직 전개할 거리가 남았을 테지만, '바이덴트 드라기온'의 효과를 쓴 시점에서 러미는 드래곤족 몬스터밖에 특수 소환할 수 없는 상태다.
지금 꺼낼 만한 싱크로 몬스터라면 '레드 와이반'이나 '카이베르트' 같은 파괴 효과를 가진 카드가 있을 터. 하지만 '뇌신룡'은 묘지의 카드를 제외하는 것으로 효과에 의한 파괴를 피해갈 수 있다.
"메인 페이즈 2. '파이도라'와 '환록'을 소재로 '천구의 성각인'을 링크 소환."
[천구의 성각인: 드래곤족 / 빛 / LINK-2 / ATK 0 / 링크 마커 ↙↘]
그렇다면 남은 수는 저 정도겠지. 예상대로의 움직임에 조브는 조금 더 안심하기로 한다.
적어도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다는 점에서.
"엔드 페이즈에 '리틀나이트'의 효과로 제외된 몬스터는 메인 몬스터 존으로 돌아온다."
[천배룡 파이도라: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1700 / DEF 1000]
[에스:피 리틀나이트: 전사족 / 어둠 / LINK-2 / ATK 1600 / 링크 마커 ←→]
"좋아, 내 턴이네."
[조브 하스웰: 패 3장]
[러미: 패 0장]
"'어둠의 유혹'을 발동. 덱에서 2장 드로우하고, 패에 있는 어둠 속성의 '뇌전룡'을 제외한다. 이어서 '뇌전룡'의 ②의 효과 발동. 덱에서 '썬더 드래곤' 카드 1장을 패에 넣는다."
[조브 하스웰: 패 4장]
"패에 있는 '뇌조룡-썬더 드래곤'을 버리고 ①의 효과 발동. 묘지나 제외 상태에 있는 '썬더 드래곤' 몬스터를 특수 소환할 수 있어. 패에서 효과를 발동했으니 '뇌신룡'의 효과가 또다시 발동한다. 그럼…."
"'천구'를 릴리스하고 ①의 효과로 체인! "
"그럼 '리틀나이트'의 효과를 체인. 이번엔 '뇌신룡', 그리고 '파이도라'를 이번 턴동안 제외한다."
"다음은 '천구'의 효과를 처리. '리틀나이트'를 엑스트라 덱으로 되돌린다."
"오케이. 체인은 역순으로. 그럼 '뇌신룡'의 효과를 적용해서 '트랜센드'를 파괴. 마지막으로 '뇌조룡'의 효과를 처리해서 제외된 '뇌수룡'을 특수 소환하지."
[뇌수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어둠 / 레벨 6 / ATK 2400 / DEF 0]
"릴리스된 '천구'의 ②의 효과 발동. 덱에서 드래곤족 하나를 공수 0으로 해서 특수 소환할 수 있지. '파도라'를 선택."
[천배룡 파도라: 드래곤족 / 화염 / 레벨 3 / ATK 1600 / DEF 1000]
"특수 소환한 '파도라'의 효과로 묘지의 '파이도라'를 특수 소환. ①의 효과로 2장째 '찬환장'을 가져오겠어.''
[러미: 패 0장]
저쪽은 턴이 돌아오는 대로 다시 후공의 진면목을 선보일 작정이겠지. 뿐만 아니라 지금 꺼낸 몬스터들로도 견제책을 마련할 생각일 것이다.
"다음 턴에 똑같은 수를 쓰시겠다? 쉽지 않을 텐데?"
"그 때가 안 오면 모르는 법 아니겠어?"
조브는 다시금 상황을 살펴보았다.
러미에게 주어진 패는 '찬환장' 하나. 묘지에서 반응하는 카드는 없음. 필드에 있는 것은 배틀 페이즈가 되어서야 효력을 발휘하는 몬스터들 뿐.
결론이 나는 대로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시구나."
그녀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을 테지. 빠르게 갖춰진 강력한 패를 통해 맛보는 화끈한 승리란 미미(美味)라고도 할 수 있었으리라.
그 심정을 조브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의 기본 목표는 승리의 쾌감. 자기 힘에 심취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어 주니까.
나아가 승리 없이 다음을 보장할 수 없는 환경에서 치른다면,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성취감이란 더욱 각별할 것이다.
분명 짜릿하고 마음이 놓일 테지. 자신이 아직 세상에 남아도 된다는 것을 인정받은 기분마저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뭔가에 선택받았다는 느낌마저도.
언젠가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망각하기에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안 됐지만, 아까 못 끝낸 시점에서 게임 오버야."
"뭐가 어째?"
그런 일말의 이해가 있더라도, 끝내 선을 넘어버린 상대를 보다 보면 자기 발밑에도 그어진 선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성의 끈은 이를 넘지 못하도록 붙잡아주는 셈이다. 언제 끊어질지 보장할 수 없는 그 끈에 의지해서 그들은 지금도 버티고 있었다.
만약 선 너머의 상대가 기고만장한 상태로 송곳니를 들이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태스크 포스라면 답은 이미 주어져 있다. 말 안 듣는 짐승에겐 매가 약이라는 것을.
"마법 카드 '썬더 드래곤 퓨전'. 묘지나 제외 상태의 융합 소재를 덱으로 되돌리고 번개족 몬스터를 융합 소환한다. '뇌전룡'과 '썬더 드래곤' 2장을 덱으로, 나와라 2장째 '뇌신룡'! 이어서 필드의 '뇌수룡'을 제외하고 2장째 '초뇌룡'도 특수 소환!"
[뇌신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빛 / 레벨 10 / ATK 3200 / DEF 3200]
[초뇌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어둠 / 레벨 8 / ATK 2600 / DEF 2400]
"제외된 '뇌수룡'의 효과로 이번에는 덱에 있는 '뇌원룡'을 특수 소환하지."
[뇌원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빛 / 레벨 1 / ATK 0 / DEF 2000]
"자, 그럼. 패에 있는 '썬더 드래곤'의 효과를 발동. 덱에서 '썬더 드래곤' 하나를 패에 넣는다. 이걸로 '뇌신룡'의 효과를 발동. '파이도라'를 파괴."
패의 '썬더 드래곤'이 덱에 있는 여분의 '썬더 드래곤'을 불러들인 직후, '뇌신룡'의 몸이 한 번 더 번쩍인다. 이번에도 그것은 러미의 드래곤을 향해 또다시 벼락을 내리쳤다.
"'썬더 드래곤'은 하나 더 있지. '뇌신룡'의 효과로 이번엔 '파도라'를 파괴."
또 한번의 벼락으로 나머지 드래곤마저 섬멸.
"패의 '썬더 드래곤', 필드의 '초뇌룡'을 소재로 3장째 '뇌신룡'을 특수 소환한다. 마지막으로, '뇌원룡'을 제외하고 3장째 '초뇌룡'을 특수 소환."
[뇌신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빛 / 레벨 10 / ATK 3200 / DEF 3200]
[초뇌룡-썬더 드래곤: 번개족 / 어둠 / 레벨 8 / ATK 2600 / DEF 2400]
그렇게 패와 필드가 순환한 끝에 조브의 필드에 나타나 있는 것은 세 머리의 뇌룡이 2마리. 그리고 먹구름처럼 어두운 몸뚱이의 뇌룡이 1마리.
'천배룡'을 모두 잃은 채 무방비 상태가 된 러미는 세 용의 번개같은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약속대로 얼마 안 걸렸어. 어때? 지금도 똑같이 대답할 수 있나?"
"……."
기껏 남은 '배만의 찬환장'이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순조롭게 얻을 수 있던 승리가 이렇게나 간단하고 빠르게 막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니.
"말문이 막히셨네. 즐거워하는 반응으로는 안 보이는데."
패닉에 빠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간 저런 조롱섞인 말이나 들어야 하겠지.
한동안 침묵에 빠져 있던 러미는 이 쯤에서 어깨에 힘을 풀기로 했다.
"…여기까지인가 보네."
그리고는 '서렌더(기권)'라는 의미로 듀얼 디스크에 자신의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러미: 8000 → 0]
서렌더가 인정되면서 듀얼 기능은 종료. 듀얼에 사용되던 솔리드 비전 기능도 그 자리에서 꺼진다. 솔리드 비전을 말 그대로 한 층 더 실체화시키던 어둠의 에너지 역시 필드를 물러나면서, 저절로 러미를 노려보고 있던 몬스터들의 형체마저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덕분에 심판의 번개를 맞는 일없이 끝날 수 있었다.
승리의 쾌감에 절었을 뇌로 용케 짐승이 아니라 교섭 가능한 인간이 되기를 택했다는 것인가. 조브는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은 바꾸었다.
"좋아. 그럼 다시 협조를 구해보도록 할까. 위저드에 대한 정보라던가."
"대가는 얼마나 쳐줄 거지?"
설마하니 금전을 바라는 것을 아닐 터.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응하는 태도에 의아해하기도 잠시, 조브는 여기까지 추적한 목적인 심문을 마저 이어가기로 했다.
"글쎄, 듣기에 따라서는."
"그래, 알았어. 혹시 저번에 열렸다던 듀얼 대회 얘기 들은 적 있어?"
"그럼. 초대는 못 받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위저드는 기어이 나갔고, 그대로 소식이 끊겼어."
"설마 거기서 진짜로 끝났을 거란 얘긴가?"
"글쎄."
머릿속을 뚫어다 보려는 듯이 조브의 눈매가 예리해진다.
"끝났을 수도 있지. 어떻게든 도망쳐나왔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다시 살아났을 수도."
"모른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처음부터 제대로 아는 게 없었거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자는 게 그 인간 제안이기도 했고. 동료니 뭐니 떠들어놓고 자기 얘기는 거의 꺼내는 일이 없었다고. 그런 식으로 서로간의 네트워크가 최소한으로 유지되어 온 거야."
"그럼, 다른 컬렉터를 붙잡아도 다를 건 없다는 얘기겠구만?"
"그렇겠지."
과연, 어쩐지 수월하게 끝난다 싶더라니. 조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티가 흐르던 저 풍모는 그야말로 장식이었단 말인가.
안 그래도 뚜렷한 성과가 없는 것이 일상이거늘.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분은 답답함과 초조함을 안기고 있었다.
그런 반응을 살폈는지 러미는 말을 덧붙인다.
"적어도 내가 파악한 건, 방금 말한 세 가지가 다 가능하고도 남을 인간이란 거지. 무슨 짓이든 해내기 위해서 무엇이든 갖다 바치니까. 그런 식으로 녀석은 전세계에 네트워크를 마련했을 거야."
과연. 그런 식으로 위저드라는 녀석은 어둠의 듀얼 중개인 노릇을 해왔으리라.
"무엇이든 갖다 바친다?"
"돈이든, 레어 카드든, 남의 신상이든. 심지어 동료라고 손잡은 놈들도 예외는 아니야. 가끔 그게 인간인지 의심스러워진다니까."
"확실히. 당신 신상도 우리한테 팔아넘겼을 수도 있단 얘기겠네?"
"……."
"그런 상황에서 용케 인조이 해오셨구만."
"이겨서 얻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이 여자는 그렇게 갖다 바친 것을 주워먹으면서 이 길에 빠져든 인간이란 뜻이렸다.
"그 정도면 들키지 않고 날뛸 만한 뒷배가 있고도 남겠지. 커넥션이 있는 당신이라면 알거나 짐작 가는 데가 있을까?"
"…댁 같은 인간들의 뒷배 만한 곳이지 않을까? 스케일적인 의미로."
"일리는 있네."
컬렉터(수집가) 씩이나 되는 인물이라면 그만큼 많은 패자들의 말로를 보아왔을 터. 자신이 그렇게 되기 싫어서 협조에 나선 이 상황에서조차 모른다고 잡아뗀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진짜로 모른다거나. 알려줬다간 더 끔찍한 결과가 기다린다거나.
"어쨌든 알고 있는 건 다 말했어."
"알겠어. 믿어주도록 하지."
어차피 대화보다도 더 효율적인 정보 추출 수단이 있고, 이런 분야에 더 전문적인 인원들 또한 본부에 대기 중이므로, 대화로 나누는 심문은 여기까지 해두기로 한다.
"그럼…."
"대가를 치를 시간이겠네."
러미는 아직 주변의 영역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내보낼 생각이 없다는 듯이.
"…무슨 뜻이지?"
"이건 평범한 듀얼이 아니잖아. 굳이 이런 듀얼을 청한 건 당신이야. 모든 걸 걸겠다고 한 것도."
당황 어린 기색을 보아하니 여기서 풀어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은 모양새다. 조브는 꿈도 야무지셔라, 라고 속으로 비아냥거려보았다.
"그래서 뭐? 이게 협조해 준 사람에 대한 태도야?"
"왜 그래? 당신한테 패배했던 상대들은 기꺼이 대가를 내주지 않았었나? 만약 내가 서렌더 했더라면 당신은 그냥 넘어가줬을까?"
다시 말문이 막힌 듯 그녀는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애초에, 즐기는 대가를 목숨에서 찾으려 하는 것들은 절대로 그냥 못 넘기겠거든."
"이, 이런 게 어디있어……."
관용이란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한테나 주어지는 법. 도박꾼이나 다름없는 마인드를 가지고 이 바닥에 남은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여태껏 치르지 않고 넘어간 대가(벌칙)를 여기서라도 치루게 하도록 하자.
조브가 인식표와 함께 차고 있던 펜던트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 상태에서 조브는 손을 뻗으며 선언했다.
"벌칙, '마인드 크러시'!"
그 직후 러미가 머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지른다.
한순간 욱신거리는 충격과 함께 머릿속을 이루던 것들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이내 그 몸뚱아리는 털썩 엎어지면서 비명이 끊긴다.
그제서야 영역이 조성하던 칠흑은 그나마 밝은 저녁의 어둠으로 돌아갔다.
"얌전히 주무시고 계셔. 그 동안이 차라리 편할걸."
그녀가 방금 당한 것은 '마인드 크러시'. 명칭 그대로 정신을 한 번 붕괴시키고 재조립시킬 때까지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벌칙이다. 사악한 마음을 고쳐낸다면 새 사람이 되어 깨어날 수도 있다고도 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실제로 있었다는 벌칙 게임 이야기일 뿐, 지금 것은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기술로 만들어진 모조 디젠의 정신 충격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회사가 자랑하는 솔리드 비전 기술을 활용해서 어둠의 게임의 벌칙이 주는 정신적 영향까지 구현한 결과물이라 했던가.
그러나 모조 디젠이 구현할 수 있는 어둠의 벌칙은 극히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진짜 디젠이 주는 충격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이 정도로 정말 개과천선이 가능할지는 쓰는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고유의 디젠이 있는 리퍼가 상대였다면 이 자는 지금쯤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으리라.
그런 것이 없는 조브는 이런 가짜로서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뒷일은 자신과 동행한 인원들이 확보해서 처리하겠지.
협조라는 것을 해준 대가로서 그나마 온건한 처사를 내려준 것이라 치기로 했다.
그는 면장갑을 꺼내 끼고는 그녀 주변에 떨어진 것을 주워든다.
붉은 선으로 용의 그림이 새겨진 검은 마작패. 그것이 그녀의 디젠이었다.
주머니서 꺼낸 비닐 팩에 조심히 밀봉한 뒤 조브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잖아, 컬렉터라는 것들도."
이것으로 악명높은 컬렉터 하나를 또 제압해냈을 뿐만 아니라, 중요 참고인으로서 산 채로 확보해 내는 데에도 성공한 참이다.
그저 듀얼 한 판으로 이렇게 작전이 성사되었다. 성취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썩 개운치 않다.
시선은 다시금 쓰러진 쪽으로 향한다.
그렇게 여유만만하던 기품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으슥한 곳에서 요란한 옷을 걸친 채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 몸뚱아리에 불과했다.
사람의 죄악감이나 배덕감 따위를 시험하게 만드는 모습이겠지만, 표정은 여전히 고통에 겨운 채 일그러져 있었기에 헛웃음이 나올 뿐.
딱히 동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것은 전부 그녀가 자처했을 뿐이니까.
그것을 두고 그가 택한 것은 무전기를 꺼내들고 본부에 연락을 보내는 것이었다. 실시간으로 감시 중인 그들이었기에 자신의 말을 신호 삼아 몇 분만에 회수 인력이 도착한다.
그는 비닐에 포장해놓은 것을 그들에게 전달하며 익숙한 인사를 보낸다.
"수고하십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어서 귀환하시죠. 식사도 안 하셨을 텐데."
그는 대기 팀에 컬렉터를 확보한 사실을 신고하고는 주변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뻐근해진 어깨를 피며 기지개를 킨다.
어둠의 게임을 승리한 자는 소유한 디젠으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고 했던가. 모조품을 갖고 있을 뿐인 그로서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지금은 살짝 찌뿌둥하고, 뱃속이 허해진 기분을 느낄 뿐이다. 늦은 저녁이라도 때우고 눈을 붙이면 그나마 회복할 수 있을까.
'아까 그 식당…, 꽤 비싸 보이던데.'
하지만 뭘 먹고 돌아갈지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졌기에, 그는 잠시 러미를 따라다니며 못 다한 산책을 마치기로 했다.
걷다 보면 뭔가 떠오리라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들리는 것이라고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저벅저벅한 발소리 뿐. 이따금씩 벌레 울음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정도.
하지만 영역 내부의 완전한 침묵과 비교한다면 충분히 시끌벅적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지기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이 참에 조브는 방금 전에 쓰러뜨린 상대를 다시 짚어 넘겨본다.
이송 전에 치러진 신원 확인 과정에 따르면, '러미'라고 자칭한 그녀는 한껏 멋을 내면서 비싼 밥을 먹고 다닐 만한 자산가였다. 하루의 반을 취미 생활에만 열중하고 보내도 별 문제가 없는, 부러울 정도로 유복한 삶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는 뭐가 부족해서 컬렉터라는 길을 선택했을까. 위저드는 어떻게 구슬려서 어둠의 듀얼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 점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았다. 삶이 무료해져서 새로운 쾌감이 필요했다고 하면 설명이 되니까. 그녀에게는 새 취미 활동의 일환일 뿐이었겠지.
그 동안 상대했던 이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사연이다. 머릿속으로 해명이 된 시점에서 그 이상의 관심은 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까부터 캐물어도 알아내지 못한 위저드의 거취. 그녀가 가지고 있던 D-패드의 통화 및 메시지 내역을 조사해봐도, 어쩐지 제대로 된 정보는 알아내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동안의 전례대로라면.
방금 전에 목숨을 걸었던 결과가 허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 편 'ABC(어드밴스드 배틀 시티)'라는 게임의 개최자에 대한 조사라면 분명 진전은 있다.
'재버워키'라는 자칭부터, 어둠의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 그리고 타인의 육체를 차지해서 그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다는 특성까지.
전부 리퍼, 그리고 아이바 유노가 목숨 걸고 나서서 생환해주었기에 얻어낸 정보다.
그런 그가 리퍼를 두고 동포라고 불렀다는 점 또한 석연치 않았기에, 슬슬 리퍼를 파견 임무에서 제외하고 연구 대상으로서만 활용해야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었다.
리퍼라는 인격체부터가 완전한 해명이 되지 않은 가운데, 과연 그 재버워키의 정체에 다가가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
위저드를 자칭한 게임 참가자가 그 재버워키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아왔다고 했으니, 사실이라면 그 특수한 능력을 모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둠의 에너지가 축적되면 될 수록 특수한 능력이 발휘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므로 일리는 있다. 그렇다면 남의 몸뚱아리를 차지해서 초능력을 부릴 수도 있는 작자를 언젠가는 상대해야된다는 뜻이겠지.
무슨 짓이든 해내기 위해 무엇이든 갖다바치는 자라고 러미도 말했으니, 할 수 있다면 안 할리가 없다. 그런 작자를 과연 듀얼이라는 게임으로 어떻게 할 수나 있을까.
이 순간에도 분명 그들은 어떻게든 어딘가에 있겠지. 그 동안 뭔가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인질과도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걸 이 자리에서 알아내려는 시도는 그냥 날로먹으려던 심보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참고인이라면 하나 더 있다. 재버워키라는 자가 자신의 반쪽(디젠)을 넘겼다던 소년. 자신이 눈여겨보고, 위저드라는 남자와도 접촉하고, 지금은 유노가 지켜보는 중인 '평범한' 학생. 이름은 서문유진.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고, 무엇을 얻었느냐가 실마리일 것이라는 다수의 기대가 있기에 빠른 시일내로 만나게 될 예정이다.
그런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주목하고 봐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놓이기는 커녕 착잡해질 뿐인 가운데, 그는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정말로 최선인가 하고.
다른 동료들이 각자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분발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시간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문제를 눈뜨고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안고서. 이미 당해버린 이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면서.
말 그대로 무엇이든, 그리고 어떻게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태스크 포스에겐 제 역량을 넘어설지도 모르는 책임이 주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잠깐 듀얼 대회에 참전했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그곳도 나름대로 치열하고, 긴장감 넘치고, 머리 아파지는 승부가 이어지는 전장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그런 곳을 그는 가벼운 기분으로 갔다 나올 수가 있었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그야, 그곳은 지고 나서도 다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기약할 수 있었으니까.
목에 걸린 펜던트를 쥐면서 조브는 생각한다. 어둠의 듀얼이라는 것도 그런 식이었다면 즐길 수가 있었을까.
어느 샌가 강줄기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귀에 익숙해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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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어어어엉말 오랜만입니다
원래부터 한달은 가볍게 잡아먹던 느낌이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줄은 저도 몰랐네요
전부터 다룰 생각이었던 덱하고 적당히 어울리는 그림 나오면서 센 덱으로 잡아본 게 이번 듀얼입니다.
문제는 이 천배룡이란 덱 말입니다. 풀파워로 나가는 순간 쓰는 입장으로서는 대책이 안서더라고요. 마듀에서 그렇게 처맞아놓고 간과라고 있었다니
결과적으로 이거 빼고 저거 빼다 요렇게 짧은 글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뭔가 현실에서의 입지를 반도 못담아낸 느낌이랄지.
역시 티어덱을 글로 다룰 때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요
다음 분량도 깨작깨작 써놓은 것이 있으니 잘하면 다음 편은 빠르게 올릴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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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 25.10.23 20:4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