避難は「非国民」 青森空襲で被害を拡大させた行政の“脅し”(毎日新聞) - Yahoo!ニュース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각 도시는 미군에 의해 공습을 마주했다. 주된 대도시가 불타버리자, 1945년 6월경 부터 전국의 중소도시가 표적\
이 되었다. 공습에서는 소화에 해당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며, 피난하는 것은 비국민. 나라는 그런 국민을 소집했다. 이러한 통제가 피해를 확
대시켜, 아오모리 시에서는 행정에 의한 위협이 일어나고 있었다.
45년 7월 28일 밤. 당시 9세였던 히라이 준지씨(87)는, 울리는 경계 경보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가족이 공습을 피하기 위해, 산간부의 친족의 집
으로 몸을 옮겼지만, 이 날은 2주간 만에 아오모리 시내의 자택으로 막 돌아갔을 뿐이었다.
머지 않아 미군기 B29의 굉음이 울렸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고, 마을 밖의 높은 곳으로 향했다. 시가지를 아래로 보니, 주위를 태
우는 재료가 들어간 폭탄 소이탄이,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을은 씨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히라이 씨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모두는 집으로 돌아간 걸까?"
그때까지 공습을 받지 않았던 아오모리 시에서는, 14, 15일에 혼슈와 홋카이도를 잇는 세이칸 연락선이 적기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 많은 시민
은 "다음은 거리가 노려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외에도 있다. 카네자와 토키노부 씨(90)로, 피난처 에서 돌아 온 같은 날에 공습을 맞이했다. 중심부로 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화해에 둘러 쌓이고 있는 중에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 주변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불타버린 유체가 잊혀지지 않는다". 아오모리 공
습에서는 1000명 이상의 목숨을 잃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위험한 시가지로 돌아 갔는가?
공습 10일전인 7월 18일부의 지역지가, 당시의 카네이 모토히코 아오모리 현 지사의 발언을 보도했다.
일부의 집을 비워둬서 도망가거나, 하는 풍문이 돌고 있었지만, 원래 다른 거였다. 그런 것은 방공법에 의해 처벌 할 수 있다". 피난을 시작한 시
민에게 귀환을 부르는 내용이었다.
방공법은 국민에게 소화를 의무화 시켜서, 피난을 제한했다. 정부가 국민을 향해 만든 방공 메뉴얼 "시국 방공 필휴" 에서는 "목숨을 내 던져서
장소를 지킨다" 라고 하는 "맹세"도 내걸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메뉴얼과 포스터에서 소이탄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다" 라고 선전하여, 국민에
게 바가지 릴레이 훈련을 반복했다.
아오모리 시의 대응도, 박차를 가했다. 28일 까지로 (자택에) 복귀하징 ㅏㄶ으면, 마을 모임의 인명대장 에서 말소한다. 물자의 배급은 받을 수
없게 된다" 라고 통보했다. 물자 부족의 전시하 에서, 배급의 정지는 아사를 의미한다. 많은 시민이 자택으로 돌아 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기
한의 날, 공습은 왔다.
방공법제에 대해 잘 아는 와세다 대학의 미즈시마 아사호 교수는 "도망치면 비국민이 된다고 하는 사회적인 강제가, 희생자를 확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라고 지적한다. 지사였던 카네이 씨는, 패전 다음 해인 46년에 공직을 추방되었다. 거리로 귀환을 명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까? 제대로 견해를 내 보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공습의 6일후에 국가에게 낸 보고서에는, 공습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인원소
개의 철저한 실행"으로 기록했다.
사망한 다음 해인 92년에 발행된 추도문서에 글을 올린 아오미리 시대의 지인은, 80년에 재회한 카네이 씨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오모리에는 좋은 기억은 전혀 없다. 그저 비애와 고통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