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해서여진계 세력인 여허의 버일러 중 한 명이었던 부양구의 누이, 흔히 '여허의 노녀'라고 칭해지는 인물은 33살이 될 때 까지 혼인을 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 보건대 혼인이 대단히 늦은 것이었다. 1597년 부양구의 누이와 누르하치간의 혼담이 오간 뒤 그녀의 친정인 여허측에서 누르하치측에게 그녀를 시집 보내는 것을 중지한 이후 그녀는 줄곧 홀몸으로 늙어갔다. 그러다가 1615년서야 옹기라트 세력에 시집을 갔다.
그러나 그녀가 18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아무런 혼담에도 거론되지 않던 것은 아니었다. 부양구의 누이는 누르하치와의 혼담 이후로도 몇 번이고 여허와 타세력간 정략혼의 대상으로 거론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의 혈통과 위치를 생각해 보건대 그녀는 여허로서는 가장 귀중한 정략혼 자산이었던 동시에 주변 세력들의 눈독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보니 여허로서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치 못한 누르하치의 반응을 경계하면서도 그녀를 몇 번이고 혼담 대상으로 거론했고, 주변의 세력들 역시도 그녀를 노려왔다. 그러나 그들 세력은 모두 혼담이 제대로 진행되기 전에 몰락해 버린 것으로 파악된다.
이전 편에서 언급한 울라의 부잔타이의 부양구의 누이에 대한 선제적인 혼인 제안, 그리고 그로서 성립된 부양구와 부잔타이간의 정략혼 약정과 그 실패 사례외에도 부양구의 누이가 시집을 가려 했던 대상들이 그녀가 시집을 가기도 전에 먼저 몰락해버려 혼담이 자연히 취소된 사례는 추가적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기록상에서 직접적인 서술은 없지만, 이를 유추케 하는 간접적인 서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추정 자체는 가능하다.
추정을 가능케 하는 사료문구는 만문노당 1615년 음력 6월 기사에 존재한다. 해당 기사는 바로 여허와 몽골의 칼카 5부 옹기라트간 정략혼담, 즉슨 부양구의 누이와 망굴다이간의 혼담과 그에 대한 건주의 반응에 대한 기록이다. 이 때 누르하치의 세력내 버일러들과 암반들은 이전에 언급했다시피 해당 정략혼 소식이 알려지자 대대적으로 분노를 토해내며 여허를 공격하고 누르하치와 혼약이 맺어졌었던 부양구의 누이를 데려와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러나 이 시기 누르하치는 부양구의 누이의 혼담을 매개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치며 '여허의 노녀'로 인해 많은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로서 많은 나라들이 몰락했고,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존재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인데 이 의도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다가는 어찌되든간에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는 논조로 전쟁이 불가함을 주장했다.1
이때 누르하치는 부양구의 누이로 인해 몰락한 나라들을 열거했는데, 직접적으로 그녀와 정략혼을 맺으려 했던 울라는 물론이고 하다와 호이파 역시도 그녀로 인해 몰락한 나라로 언급했다.2누르하치의 발언을 신뢰한다면 해당 나라들 역시도 기록상에서 직접적인 언급이 생략되었으나 멸망하기 전 그녀를 대상으로 한 여허와의 혼담이 존재했던 것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특히 하다의 경우에는 비록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기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599년 하다의 버일러 멍거불루가 친건주 행보를 보이던 당시에 여허 버일러 나림불루는 멍거불루에게 다시금 자신과 화친을 맺고 반건주행보를 걸을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 이 때 나림불루는 멍거불루와의 화친을 도모하면서 '이전에 그대가 요청했던 딸을 처로 주겠다'고 제안했다.3이 부분이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나림불루가 멍거불루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한 '딸'에 대하여서, 이전에는 제안자가 나림불루이다보니 언급된 딸을 나림불루의 친딸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 역시 해당 인물을 나림불루의 친딸로 추정하였다.4그러나 조카딸이나 종실의 딸 역시도 항렬만 맞으면 언어적 표현상 '딸'로 취급될 수 있던 당시 여진의 특성과 그러한 종실의 여식들을 양녀로 맞이하여 시집보내는 경우가 많았던 당시 여진의 상황상, 그리고 1615년의 누르하치의 발언상 아마도 당시에 나림불루가 멍거불루에게 시집을 제안했던 '여허 왕실의 딸'은 나림불루의 딸보다는 부양구의 누이, 즉슨 나림불루의 종질녀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되면 1615년 당시 누르하치의 발언과 1599년의 여허-하다간 밀담 문제가 아귀가 들어맞게 된다.
한편 호이파의 경우에는 호이파가 멸망하기 전 여허가 본인들의 왕실 여식을 시집보내겠다고 호이파측에 제안한 경우가 직/간접적인 사료문구로 살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역시 호이파가 본인들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한 진압과 관련하여 건주와 밀접해졌고, 이에 여허가 호이파측에 외교적 제안5을 행하며 건주로부터 호이파를 떼어내려 시도한 것을 생각해 보건대6비록 기록상에 직접적으로 남진 않았으나 당시 호이파의 버일러였던 바인다리가 여허로부터 부양구의 누이를 처로 받는 것에 대한 논의 역시도 존재했을 것으로 파악된다.7
하다와 여허간의 혼담처럼 기록문구가 남진 않았지만, 호이파와 여허간의 혼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 역시도 존재한다. 바인다리는 건주로부터 이전에 자신이 보낸 인질들을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허가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치 않고 망명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며 나아가 오히려 자신의 자식을 인질로 잡기까지 하자 여허를 견제할 목적으로 누르하치에게 정략혼관계를 제안했다. 누르하치는 이를 승락하여 자신의 딸을 바인다리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바인다리가 누르하치에게 정략혼관계를 제안했다는 것은 그와 여허간의 외교협상에서도 정략혼담이 오갔음을 유추케 한다. 그런데 그것이 여허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틀어지자 누르하치에게 대신 정략혼을 제안하고 그에게 신속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여허를 자극, 자신의 아들을 돌려받고자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 혼담은 호이파가 여허로부터 볼모를 돌려받은 뒤 파기되었으며 이후 호이파는 분노한 누르하치에게 멸망했다.
이상의 사례들을 통해 보자면 부양구의 누이의 혼인에 관한 여허와 타세력간의 논의 자체는 그녀가 누르하치와의 정략혼이 파혼된 이후 미혼으로 있던 18년간의 시간 동안 꾸준히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누르하치의 발언과 여진 세력간 외교 상황을 보건대 하다, 호이파, 울라등 모든 해서 여진 세력들과 최소 한 차례 이상 혼담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혼담이 제대로 성사되기 전에 시집을 갈 세력이 몰락해 버리거나 혹은 제대로 된 혼담이 아니었던 탓에 18년동안 혼인을 하지 못하다가 겨우 1615년에서야 옹기라트의 망굴다이에게 시집을 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안타깝게도 시집을 간 지 1년도 안되어 미상의 이유로 말미암아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그녀의 인생은 그야말로 비극으로 점철되었다고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1.만문노당 을묘년 음력 6월
2.만문노당 상동, tere sargan jui turgunde, hada i gurun efujehe, jai hoifa gurun efujehe
3.만주실록 기해년 음력 9월
4.하지만 현재는 해당 논조를 언급한 글을 수정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
5.호이파측이 건주에 보낸 인질들을 돌려받고 중립을 선언하면 당시 여허가 데리고 있던 호이파 출신 종실 망명자들을 호이파에 돌려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6.만문노당 정미년 음력 9월
7.다만 여허측이 호이파측에 먼저 혼담을 제안했다고 할 경우 해당 혼담 제의는 제대로 된 혼담은 아니었다고 유추된다. 당시 여허의 호이파에 대한 외교적 행동은 실제로 호이파와 연대를 도모하려 한 것이 아니라 건주와 호이파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위한 행동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부양구의 누이는 해당 사례에서 본인의 세력에 의해 본인의 결혼이 이용당했다고 할 만 하다. 하다의 경우에도 여허측의 혼담 제의가 과연 진심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하다의 사례의 경우 혼담이 제대로 논의되기 전에 하다가 멸망하여 확실히 재단할 수 없는 반면에 호이파의 경우에는 호이파가 멸망하기 전에 여허측이 확실히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례이기 때문에 두 사례는 구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호이파가 먼저 여허에게 부양구의 누이를 요청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