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6년 음력 5월 흑룡강 유역에서 후금의 파견장관 보지리가 반란을 일으킨 데에는 당시 보지리의 근거지 지역 인근에 세거하던 사할리얀계와 후르하계의 암반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계열에 속한 부락 암반들이 후금으로부터 파견된 감독자이자 본인들의 동족이라고 할 수 있던 보지리를 설득하여 후금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그의 휘하에 종군, 반란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이들의 '종용'이 없었다면 보지리가 후금 정부에게 불만을 가지더라도 후금을 상대로 반란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으리라 판단된다.
여기서 반란에 참여한 사할리얀계 세력들은 11개 혹은 20개의 가샨으로 추산된다. 11개의 경우 소수설이며, 음력 9월 말까지 9개가, 음력 10월 5일의 도하 작전과 이후 이어진 사할리얀계 가샨 2개에 대한 토벌전으로 추가로 2개의 가샨이 함락됨으로서 11개의 가샨이 함락되었다는 추정이다. 이는 필자의 의견과 일맥상통하다. 다수설은 음력 8월에서 9월 말까지 9개가, 음력 10월 초의 작전에서 11개가 함락되었다는 추정이다.
사할리얀계는 최소한 해당 원정에서는 통솔 암반들이나 세거 지방에 따라서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렇게 도합하여 그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빠르게 이루어 질 수 있지만, 후르하계의 경우에는 다소 계산이 복잡하다. 당시 반란에 참여한 후르하계의 경우 '후르하 구룬(hūrha gurun, 후르하 나라)로 통칭되긴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세력으로 자잘하게 나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음력 8월에서 9월 말까지 등장하는 후르하계 세력은 2개로 구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반란의 지도자였던 보지리의 세력이다. 보지리는 당시 11개의 가샨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본래 이들 가샨 모두가 보지리의 산하에 속한 가샨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후금에 항복한 친후금파 후르하계 암반들이 1616년 음력 2월에 누르하치에 의해 송환되고 음력 5월에 보지리에 의해 제거 되었을 때 그들의 가샨들 일부가 보지리에게 흡수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지리 휘하의 가샨들을 제외하고도 뫀콘이라는 대영주급 암반이 통치하고 있던 가샨 16개 역시도 후르하계로 분류할 수 있을 듯 하다. 비록 뫀콘의 계열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시기에 후금군에 의해 점령당한 가샨들 중 사할리얀계에 속한 가샨들의 경우 사할리얀 국(sahaliyan gurun)의 가샨이라고 명시되는데에 비해 뫀콘의 가샨들은 따로 뫀콘의 가샨이라고만 명시되었고 사할리얀계라고는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보지리와 마찬가지로 뫀콘 역시 후르하계로 판단된다.
여기까지는 다소 쉽게 판단할 수 있으나 음력 10월 5일 이후에 후르한과 안피양구에 의해 복속된 노오로, 시라힌, 그리고 인다훈 타쿠라라의 경우 다소 이견이 있다.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의 병진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때에 복속된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은 모두 나라(gurun)으로 분류되어 후르하계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1이에 따르면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은 후르하와 구분되면서 후르하 계열과 대등한 권역을 가진 세력군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만문노당의 무오년 음력 1~2월 기록에서는 이들이 후르하로부터 독립된 세력군집이 아니라 후르하 계열에 내포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때는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의 암반들이 보지리와 함께 후금으로 내귀(來歸)한 시기인데, 당시의 기록에도 이들 3개 세력,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은 일단 나라(구룬)으로 나타난다. 그에 따라 해당 기사에서도 이들이 후르하 계열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이에 이어지는 기록은 과연 이들이 후르하로부터 분리된 세력인지를 의심케 한다.
이에 대한 후술 기록은 이 때 보지리와 후르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결국 후금과 누르하치가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게 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었다는 후금측 사관2들의 사론인데, 여기에는 '그리 정벌하지 않았다면 동해에 인접한 후르하 국(의 사람들이) 여기에 어찌 왔겠는가.'라는 기술이 보인다.3 1618년 음력 1~2월에 허투 알라로 내귀한 이들에는 보지리와 그의 가솔들이 속해있긴 하였으나 대부분의 인원은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의 암반들과 그 가솔들, 백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즉슨 이러한 기술은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을 후르하에 속하는 세력으로 서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실록에서 노오로, 시라힌, 인다훈 타쿠라라가 언급된 기록들, 즉슨 1616년 음력 11월과 1618년 음력 2월의 기록들을 살펴보자면 이 때 해당 3개 세력들은 모두 골로(golo)로 서술되어, 구룬으로부터 2단계 가량 격하되었다.4이 때 후르하 역시도 구룬에서 격하되긴 했지만 골로들을 내포하는 집단인 아이만(aiman)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해 보건대 당시의 초기 후금에서는 후르하 아이만에 노오로, 시라힌, 인다훈 타쿠라라를 내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 다른 근거로, 1619년 음력 2월 당시 출정한 무할리얀의 임무를 들 수 있을 듯 하다. 당시 무할리얀은 동해 여진 세거지역에 남아있는, 후금에 내속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고 출병했다. 이 때 호송대상이 된 이들은 정확히 판별할 수는 없으나 1618년 음력 10월에 귀순한 나카다 및 일곱 암반들의 백성들과 1618년 음력 2월에 내속한 암반 40여명의 백성들을 포괄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때 무할리얀이 호송 임무를 맡은 대상은 만문노당이나 실록이나 모두 후르하 (구룬/아이만)의 사람으로 서술된다.5 이를 보건대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의 사람들은 후르하에 내속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더불어서 보지리에게 반란을 종용하고 그의 반란에 참여한 세력에 대한 병진년 음력 5월 기록에서 노오로, 시라힌, 인다훈 타쿠라라는 찾을 수 없다는 것 역시도 이들이 당시를 기준으로 후르하 계열에 속해 있었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시라힌과 노오로, 인다훈 타쿠라라 세력이 후르하 계열이 아니라 분리된 독립계열이라면 보지리가 반란을 일으키게끔 주위의 세력이 그를 설득할 때에 시라힌, 노오로, 인다훈 타쿠라라 세력의 암반들 역시도 언급되어야 했다. 하지만 기록상에서 보지리에게 반란을 설득한 것은 사할리얀과 후르하 두 세력에 소속된 암반들 뿐이었다.6 그렇다면 여기서 시라힌과 노오로, 인다훈 타쿠라라 세력의 암반들은 후르하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되었기에 자연스레 세력언급이 생략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 반란에 참여한 시라힌, 노오로, 인다훈 타쿠라라 세력은 '후르하 구룬' 혹은 '후르하 아이만'에 내포되어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당시 반란에 참여한 후르하계 세력은 당시 후금의 기준에서 보지리의 세력, 뫀콘의 세력, 시라힌, 노오로, 인다훈 타쿠라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중 인다훈 타쿠라라는 상당히 광범위한 대상들을 문화적 공통점으로 뭉뚱그려 칭해진 것으로, 후대에는 보다 세분화되어 분석되었다.7
1.구만주당 병진년 음력 10월~11월 7일, 만문노당 동년 동월
2.어르더니를 위시로 한 밬시들이 사관의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3.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2월, tuttu dailarakv bici, dergi mederi hanciki hvrha gurun ubade ainu jidere bihe.
4.만주실록 천명 원년 음력 11월
5.만문노당 기사년 음력 2월, 만주실록 천명 4년 음력 2월
6.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5월, hvrha gurun i bojiri de, sahaliyan ula i sahaliyan gurun, hvrha gurun gemu hebe acafi gisureme
7.이훈, 17세기 중엽 청-러시아의 충돌과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65집, 2018, pp.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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