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Lewis Shaw
- 1880. 1. 25. ~ 1943. 11. 13.
1880년 1월 25일 아버지인 영국 아일랜드계의 사무엘 루이스 쇼(Samuel Lewis Shaw)와
어머니 일본인 엘렌 오씨(Ellen Oh’sea)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쇼의 어머니 엘렌 오씨는 아일랜드 풍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친손자들도 아일랜드인 혹은 스페인계 아일랜드 인으로 착각했으며,
일본 정보 당국도 중국인으로 파악했을 정도였다.
그는 1912년 6월 일본인 사이토 후미(齊藤ふみ)와 결혼했고,
사무엘(Samuel George Shaw)과 루이스(Lewis Shaw) 등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럼에도 쇼가 ‘친일(親日)’은커녕 ‘반일(反日)’적인 한국독립운동에 적극 관여하였던 이유는
쇼가 사업상 일본과 경쟁해야 했던 상황을 꼽을 수 있다.
그가 3·1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신변의 안전을 무릅쓰고 이륭양행 내에
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이전부터 임정의 요인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아왔음을 잘 보여준다.
1920년 7월 11일 쇼가 일본에서 오는 처자를 맞이하기 위해
안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갔을 때,
일본영사관 및 경찰서신의주경찰서·총독부 경무국은 독립운동을 근절시킬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계획적으로 그를 체포하였다.
쇼는 옥고를 치루고 석방된 후에도 이륭양행의 사무원 김문규에게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독립에 호의적인 입장을 여전히 견지하였다.
1922년 8월 일제의 김문규 체포로 안동교통사무국이 크게 위축되었음에도
1923년 2월 중순 쇼는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김구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자신이 카라한을 방문해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겠다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를 도모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1938년 4월 안동을 떠나 푸저우에 이륭양행의 본점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5월 3일 영국총영사에게 정식으로 영업신고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31여 년간 안동에서 쇼가 일제의 온갖 탄압에 굴하지 않은 채 전개했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반일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1943년 11월 13일 쇼는 63세로 푸저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