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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처의 한켠 틈새에 난 커다란 균열을 따라 우리는 계속 내려갔어. 나는 칸 대장이 왜 이런 곳으로 날 안내하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난 대장을 믿었어. 대장은 허튼짓을 할 사람이 아니니깐.
이윽고, 우리는 균열이 끝나고 탁 트인 지하의 공간으로 다다랐어. 원래는 우리가 있던 은신처와 이어져 있던 곳은 아닌 거 같지만, 아마 지진폭탄이나 벙커버스터 등의 영향으로 여기까지 사람이 하나 겨우 드나들 만한 균열이 생겼던 모양이야. 우리가 들어온 반대편에 아마도 원래 이 지하실의 제대로 된 출입구였을 녹슨 금속문이 보였지만, 그건 무참할 정도로 우그러져 뜯겨져 나가 있었지. 또다른 한구석에는 이미 오래 전에 폐유가 되었을 기름통이 굴러다니고. 여기저기 잡동사니가 흩어진, 참 어둡고도 정신 사나운 곳이었지.
“여긴...”
“아마 바이오로이드 제조 시설이었던 것 같다. 저길 봐라”
우리들, 바이오로이드들을 대량 제조하는 수많은 설비와 초대형 실린더들이 보였어. 이미 오래 전에 다 사용되고 지금은 고장난 게 분명했지만,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났어. 분명 오랜 시간 전에 버려진 곳일 테지만,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공간이었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우리가 여기의 최초 방문자는 아니었어”
“?”
“이게 증거가 되겠군.”
그렇게 말하고서 워울프는 어둠에 휩싸인, 검게 얼룩진 벽으로 다가갔어. 어둠에 눈이 완전히 순응되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났어. 그리고, 그 ‘검은 얼룩’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소름이 끼쳤지. 벽과, 제조장치 곳곳에 흠뻑 적셔져 있는....오래된 핏자국들. 벽의 발톱자국들. 빛바래어 갈색도 아니고 이미 검게 변한 핏자국이었지만 마치 바로 어제인 것처럼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 핏자국에 손을 댄 워울프가 말했어.
“이 피는 우리 바이오로이드의 것이 아니거든. 그리고, 이건, 남성용 방사능 방호복”
걔가 들어보인 건, 옷이라기보다는 거의 다 찢겨지고 삭은데다 핏자국에 푹 적셔진 걸레쪼가리 같은 것이었지. 그래도 일단 최소한 체형과 크기가 우리 것보단 더 큰 옷이란 건 알 수 있었어. 우리들, 바이오로이드들의 방호복보다 훨씬 더 두툼하고 잘 밀폐되어 있는. 그런데 남성용 방호복? 남성이라면...칸 대장이 워울프의 말을 받았어.
“오리진 더스트 함량이 낮은 인간은 우리들보다 방사능에 취약하다. 방호복도 훨씬 더 튼튼하고 안전한 것이어야 했지”
그러니까, 이건, 여기 있던 인간들이 입던 것이군. 그런데 이게, 이런 두꺼운 옷이 이토록 처참하게 갈가리, 조각조각 찢겨져 있다는 것은....
“뻔하잖아, 카멜. 이런 지하실에 인간이랑 그 괴물들이 같이 있었다고 생각해봐.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
워울프 같은 띨박이도 짐작할 수 있는 거니 나 역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지.
어둠 속에 잠긴 제조설비 표시등에 흐릿하게 불이 깜빡이고 있었어. 그건 디지털 숫자였지. 우리는 어두워서 거의 알아보기 힘든 그 숫자들을 읽었어.
- 남은 제조 회차: 0/3
- 회당 제조량: 12## - LRL $&&^&기, 더치걸 %^*&*기.
방사능 떄문인지 세월 때문인지, 이미 맛이 간 지 오래인 기기가 표시하는 숫자의 뒷부분은 알아볼 수 없었어. 다만 이게 LRL과 더치걸을 제조하던 장비라는 건 알 수 있었지.
“총 3번의 제조를 행했다는 이야기다. 총 몇 기의 LRL과 더치걸을 제조했는진 모르지만, 한꺼번에 다수를 제조하는 방식인 것 같군”
“음...실린더가...꺠져 있는데. 세월이 지나서 깨진 걸까요, 아니면...”
“모른다. 다만 봐라”
칸 대장이 자신의 방호복에 붙은 가이거 계수기를 가리켰어. 그건 죽어라고 딱딱딱 소리를 내면서 한 쪽 극단으로 그 바늘을 미친 듯이 몰아넣고 있었어. 이게 의미하는 건...
“이 구역의 방사능 수치가 심각하다는 거다.”
그래. 여기가 방사능 범벅이라는 거지, 아마 저 뜯겨진 금속문 바깥까지. 칸 대장은 천장을 가리켰어. 두꺼운 콘크리트 천장에 금이 가 있었어. 폭격으로 금이 가고 저 틈으로 호수의 방사능이 흘러들어왔나봐. 아마 이 지하실은 저 바깥의 호수와 가까운 장소인 것 같았어.
“방사능은 전자장비도 맛이 가게 하지. 아마 저 설비도 오래 전에 오염되었을 거다”
새삼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방독면과 방호복이 - 오라지게 불편하지만 - 고마워졌어. 우리 바이오로이드는 방사능에도 상당한 내성이 있지만 거기에 무적인 건 아니니까. 우리가 방사능에 강한 건 오리진 더스트 떄문이야. 그런데 여긴 그런 우리조차 오래 버티기 힘들 만큼 방사능 수치가 미쳐 달아오르는 곳이었어. 그리고 그 말은...
“제조 설비가 오염되었다는 건....”
칸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어. 그 끔찍한 결론에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했어.
그제야 난 알 수 있었어. 제조장치의 마지막 제조 기록 - 3번 제조되었다는 숫자, 그리고 바깥의 괴물 세 마리.
놈들이 내지르던 바이로오이드 수백 수천 명의 뇌파 같은 비명소리.
마치 수천 명의 바이오로이드를 제멋대로 뭉쳐 만든 듯한 괴악하고 뒤틀린 살덩이 같은 몰골.
나는 턱을 덜덜 떨며 뇌까렸어.
“그놈들은...여기서 만들어졌구나”
바이오로이드를 제조장치가 방사능으로 오류를 일으키고 오작동했던 걸까? 아니면 저 안에서 자라던 바이오로이드들이, 아직 오리진 더스트로 보호받기 전에 방사능에 절여져 돌연변이를 일으켰던 걸까? 알 수 없었어.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았지. 여기서, 바로, 그 괴물들이 태어났다는 것.
수많은, LRL과 더치걸들이 뭉치고 뒤틀려 만들어진.
“그래서, 우리가 그놈들을 바이오로이드로 인식했던 거군”
그냥, 우리와 같은 바이오로이드 그 자체였으니까.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에이다가 이곳에서 수천 명의 바이오로이드 신호를 감지했던 것도”
실제로 이곳엔 수천 명분의 바이오로이드가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예상했던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걸 '살아있다'고 불러야 하는지조차 몰라도. 몸서리쳐질만큼 흉측하게 엉겨붙고 들러붙은 채.
갑자기 이 공간이 더더욱 으스스하고 무서워졌어.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이.
“이것 봐라”
나는 칸 대장이 가리킨 보았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거의 바스라지기 직전의 서류들이었지. 그 중 하나에는 ‘재물목록’이라고 쓰여 있었어. 거기엔 바이오로이드들의 이름과 제조번호, 신상명세가 나열되어 있었어. 브라우니, 레프리콘, 노움, 홍련...
“어른 바이오로이드들도 있었구나”
아, 그럼 당연한 소리지. 이런 도시를 운영하는데 실험체용 아이 바이오로이드만 있었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도시를 경비할 병사 바이오로이드, 대테러 바이오로이드, 인간들에게 봉사할 서비스용 어른 바이오로이드들도 필요했겠지. 그 수가 상당했을 텐데.
‘전부...잡아먹힌 거구나’
그것들에게.
명부를 흟어보다 보니 익숙한, 그러나 반갑지 않은 얼굴도 보였어.
“마리아”
- 마리아, 실험기자재 보육담당. 1966번
시커먼 먼지와 얼룩이 묻어 자세한 건 알기 어려웠지만, 아마 이 마리아가 내가 만났던 그 마리아일거야. 명부에 다른 마리아는 없었으니까. 사진 속에서 따스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이 사이코패스 뺨치는 미치광이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어. 하기야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도 그 따스한 포옹 때문에 난 속아버렸지만.
재물목록 옆에는 다른 서류도 있었어.
“연구일지군”
대장이 짧게 말했어. 그리고 그녀는 그, 가루가 되기 직전의 종이쪼가리를 펼쳐보았어.
XX년 XX월 XX일.
이건 정말 엄청난 발견이다! 아직 배아 상태인 바이오로이드 줄기세포에 방사능을 쪼이자 비정상적인 재생능력을 보였다! 아마 세포내 오리진 더스트와 방사능이 반응하는 것 같다. 재생력이 지나쳤는지 실험체 A는 제멋대로 성장해서 결국 스스로 죽어버렸지만, 이걸 잘 활용하면 강력한 병기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개발된 군용 바이오로이드의 개체당 전투력은 AGS보다 뒤떨어졌다. 하지만, 이 연구를 통해 어쩌면...단일 개체로서도 AGS에 뒤떨어지지 않는 생물 병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내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다!
XX년 XX월 XX일.
지금까지 LRL 211기, 더치걸 86기를 소모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다. 모두 방사능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더 많은 실험대상이 필요하다. 더, 더, 더 많이. 앞으로는 LRL과 더치걸을 천 단위로 생산할 것을 명령했다. 실험에 동원되기 전에는 마리아 1966번이 그것들을 관리할 것이다.
그래도 여기, 카라차이 호는 이 연구를 하는 데에는 최고의 장소다. 그냥 LRL과 더치걸을 매립된 호수 위에 떨어뜨려 두고만 와도 실험이 진행된다. 바이오로이드들을 시켜 호숫가의 돌 하나만 주워오게 해도 그것 자체가 실험이요 또한 방사능 물질 수거 작업이다. 풍부한 고준위 방사능을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곳도 또 따로 없다!
XX년 XX월 XX일.
연구가 진척이 없다. 이미 제조가 끝난 바이오로이드에게 고준위 방사능을 쏘이면 인간보다 좀더 오래 버틸 뿐, 결국은 인간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죽어버린다. 그렇다고 제조 단계에 있는 바이오로이드에 방사능을 쏘이면, 무쓸모한 돌연변이가 된다. 유전자 씨앗이 망가져 그대로 죽어버리거나 혹은 기괴하게 변형된 채 쓸모없이 뒤틀린, 지성도 지각도 없는 세포 덩어리가 되어 버린단 말이다. 오늘로 벌써 도합 3천기의 LRL과 더치걸이 폐기되었다. 태어나지도 못한 채 제조단계에서 죽은 개체들은 제외한 수치다.
그래도 성과가 없던 건 아니었다. 4721번으로 명명된 배아는, 아마도 우연인 듯하지만 무사히 평범한 LRL 개체로 자라났다.....양쪽 눈이 없는 것만 빼고.
고무적이다. 이 실험은, 계속될 가치가 있다. 바이오로이드 제조시설은 계속 가동되어야 한다.
XX년 XX월 XX일.
양 눈이 없는 LRL 4721번은 실패작으로 판명났다. 뛰어난 재생력도, 특출난 공격성도 없다. 다른 LRL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 눈까지 없다면 이게 실패작이지 무엇이겠는가. 즉시 폐기하려 하였으나 그새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친해져서 생각을 바꾸었다. 어쨌든 1966번 혼자서 그 많은 실험체들을 돌보긴 힘드니까. 장님이지만, 일이나 거들라고 직무를 재배치했다.
지난 번 실험에서는 더치걸의 유전자 씨앗을 개조해서 신경발작제를 섞어서, 변이된 단백질 용액과 함께 바이오로이드가 제조중인 실린더 안에 부어 보았다. 방사능은 감마파 비중을 늘이고 베타파 비중을 줄여서. 그 결과, 공격성과 허기를 자극하는 신경세포줄기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 결과다. 전장에서 날뛸려면 블랙리버 브라우니보다 사납고 배고파야 할 테니.
XX년 XX월 XX일
상부에서는 불안해 한다. 카라차이에서 나오는 방사능이 너무 위험한 수준이라고. 또 카라차이가 노출된 야지에 있는지라 적의 포격이나 폭격에 취약하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내 출세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세상을 통제해 왔다. 능히 그럴 힘과 마땅한 자격을 갖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번에도 통제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방사능도, 곧 우리가 만들어 낼 병기도. 모든 것을.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길 바랬는데.”
적어도 이 부분은 마리아가 내게 거짓말한 건 아니었네. 왜 이건 진짜인 거야. 이미 그녀에게서 들었지만 실제 그 짓을 행한 이들의 일지를 보자 난 그만 방독면을 벗고 토하고 싶어졌어. 방사능이 심한 곳이라 그럴 순 없었지만.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을 확인하느라 얼굴이 하얘진 - 방독면을 써서 안 보였겠지만 - 내게 대장이 다가왔어.
“카멜, 혹시 남는 배터리 있나?”
있었어. 오르카에서 올 때, 혹시 어두운 폐건물이라도 수색하게 될까봐 후레쉬를 가져왔었었거든. 후레쉬 자체는 괴물들에게 쫒기다 흘리고 말았지만, 건전지는 남아 있었지. 그걸 받은 대장이 말했지.
“잘됐군. 이걸 재생해보고 싶었는데”
“?”
“카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알고 싶지 않나?”
어. 별로 알고 싶진 않은데. 이미 충분히 토할 것 같다고요, 대장. 전 워울프와 달리 호러 영화는 취미가 아니거든요?
하지만 대장이 저렇게 말한다면 싫어도 알아야 하겠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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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들을 클릭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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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마리아가 미치고 만 데에는 사실 인간의 탐욕과 비정함이 있었던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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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에게 잡아먹힌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많은 사연이 있었을 테고요. 도시 출신이든, 외부에서 유인되어 온 이들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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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양눈이 없는 LRL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게 되셨죠 ㅎㅎㅎ 인간들은 힘을 쥐면 휘두르고 싶어하고, 가능성이 있으면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해보고 싶어하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괜찮을 거라고, 다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법... | 21.12.16 18: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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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에게 잡아먹힌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많은 사연이 있었을 테고요. 도시 출신이든, 외부에서 유인되어 온 이들이든.... | 21.12.16 18:55 | |
삭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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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그렇죠. 마리아가 미치고 만 데에는 사실 인간의 탐욕과 비정함이 있었던 셈이지요. | 21.12.16 18: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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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탐욕과 오만이 결국은 모든 것의 시작이엇던 것입니다 | 21.12.17 14: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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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미쳐버린 것도 이해는 가는 일이겠죠 | 21.12.17 14: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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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엄청난 비밀이 있진 않지만... | 21.12.18 03:0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