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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막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나는 일어났어.
어, 뭐야, 벌써 해 떴나? 아직 새벽인데?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어. 마리아도, 불가사리도, LRL도. 다들 어디 갔나? 이러는 와중에 날 깨운 존재가 한 번 더 다급하게 날 불렀어.
“도망가”
“핀토?”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도망가”
핀토였어. 그, 비행장비를 잃은. 그녀는 뭔가에 쫒기는 듯한 다급한 표정이었어. 그런데 더는 이렇게 못 산다니? 이게 무슨 소리지? 나머지는 다들 어디 갔고? 그러나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핀토는 다시 한 번 날 재촉했어.
“일어나라니까? 빨리! 시간이 없어. 도망가야 해”
“뭐? 어, 무슨 소리야? 왜?”
하지만 내 물음은 대답을 얻지 못했어. 소리가 들렸거든. 어제 지겹도록 들었던, 마치 수십 개의 다리가 땅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가. 이 소리는....젠장!
다음 순간, 내가 머물고 있던 지하 대피소의 벽이 무너졌어. 저게 저렇게 쉽게 무너지는 거였나?
어둠 속에서 풍기는 먼지내음 속에서 뭐라 표현하기조차 끔찍한 괴성이 울려퍼졌어. 나는 벌떡 일어났지만, 늦었어, 아직도 혼란스러웠거든. 이게 무슨 일인지, 핀토가 말한 건 무슨 뜻이었는지. 하지만 핀토에게 더는 물어볼 수는 없었어.
“위험해!”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과 혼란 속에서, 놈이 걔를 물어채갔거든. 핀토가 나를 밀친 것과 그 아이의 작은 몸이 놈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 끼어 홱 끌려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어.
“핀토!!”
그 애가 비명을 질렀을까? 알 수 없었어. 비명을 질렀더라도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놈들이 내는 기괴한 소움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을거야. 나는 벌떡 일어났어. 장구류와 무기를 순식간에 들쳐입고 뛰쳐나갔지. 핀토는 나를 밀치고 내 대신 물려간 거니까.
“거기 서라!”
인정하지, 경솔한 행동이라는 걸. 그리고 솔직히 바깥으로 내가 뛰쳐나간 이미 그 시점에서 핀토가 살아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수를 갚아 줘야 해. 차라리 잘 됐어. 난 놈들에게 안 그래도 빚진 게 하나 있었거든.
“안 돼요!”
하지만 누군가가 바깥으로 달려나가 놈들을 쫒으려는 날 붙잡았어.
“가시면 안 돼요!”
마리아였어. 그 새 멸망 전 구형 방독면을 뒤집어 쓴. 벽이 무너져서 지상의 방사능이 여기 지하까지 흘러들어왔으니까. 바로 그녀가 필사적으로 날 붙잡고 있었지.
"이거 놔!"
"이미 늦었어요!"
"구해야 해!"
생존자를 구하라는 게 사령관 명령이었어. 아니 그 이전에, 누군가가 잔인한 괴물에게 죽어가는 걸 두고만 볼 꺼야? 그러나 마리아가 쥐어짜내듯 소리쳤어.
“당신까지 놈들을 따라갔다가 죽어버리면, 저흰 이제 정말로 희망이 없어요!”
그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어. 그리고 거기서 모든 기회는 끝났지. 저 멀리로 꽁무니를 내보이며 사라져가는 놈의 입 속에서 으드득, 하고 뭔가 씹혀 으스러지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거든. 동시에, 방독면 너머로도 느껴지는 강렬한 피 향이 확, 풍겼어. 바이오로이드의 피 냄새가. 나는 그만 망연히 서 버리고 말았어.
“핀토....”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아이였지만, 저 애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만 할 애는 아니었을 거야. 그리고 그 애는 어쨌든 나를 구했어. 나 대신, 자신이 죽어서.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어.
“제기랄, 왜 날 붙잡은 거야? 핀토가 죽은 게 분하지도 않아?”
그러나,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어.
"저들의 아가리에 물린 시점에서...이미 늦었어요.."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어. 불가사리의 팔을 썩어들어가게 한 녀석들이야. 온 몸이 저 예리한 칼날 같은 이빨에 씹혔으면, 설혹 구해졌더라도 꼴이 안 좋았을 거야. 여기, 이렇게 의약품조차 없는 곳이라면 더.
“핀토를....데려갔으니, 놈들은 당분간 잠잠할 거에요. 일단 당장의 허기는 채웠을 테니까.”
그 끔찍한 말이 의미하는 바에 나는 그만 흠칫 소스라쳤어. 하루 하루 바이오로이드를 잡아먹는 괴물들. 그 대신으로 나머지는 살 수 있었겠지. 핀토가 대신 죽음으로써 살아남은 나처럼, 그리고 그녀들처럼. 망연해버린 나에게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어.
“이제 아셨죠?”
“....”
“이게 저희들이 살아온 현실이에요”
그렇게 수십 년을 여기서 살아왔던 거구나. 이 도시를 나가지 못하게 틀어막는 괴물들에게, 마치 사육당하듯이, 늑대에게 양몰이 당하는 양처럼. 그 무서운 삶을 살아온 자들에게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불현듯 마리아가, 그리고 이 도시에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들이 가엾어졌어. 그 수십년 동안 그녀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했을까? 그게 무엇이든, 좋은 경험은 아니었을 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들에게 좋은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겠지. 수십년 동안 방사능투성이인 땅에서, 살아남으려 발악하면서도, 한 명 한 명 정체도 모를 괴물들에게 사냥당하는 삶이라.
“.....”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야,
...
해가 떴지만 모두는 침묵했어.
“.....”
원래대로라면 아침은 상쾌하게 시작해야 하겠지만, 핀토가 물려가고 난 아침은 우울하기 그지없었어. 다들, 아무런 말도 없었지. 바로 어제까지 살아서 함께 밥 먹던 동료가 사라져 버렸는데 어찌 유쾌할 수 있겠어?
“그..그래도 일단 식사는 하도록 해요.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리아가 억지로 웃으며 은신처의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썼어. 그녀 말이 맞아. 우리는 먹어야 사는 존재야. 슬프든 기쁘든, 화나든 즐겁든, 우리는 일단 먹어야 해. 우리는, 일단 먹고 나야 하는 존재들이야.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일단은 먹어야 내일을 볼 수 있고 또 뭔가 해 볼 힘이 나는 존재들이야. 우리는, 무언가를, 먹어야 나아갈 수 있어.
‘그게 누군가의 죽음을 본 직후라도, 말이지.’
생존자들이 줄어들어 가면서 역설적이게도 식량 사정은 되려 나아졌을 거야. 먹을 입도 줄어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과연 그걸 즐거워할 수 있을까. 마리아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오늘 같은 죽음들을 수도 없이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요리를 준비하는 그녀를 보자니 나는 약간 미안해졌어. 나는 여기 남은 이들의 마지막 희망 같은 존재였을 테니까. 여길 나가게 해줄. 나마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리면, 그녀들은 구조될 희망이 없을 거야. 그러니 나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붙잡았을 테지. 동료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보고서도.
그러니 나도 그에 부응해야지. 어떻게든 바깥과 연락할 수를 강구해야 했어. 워울프와 칸 대장을 찾는 것도 급한 일이지만, 이곳의 생존자들을 어떻게든 저 괴물딱지들의 마수에서 구해 도시에서 내보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어. 아. 딜레마네. 사령관이라면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을 거고, 나도 그랬어.
‘증원이 필요하겠어’
도시 바깥에서 기다리는 페더가 생각났어. 위험할까봐 바깥에서 대기시켰지만, 그리고 실제로 여긴 정말로 졸라게 위험한 곳이었지만, 어쨌든 이젠 슬슬 걔가 필요해질 것 같았어. 나 혼자선 괴물딱지들의 위협 아래 칸 대장 수색과 생존자 구출을 동시에 할 순 없었어.
‘난 대장을 찾아야 하니까.’
응? 맞아. 난 칸 대장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어. 워울프도. 난 그녀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기 전에는 나 안 믿어. 아니, 못 믿어. 그러니, 나 대신 이들을 인솔해 줄 수 있는 여자, 도시 바깥의 페더와 연락을 해야 해.
“혹시 도시 안에 외부로 통신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어떻게든 페더가 도시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오도록 유도해 줄 수만 있다면 생존자들을 맡아 줄 수 있을 거야. 내 질문에 마리아는 잠시 생각했어. 방사능 샤워(전자회로를 태워먹지)와 오랜 세월(세월 앞에는 뭐든 장사없지)로 인해 도시 안에 제대로 된 통신장비가 있을지는 의문이었어. 실제로 칸 대장과 워울프도 못 찾았던 거 같으니까(찾았으면 우리에게 연락을 했겠지).
만약에 장거리 통신 설비가 없다고 해도, 지금 도시 바깥에는 탈론페더가 대기하고 있으니까. 일단 걔한테 연락할 수만 있다면, 여기 사정을 설명하고, 걔를 통해 오르카에 통신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그 중증 관음정신병자 치녀라면 오르카에 여기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려 줄 수 있단 말씀이야. 그리고 나서 걔는 도시 안으로 들어와서 내게 생존자들을 인계받으면 되는 거지. 으음, 괜찮은 계획이지? 아마?
“아, 있어요”
내가 이렇게 - 내 나름대로는 완벽한 - 계획을 짜는 사이 마리아가 드디어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어. 그리고 손으로 저 멀리, 불길한 안개에 가려져 있는 저 너머의 탑 같은 구조물을 가리켰지.
“저긴 멸망 전에 이 도시의 행정과 인프라의 제어를 담당하는 청사 건물이었어요. 이 도시의 핵심 건물이었으니 방사능 누출이나 적의 폭격에도 견딜 수 있게 튼튼하게 지어졌죠. 저기에 있는 통신설비는 방사능에 영향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 통신설비가 아직 작동할 거에요”
그건 좋은 소식이군. 다만...
“좀...머네”
꽤...부담될 정도로 말이지. 내가 약간 자신 없는 투로 말하자 마리아도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어.
“네. 저희가 저기까지 가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 때문’이라. 당연히 그 괴물놈들을 이야기하는 거지. 멀리서 척 보기에도 이 은신처에서 청사 건물까지의 거리는 꽤 되어 보였고, 도시의 많은 교차로와 코너를 지나가야 할 것 같았어. 걸어서 가기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 물론 나는 앵거 오브 호드고, 호드는 지상 기동 부대니까 나 혼자라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말이지’
문제는 이게 그야말로 가는 도중에 놈들의 매복 기습이나 습격을 받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상황이라는 거야. 제기랄. 분명히 전쟁통에 버려진 장애물들도 수두룩할 테고, 그 괴물들도 가만 있진 않을 거야.
‘놈들 추격을 피해서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내가 아르망 같은 예측기계는 아니었지만, 이건 쉽게 확률이 나왔어. 그럴 확률은 한없이 낮았어.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지. 그리고 솔직히 여기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나, 나 혼자뿐이었어. 나머지들은 짐짝이 될 뿐이었지. 한 쪽 팔이 없는 불가사리는 서 있는 것만 해도 균형잡기 힘들어 보이고, 장님 LRL에게 빠른 이동을 기대할 순 없겠지. 그나마 마리아가 사지 멀쩡하지만, 마리아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차라리 초고속 기동부대원인 나 혼자 재빠르게 질주하는 게 훨씬 나아.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어.
“...내가 가야겠네”
약간 똥 씹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한 거였지만, 단박에 마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어. 그럴 만하지. 성공하기만 하면, 이 곳 바이오로이드들에겐 구원의 길이 열리니까. 그녀가 기쁘게 찬합을 열고 주섬주섬, 보존된 식재료를 꺼내기 시작했어. 누가 보모 아니랠까봐, 누구 밥 먹이기 좋아한다니깐.
“식사는 하시고 가요. 맛있는 스튜를 끓여볼 테니까요. 어...가능하다면요”
“큰 기대는 안 해. 언제 출발하는 게 좋을까?”
“정오가 지나면 출발하세요. 아침에는 아직 춥고 어두우니깐.”
“으. 북구는 추워”
북반구. 러시아. 그리고 겨울. 우중충한 하늘. 여긴 원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네 영역이었어. 걔네가 활동했던 무대가 한랭지인 걸 생각하면, 여기가 억수로 추운 게 무리도 아니지.
“네. 그러니 먹어야 열을 내죠”
“틀린 말은 아니네”
“위험하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으, 당연하지. 길바닥은 방사능에 절은 잔해와 장애물 투성이고, 저 바깥에는 날 죽여 잡아먹으려는 괴상한 생물체들이 호시탐탐 도사리고 있고. 솔직히, 나가고 싶지 않았어. 나가면 참 즐거운(?)상황이 펼쳐질게 분명했으니깐. 틀림없이 개고생 하게 될 거야.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여기 가만히 죽치고 있을 순 없으니깐.’
“헤, 염려 말라고.”
그래도 난 일부러 멋있는 척 폼 잡고 비장한 미소를 띄며 말했어. 이 때가 아니면 언제 영웅인 척 해보겠어?
“핀토가 당한 일, 앞으로 다시는 안 겪게 해 줄테니깐”
속으로는 씨1발을 한 삼천 번은 외쳐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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