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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어. 그 지난 세월동안 여기 있던 이들이 겪었을 공포도.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것까지 신경쓸 때가 아니었어. 지금 당장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여기 모인 바이오로이드들 중에 워울프나 칸 대장은 없었어. 그 말인즉슨, 그녀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겠지. 나는 그 ‘다른 곳’이 저 괴물딱지 새1끼들의 뱃속은 아니길 바랬어.
“혹시 내가 오기 전에 여기 먼저 왔던 바이오로이드들은 없었어?”
“다른 분들이라면....”
마리아의 포근한 얼굴이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했어. 그러다 이윽고 그 얼굴에 더더욱 수심 젖은 빛이 감도는 순간 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
“맞아요. 얼마 전에 외부에서 바이오로이드 두 명이 왔었어요.”
내가 찾는 이들임이 분명했지. 칸 대장과 워울프. 나는 금새 화색이 되어 물었어.
“그래? 그 양반들 지금 어디 있어? 어떻게 되었는데?”
“.....”
마리아는 잠시 침묵했어.
“그분들도...당신처럼 놈들에게 쫒겼어요.”
“.....”
이번엔 내가 침묵할 차례였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진 않았기에.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죄송해요. 저희를 만나기 전에 이미 쫒기고 있어서 그분들과 접촉할 순 없었어요”
이해했어. 꾀죄죄한 난민이나 다름없는 그녀들이 그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싸울 순 없었겠지. 그녀들에게 왜 대장과 워울프를 돕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순 없었어. 그녀들도 살아남느라 급급했을 테니까.
“상당히...치열한 추격전이었어요. 소리가 요란했으니까요. 혹시나 해서 따라가 보았지만....”
“따라갔다고?”
“네. 하지만...결국 놈들이 성공한 거 같았어요. 위험해서 가까이 가볼 순 없었지만...마지막에 놈들의 포효가 들렸거든요,”
“.....”
오히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시무시한 추격전 - 호드를 뒤쫒는다면 보통 추격전이 아니지, 당연히 - 을 따라가 보았다는 마리아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정말 대담한 여자였어. 하지만, 난 마리아의 담력에 감탄할 수가 없었어. 그녀가 내게 건넨 것 떄문에.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가봤지만...남은 건 이것뿐이었어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리아가 건넨 걸 받아들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건, 워울프가 애지중지하는 그 웃긴 서부영화 모자였으니까. 하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어.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워울프, 워울프, 정말 죽은 거야? 정말이야?
맨날 엉뚱하고 한심한 짓만 했지만, 그래서 늘 날 한숨쉬게 했지만, 너, 넌 이렇게 죽을 애는 아니었잖아. 응? 아니라고 해줘. 제발. 이건 아니잖아. 이럴 순 없잖아. 거짓말이라고 해줘.
“......”
나는 워울프의 모자를 받아들고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어.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어. 그 워울프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다고? 그, 흉측하기 그지없는 개1새1끼들 떄문에? 나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어.
“....아냐. 이건 사실이 아니야. 거짓말이야. 받아들일 수 없어.”
“죄송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칸 대장도, 워울프도, 그놈들에게 죽었다고? 도저히 죽을 것 같지 않은 그녀들이? 전투라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 신속의 칸이, 그리고 늘 나사빠졌지만 실력은 확실한 워울프가, 그 흉측한 놈들에게....잡아먹혔다고?
“아..아...안 믿을 거라고. 젠장. 내일부터 당장 수색 재개할 거야. 그녀들이 고작 저딴 새끼들한테 죽었을 리가, 욱, 윽, 어..없다고.”
“.....”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대장, 워울프....”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만 흐느끼고 말았어. 그런 나를 마리아는 다시 한 번, 말없이, 안아 주었어.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칸 대장은 몰라도 워울프는, 마리아가 건넨 모자는, 비참한 증거가 되고 있었지. 워울프가 소중히 여기던 모자였으니까.
이 끔찍한 결말을 오르카에 어떻게 전해야 할까. 이 처참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까. 오르카가, 사령관이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을까? 믿을 수나 있을까? 신속의 칸과 워울프가 이토록,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잊혀진 외딴 도시에서, 그렇게나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했다는 걸? 아무도 보는 이 없이, 그렇게 비참하게?
갑자기 그 괴물들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하나 새로 생겼어. 상당히, 아니, 굉장히 큰 이유였지. 나는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물었어.
“...놈‘들’이라고 했지? 그 새1끼들 수가 몆인데.”
“셋...셋이요.”
“하”
사실 몇 놈이든 상관없어. 호드는 순한 양이 아니야. 호드는 거친 늑대야. 빚진 건 반드시 갚아. 그 개 같은 괴물 새1끼들이 대장과 워울프에게 뭔 짓을 했다면, 그 놈들이 얼마나 못생기고 추잡하건 간에 그 값을 치르게 해줄꺼야.
“그러지 마세요. 놈들은 위험해요. 저희도 저항은 해봤어요. 도시에 남은 무기들을 꺼내서 쏴본 이도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 통하지 않았어요”
“그건 나도 알아”
내가 쏜 대탄에 맞고도 안 죽는 미1친놈들이었으니까. 마리아는 나를 극구 말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어. 그렇겠지. 그녀들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들을 이 생지옥에서 데리고 나갈 수 있는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일 테니까. 나 역시, 오르카가 준 임무를 저버릴 정도로 생각 없는 여자는 아니야. 오르카 바깥에서 고통받는 생존자 바이오로이드들을 구출하라는 것 말이야. 하지만, 난 역시 그 자식들에게 한 방 먹여 주지 않고선 분이 풀리지 않을 거 같았어.
“오늘은 일단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마저 계획을 짜 봐요”
그리고 마리아는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미소지었지. 그건, 아마도 그녀가 수십년 만에 처음 가져 본 희망이었을 거야. 여길 나갈 수 있다는 희망. 그런 그녀가 대피소 한구석에서 식량을 꺼내왔어. 솔직히 맛은 없었지만 - 멸망 전부터 남아있던 보존식들이 뭐 그렇겠지 - 양만큼은 꽤 푸짐했기에 나는 놀라고 말았어.
“어디서 이런 걸 다 구한 거야?”
“마리아가 우리들 밥은 잘 먹여. 우릴 굶기진 않거든. 그래서 따르는 거고”
무심하게 답하는 불가사리의 답을 듣자니 정말로 마리아가 이들의 리더이자 ‘마망’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어. 그녀는 보모 바이오로이드답게 배고픈 바이오로이드들을 배불리 먹이는 데 삶의 보람을 느끼는 듯했지. 허겁지겁 통조림을 먹어치우는 우리들을 보면서 정말 엄마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아이들은 잘 먹어야 해요. 먹는 것만큼은 배부르게 먹어야죠.”
진짜 엄마 같네. 뭐, 난 신체나이상 어린애는 아니지만. 마리아의 포근한 말을 듣자니 나도 마음이 풀어지고 따뜻해지는 것 같았어.
“먹이는 건 노력 많이 했겠네”
“저는 마리아에요. 아이들을 잘 먹이는 게 제 할 일이죠. 잘 먹고 살찌는 거 보면 기쁘기도 하구요.”
하긴 마리아는 그렇게 만들어졌지. 아이들을 먹이고 키우는 게 그녀 임무니까. 아이들이 배불러하고 살찌는 걸 보면 좋아하는 성격이지. 흠, 생각해보니 꼭 할머니 같군. 난 할머니가 없지만.
“다들 잘 먹고, 무럭무럭 커야죠.”
“이런 건 다 어디서 구한 거야”
“꽤 애썼죠. 도시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건 다 긁어모은 거에요. 아이들에겐 늘 밥을 먹여줘야 하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내게 미소지었어. 바깥의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느라 점점 먹을 입이 줄어들었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돌보는 이들의 배를 곯지 않게 해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수완이었지. 아이들을 생각하는 정말 대단한 보모기도 하고. 이 마리아는, 부드러워 보여도 뛰어난 인물임에 분명했어.
“점점 구할 수 있는 식량이 떨어지고 있지만요. 당신이 온 건 정말 천운이었어요”
흐음, 약간 부끄러워지네. 따지고 보면 나도 지금 당장은 그냥 피난민에 불과한데 말이야. 이 낯선 - 그리고 지옥 같은 - 도시에서 마리아한테 의지하는.
나는 이 버려진 도시 최후의 생존자들의 면면을 보았어. 어쩐지 지치고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핀토, 한 손으로 눈앞의 식사에만 열중하는 외팔이 불가사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그저 조용히 입을 오물거리는 어린 LRL....이렇게 다들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문득 하라가 헷따.
....가 아니라 배가 고파지며 여러 생각이 떠오르더라. 오늘 있던 수많은 일들, 칸 대장과 워울프, 이곳의 생존자들...어쩐지 어깨가 무거워져서 난 옆에서 꺠작깨작, 유일하게 밥맛없게 먹고 있는 핀토의 어깨를 슬쩍 두드렸어.
“많이 먹어라. 배라도 불러야 뭘 하지.”
“.....”
핀토는 대답하지 않았어. 하기야. 삶의 목적 - 도시를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정의의 수호자가 되는 것 - 을 잃은 아이에게 무슨 의욕이 있겠느냐마는. 칸 대장과 워울프의 사정을 확인한 나도 그녀의 심정을 알 것 같았어. 절망하고, 아무런 힘도 나지 않는.
그래서 지금은 더 말하지 않기로 했어. 오늘은 너무 피곤했고, 조그만 대피소의 저녁식사는, 의외로 따스했으니까.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1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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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라가 헷따는 '고독한 미식가' 패러디입니다.
2) 저는 라스트오리진의 공식설정을 (가능한 한, 가급적, 최대한) 준수합니다.
3) 쓰면서 느끼는 건데 보속의 마리아는 참 인터넷 밈 속의 할머니 같겠군요. 아마 초코바 먹고 살찐 알비스 보고도 뼈와 가죽뿐이네요! 하실 것.
제 글들을 클릭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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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님의 맵고 어두운(?) 생각은 순진하고 착한 제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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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님의 맵고 어두운(?) 생각은 순진하고 착한 제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 21.12.15 15: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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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 성격이 문제겠죠ㅠ | 21.12.15 15: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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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뛰는 공대장 퀵 카멜! | 21.12.16 01: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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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수십 년간 도시 안에서 고립된 채 버텨온 걸 보면, 어떤 식으로든 보통 능력이 아니긴 하죠. | 21.12.16 13: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