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칠게 ‘카라 어쩌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부서진 팻말을 걷어차며 달렸어. 옛 인류의 유산을 내 손으로 부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어서 말이지.
안녕, 소개가 좀 늦었네. 난 퀵 카멜이야. 앵거 오브 호드 팀의 화력지원 담당이지. ‘화력 지원’이라는 좋은 울림의 수식어가 말해주듯이 내 원래 역할은 칸 대장이 실컷 깽판을 치고 있을 때 후방이나 측면으로 돌아서 화끈한 지원사격을 해 주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처럼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르는 괴물딱지에게 쫒기는 게 내 원래 역할은 아니다 이거야.
“으아아아 시1발 저리 꺼져!!”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 내가 좀 터프한 성격이긴 해도 워울프처럼 입까지 걸걸하진 않아. 하지만 정체도 모를 괴물에게 몇십 분이고 계속 쫒기고 있으면, 가장 얌전하고 정숙한 바이오로이드라도 입에서 욕이 나올거야. 더구나 난 지금 방호복에 방사능 차단용 방독면까지 뒤집어쓰고 있단 말이야. 그 상태에서 계속 달리는 게 얼마나 X같은지는 해본 사람만 알거야.
“으흐헝, 따라오지 마아아-”
나는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도 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어. 괜히 내 이름이 퀵(quick)카멜이겠어? 애초부터 내 역할이 기동 타격 화력지원이라니깐. 앵거 오브 호드는 기동에 모든 것을 건 강습부대고, 난 무장헬기조차도 따라가지 못하는 칸 대장 꽁무니를 쫒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거든. 그래서 땅 위에서 발 붙이고 움직이는 것치고 나보다 빠른 것은 흔치 않아.
그런데 이 놈을 보라고. 물론 나보다 근소하게 느리긴 하지만, 거의 나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속도로 죽어라 나를 쫒아오고 있다고. 이 내가, 최고 속력으로 달리지 않으면 잘못하면 붙잡힐 정도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단 말이야. 워울프 같은 바보라면 벌써 잡혔을 거야. 셀주크보다 덩치가 더 큰 흉측한 살덩어리가 믿기지 않는 속도로 괴성을 내뿜으며 나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니, 믿겨져? 물론 방향전환이나 순발력에서 나만큼 기민하진 못한 거 같지만, 일단 저놈 덩치만한 게 그 속도로, 그것도 징그럽게 꾸무럭거리면서 돌진해온다는 거 자체가, 어, 뭐였더라, 워울프가 예전에 보여 준 멸망 전 삼류 B급 호러영화 급이라고.
“으아아아아아---”
아니, 근데 도대체 진짜 저게 뭐야? 난 멸망 전 개체는 아니지만 오르카에서 꽤 짬밥을 먹었고 이런 저런 철충들과도 붙어봤어. 그래서 웬만한 철충들의 유형은 자연히 외워졌고, 보면 대충 저게 뭘 베이스로 기생했는지 정도는 대부분 알 수 있어.
근데 이놈은 달라. 도대체 무슨 기계에 기생했는지 알 수가 없어. 아니 그보다...이거 기계 아닌 거 같아. 철충이 기생한 기계는 뭔 곰팡이나 이끼 같은 더럽고 징그러운 녹이 온 몸을 뒤덮어. 그래도 그건 금속성이지. 척 봐도 딴딴하다 이 말이야. 그런데 이놈은...그보다는 살덩이로 뒤엉킨 지옥에서 기어나온 괴물 같아. 그래, 금속성이 아니라 살덩이 말야. 인간이나 나같은 바이오로이드를 구성하는 그 탄력 있는 단백질 조직 말야. 장담하건데, 내가 본 그 어떤 철충보다도 못생겼지만 말야.
아, 맞아, 칸 대장이 늘 가르쳤지. 외모만 보고 남을 판단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야. 하지만, 날 뒤쫒는 놈의...쩌어억 벌어진 ‘가장 큰 입’ - 맞아, 이 새1끼 입이 한 개가 아냐 - 안에 불규칙하게, 하지만 빽뺵하게 돋아나 있는 날카로운 이빨과 질질 흐르는 침을 보자, 어쨌든 이 놈이 나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진 않았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어. 배가 고픈 모양인데, 어쩐지 내가 살아 움직이는 토스트쯤으로 보이나봐, 젠장.
“시1발, 이거나 먹고 떨어져어어어!!!”
부서진 건물의 외벽을 돌며 한 번 휘청할 뻔했지만, 나보다는 녀석이 방향을 전환하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처박히고 말았어. 낡고 무너져가는 벽돌들이 우르르 무너졌지.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함을 치며 녀석에게 포탄을 날렸어. 간신히 무너진 돌더미 속에서 기어나오려는 녀석의, 어, 아마도 머리 - 정말이지 끝내주게 괴상망측하고 끔찍하게 생겨먹어서 그게 머리인 줄도 모르겠어 - 에 해당하는 거 같은 부위에 내 180mm 대탄(맞아, 대전차 로켓이야)이 작렬했어. 보통 이거면, 웬만한 놈은, 죽어.
“...해치웠나?”
잠깐, 뭔가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거 같은데.
자욱한 먼지구름 속에서 녀석의 그림자가 비틀비틀, 그러나 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닌 것처럼 일어났어. 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짐작되는 사람 있어?. 나는 멀쩡하게 살아서 고개를 쳐드는 놈을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어. 진짜로 질렸으니까. 그리곤 녀석이 몸에 묻은 먼지를 채 다 털어내기도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들 사이로 내달렸어. 헐레벌떡 도주하는 나의 뒤편에서, 결국 나를 놓쳐서 단단히 빡쳤는지 점점 멀어지는 놈의 포효가 들렸어. 그건, 그 정도 덩치의 괴물이 낼 법한 낮고 둔탁한 포효라기보다는, 수많은 작은 짐승들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날카로운 고음의 비명소리들의 합창에 가까웠어. 어쨌든 듣기 좋은 청아한 소리는 아니었지.
“난, 여기, 이럴려고 온 게, 아니란 말야, 헉헉”
한바탕 때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와 전혀 예상치 못한 술래잡기를 하니 숨이 가빠 왔어. 빌어먹을 방독면. 빌어먹을 방호복.
진짜 이거 뭐야? 철충은 인간님들과 비슷한 뇌파를 내뿜어. 그래서 별도의 지침이 없는 한 우린 놈들을 종종 인간으로 착각하곤 하지. 짐승은 또 짐승마다 뇌파도 생김새도 다르니깐 구분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린 철충이든(인간 없는 시대에, 인간의 뇌파를 내뿜는데 인간 같이 안 생겼으면 그건 철충이지, 안 그래?) 짐승이든 아무튼 구분할 수 있어. 그런데 이놈은....뭐야...대체 뭐냐고....
왜 우리 바이오로이드랑 같은 뇌파를 내뿜는 거야???
왜 내 뇌는 저 놈이 자꾸 나랑 동류의 종족이라고 하냐고???
아니, 정확히는 좀 달라.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는 한 명분의 뇌파를 내뿜지. 당연하잖아? 근데 저 놈은 수십, 수백 명분의 바이오로이드의 뇌파를 내뿜고 있어. 시끄러울 정도로 말야.
음, 인간에게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뇌파를 일종의 노래라고 치면, 저놈은 수천 명이 합창을 해오는 기분이야. 뭐 합창처럼 듣기 좋은 음색은 절대, 절대로 아니지만 말이지.
아씨, 이렇게 설명할 때가 아니지. 나는 언제 어디서 또 튀어나올지 모르는 놈을 피해 숨을 곳을 찾았어. 이 망할 놈의 폐허, 빨리 떠나고 싶어.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빨리 말야. 하지만...
나는 도망치면서도 이 저주받은, 도대체 듣도 보도 못한 저딴 못생긴 괴물이 튀어나오는 버려진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어. 여기서 완수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으니까.
칸 대장, 대체 어디 있어요?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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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2020년 초에 구상했던 소설인데, 관두고 있었습니다만 원자력대회를 맞이하여 써불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두세 편씩 업로드하겠습니다.
2) 마침, 예전에 제가 '누구를 갖고 소설을 쓸까요?' 하고 문의하였을 때 (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3373), 칸과 워울프를 요청하신 분들이 있었는데 그 요구도 어느 정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술자인 주인공은 퀵 카멜이지만 사실 주연은 호드의 바이오로이드들이라서요.
3) 장편이며, 장르는 '포스트 아토믹 아포칼립스 코미디 호러'입니다. 덧붙여, 욕설이 좀 나옵니다.
4) 카라차이 호는 러시아의 첼랴빈스크 주에 실제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여기가 뭐하는 곳이냐에 대한 정보는 나무위키:(https://namu.wiki/w/%EC%B9%B4%EB%9D%BC%EC%B0%A8%EC%9D%B4%20%ED%98%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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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계속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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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아토믹 아포칼립스의 폐허가 된 풍경을 인상적이고 선명하게 제시했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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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생김새는...그냥 생각하시는 것 중서 가장 역겨운 걸로 생각하심 됩니다. 구체적인 외형은 사실 안 정해두었고(소설의 특권(?)인 셈이죠) 다만 다음 조건만 정했거든요. 1) 살덩이다(즉 뼈, 근육, 살 등으로 이뤄진 생물체다) 2) 이빨이 엄청 많다 3) 눈이 엄청 많다 4) 다리가 엄청 많다. 5) 발톱이 날카롭다. 6) 강하다. 7) 정말 개 못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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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생김새는...그냥 생각하시는 것 중서 가장 역겨운 걸로 생각하심 됩니다. 구체적인 외형은 사실 안 정해두었고(소설의 특권(?)인 셈이죠) 다만 다음 조건만 정했거든요. 1) 살덩이다(즉 뼈, 근육, 살 등으로 이뤄진 생물체다) 2) 이빨이 엄청 많다 3) 눈이 엄청 많다 4) 다리가 엄청 많다. 5) 발톱이 날카롭다. 6) 강하다. 7) 정말 개 못생겼다. | 21.12.15 13: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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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게걸스럽게 씹고 먹어치워서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드는 것도 '하나가 되는 것' 아니겠읍니까. | 21.12.16 00: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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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오랜만입니다. 어서 오세요. 늘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21.12.16 17:3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