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색과 흰색의 하모니. 그 지평선을 매우는 하늘색에 드문드문 지나가는 구름은 솜털을 뜯어다가 띄워놓은 것만 같다.
꽤 맑게 트인 하늘은 사진으로 찍어둬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지만, 나날이, 적어도 며칠째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일랑 자연스레 사라져 있는 법.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위해 출근길에 나선 아사는 잠시 그 하늘을 올려다본다.
함부로 고개 들지 말라는 듯 내리쬐는 햇빛에, 아사는 눈을 찌푸리고는 손등으로 미간을 가렸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새파란 허공. 그러나 더 올라가면 시커먼 우주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허공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아무리 뻥 뚫려있는 것처럼 보여도, 저것은 수많은 공기가 층층이 쌓인 채 우주를 가로막는 천장이나 다름없으니까.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의해 사람은 우주라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주의 존재를 몰랐다면 저 하늘은 그야말로 무한한 공간으로만 보였으리라.
그런 잡생각을 품으며 아사는 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답답하다. 그것이 아사가 느끼는 감상이자, 최근 들어 안고 있는 심정이었다.
꿈을 안고 달리기에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다. 건실한 목표라고 인정받을 만한 꿈조차도 아니라면 더더욱 힘들다는 것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택한 게이머로서의 길이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부딪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리는 요즘이었다.
'듀얼몬스터즈'는 지금 와서도 세계적인 인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게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처럼 듀얼리스트라는 꿈을 갖고서 뛰어드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전력 보강에 필요한 새로운 카드들을 구해야 할 것이고, 그런 나날을 유지하기 위해 입에 풀칠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 자신은 오늘도 발을 옮기고 있었다.
지금 일하는 걸로 들어온 수당 중 이거저거 빼고 나면 카드를 구할 비용은 얼마가 남을까. 그런 가운데 갚을 학자금은 또 얼마가 남아 있는가.
원하는 대로의 길을 택해도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 치워질지 알 수 없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자식의 꿈을 존중해주겠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눈치를 주던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큰소리치고 집을 나오기는 했다만, 만에 하나 나중에 또 들르거든 그 눈치를 마주해야 하겠지. 프로리그에 이름을 올린다면 조금이나마 입을 다물어줄까.
걷다 보니 어느 새 전철역이 코앞이다. 이제 타고 나서 내리면 곧장 일터로 들어가면 된다. 그 동안은 하늘에 집중할 여유 따위 없으리라.
하나 남은 신호등 앞에 서면서 아사는 무심코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좋다고 저 퍼런 허공에 시선이 이끌린단 말인가.
그 자리에서 남은 피로를 털어내기 위해, 그 다음에는 기지개를 쭉 펴는 순간이었다.
바로 앞을 가로지르던 무언가가, 그녀의 팔에 걸린 핸드백을 낚아채버린다.
"어!?"
오토바이를 탄 소매치기가 그 핸드백을 챙겨든 채 정지 신호까지 무시하고 속주하고 있었다. 자동차의 경적을 뒤로하며 아사는 놓칠 새라 그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야, 거기 서! 멈춰! 내 가방!"
멈추란다고 멈출리는 없다는 것쯤이야 생각은 해도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힘들게 벌어들인 것을 이런 식으로 허망하게 날릴 수는 없는 법.
왜 도로변에서 무방비하게 서있기나 했을까, 후회하며 벌써부터 체력을 낭비해야만 했다. 결국 뛰던 발을 멈춰서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에 없나 하던 순간이었다.
"거기까지다!"
우렁찬 소리가 귀를 찌른다. 그것이 들린 방향으로 아사와 소매치기가 무심코 고개를 들자, 무언가가 가까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다. 아무것도 타고 있지 않은 채 그냥 자기 발로 달리는 사람 실루엣이 쫓아오고 있었다.
'실루엣'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얼굴이나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그가 지른 것으로 보이는 목소리까지 감안하면 건장한 성인 남성 정도라는 것을 판별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알아낼 수가 없다.
여러가지 의미로 굉장한 광경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맨발로 달릴 뿐이 아닌가. 어차피 이대로 더 속도를 낸 채 계속 달리다 보면 뒤쳐져 있을 운명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핸들을 잡던 소매치기가 더욱 당황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저놈은 또 뭐야!?'
그는 백미러 너머의 광경을 의심할 수밖에 없없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에도 아랑곳 않고 실루엣의 질주는 계속되고 있던 것이다.
벌써 몇 km를 달렸는데 지친 기색도 없는 건 둘째치고, 왜 멀어지기는 커녕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일까.
그야 도로가 뻥 뚫린 것은 아니라지만 열심히 길이 나있는 대로 피해서 가고 있을 텐데, 추격자는 어떻게든 그걸 꿋꿋이 따라오고 있었다.
멀리서나마 살펴보니 그는 몸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전신 타이즈와 자신처럼 오토바이용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추가로 벨트, 장갑, 부츠 등등. 색상은 대부분 검은색 계열이다.
하나같이 시중에서 구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저런 식으로 전신을 뒤덮은 모습은 무언가를 코스프레한 모습으로도 보였다.
저걸 뭐라 해석해야 좋을까. 본인이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던 소매치기는 저런 차림의 인물이 뭘 시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고 제발 좀 가라!'
하필이면 아침 댓바람부터 히어로 놀이 중인 인간한테 쫓기고 있을 게 뭐람. 할 짓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나름대로 마련한 히어로 코스튬이 결코 겉치레가 아니라는 듯이,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자세로 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저렇게까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만큼 서로간의 거리는 점점 좁혀들어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소매치기는 핸들을 틀어서 어떻게든 차 사이로 빠져나간다. 이젠 경적 소리도 찰과상도 알 바가 아니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차가 많이 다닌담. 이러다 붙잡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만에 하나 잡히거든 이대로 달려서 떨어져나가게 만들까 하는 생각마저 닥쳐왔다.
그러다 상가 지대에 접어들 무렵에 그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진다.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중간에 골목으로 빠졌을 것이다.
'…갔나? 진짜로?'
드디어 지쳐버렸나? 아니면 애초에 행선지가 겹쳤을 뿐 따라올 생각이 없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냥 저기로 가려고 정신없이 뛰었을 뿐인가?
어찌됐든 쫓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됐다. 이번 장물도 무사히 접수할 수 있으면 그만. 이미 신고가 들어왔을 테니, 어설프게 계속 주행하고 있다가는 오히려 특정이 되어서 잡히는 수가 있었다.
무작정 달리는 것보다 어떻게 빠져나가야되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다. 마침 인적이 드문 곳이 머지 않았으니 서서히 빠지면 이번 건수도 해결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혹시나 해서 살짝 속도를 낮춘 채 좀 더 달리고서야 시동을 껐을 무렵,
그의 하늘은 한 순간 살짝 어두워졌다.
"꿰엑!?"
헬멧을 강타하는 육중한 타격과 함께 소매치기의 몸이 오토바이에서 떨어져나간다. 동시에 바닥을 구르면서 온몸이 아스팔트에 긁히고 흙먼지로 뒤덮였다.
짧은 시간 내에 찾아온 충격에 의해 남자의 몸은 희미하게 꿈틀거리기만 할 뿐 더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어느 샌가 공중에서 뛰어들어 오토바이의 좌석을 차지해버린 복면의 남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은 채 드디어 한 마디를 꺼낸다.
"이제야 멈췄나."
잠시 후, 그는 소매치기의 오토바이를 탄 채 역사 앞으로 돌아온다. 곧 지갑도 교통 카드도 없는 상태라 우물쭈물하던 아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훔쳐간 게 이거 맞습니까?"
헬멧 너머로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손에 내민 것은 아사의 핸드백이었다.
그녀는 다시 뺏길 새라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들인다.
"네, 맞아요."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다행히도 빠져나간 물건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사는 한숨을 내쉰다. 적어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남자는 분명 자기 소지품을 안전하게 전달해주었다.
이미 지각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가진 것을 잃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 점에서 그는 분명 은인이 맞았다.
"다행이다. 진짜 감사합니다."
"초면에 실례지만, 선량한 민간인으로서 협조해주실 수 없습니까?"
"네?"
"체포는 완료했으니까, 경찰에 신고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아, 이미 다른 분께서 신고하셨어요."
"잘 됐군요. 이쪽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뒤에 타고 있던 합승객을 내민다. 인상착의로 보면 아까 그 소매치기가 맞겠지만, 어쩐지 이미 의식이 없는 듯 뒷좌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헬멧 너머로 보이는 얼굴부터 멀쩡하지가 않아보인다.
부탁한다니, 이 사람을 경찰에 넘기면서 사정까지 더 설명해달라는 의미겠지. 그러나 그녀가 확인한 것이라고는 이 남자가 저 모습으로 그냥 뛰어가더니, 어떻게든 오토바이를 붙잡아서 소매치기를 곤죽으로 만들고 돌아왔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걸 쉽게 진술할 수 있을까. 어차피 지각한 신세지만 이러는 사이에 받을 수당까지 더 깎이면 어쩌지.
그렇게 골치를 썩히기에 앞서 아사에게는 더욱 신경쓰이는 의문이 있었다. 애당초 이 인간은 누구란 말인가.
"죄송한데 뭐하시는 분이에요?"
"그냥 민간인입니다."
"네?"
"민간인이요. 당신과 다를 것 없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라는 반문이 튀어나오려던 아사는 다시 생각해본다. 확실히 경찰도 군인도 아닌 민간인 신분이니까 익명으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일 테지.
저런 복면차림을 보면 정체 따위 알려줄 생각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언동이 당황스러운 광경을 전부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성함이라도…."
"그건 곤란합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하라구요?"
"어차피 다른 목격자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말을 맞추다 보면 당신이 져야할 책임도 줄어들겠지요."
범인을 잡은 것은 좋지만, 그래봤자 이 사람 역시 경찰 쪽에서 조사를 시도할 텐데. 무엇보다 이런 수상한 인상착의로 돌아다니면서 남을 떡으로 만드는 사람을 절대 가만히 둘리가 없다.
본인도 알고 있지만 딱히 신경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애초에 신경을 안 쓰니까 저러고 다녔을 테지만.
"저, 다른 건 여쭤봐도 될까요?"
"뭐죠?"
"왜 이렇게까지?"
"불의를 참지 못했을 뿐입니다."
과연 히어로다운 대답이다.
"정말로 그게 다에요?"
"마음에 둔 것은 실천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후회 없는 삶이 아닐까요?"
실천이라. 말은 쉽다.
맨발로 오토바이를 따라잡을 정도의 힘을 발휘하려면 얼마나 되는 실천을 발휘해야 할 것인가.
"아, 네."
"말이 길었군요. 죄송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직 맞서싸워야할 악이 더 있어서 말이죠."
곧 그는 경찰이나 군인처럼 칼 같은 거수 경례를 해보인다.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의미있는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그 한 마디 인사를 끝으로 그는 도약했다. 닌자라도 되는 듯이 점프만으로 가볍게 각종 기물을 딛고서 빠르게 현장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그리 높지 않은 건물 너머로 여전히 뻗어 있는 푸른 하늘. 여전히 달리고 있을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만화나 영화에서나 볼법한 광경이 이어지면서 아사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 가벼운 헛웃음이 터져나오고서야, 아사는 나지막히 중얼거릴 수가 있었다.
"뭐야, 저 사람?"
원하든 말든 상관없이 들어오는 에너지 덕분에 일상은 그나마 활기를 찾을 수 있다.
그런 그나마 긍정적인 생각을 지금의 유진은 전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몸이라도 수면 시간이 부족해지면 부족해질 수록 정신에 한계가 찾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잠을 덜 자야 한다.
렘 수면에 들어갈 정도로 깊은 잠이 찾아온다 싶으면, 그 때를 대비해 주기적으로 맞춰놓은 알람 소리를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린다. 아직 몸이 움직여질 때 쯤에 주기적으로 팔을 꼬집었고, 쓰디쓴 블랙 커피도 몇 잔을 들이켰는지 모른다.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다. 잘 시간도 아꼈겠다, 이럴 때는 무언가 다른 재미있는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아니면 덱을 살피는 것으로도, 하다못해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하다 보면 시간은 적당히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한 저항의 결과는 이미 학교 생활을 비롯한 일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걷다가 가끔씩 몸이 비틀거리는 걸 어떻게든 바로잡은 적이 많았다. 수업 중에는 벌써 몇 번 째를 조는 것이냐며 교사에게 한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이러니 쉬는 시간은 이미 낮잠 시간으로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 번 정도는 그대로 책상에 엎어지려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라며 억지로 깨워진 적도 있었다.
꼼짝하기도 싫은데. 그러나 잠에 드는 짧은 순간에라도 꿈을 꾸어버릴 가능성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일어섰다.
체육 시간.
시원한 바깥 공기를 쐬면서 운동장을 달린 끝에 어떻게든 정신을 바로잡을 수가 있었다. 발이 조금 비틀거릴 뻔도 했지만 페이스가 흐뜨러지는 수준은 면했다.
그래봤자 한 교시조차 버티지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깬 정신으로 버티고 있을 수는 있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발버둥쳐볼 수는 있겠지.
그런 유진의 예상은 체육 수업이 끝나고 환복을 마친 직후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교실에서 한 층 더 따스해진 온기가 잠기운을 자극해버렸으니까.
결국 앉아 있기만 해도 서서히 눈이 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 봐 저거, 얼마나 반가우면 저렇게 꾸벅꾸벅 인사를 해대. 목 나가겠다."
무게감 있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의 능청스러운 말투, 그리고 희미한 웃음소리가 귀를 긁고서야 유진은 다시 정신을 차린다.
그러자 벌써 수업 중이고, 자신은 아직 교과서는 커녕 D-패드도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그를 깎은지 얼마 안 된 듯 꼿꼿한 스포츠 헤어의 교사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가서 서 있어라. 잠 깨면 돌아오고."
"…네."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주변 시선 신경 쓰는 일 없이 유진은 순순히 복도로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동안에도 잠기운과의 씨름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결국 수업종이 울리는 순간까지 유진이 교실에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교사는 교실을 나오면서 팍 찡그린 표정으로 여전히 눈이 게슴츠레한 그와 눈을 마주친다.
"지독한 놈. 어떻게 한 번도 돌아올 생각을 안 하냐."
"…잠이 안 깨서요."
"너 아까도 졸았다며? 한 동안 수업 태도 나아졌나 싶더니만 원상복구 되는 거야? 어젯밤에 뭐했어?"
"본업에 충실했습니다."
"학생 본업이 학업이잖아. 공부했냐?"
"그런 셈입니다."
"이거 봐라…."
대답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 더욱 찡그린 눈초리로 유진을 쏘아본다. 그리고는 이럴 시간이 어디있냐는 듯 교사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서 발을 옮겼다.
"앞길은 네가 생각하는 거다. 다음엔 더 잘 하자."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떠나는 교사를 뒤로 하고 유진은 교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옆자리의 클래스메이트로부터 또다시 비슷한 질문이 날아왔다.
"밤에 뭘 했길래 그렇게 비실거려?"
한 번 했던 대답을 또하기가 귀찮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민감한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해지리라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대답해야 됐다.
"듀얼."
"그럼 그렇지. 지독하다 지독해."
"지독해야 이기지."
"그래. 듀얼리스트 외길 인생 정진하느라 고생이다."
기가 막히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온다. 남의 일이라고 저렇게 아무렇게나 얘기할 수가 있다니.
막말이 목구멍 너머로까지 차오르려던 유진은 간신히 숨을 삼켰다.
'이대로는 안 돼.'
정신이 나가서 뭔 소리를 할지, 뭔 행동을 해버릴지 본인도 장담할 수가 없다. 역시 잠을 줄이는 것은 할 짓이 못 된다.
몇날 며칠 이러다간 제 수명이나 갉아먹는 꼴일 뿐이고, 잠깐 잠든 순간에도 꿈이라는 것을 꿀 수는 있으니까.
얼마나 머저리같은 행동이란 말인가.
"나 보건실 갔다 온다. 대신 좀 전해 줘."
"수업 짼다고?"
"에이씨."
"아니, 맞잖아."
반박할 수는 없으니 일단 짜증부터 부리고 본다.
"알았어. 정상적으로 수업받을 꼬라지도 아니겠고. 적당히 좀 해라."
"어, 고마워."
대충 감사 인사를 던지고 터덜터덜 계단으로 향한다.
멀쩡한 상태가 아닌 것은 사실이므로 딱히 변명조차 아니다.
그러니 갈 곳을 가는 것이다.
보건실 문을 연다.
허락을 구해야 할 보건교사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정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일단 들어가 보니 실내는 조용하다. 설마 하니 농땡이를 피러 온 불량학생이 있는 것은 아닐지 불안을 품기도 했으나 딱히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침대칸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유진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는 의외의 인물과 눈을 마주쳤다.
"………."
잠시 정적.
아이바 유노는 그냥 못본 척 하듯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런 반응을 유진은 신경 끄듯 태연히 옆 침대칸으로 돌아 걸터 앉는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기듯 이마를 짚고 있자, 유노가 다시 눈을 뜨며 물었다.
"뭐 해?"
"깊은 잠은 피해야겠다 싶어서."
뭔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듯 유노가 또다시 묻는다.
"교실까지 나와놓고 그러기야? 건강이나 해칠걸."
"넌 건강 지키려고 여기 와서 누워 있어?"
유진은 저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대답이 나와버렸다.
그걸 농담으로 들어줬는지 유노는 농담하듯이 받아친다.
"그럴걸. 지금 너보다야 건강하겠지만."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유진은 겨우내 다시 정신을 다잡고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좋겠다. 나보다 더 정신없고 피곤할 텐데."
"나야 단련이 돼 있으니까."
"그래도 피곤할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의외로 솔직하게 터놓는다.
유노는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는지 그가 그 모양인 이유를 따져보았다.
"저번에 그 일, 아직도 신경쓰여?"
"그런가 봐."
꿈 속에서 펼쳐진 듀얼.
단순한 꿈이라고 넘겨짚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더이상 같은 꼴을 겪기 싫다고 발악을 하다 유노에게 따로 보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할 일이기는 했지만, 경험이 더 있을 그녀라면 무슨 방법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의 듀얼은 그녀조차 경험한 적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녀는 잠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또 착잡한 반응을 보이고 있겠지.
들어주는 건 고맙지만, 제발 아무것도 해주는 게 없다며 자책하고 있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괴로워해대는 모습이야말로 보는 사람에게는 고통이니까.
차라리 왜 그러고 있는 것이냐며 다그쳐줬으면 좋겠다. 겸사겸사 뭔가 떠오른 대안이라도 말해준다면 더 좋을 것이다.
뭔가 행동을 해서 바뀌는 것이 있다면 이 지옥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난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저번에도 들었던 것이다.
"이겼으면 됐다고 했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해도 되나?"
"피하지도 못할 싸움이면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렇게 뜻을 맞췄던 것 같은데. 다른 생각해서 어쩌게?"
유노의 반문에 답할 거리가 순간 떠오르지 않는다.
"모르겠어."
"몰라?"
정말로 다른 생각을 갖겠냐고 심문하듯 유노가 묻는다.
결국 화를 내게 해버린 모양이다.
그것조차 두렵다.
정해진 답만 내놓는다면 지금 이 순간도 무사히 넘길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유노와 리퍼가 이런 식으로 속는 셈치고 넘어가줄 수 있을 것인가.
"미안. 내가 요새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래."
"그러니까 잠부터…."
"…자다가 꿈 꿔버릴 수도 있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녀가 지금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대답을 곱씹으며 유진은 한숨을 내쉰다.
"저번에 또 꿈 꿨어."
그리고서 내뱉은 발언에 갑자기 뭔 소리냐는 듯 유노가 째려본다.
"무슨 꿈?"
"별 건 아니고. 그냥 졸다가 꾼 건데. 카나이 하츠카라는 사람 기억하지? 그 때처럼 소리 빽빽 지르다가 가루가 되더라고."
"그 때 일이잖아. 트라우마로 남으면 나올 만도 하겠지."
"그 사람만이 아냐. 나한테 져서 벌칙을 받은 사람들 모습이 잊을 만 하면 튀어나와."
"그러니까, 다 지난 일이라고. 하츠카라는 사람도, 유메미라는 애도, 네가 원해서 싸운 게 아냐. 너한테 물을 책임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가지고 머리 싸매지 말라니까."
그녀 말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잊자고 아무리 스스로 되뇌어도 카드를 쥐는 순간마다, 익숙한 거리를 지날 때마다, 심지어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기억은 떠올라버리니까. 그렇기에 계속해서 기억은 머리에 남아 정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잊는 게 답이라 이거지?"
"네 정신만 괴롭힐 바에는 뭐, 그렇지."
그녀의 대답을 넘어서는 대책을 유진은 떠올리지 못한다.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리면 어떡해?"
"뭘?"
"내가 나로서 있게 해주는 뭔가."
"구체적으로 어떤 거?"
"그러니까……."
자기가 말한 것의 구체적인 예시도 그의 머리는 떠올리지 못한다. 연산능력이 떨어지는 컴퓨터처럼 생각을 관두고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만 같다.
그런 철학적인 논제 따위 여태까지의 인생에서 고민해볼 여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모르겠다. 지금 내가 나 자신이 맞는지부터 확신이 안 가. 잠에서 깨기 전에 뭔가가 나를 바꿔치기 한 거면 어떡해? 아니, 그 날 깬 시점부터 내가 아니게 된 거면?"
"……."
보인다. 의심이 담긴 눈초리가.
그러나 그것을 거두듯 유노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위저드가 전에 그런 식으로 떠들었다 그러지 않았어? 그런 헛소리 때문에 시달리는 거면 그것도 잊어. 그게 너한테 이로운 거야."
"그래. 잊는 게 답이다. 그치."
역시 그 이상의 명안은 없으리라.
또 한숨이 나온다. 지금 순간만 해도 앞으로 몇 번을 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나, 잊어서라도 익숙해지면 그만이다 생각했거든? 네 말대로 어차피 피하지도 못할 싸움이잖아. 그냥 복잡한 생각 말고 덤비는 애들이나 때려잡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넘어가려고 했어."
"내가 언제 생각까지 관두랬어? 어떻게 살아남을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같이 생각해보자고 했었잖아."
"그랬나. 미안, 머리가 멍청해서 잊어먹었나 보다. 아무튼."
피곤한 나머지 언제부턴가 그녀의 말뜻을 곡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쉴새 없이 싸우고 이겨나가야 하는데 그런 것까지 고민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재버워키도 그러더라. 잊으래. 여태까지 있었던 일은 다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
"그 놈은 어차피 다 아는 거야. 내가 뭔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할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날 가지고 노는 거라고. 어쩌면 너까지."
한 순간 유노의 눈매가 찌푸려진 것을 유진은 알아채지 못했다.
"적어도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는 거잖아. 최소한 저항할 의지가 있으면 너는 너로서 있다는 거야."
티나지 않는 선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내뱉는 유노의 대답을, 유진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이렇게 잊지 않도록 목적을 떠올리게 해주는 존재가 고맙지 않을리 없다. 그 은혜를 위해서라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야 한다.
지금까지는 잘해왔다, 고 생각해보려 했다.
"그럼 뭐해, 가면 갈 수록 더 돌아버리겠는데. 내가 지금 뭘 생각하는 건지, 생각이란 걸 하는 게 내 머리가 맞는지 모를 지경이야. 뭔 선택을 하든 그냥 그 놈이 원하는대로 돼가는 것 같아. 진짜 이래도 되는 거 맞아?"
유노의 험악한 눈매가 더 뚜렷해진다.
"또 말 나오게 만들래? 그거 말고 너한테 다른 선택이 뭐가 있어? 그대로 정신 놓게? 아니면 그냥 무기력하게 당할 거야?"
이렇게 서로가 쓸데없이 날을 세우게 만드는 말만 내뱉는 것만 해도 자신이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유노에게도 있었는지, 그녀 역시 한숨을 삼키고는 자세를 낮춘다.
"나도 알아. 지금 이것도 네 선택인 거. 재버워키 뜻대로 되는 게 싫으니까 안 자고 버티는 거잖아."
"그건 그런데…."
"근데 이런 식으로는 아무 소용 없어. 가뜩이나 네 몸하고 정신만 더 망치는 짓이야. 그러다 중요한 걸 잊어버리면 어떡할래? 진짜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지금 내가 그 정도라는 거야?"
"너 스스로 위험하다고 느꼈으니까 여기 쉬러 온 거잖아?"
"…………."
"바로 그거야. 널 가장 잘 책임질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 자신이야. 적들은 물론이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지금의 널 이해 못해 줘."
"너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건 걱정이 아니라 경고야. 선 넘는 순간 끝이니까. 주변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 나(우리)까지 적이 된다는 걸 잊지 마."
자신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뭘까. 유진은 의문을 놓지 못한다.
벌써 제 손으로 어둠에 묻어버린 사람들만 두 자릿수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러다 그녀는 자신보다도 일찍, 그리고 바쁘게 어둠의 듀얼에 나서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모든 벌칙이 진짜로 그런 식으로 어둠에 파묻어버리는 것이었다면 더 많은 목숨도 묻어왔다는 뜻이겠지.
그만큼 기준이 더 관대해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강인해서 좋으시겠어. 그런 비아냥을 유진은 입밖으로 내지 못한다. 대신 웃음이라도 지으면 뭔가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라도 지어보았다.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뭘 어떡하면 돼? 뭘 어떡해야 선을 안 넘어? 그 동안 어떻게 될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솔직히 겁나 죽겠어."
화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던 그녀의 얼굴은 어느샌가 측은해하는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 디젠하고 엮이는 사람은 대부분 그렇겠지."
"그런가."
"그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으니까 다른 생각을 품게 되는 거야. 어쩌면 모든 것은 기만이고 그냥 순수하게 즐기면 그만인 게임이 아닐까,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구체적인 예시들은 본인 머릿속에서 나온 망설임일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들어온 것일지. 그 답은 바로 다음 말에서 뒤따라나왔다.
"그 동안 대면해온 상대들하고 나눠 온 얘기가 있거든. 대체로 어디 정신적으로 몰려 있을만한 계기가 있더라고. 재버워키는 그런 사람들을 골라서 이 판에 끌고 오는 거겠지."
"나도 그렇다는 거야?"
"듀얼 대회 전후로 성적이 썩 좋지 못했었다며."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에 유진은 더욱 눈을 찡그린다.
"…그랬었지."
"아린이한테도 졌다고 들었어. 많이 속상했겠지."
"그걸 또 얘기했어?"
"응. 신나게 얘기하더라."
그 새 또 메신저 주고 받았었냐, 하며 유진이 태클을 건다.
"그런 너였으니까 '이기고 지는 의미를 알려주겠다' 하면서 얘기를 걸어온 거 아닐까? 그래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판으로 던져넣고, 다른 녀석들처럼 변해가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웬 이상한 카드가 있으니까 일이 생각처럼 잘 안 풀리는 거고?"
"글쎄."
과연 재버워키가 리퍼, 그리고 'ET레인저' 등 변수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못했을까.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며 유노는 의심해본다. 설령 정말 생각도 못한 경우였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든 공략해버릴 계획을 꾸미고 있을 터.
그것에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노는 유진을 데리고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렇게 이상한 생각을 못 하도록 멘탈 케어를 해주는 일이었다.
"더 중요한 건, 네가 아직 그 놈 생각대로 타락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우린 그런 너를 지켜보고 있는 거고."
"내가, 아직 제정신이란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적어도 너한테는 아직 버틸 힘이 남아있어."
"그럼 앞으로도 더 집요하게 괴롭히는 거 아냐?"
"각오하겠다고, 전에 얘기했었지?"
"그랬던가?"
"안하고 있어?"
"아니, 뭐."
무슨 따가운 반응이 돌아올까봐 무른 대답을 꺼내기가 두려워진다.
"그래. 듀얼 뿐만이 아냐. 넌 지금 이 순간에도 충분히 싸우는 중이야. 그 싸움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제대로 싸움이라고만 생각해준다면 우린 네 편으로 있어줄 수 있어."
"그러면 선을 안 넘는다는 거야?"
"그렇겠지. 도망치지 말라는 게 아냐. 너 자신을 망치는 선택만 하지 마."
"알았어. 계속 싸워 볼게."
"아니, 안 싸우는 선택을 해야지."
"그렇지, 참."
유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적으로 삼은 상대에게는 가차없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한 편 아직 적이라고 판단되지 않는 상대라면 다소 물러진다.
계속해서 상태를 살펴보며 경계하는 것이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리라. 그렇기에 불발탄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불안한 시선으로 주시하는 것이겠지.
완전한 신뢰 따위 기대할 처지가 아니겠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경고'를 던지고 있는 시점에서, 또한 그 전까지 해준 말과 태도를 통해서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어느 정도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짜 적으로 돌아서서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이런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미안해. 이런 소리밖에 못해줘서."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민폐로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 고맙지 않을리는 없다. 그러니 이 대답은 빈말로 들릴지라도 엄연한 진심이었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뱉어놓고도 조금은 쑥쓰러운 대답이라는 감상을 가져 보았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으니 유노 쪽이 어떤 반응일지는 알 수 없다. 이 참에 더 쑥쓰러운 발언을 꺼내보기로 하자.
"네가 이렇게 한 두 마디라도 안 건네줬으면, 내가 언제 어떻게 비뚤어졌을지 모르니까."
표정 변화 없음. 아마도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못 떠올린 것이 아닐까.
유진이 그렇게 생각해보려는 찰나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아닌 거겠지."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더라도 맞는 소리다. 이대로 버텨낼 만한 자신은 아직 스스로에게도 없었다.
단지 버텨내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외면한다는 미봉책만이 있었을 뿐.
유노는 깍지를 낀 상태로 누운 자세를 바로잡는다. 바로 잠이 들 생각은 없는 듯한 모양새였다.
"잠깐이나마 눈 좀 붙여. 선생님 오시면 내가 얘기해 놓을게."
"그럴까."
비로소 유진은 침대에 눕는다.
눈을 감고서 몇 초가 흐르자 마자 잠은 곧바로 유진의 정신을 지배했다.
얼마나 자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호해지는 순간 속에서 꿈이라는 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유진의 머릿속에 남을 만한 꿈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완전한 평온이 아니더라도, 강렬한 자극 따위가 없는 순간이야말로 휴식을 취하기에는 최적의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 불안하기만 했던 그 행위를 옆의 여자애와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미 잠들어버린 유진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양호 선생이 오는 대로 깨어나고 보니, 유노는 이미 양호실을 나간 뒤였다.
"지금 학교 나왔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D-패드 스피커 너머에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반겨준다.
"오늘도 하던 대로 가요?"
"당번 인력은 충분하니까. 적어도 리퍼 씨께 이쪽 일로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네요."
'이쪽 일'. 조브 하스웰을 비롯한 태스크 포스 멤버들이 한 달 가량 주기적으로 돌아가면서 하고 있는 업무였다.
입이 쓸데 없이 무거운 사람을 생명의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취조하는 것이란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
"그 사람, 오늘도 아무 얘기 없었죠?"
"네. 식음전폐까지 하고 있어요. 진짜로 죽을 작정인 것처럼."
"진짜 죽으면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에요? 조브 씨가 그랬잖아요."
"상태를 봐서 링거 조치라도 취해야겠죠."
만에 하나 링거 바늘갖고 자해라도 시도했다간 어찌될 것인가. 죽으려고 작정한 인물을 얕봐서는 곤란한 법이다.
덕분에 사태는 생각보다도 불안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 뇌내 기억 정보를 뒤지는 기술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걸 안 쓰는 이유라도 있어요?"
"아, 전달이 안 됐었네요. 그건 조기에 시도했거든요."
"소용없었다고요?"
"네, 뇌파에서 정보를 뽑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죠. 아니, 정보가 없는 건 아닌데 우리가 찾는 내용은 없었어요. 하루 종일 불바다만 보였으니까."
"불바다…?"
"말그대로 화산처럼 사방에 불이 터졌죠. 다큐멘터리 영상 같지 않나요?"
"그게 다에요?"
"네. 그 정도로 주변에 대한 파괴 충동이 강렬하다는 뜻일지."
정말로 그 뇌내 정보를 심상 풍경 따위로만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머릿속에 다른 잡념도 없이 불바다만 널려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군가의 재밍으로 다른 정보가 출력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다른 세계의 무언가를 관측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추론을 유노 혼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고 보았다.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직접 그 업무에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장의 불안을 공유하는 처지인 만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저도 조브 씨의 추론대로라고 봐요. 섣부른 행동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겠죠. 만에 하나 잘못되서 일이 생기거든, 그 때는 정말 실례드려야겠어요."
"알아둘게요."
"그러고 보니 그 학생은 어떻죠? 정말로 아무 일 없나요?"
"일단은요."
"그럴리 없을 텐데. 꿈에서까지 어둠의 듀얼을 겪었다면서요. 불안해서 잠까지 거르는 지경이면 후유증이 남았다는 것 아닐까요?"
"제 생각도 그래요. 그래서 더 살펴야겠죠."
"네. 저로서도 잘 부탁드릴게요."
서로가 큰 성과는 없다는 보고만이 돌아온다. 듣기에 따라서는 아직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길조이기도 했다.
태스크 포스 내에서 서문유진을 걱정해주는 인물은 유노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 관찰 임무를 맡도록 추진한 조브 하스웰이라는 남성만 해도 그녀보다 먼저 유진을 눈여겼을 것이다. 지금은 다른 관찰 대상까지 생겨버리느라 더 바빠진 참이겠지만.
지금 통화를 주고받는 인물 또한 그렇다. 'ABC(어드밴스드 배틀 시티)'를 마치고 귀환한 이후, 그녀 또래의 학생인 서문유진의 신상을 파악하고 나서부터 확연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몇 명 더 있을 터.
어떤 관심과 걱정인지 저마다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노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보았다. 이런 사건에 휘말린 이상 더 해를 입지 않고 조금이라도 무사히 지내주기를 바라주는 마음 반,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에 대처해야 한다는 마음 반.
그 '불발탄'이 또다시 어둠의 듀얼을 치렀다는 보고를 본인에게서 들었다. 그런 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더라도 최소화시켜보고자 그가 거동하는 곳의 주변을 특히 경계하고 있었거늘, 집 안에서 어둠의 듀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여차하면 동거까지 불사할 생각이었거늘, 자는 동안 꿈 속에서 이뤄져버린 듀얼은 리퍼의 힘을 빌려도 현 시점에서 대처할 방법 따윈 없었던 것이다.
"유노 씨는 지금 어때요? 안 피곤하세요?"
"걱정 마세요. 휴식은 틈틈이 취하고 있으니까."
"그럼 다행이지만, 학교 수업은 제대로 들으시는 거죠?"
"수능에 지장이 없으면 되겠죠."
"아하하…, 학교는 공부만 배우는 데가 아닐 텐데."
부모님인가, 하고 유노는 속으로 살짝 딴지를 걸었다.
"마리아슈 씨야말로 잠은 제대로 주무세요?"
"이래 보여도 실컷 자고 있답니다. 인체나 기계나 적당한 휴식이 없으면 안 돌아가는 법이니까. 너무 자서 주변에 눈치보이는 감은 있지만요."
멋쩍은 웃음과 함께 '괜찮다'는 요지의 대답이 돌아왔다.
'ABC'에서 귀환한 뒤로 목소리 컨디션이 좀 더 좋아진 것을 보면 수면을 웬만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유진도 그런 대답은 줄곧 해오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반대로 날이 갈수록 피로해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조심하라'는 말 빼고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적지않게 착잡한 일이었다. 그리고는 주변에서 그의 모습을 살피다가 뒤늦게 연락을 받을 뿐. 결국 그녀는 그녀의 일을, 그는 그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걸 돕는다고 할 수나 있을까.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자기를 챙길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 이런 때라도 몸은 알아서 잘 챙겨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 웬만한 학생이 감당할 수준이 되나 싶은 스케줄 속에서도 휴식 시간은 재량껏 확보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의 그녀에겐 학교에 있는 순간이 차라리 쉬는 시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수업시간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심신의 안정은 유지해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이 망가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니까.
심신의 위협을 받는 것은 유노나 유진이나 마찬가지. 그렇기에 서로 힘을 합치기로 했지만, 적에게 마음을 뺏긴 순간 예외없는 적이 될 뿐이다.
약해진 마음은 어둠에게 딱 좋은 양식이니까. 그대로 적의 영양분이 될 바에는 빠르게 없애버리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유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착잡한 기분에 괜한 한숨이 입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망설이지 마라. 우리는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알아.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지.'
그렇게 무언가를 없애야만 한다. 도저히 못하겠다고 물러서기에는 너무나 멀리까지 와버렸다.
지금 이 상황까지 이르게 된 선택을 그녀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최악의 사태라는 것이 오지는 않았으니 후회하기는 이른 것이라 해도 좋다. 당장 닥쳐올 선택을 실수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럴 필요조차 없겠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생각해 둬야만 하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돕는다는 것을 시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자신은 그와 떨어질 수 없다.
생각난 김에 메시지를 띄웠더니 이상 없다는 유진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봤자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안심하기는 이르다. 다음에 연락에도 같은 답변이 오기를.
그렇게 교문 밖에서 연락을 마친 유노는 바로 헬멧을 쓰고는, 앉아있던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도착한 곳은 역 주변에 위치한 호텔. 몇 십년 째 인테리어가 그대로라 주변 맨션보다도 투박해보이는 그 건물은 얼마 전부터 유노가 체류 중이던 곳이었다. 객실에 들어간 그녀는 잠시 후 다른 가방을 챙긴 채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양호실에서 피로를 해소해두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직 침대에 누우려면 멀었으니까.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해골 가면과 검은 로브를 대신하는 코트. 그리고 리퍼가 사용할 수 있도록 팔에 세팅된 전용 듀얼 디스크.
이제 태스크 포스로서의 일과에 들어갈 차례인 것이다.
그녀는 늘 하던대로 인적이 드문 골목에 들어선다. 그리고는 사람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가방 안에 든 옷을 걸쳤다.
'그림 리퍼'를 구현한 그 모습은 적에게 보여주기 위한 분장이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적이 아닌 인물에게는 되도록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차림으로 있으면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어둠의 듀얼로 인생이 어지럽혀지는 현장이 있을 것이고, 그런 인생을 강요당하는 희생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 그것을 제지하다가 외부의 시선에 들킬 가능성까지 신경써야 하니 피로가 이만저만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근방에 어둠의 듀얼리스트가 있다는 정보가 확실하다면 임무는 속행. 없다면 다시 갈아입고 호텔로 귀환하면 된다.
그러나 오늘도 일이 수월하게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좀처럼 하기 어려웠다.
'ABC'로 인해 이 동네의 어둠의 듀얼리스트가 어느 정도 줄었으리라는 낙관론은 이미 깨져가고 있었으니까. 재버워키가 열심히 영업이라도 하고 있는 중인지 도전자는 그 뒤로도 이따금씩 튀어나왔고, 개중에는 먼 곳까지 찾아온 인물까지 있었다.
대체 그런 것에 어떻게 홀릴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 왜 하필 이곳일까. 물론 도미노 시티에 한 층 더 삼엄한 보안이 내려졌으니 가까운 이곳으로 기웃거리고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어둠의 듀얼리스트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무법지대가 되는 셈이다. 이미 조사 인력을 더 투입할 방침이라는 것 같지만 더 있어도 부족하지 않을까.
고요한 골목 가운데에서 잠시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최근에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추격전이 있었다나.
타이즈 따위로 온몸을 가린 정체불명의 인간이 맨발로 몇 km를 뛰어다녀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하던 소매치기를 붙잡았다는 것이다. 소매치기였던 인간은 중상을 입은지라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인간은 아직도 행방불명. 사라질 때도 건물을 맨발로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단순히 히어로 놀이 중인 인간이라 단정하기엔 신체 능력이 비범하다는 것도 사실. 그저 넘쳐나는 힘으로 선행을 베푸는 기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왜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이 근처에서 나타났을까.
자신 같은 자경단이라면 그나마 고마운 일이겠지만 만약에 진짜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더구나 그 힘의 출처가 수상한 데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유노는 의심한다. 평범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평범해 보이는 것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했다.
그 시선으로 둘러보는 평범한 거리는, 언제 평범하지 않은 것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위험지대로만 보였다.
수상한 사람이 이 동네에 점점 더 기어들어오는 이유를 유노는 더 추론해본다. 그러고 보니 서문유진은 이 동네 토박이였고, 재버워키는 그런 유진을 예의주시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던가.
'어쩌면, 재버워키의 본체는 멀지 않은 데에 있는 게 아닐까?'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마냥 희망으로 여기기에도 한참 멀었다. 사실이라고 해도 본체까지 접근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농락이 따를지 예상이 힘드니까.
그 동안 유진이 과연 선을 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벌써부터 상태가 악화되어가는 것이 보이기에, 만약 수색이 끝나거든 곧장 집에 방문해보기로 했다.
그 전에 또다시 메신저를 켜본다. 귀찮아 하는 반응이 돌아와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유진의 안부를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까악."
까마귀떼다.
들려온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그들이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빈 집 주위로 이곳저곳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아직 날아갈 기미가 없는 것을 보면 그곳이 쉴 자리라도 되는 모양이다.
지붕 위에 가만히 앉은 모습은 언뜻 풍향계로 착각할 지경이었지만, 이따금 뭐 먹을 것 없는지 기웃거리는 것이 보인다. 무언가를 감시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다 몇 마리와는 눈이 마주친 것도 같다.
불길한 예감을 접어두고 유노가 다시 D-패드로 시선을 돌리려 하자,
'있다.'
리퍼의 말(생각)이 신호라도 된 것인지 강렬한 기운이 피부를 뒤덮는다.
어디선가 짙은 농도의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는 듯 했다. 감출 생각이 있기는 하냐는 듯이 발산되는 꼴은 의도적인 것으로마저 여겨졌다. 마치 자신을 도발하려는 듯이.
분명 이 근처에 있다. 그렇게 판단하며 리퍼가 몇 발짝을 옮긴 순간, 갑자기 달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리퍼는 그 발소리의 주인이 에너지를 가진 녀석이라 확신하며 뒤쫓았다.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왔으니 마찬가지로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지만, 몸을 완전히 뒤덮은 채 뛰어다니는 일은 익숙했기에 리퍼는 숨이 찬 기색도 없이 그저 달렸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오르니 답답한 건물과 벽 사이를 비집던 길이 조금은 넓어져간다.
그 결과 서서히 익숙한 골목이 보이고 있었다. 저번에 이데누마와 리벤지 매치를 치른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음습한 곳이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다 보니 곧 앞으로 달아나는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창백한 맨살 부분을 빼면 시커멓다. 역시나 검고 긴 머리를 휘날린 채 달리는 몸뚱아리는 건장하다기엔 다소 여려보였다.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런 의문 속의 추격전은 쫓기던 인물이 갑자기 멈춰서면서 끝나버렸다.
"스톱! 다 왔어."
그 자가 돌아서는 대로 자세한 인상착의를 확인한다. 키는 유노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쓰고 있는 마스크 너머로도 내다보일 정도로 선이 가는 중성적인 용모 때문에 여전히 선뜻 판단하기가 힘들다. 다만 방금 소리친 목소리를 들어보면 아마도 남자겠지.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에 검은 마스크, 검은 셔츠. 그리고 퀭한 눈매 사이에 자리잡은 빛이 통과하지 않는 듯한 흑요석같은 눈동자. 그런 칠흑을 수놓듯 귀에 해놓은 피어싱까지. 마치 퇴폐적인 스타일의 락커를 연상시키는 생김새다.
한 편으로는 마치 까마귀 한 마리가 그대로 인간으로 변모한 듯한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적어도 저번에 환각을 통해 어렴풋이 비춘 여성의 실루엣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이었다.
"이야, 끈질기다. 내가 누구인줄 알고 따라오셨어?"
"넌 내가 누구인줄 알고 뛰었지?"
뛰어다닌 동안 차오른 숨을 고르면서도 마스크에 숨은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기가 막힌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니, 차림새가 그 따구인데 어떻게 안 뛸 수가 있어? 코스프레야? 나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고 광고라도 하는겨?"
"누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든 알 바는 아니거든."
"그렇겠지. 근데 그렇게 뛰면 힘들지도 않냐? 답답한데 그 가면이라도 벗을 수 없어?"
"네놈한테 얼굴을 알릴 이유는 없다."
"그러셔."
이 문답으로 어떤 인물인지 파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잠시 미소를 거두고 그 자는 리퍼의 모습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해골바가지에 검은 옷이라. 네가 리퍼 맞지?"
"그렇다면?"
"진짜였냐. 패션부터 딱 컨셉대로네. 그 애 마음에 들었을만 하겠다."
"넌 뭐냐?"
"들으면 기억해 주게?"
초장부터 빈정대는 대답이다.
애초부터 예의를 바란 적은 없었기에 리퍼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대답할 생각이 있다면 하시지."
"'카라스마 하루카(烏丸 遥)'. 어때, 누군지 알겠어?"
과연. 이름에서부터 '까마귀(烏)'가 들어간다. 그것 외에 별다른 감상은 없다.
그 태도에서부터 반쯤 뻔한 일이었지만, 만약을 위해 리퍼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냐?"
"어떤 애한테서 들었거든. 어둠에 떨어진 자를 심판하는 분이 계신다고. 그 때부터 기대했어."
'어떤 애'.
리퍼를 마음에 들어한 인물 중에 자신이 상대했을 자를 가려낸다 친다면.
리퍼가 주도한 육체의 내면 속에서 지켜보는 유노는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얼핏 짐작이 갔다.
"이데누마라는 자를 알고 있나?"
"기억하는구나, 데누망. 난 또, 어둠에 묻어버린 사람 같은 건 기억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줄 알았지."
"만난지 며칠밖에 안 됐으니까."
"걔가 또 찾아갔어? 난 이번이 처음인데. 그렇게 행동력이 좋은 애였다니."
"그럭저럭 가까운 사이였나 본데. 목적은 복수냐?"
"딱히?"
어리둥절한 반응을 표현하려는 듯 마스크 위의 퀭하던 눈이 순간 동그레진다.
"오히려 부러워. ABC에서 먼저 너를 만나는데 성공했다니. 솔직히 살아 돌아온 걸 확인했을 때는 믿어도 될지 싶었다니까."
도로 눈매를 가라앉힌 카라스마는 리퍼의 인상착의를 다시금 찬찬히 살핀다.
"혹시 걔가 또 찾아갔을 때도 그 차림이었어?"
"그런 건 사정에 따라 다르다."
"아니라는 거구만. 그럼 걔는 본 모습을 봤을 수도 있겠네. 갈아입을 정신머리도 없었다니, 걔가 좀 귀찮은 애긴 해."
흑요석 같은 검은자위를 둘러싼 그 퀭한 눈매에는 흥미와 조롱의 시선이 공존하고 있었다.
"귀찮은 애는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런가? 그래서 이번엔 나를 보내버리러 와주셨다? 고맙기도 해라."
"그것도 네놈의 대답에 따라 다를 거다."
"무슨 뜻이야? 대답에 따라서라니?"
어리둥절한 나머지 뭔가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었다는 듯 눈을 부라린다.
"설마, 이제 와서, 귀찮은 나한테 용서의 여지를 주겠다고?"
그리고는 풋, 하는 소리가 마스크 너머로 들려왔다.
"느껴지잖아. 이 에너지. 이 소울. 애초에 그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온 것 아냐. 너라면 어떻게 모았는지 모를리가 없을 텐데?"
"……."
"아 맞다. 본명이 생소하면, '라스칼(Raskal)'이라고 아시려나 모르겠네?"
가면 너머의 붉은 안광은 그의 모습을 더욱 집중한다.
"…네 녀석이었나."
카라스마가 눈꼬리를 올린다. 주름진 눈가에 다크 서클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그제서야 리퍼는 이 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라스칼. 분명 '어드밴스드 배틀 시티'에도 참가했다는 정보를 들은 어둠의 듀얼리스트였을 것이다. 직접 만나지 못했기에 승부를 펼친 일도 없었다.
재버워키가 초청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이름을 알렸다면, 그가 얼마나 활개를 쳤을지 더는 파고들 이유가 없으리라.
그것이 이데누마와 아는 사이였다고 주장하는 저 남자라면, 이데누마는 이미 어엿한 어둠의 듀얼리스트와 알고 지내는 인물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 쾌락이 인생의 전부다, 이런 마인드로 살아왔거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별에별 쓰레기들 중에 하나,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겠네. 싸울 생각 없는 무고한 사람까지 끌어들인 몸이니까. 그런 작자를 히어로 지망생님께서 두고 볼리가 없겠지?"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이번에도 대화의 여지는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늘 하던 일을 할 뿐.
"나(우리)까지 그 쾌락의 제물로 삼을 작정이라면, 어디 시도해 봐라."
"제물이라. 어쨌든 고마워."
흔쾌히 승낙의 표시에 따르듯 카라스마는 검은 덱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덮개의 한가운데에는 활짝 펼친 날개 문양이 은빛 엠블럼으로 박혀 있었다.
"이건 이번 승부만을 위해 특별히 완성한 작품이거든. 시험해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마음대로 해라."
"좋아, 좋아."
저렇게 자기 덱에 자신만만해 보이는 태도를 처음 접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벌어진 온갖 결투에서 상대방의 몸뚱아리를 찌르고 도려내기 위해 무기가 마련되었듯이, 이 어둠의 결투(듀얼)에서 쓰이는 덱 역시 상대가 가진 것을 빼앗기로 작정하고서 있는 것을 털어내 제련한 듀얼리스트의 무기나 다름없다. 그것이 어둠의 듀얼리스트들 생애의 걸작이라면 걸작이겠지.
그 도취감도 어둠의 듀얼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 중 하나일 터.
리퍼는 어김없이 현현과 동시에 세팅된 덱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적을 단죄하는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 마련된 무기. 그것에 별다른 긍지를 갖지 않은 채, 그저 다음 듀얼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조금씩 고치고 고쳐왔다. 아마도 이 무기가 작품으로서 완성되었다고 자부할 날은 찾아오지 않으리라.
이번 승부도 이길 수만 있으면 그만이니까.
영역은 금세 두 사람의 차림새같은 시커먼 어둠으로 뒤덮이고, 오늘도 이를 무대삼아 단판의 결투가 치뤄진다.
[라스칼: LP 8000, 패 5장]
[리퍼: LP 8000, 패 5장]
"아주 좋아. 나부터네."
선공을 차지한 라스칼은 패를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필드로 꺼내든다.
"카드 5장을 세트. 턴 엔드야."
"내 턴."
[리퍼: 패 6장]
[라스칼: 패 0장]
패를 전부 세트. 함정 지옥 덱이거나, 몬스터를 뽑지 못해 불리한 상황을 넘기기 위한 블러핑이거나 둘 둥 하나이리라.
턴을 받은 리퍼가 그렇게 판단하려 들자마자 카라스마는 세트 카드 하나를 드러낸다.
"그럼 지속 함정 '빛의 봉인벽'. 발동시 LP를 5000 지불한다."
[라스칼: LP 8000 → 3000]
필드 사이에 눈부신 빛의 장막이 둘러진다.
그가 먼저 선보인 것은 지불한 LP 코스트 수치 이하의 공격력을 가진 상대 몬스터의 공격을 막는 지속 함정.
물론 리퍼와 유노가 숙지하고 있는 카드다.
발동 시점에서 '코즈믹 싸이크론'이나 '레드 리부트'는 패에 잡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막아내지 못했다. 이 장막을 통과할 수 있는 몬스터는 현 시점에서 리퍼가 마련할 방법이 없다.
대신 패에 들어온 다른 함정 카드인 '엔보이드 버스트'를 확인한다. 이거라면 다음 턴에 저 '빛의 봉인벽' 만큼은 파괴할 수 있을 터.
"어, 그 뭐냐."
그런 계산에 들어가던 리퍼에게 카라스마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꺼낸다.
"맞다, 그거.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뜬금없는 라틴어 문장. 그 동안 축적해 온 지식 가운데에 어렴풋이 있는 문구였다. 어느 성서의 맨 첫줄부터 나오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바니타스'. 그것은 이전 상대였던 노인이 꺼낸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표현이기도 했다.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 만사 헛되다."
"정답!"
카라스마가 삿대질까지 해가면서 익살스러운 축하를 보낸다.
"그 말대로야. 모든 게 헛수고. 더이상 만족시킬 만한 것도, 새로운 것 따위도 없어. 웃음도, 즐거움도, 지혜도, 뭔가 그럴싸한 걸 이루기 위한 노력은 헛될 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네가 뭘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이미 이 시점에서 운명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거든."
남은 세트 카드는 4장. 설마 저걸로 필승 콤보가 완성되어 있다는 소리일까.
그에 답하듯 라스칼은 다음 카드를 공개한다.
"이게 화룡점정이 될 마지막 열쇠. 함정 카드 '운명의 파괴(데스티니 디스트로이)'!"
드러나는 그 정체에 리퍼는 한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효과로 덱에서 카드 3장을 묘지로 보낸다. 그리고 묘지로 간 마법이나 함정 하나 당 1000 데미지를 받는 거야. 내가 말이지."
"………."
덱에서 빠져나가는 3장의 카드를 바라보는 라스칼은, 이번에도 코웃음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이런. 3장 전부 다잖아."
그 확인 결과가 사실이었는지, 총알에 맞는 듯한 충격이 세 번 그의 몸을 강타해 온다. 폭죽이 몸 안에서 터지는 느낌이라 비유해도 좋을 듯한 느낌이었다.
[라스칼: LP 3000 → 0]
단번에 치고 올라오는 충격에 라스칼, 카라스마의 몸뚱아리는 그대로 시커먼 어둠으로 된 바닥에 자빠졌다.
그럼에도 그저 또다시 눈꼬리를 올리며 큭큭대고 있을 뿐이다. 고통에 신음할 뿐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몬스터는 하나도 없으니까."
"뭐하는 짓이지?"
"작품의 테마는 인생(라이프). 무엇하나 이룬 것도, 가치있는 것도 없는 덧없기만 한 시간. 앞으로 남은 시간도 쓰레기같이 버려지는 거지."
"나하고의 승부를 기대한 것 아니었나?"
"글쎄. 그 배틀 시티 짝퉁에서 만났으면 확실히 그랬을 거야."
"지금은 아니라고?"
필드에 잠깐 나타난 '빛의 봉인벽'이 사라지면서 사방은 다시금 캄캄한 어둠으로 돌아간다.
그걸 바라보던 카라스마는 갑갑해졌는지 누운 채 마스크를 벗는다. 썩은 눈매와 같이 붙어 있다고는 여기기 힘든 창백하고 깔끔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그 입으로 카라스마는 한숨을 팍 내쉬었다.
그리고는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는 듯, 잠시 뜸을 들이고서야 대답한다.
"그거, 다시 생각해도 기대 이하였지. 한 번 이기면 디젠하고 카드를 보상으로 준다고? 그럼 뭐해? 사람 하나 만나기도 힘든데. 그 쓸데없이 넓은 데에 50명따리만 던져놨으니까 당연하겠지. 그마저도 줄고 줄으니까, 멀리서는 시끄러운데 나 있는데는 한없이 조용하지 뭐야."
리퍼도 그 느낌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도펠코프를 직면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마주치는 순간이 손에 꼽았으니까.
그 뒤에 재버워키 본인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이루어진 적들의 등장은, 오히려 어떤 운이 따라주지 않았나 하고 여겨질 정도다.
"그런 데서 내가 진정 원하는 상대는 언제 찾아올지 더욱 알 수가 없어. 그러다 다 때려치고 그냥 죽치고 있기로 했지. 그렇게 시간만 보내다 보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그 순간이 좋게 느껴지더라. 하늘도 안 바뀌고, 새나 벌레 한 마리 날아다니는 일도 없어. 그 죽어있는 공간이야말로 내가 찾는 어둠이었던 거야."
지금처럼 길 한가운데에 맨 바닥을 드러누우며 하늘을 감상한 것을 떠올린다. 그걸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보인 사람들이라고는, 이미 게임에서 패배하여 더이상 움직일 일 따위 없게 된 몸뚱아리가 고작이었으니까.
그 거리처럼 죽어있는 것들 뿐이었다.
"그 때 깨달았어. 만족할 수만 있다면 뭐가 됐든 좋았던 거구나 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만 해도 간단히 이뤄지는 거였는데, 열나게 다음 상대를 찾아다니던 순간이 바보같을 정도야. 근데 다른 놈들은 그렇게 생각 안했겠지. 결국 게임은 끝났고 도시도 무너졌으니까. 혹시 너였냐?"
"아니."
"별 일이네."
리퍼는 누가 재버워키를 쓰러뜨렸는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한창 무너질 때 내가 뭘 했는지 알아? 정신없이 뛰었다니까? 건물하고 같이 쓸려나가는 몸뚱아리들을 보고 있자니까 아, 저 꼴이 되지는 말자 하고 살고 싶어서 속도를 높였지. 내가 진정한 어둠이라고 여겼던 그 자리를 살고 싶어서 도망친 거라고."
그 때 이후로 카라스마는 계속 생각해보고는 했다.
무너지는 도시에서 계속 누워 있다 보면 이 풍경이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어쩌면, 그 전에 떨어지는 건물 파편이든 입간판이든 부딪혀서 곤죽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후자를 경계했기에, 그 잠깐의 고통의 두려운 그는 도망친 것이다.
"그렇게 돌아오고나서는 뭐, 별 것 없었어. 삶에 대한 집착이 있으니까 진짜 원하는 걸 이룰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 나 정도면 어둠에 심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둠을 피해서 도망치기나 할 운명이라니. 어차피 계속 살아봤자 다음 상대 찾느라고 의미없는 시간만 버리고 있겠지."
결론은 즐겁지 않다. 그 문맥만 받아들인 채 리퍼는 또다시 질문한다.
"…더이상 어둠의 게임을 즐길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왜 그 얘기를 진작 꺼내지 않았지?"
"왜? 들으면 용서해 주게?"
숨이 새어나가는 듯한 웃음 소리는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런 단편적인 판단으로 사람 목숨이 갈린단 말이지. 그래, 나쁜 놈들 묻어버리는 데 복잡한 생각이 뭐가 필요하겠어."
잠시 후 웃음기를 뺀 채 그는 리퍼를 향해 노려보며 말을 더한다.
"그딴 식으로 구제받는 건 내 쪽에서 사양이야. 난 말이지, 딱히 재버워키가 얘기한 대로 즐겨온 걸 후회한 게 아니야."
"그럼 뭐냐?"
"남들보다 아주 조금, 한 발짝 더 먼저 깨달았을 뿐이야. 만족이란 건 오래 가지도 않고, 원하는 때에 제대로 채워지지도 않는다고. 그게 재버워키 녀석이 의도한 교훈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뭔가에 미치도록 심취해 있지 않으면 깨닫지도 못했을걸."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없다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거냐?"
"그럼. 이런 같잖은 쾌락으로 버티는 인간이나, 즐거움도 뭣도 없이 움직이는 댁 같은 양반이나, 이런 어둠에 뒤덮이고도 무지한 세상이나. 시시하기 짝이 없는 쓰레기 천지거든. 더 추하게 썩어문드러지기 전에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닐까."
"그렇게까지 자기 파멸에 도취되어 있고 싶나?"
"그렇다면 어쩔래?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재버워키 양반도 말리지 않으니까 아무 문제없는 거잖아?"
따지고 있는 자신이 바보같다는 듯 카라스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 때 당신을 진작 만났어야 됐는데. 하다못해 그 자리를 빠져나오지 말걸 그랬어. 정말이지, 이게 무슨 수고냐고."
"……."
"뭐 해? 준비는 끝났어. 하던 대로 해봐."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군. 너 자신을 없애버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이러자고 나(우리)를 끌어들일 이유가 어디 있다는 거지?"
"그야, 네가 이 꼴을 봤으면 좋겠으니까. 무슨 목표를 가지던, 어떤 변명을 하든, 모든 귀결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다시 조롱할 마음이 생긴 듯 카라스마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린다.
의외로 웃음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바뀔 정도로.
"아니면 뭐야? 너무 많이 봐서 지긋지긋한가?"
그 말대로 리퍼에겐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바니타스' 어쩌구 하는 소리도 전에 상대했던 인물이 꺼낸 말이니까.
"이미 알고 있다면 어쩔 거냐?"
"아, 그래. 역시 이것도 덧없는 짓이었구나. 바쁘신 몸 불러들여서 미안하게 됐어. 마지막 순간까지 쓰레기 같았네."
하지만 켕기는 것은 있었기에, 처벌에 앞서 내면의 목소리에 또 귀를 기울인 리퍼는 질문을 더 청하기로 한다.
"내(우리) 쪽에서 하나 더 묻지."
"뭐?"
"내가 여기 지나갈 것을 알고 있었나?"
"글쎄. 여기가 조용하다고 귀띔해준 녀석은 있었어."
"그게 누구냐?"
"우리 모두의 친절한 친구 있잖아."
이걸로 리퍼는 감을 잡는다. 재버워키는 이 타이밍에 자신을 붙잡아둘 거리가 필요했던 것으로.
"단단히 홀렸군. 그렇게까지 목숨을 버리는 게 목적이라면 들어주마."
"하핫, 고마우셔라."
"고마워할 것 없어. 네놈이 쓰레기같다고 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라."
그렇다. 더 볼 것은 없다.
한낯 짐승이 되기를 택하든, 꼭두각시가 되기를 택하든, 인간으로서 선을 넘어버렸다면 인간다운 대처를 고려해줄 필요 따위는 없다.
하물며 어둠에 심취한 자가 어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하니,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될 뿐인 것이다. 승부라고 할 수나 있을지 의문인 듀얼 만큼이나 간단한 결론이었다.
"'벌칙'."
리퍼가 불러들인 어둠에 검은 실루엣이 동화되어간다.
그나마 형태를 구분시키던 음영마저, 늪처럼 서서히 가라앉아 완전한 어둠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기억해 둬. 뭘 하든 헛수고야."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진심인지, 그는 여전히 한 결 개운한 표정으로 어둠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 된 자리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은빛 날개가 펼쳐진 피어스.
남자의 몸을 파고들었던 쇠붙이야말로 디젠인 모양이었다.
'뭐야…, 뭔 말이 하고 싶었던 건데.'
마지막까지 황당한 인간. 그것이 리퍼와 유노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을 되짚어보면서 이해하지 못할 소리는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뭘 하든 무의미…, 헛수고…."
유노도 이미 알고 있다. 모든 것의 끝은 무의미라는 걸.
그저 임무에 방해만 될 테니 머릿속 저편에 숨겨두기만 했을 뿐.
'아이바 유노.'
내면에서 이름을 불린 유노가 흠칫한다.
'저번과 별 다를 것 없는 발언일 텐데. 적이 어떤 궤변을 내뱉든 들은 체 만 체 해왔지 않았나?'
그렇다. 알고 있는 사실을 앞두고도 자신이 없다는 대답이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붕괴의 시작이니까.
'맞아. 그런 헛소리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이건 각오를 시험받는 순간일 뿐이다. 적이 언제든 이런 수법을 취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한 두번도 아니고, 특히 이번 경우에는 조잡하다고까지 평할 수 있는 수준이다.
과연, 인생을 축적해온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카라스마라는 남자는 간단히 증명해냈다. 남은 목숨(라이프)을 쓰레기같이 낭비해가면서.
유노에게도 그 남자의 의의는 그 정도밖에 받아들일 것이 없었다.
'앞으로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나?'
그렇게 넘어가려는 유노에게 리퍼는 우려와 의문을 보내온다.
어느 샌가 어둠이 걷히고 돌아온 풍경 가운데, 까마귀떼는 여전히 지붕 위를 수놓은 채 멀뚱히 앉아있을 뿐이다. 그들과 마주하다 보면 머릿속 파트너의 목소리를 저쪽에서 내는 것은 아닌가 착란해버릴 지경이었다.
의지 없는 고깃덩어리라 판단해버리는 순간 날아와서 쪼아버리려 들지 않을까.
'저렇게 간단히 퇴장해준다면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대답해야 한다. 소용없는 짓이라 적에게 증명해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 사이클을 택한 자신이 그걸 포기하는 순간, 그저 뜯어먹히기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니까.
그러니 망설임은 처음부터 용납되지 않았다.
'글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이상 기대하기 어렵겠지.'
신경써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정말로 한 번 들은 메시지를 또 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찾아왔을까.
본인이야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를 여기까지 보내도록 한 작자라면 뭔가 다른 생각이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확인하려던 게 있지 않았나.'
'맞아.'
유노는 잠시 D-패드를 꺼내 만지작거린다.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는 즉시 거리를 달려나갔다.
갑작스럽게 뛰는 동작에 맞춰 까마귀들도 한 두마리씩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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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편 올리고 3개월만이네요. 그것도 모자라 듀얼로그랄 것도 없는 듀얼을 끼워넣고야 말았습니다.
이거 그냥 날로 먹는 것 아니냐고요?
아니 그게 뭔가 다음 듀얼 전개를 앞둔 빌드업이라는 걸 세워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틀은 진즉에 짜였는데 조금씩 살을 붙이고 붙이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다고나 할까 듀얼로그는 여전히 막힌 마당에 뭐라도 써야되는 거 아닐까 그 와중에 떡밥은 넣어봐야되지 않을까 이러다 보니 요 정도 분량이 나왔습니다. 이번 내용으로 뭔가 설명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후라게라도 기다리면서 다음 분량이 써지는 대로 또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팬픽] 유희왕 D-GEN TURN-35_1.png](https://i3.ruliweb.com/img/25/03/23/195c0fc0afa20b132.png)
![[팬픽] 유희왕 D-GEN TURN-35_2.jpg](https://i3.ruliweb.com/img/25/03/23/195c0fb13fb20b132.jpg)
![[팬픽] 유희왕 D-GEN TURN-35_3.jpg](https://i1.ruliweb.com/img/25/03/22/195bd0df5d220b132.jpg)
![[팬픽] 유희왕 D-GEN TURN-35_4.jpg](https://i1.ruliweb.com/img/25/03/22/195bd0edd0f20b13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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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올라올 때마다 역시 유노가 진히로인 같으요 ...저도 삽화 문제 때문에 석달 째 막혀있어서 드릴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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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스스로 사-망을 선택하다니 얼얼한 스토리군요 뭐 장르 특성상 데스게임의 비밀이 밝혀지려면 한참 남았을 텐데, 다음 데스게임이 벌어져야 윤곽이 드러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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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올라올 때마다 역시 유노가 진히로인 같으요 ...저도 삽화 문제 때문에 석달 째 막혀있어서 드릴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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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3.23 15:01 | |
(IP보기클릭)39.118.***.***
그래도 스스로 사-망을 선택하다니 얼얼한 스토리군요 뭐 장르 특성상 데스게임의 비밀이 밝혀지려면 한참 남았을 텐데, 다음 데스게임이 벌어져야 윤곽이 드러날지
(IP보기클릭)118.176.***.***
언능 밝히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하다가도 듀얼 쓰다가 막혀서 놓아버리는 현실이 그만 | 25.03.23 16:2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