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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펠코프가 내다본 전망은 유진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현 상황 자체는 명백히 리퍼 쪽이 불리하게만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턴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인 리퍼를 유진은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마법 카드 '엔보이드 레거시'. 묘지의 '엔보이드 나이트 드래곤', '엔보이드 어라이벌, '엔보이드 메너스'를 뒷면 표시로 제외하고 3장을 드로우."
[리퍼: 패 3장]
패를 짧게 들여다 본 리퍼의 발언은 다소 뜬금없는 것처럼 들렸다.
"그럼 배틀 페이즈."
"?"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로 배틀 페이즈라니. 순간 고개를 갸웃하려던 도펠코프는 바로 그 의미를 깨닫고 탄식한다.
"아아, 또야."
"배틀 페이즈 종료시, 패에서 함정 카드 '길항승부'를 발동한다. 내 필드의 카드 수와 같아지도록, 네놈 필드의 카드를 뒷면으로 제외해야 되지."
"지금 네 필드는 그거 한 장이니까 하나만 남겨야 되는 거잖아. 볼 것도 없네. '카오스 앙헬'을 남길게."
지목받은 '카오스 앙헬'을 제외한, 도펠코프의 필드를 지탱하던 카드가 허공이 되어 사라진다.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어버리는 카드가 다시 한 번 덮쳐왔음에도, 도펠코프는 역시 단발적인 짜증으로 끝날 뿐 그렇게 당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까도 그렇고, 내가 전개 위주로 나설 거라 예상해서 그런 카드를 마구 넣어두셨구만. 따라붙어다닌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번에도 그런 방식을 고집해준 덕분이겠지."
"그야, 하던 대로 나가야 전력을 다할 수가 있지 않겠냐. 새로 받은 카드도 그 전력에 맞게 써주면 되는 거겠지."
당황은 커녕 여전히 여유마저 보인다.
"근데 네 쪽은 괜찮겠어? 견제용 카드를 넣어놓은 건 좋은데, 네 잘난 전술에 공헌할 만한 카드 비중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을까?"
"그 전에 네놈 날개를 뽑아버리는 게 우선이야."
"쉽진 않을걸. 일단 내 필드의 마법이나 함정도 같이 날렸으니까, 패에서 '마옥룡 질드라스'를 특수 소환."
[마옥룡 질드라스: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6 / ATK 2200 / DEF 1200]
"'질드라스'의 또다른 효과로, 제외 상태의 마법이나 함정 하나를 내 필드로 세트할 수가 있지. '카오스 테리토리'를 세트."
필드를 날려버리는 초강수를 뒀음에도 도펠코프의 필드에 있는 최고전력은 아직 남아 있다. 더구나 리퍼의 발버둥을 매개로 삼아 새로운 전력이 튀어나와버렸다.
"또 할 게 있으면 뭐라도 해보시던가. 패도 남았잖아."
"메인 페이즈 2. 2장째 '삼전의 재'를 발동. 1번째 효과를 사용해서 2장 드로우."
[리퍼: 패 3장]
"그 다음 '라이트닝 스톰'. 이걸로 네 공격 표시 몬스터도 전부 파괴한다."
"오올."
그나마 버텨내는가 싶었던 '카오스 앙헬'마저 필드에 휘몰아치는 번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스러진다.
그러나, 이 순간마저 대비했는지 수비 표시 상태로 튀어나온 '질드라스'는 그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가 있었다.
"패에 다른 몬스터가 없으면, 패에서 '엔보이드 암피프테레'를 특수 소환."
[엔보이드 암피프테레: 환룡족 / 어둠 / 레벨 6 / ATK 1200 / DEF 2500]
"카드 1장을 세트. 턴 엔드다."
성가신 몬스터를 해치운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겠지만 거기까지. 필드나 패나 카드의 매수는 도펠코프 쪽이 더 많다. 거기다 또다른 전개의 초석이 될 카드들이 이미 도펠코프에게는 갖춰져 있었다.
"왜 그래? 날 부정하시겠다며? 벌써 그렇게 힘이 부쳐서야 되겠냐?"
"네 턴이 되보면 알겠지."
여전히 무뚝뚝한 대응을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까지 도발할 맛이 안 나는 녀석도 처음일 것이다.
도펠코프는 체념하고 턴을 받아들인다.
"하는 수 없지, 내 턴."
[도펠코프: 패 4장]
[리퍼: 패 0장]
과연 이번에 리퍼가 필드에 덮어둔 카드의 정체는 무엇일지 잠시 추론에 들어갔다. 또 자신의 발목에 제동을 걸어올 제거 계열 카드일 수도 있고, 단순한 블러핑일 수도 있다.
도펠코프는 패에 있는 '더 비스테드 알베르'를 흘겨보았다. 이걸 꺼내서 '바로네스'를 싱크로 소환한다면, 단번에 끝장낼 수는 없어도 저런 숨겨둔 방아쇠 따위 경계할 필요는 없어질 터. 물론 그 전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이번에도 도펠코프는 자신의 감에 귀를 기울인다. 아직 끝나지 않은 듀얼에 이 감을 얼마나 믿어야 좋을지를 타협해보았다.
'일단은 그냥 이대로 가볼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건 아직 미동이 없는 수면에 작은 돌부터 던져보는 셈이니까.
"그럼 튜너 몬스터 '더 비스테드 알베르'를 소환."
[더 비스테드 알베르: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4 / ATK 1800 / DEF 0]
'튜너'임을 대놓고 고지하듯이 싱크로 소환으로 연계할 수 있는 전개다. 리퍼는 바로 이 순간에 반응을 보였다.
"함정 카드 '엔보이드 버스트'. 내 필드에 '엔보이드' 몬스터가 존재하면 필드의 카드 1장을 파괴한다. '질드라스'를 파괴."
싱크로 소재가 될 예정이었던 드래곤이 불길한 빛을 내뿜으며 폭파한다. 이걸로 레벨 10의 싱크로 소환은 이번에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 세트한 '카오스 테리토리'를 발동. 패에서 '백금룡-링고블룸'을 묘지로 보내고, 덱에서 속성이 다른 레벨 8의 특수 소환 몬스터를 가져온다. '혼원룡 레비오니아'를 서치. 묘지의 '와이버스터', '달크', '카오스 앙헬'을 제외하고, 패에 있는 '레비오니아'를 특수 소환."
[혼원룡 레비오니아: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0]
[도펠코프: 패 3장]
"'레비오니아'의 효과. 어둠 속성과 빛 속성을 제외하고 불러낸 상태라면, 필드의 카드를 2장까지 파괴할 수 있어. 그럼 '암피프테레' 1장만 파괴."
방금 튀어나온 흑백의 드래곤이 하얀 광배를 동반한 시커먼 구를 전개한 끝에 발사하자, 그에 맞은 '암피프테레'가 증발하며 사라진다.
"묘지의 '카오스 테리토리'를 제외하고 ②의 효과를 사용. '달크'를 엑스트라 덱으로 되돌리고 1장 드로우."
''카오스 앙헬'이 아니고?'
의외의 선택에 유진은 의문을 품는다. 더구나 뽑은 카드를 본 도펠코프 본인의 표정도 썩 밝지는 않다. 당장 쓸 수 있는 카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리퍼의 필드는 또다시 비어버린 상태. 효과를 사용한 '레비오니아'는 공격을 할 수 없는고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 시점에서 도펠코프가 공격을 지시할 수 있는 몬스터는 결국 하나 뿐이었다.
"배틀, '알베르'로 다이렉트 어택!"
호명받은 적발의 소년 '알베르'는, 여유로운 미소를 띈 그대로 손바닥을 펼쳐서 쥐고 있던 무언가를 공중에 띄운다. 그것은 무언가가 깨져서 생긴 파편처럼도 보이는 돌덩어리였다.
염력이라도 쓴 것마냥 던져올리는 동작 없이도 서서히 부유하던 돌덩어리는, 이내 강렬한 붉은 빛을 띄더니 아무것도 없어야 할 주위에 시커먼 그림자를 띄워나간다.
그림자는 뚜렷한 형체를 만들어나간다. 새빨간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마름모꼴이 일렬로 다닥다닥 붙은 채, 바닷속 두족류의 촉수처럼 구불구불 춤추기 시작했다.
사슬인지 촉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 중에서 한 가닥이, 이내 거대한 마수의 발톱처럼 빠르게 나아가 리퍼를 스치고 지나간다.
[리퍼: LP 8000 → 6200]
뚜렷한 형체가 있기에 그림자는 다른 몬스터와 다를 것 없이 물리적인 충격을 안겼다. 그것은, 리퍼가 쓰고있던 가면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가면이 뒤덮고 있었던 얼굴은 여전히 싸늘한 눈초리와 무표정을 보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반듯한 이목구비다. 대놓고 맨얼굴로 돌아다닐 때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아파하는 시늉조차 없으니 여전히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돌을 쥠으로서 공격을 마친 그림자를 거두는 '알베르'는 여전히 비웃는 듯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도펠코프 역시 같은 표정으로 한 마디 던져본다.
"훨씬 보기 좋구만."
그래봤자 여전히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직 LP는 반도 채 깎이지 않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리할 뿐이다.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음 턴을 맞이해야한다는 각오가, 자칫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턴을 넘겨야 한다는 각오가 저 머릿속에 있을까.
그 정도의 수라를 헤쳐나온 그에게, 과연 이번에도 불리한 태세를 뒤엎으리라는 자신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택의 기로가 조금씩 가까워져만 가는 기분이다.
"메인 페이즈 2. 드래곤족 몬스터인 '알베르'와 '레비오니아'를 소재로, 링크 2 '천구의 성각인'을 링크 소환."
[천구의 성각인: 드래곤족 / 빛 / LINK-2 / ATK 0 / 링크 마커 ↙↘]
"카드 2장을 세트. 턴 엔드야."
"…내 턴."
[리퍼: 패 1장]
[도펠코프: 패 2장]
"묘지에 있는 '암피프테레'를 뒷면으로 제외하고 ②의 효과를 사용. 1장 드로우. 그리고 2장째 '이차원의 등대'를 발동. 뒷면 제외 상태의 카드 4장을 묘지로 되돌리고, 이번에도 덱에서 레벨 4의 '뷔브르'를 특수 소환."
[엔보이드 뷔브르: 환룡족 / 어둠 / 레벨 4 / ATK 1400 / DEF 1100]
아직 '천구의 성각인'의 효과를 사용해오지 않는다. 필시 이를 소재로 튀어나올 다음 몬스터를 저격할 속셈임을 리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뷔브르'의 ①의 효과로 '엔보이드' 몬스터를 서치. 그리고 가져온 '엔보이드 펠루다'를 소환."
[엔보이드 펠루다: 환룡족 / 어둠 / 레벨 4 / ATK 1200 / DEF 1500]
"펠루다'의 효과. 소환 성공시 필드의 카드 1장을 뒷면으로 제외한다."
"'천구'의 효과를 억지로 쓰게 만드시겠다? 그건 안 돼. 세트한 '무한포영'을 발동. 이걸로 '펠루다'의 효과는 무효야."
리퍼가 불러낸 가시 돋힌 마수의 모습을 한 몬스터가 효과를 발휘하려들자 마자, 함정의 기습으로 감전이라도 된 듯 경직되면서 무력화된다.
"그래도 몬스터는 남았네? 잘 됐어. 링크든 엑시즈든 맘대로 꺼내봐."
"…그럼 '뷔브르'와 '펠루다'를 소재로, 2장째 '아벤트브룸'을 링크 소환."
[엔보이드 아벤트브룸: 환룡족 / 어둠 / LINK-2 / ATK 1400 / ↙↘]
"링크 소환한 '아벤트브룸'의 ①의 효과를…"
"'천구'를 릴리스하고 ①의 효과로 체인. '아벤트브룸'을 엑스트라 덱으로 되돌린다. 이걸로 후속은…"
"묘지에서 '펠루다'의 ②의 효과를 사용. '엔보이드'가 효과로 필드에서 벗어날 경우, 이 카드를 대신 뒷면으로 제외한다."
"칫."
역시 생소한 카드는 정보의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것을 도펠코프는 실감한다. 자신이 그 이점을 누리는 것은 좋아도 반대는 역시 성가신 일이었다.
"'아벤트브룸'의 효과를 처리. 5장 넘기고, 이번에는 '어버이해마'를 특수 소환."
[어버이해마: 환룡족 / 물 / 레벨 7 / ATK 2100 / DEF 1400]
"나머지는 뒷면으로 제외. 여기에 묘지에 있는 '마카라'의 ①의 효과를 적용해서 필드로 특수 소환."
[엔보이드 마카라: 환룡족 / 어둠 / 레벨 4 / ATK 1800 / DEF 0]
자기 몬스터를 보전하면서 남의 소재 마련하기를 방해하는 작전은 장렬하게 실패. 도펠코프는 아쉬운 마음으로 사용한 효과의 뒷처리를 수행해주기로 한다.
"어쨌든 나도 릴리스된 '천구'의 ②의 효과를 쓸게. 덱에서 드래곤족 하나를 특수 소환."
[비스테드 살로니르: ATK 2500 → 0 / DEF 2000 → 0]
도펠코프가 선택한 것은 마지막 매수에 해당하는 3장째 '비스테드 살로니르'. 이번에도 레벨 6이다.
살려놨다간 십중팔구 싱크로로 연계할 작정일 것이다.
"몬스터 효과가 발동했으니 3장째 '삼전의 재'를 발동한다. 이번에도 2장을 드로우."
"징하다. 꼭 이 상황을 예견한 것 같잖아?"
"어느 정도의 난적인지 짐작은 했으니까."
"크으~"
그 대답이 한 순간 도펠코프의 심금을 울릴 뻔했다.
수동적인 조건을 가진 카드를 3장씩이나 투입할 정도로 자신의 방해를 대비하고 있었다니.
그렇게까지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세가 한 편으로는 긴장을 부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감동적이다.
[리퍼: 패 2장]
"그럼 '어버이해마'의 효과. 레벨을 하나 낮추면 '해마 토큰'을 한 마리씩 특수 소환할 수 있지."
"안 돼. 함정 카드 '붕계의 수호룡'. 드래곤족인 '살로니르'를 릴리스하고, 필드의 카드 2장을 파괴한다. '아벤트브룸'과 '어버이해마'를 지정할게."
기껏 새로운 몬스터를 뽑아낼 만했던 진영이,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폭발하는 도펠코프의 몬스터와 함께 박살난다.
"계속해서 묘지로 간 '살로니르'의 ②의 효과. 이번엔 2장째 '알베르'를 묘지로 보낸다."
"어쨌든 필드는 비었군."
도펠코프의 이마에 저절로 식은 땀이 맺힌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를 내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네. 올 테면 오던가."
"배틀, '마카라'로 다이렉트 어택."
간발의 차로 열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까지 자신을 한 대라도 치려 드는 꼴이라니. 사냥개의 본성을 떨치지 못한 반려견이 목줄이 풀리자마자 뛰어드는 걸 보는 것만 같다. 망설임이라곤 없는 적대감에 도펠코프는 황홀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물론 이를 그대로 맞아줄 생각 따윈 없다.
"이 순간 '체크섬 드래곤'의 효과! 이 카드를 패에서 특수 소환하고, 그 수비력 절반만큼 내 LP를 회복한다."
[체크섬 드래곤: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6 / ATK 400 / DEF 2400]
[도펠코프: LP 8000 → 9200]
네 발로 전진하던 리퍼의 몬스터가 독특한 외양을 자랑하는 도펠코프의 몬스터 앞에 가로막힌다.
"칠 수 있으면 쳐보라니까?"
"…배틀 종료. 메인 페이즈 2로 간 다음 카드를 1장 세트. 엔드 페이즈에 '아벤트브룸'의 효과로 제외된 카드 1장을 회수한다. 턴 엔드."
"내 턴이다?"
[도펠코프: 패 2장]
[리퍼: 패 2장]
턴을 받아든 도펠코프가 한 층 더 히죽거렸다.
저 능하디 능한 포커페이스를 보라. 즐거움도 두려움도 일절 내비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 기필코 버텨서 꼭 자신의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투지.
분명 그 뜻은 여러 번이고 이루어져 왔기에 자신을 상대로도 굽힐 일은 없으리라.
그것을 얼마나 밟아놓아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이를 알아낼 수단이 마침 패에 쥐어진 참이다.
"튜너 몬스터 '백금룡-링고블룸'을 소환."
[백금룡-링고블룸: 드래곤족 / 빛 / 레벨 2 / ATK 100 / DEF 1100]
"레벨 6의 '체크섬 드래곤'에 레벨 2의 '링고블룸'를 튜닝! 빛과 어둠은 표리일체! 혼돈의 지배자여, 그 난폭한 힘을 터뜨려라! 싱크로 소환!, 레벨 8 '혼돈마룡 카오스 룰러'!"
[혼돈마룡 카오스 룰러: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2500]
"싱크로 소환한 '카오스 룰러'의 ①의 효과. 덱에서 5장 넘기고, 빛이나 어둠 속성 몬스터 1장을 패로 가져온다. 나머지는 묘지로. 여기에 묘지에 있는 '링고블룸'을 제외하고 그 ②의 효과도 발동. '백금 토큰' 하나를 내 필드로 특수 소환."
[백금 토큰: 환룡족 / 빛 / 레벨 2 / ATK 100 / DEF 100]
마왕의 풍채를 지닌 시커먼 드래곤과 함꼐 나타난 것은, 황금빛 드래곤이 움켜잡고 있던 큼지막한 황금빛 사과였다.
그 크기, 그 환하게 빛나는 모습은 평범한 열매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백금 토큰'은 싱크로 소환시에 튜너로 취급할 수가 있거든. 뭔 말인지 알겠지? 그래도 그 카드는 발동 안 할 거야? 아님 못하는 거냐?"
"…꺼내기나 해라. 레벨 10짜리 싱크로를."
경계했던 전개를 막지 못하는 운명이 정말로 두렵지 않은 것일까.
"소원대로. 그럼 레벨 8 '카오스 룰러'에 레벨 2의 '백금 토큰'을 튜닝."
두렵지 않다면 기어이 대령해주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예상하던 것과는 다소 다른 변화구일 뿐.
"누가 끝까지 버티나, 누가 먼저 떨어지나, 지금 불러낼 놈이 곧 답이 될 거야! 싱크로 소환! 레벨 10, '심연의 짐승(비스테드) 디스 파테르'!"
[비스테드 디스 파테르: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10 / ATK 3500 / DEF 3500]
이번에도 도펠코프가 불러낸 것은 한 마리의 용.
실루엣상으로는 드래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 하얀 몸체에는 세쌍의 사지와 천사의 날개, 그리고 여러 가닥의 촉수가 뻗어나와 있다. 더구나 촉수를 포함한 몸뚱아리 곳곳에는, 루비처럼 새빨간 홍채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명왕(디스 파테르)'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는 듯이, 그 모습은 뒤틀려버린 마귀라고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디스 파테르'의 ①의 효과. 제외된 빛이나 어둠 속성 몬스터 1마리를 내 필드로 특수 소환할 수가 있어."
"패에 있는 '이펙트 뵐러'로 체인. '디스 파테르'의 효과를 무효로."
"그럼 '디스 파테르'의 ②의 효과를 체인! 제외된 카드를 덱으로 되돌리고, 효과를 발동한 몬스터를 덱으로 되돌린다. 추가로 네 카드를 되돌렸으니까 효과는 무효 처리되지."
몬스터의 대처가 막혔다. 패가 무력하게 소모되는 것을 보고 애가 타던 유진은 생각한다.
'저걸 진작 썼어야…, 아니, 소용 없었나?'
설령 '이펙트 뵐러'의 효과를 그 전에 '카오스 룰러'에 대고 썼다 한들, 어차피 묘지에서 튀어나오는 싱크로 소재로 인해 '디스 파테르'의 군림을 막을 여지 따윈 없었다.
물론 그가 행사해 올 효과도.
"그럼 '디스 파테르'의 효과는 무사히 처리. 다시 비상하라, '카오스 앙헬'!"
'디스 파테르'가 손의 조형을 띄고 있는 허연 앞다리를 모으니, 그 사이로 마름모꼴의 문양 하나가 떠오른다. 문양은 하나의 문으로 기능하면서 새로운 전력을 끌어온다.
비로소 해치웠으리라 믿었을 난적이 또다시 날갯짓하며 귀환하는 것이었다.
[카오스 앙헬-혼돈의 쌍익-: 악마족 / 어둠 / 레벨 10 / ATK 3500 / DEF 2800]
"특수 소환된 '카오스 앙헬'의 효과! 이번엔 네 세트 카드를 제외한다."
전번과 마찬가지로 '카오스 앙헬'이 양손에 쥔 불덩어리를 합친다.
몬스터를 남겼으니 LP를 완전히 깎아내릴 수는 없을지 몰라도 방해가 될지 모르는 장애물을 치워버린다. 여태까지 발동하지 않았다면 공격 반응형 함정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을 터.
또다시 감에 맡긴 그 선택에, 리퍼는 반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 전에 발동한다. 함정 카드 '트랜스 엔보이드'. 제외 상태의 내 카드를 임의의 수만큼 덱으로 되돌리고, 그와 같은 링크 마커를 가진 '엔보이드' 링크 몬스터를 링크 소환하지."
이번에도 정보의 불균형을 무기삼아 기습해온다. 도펠코프는 또다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한 발 늦었나.'
"'마카라', '코아틀', '뷔브르', 그리고 '엔보이드 나이트'까지 총 4장을 되돌리고 이 카드를 특수 소환한다. 링크 4 '엔보이드 나이트레이 드래곤."
[엔보이드 나이트레이 드래곤: 환룡족 / 어둠 / LINK-4 / ATK 3000 / 링크 마커 ↑↙↓↘]
도펠코프의 진영이 진군의 채비를 하는 도중, 리퍼의 필드에 갑작스럽게 군림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한 마리의 드래곤 처럼 보였다.
'엔보이드 나이트 드래곤'이 한 층 더 거추장스런 갑옷을 거친 듯한 모습인 것만 봐도, 그를 능가하는 에이스 몬스터일 것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타난 몬스터의 공격력은 도펠코프의 필드를 버티는 몬스터 중 어느 쪽도 상대할 수 없을 터. 물론 한낯 허물어질 벽으로 불러냈을리는 없다고 그의 감이 경고해온다.
그것은 여지없이 정답이었다.
"링크 소환된 '엔보이드 나이트레이'의 효과. 필드에 있는 다른 카드를 전부 뒷면으로 제외한다."
용이 앞다리를 뻗자, 시뻘건 발톱 끝으로 무언가가 모여든다. 빛이 응결된 테두리 사이에 보이는 것은 빛이라는 것이 완전히 배제된 듯한 칠흑. 공간 사이에 뚫어놓은 듯한 검은 구멍같은 그것이, 순식간에 확대되면서 필드 전체를 뒤덮어나갔다.
싱크로 소환 외의 방법으로 귀환한 '카오스 앙헬'에게 이를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 결과, 검은 구멍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엔보이드 나이트레이' 하나 뿐.
큰소리를 치면서 꺼낸 최강의 전력들이 뭔가를 보여주기도 전에 한방에 소멸한 것이다. 이걸로 또다시 그의 필드가 갈아엎어졌다.
위저드가 선물한 강력한 카드들까지 합친 덱이, 결정타를 내리지 못한 채 공방을 질질 끌어나갈 뿐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평가해야 좋을까. 이 정도면 잘 싸우고 있다? 그것밖에 못 하냐?
"그런 걸 숨겨뒀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네스'나 꺼내야 됐나? 아니, 그게 그건가?"
중얼거리다 말고 풉,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신호삼아, 도펠코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눈물마저 새어나올 정도의 시원한 웃음이 한동안 멈추지를 않았다.
갑자기 왜 저러지, 라며 유진은 어리둥절한다.
또다시 갖춘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버렸으니 슬슬 실성이라도 한 것인가 해석이 될 지경이었다.
그런 웃음이 잦아들고서야,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아, 이거거든! 이게 듀얼이지."
즐겁니 뭐니 할 때가 아닐 것이다. 한없이 유리하리라 생각했던 전황에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다. 진짜로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다음 수를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그 생각이 미치던 순간, 자신은 머리를 굴린다는 행위를 질색해왔던 것을 떠올렸다.
복잡한 생각 따위를 하고 싶지 않으니 즐거운 듀얼에 몸을 맡겼을 텐데, 듀얼몬스터즈라는 게임 자체가 원래부터 머리 싸움이 아니던가.
그걸 목숨 걸고 한다는 것은 더더욱 복잡한 생각이 필요한 행위다. 즐겁다고 생각하기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고갔을까. 그걸 받아들인 자신의 머리는 어떻게 되어먹었을까.
반대로, 저들 머리는 어떻게 되어 있길래 이런 걸 계속해올 수 있었을까.
"갑자기 빵 터져서 미안. 근데 오해하지는 마라. 비웃거나 실성한 거 아니니까."
"이것조차 즐겁다는 거냐?"
"그래. 이런 식으로 얼마나 악착같이 버텨왔을지 절실히 전해지거든. 이번에도 안 즐겁겠지?"
"물론."
그 반응은 여전히 리퍼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배제해야 마땅한 존재를 배제해야 한다는 살의를 더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쓴맛을 쓴맛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그 마인드, 참 부러워. 즐겁다는 걸 부정하면서 이렇게까지 용을 쓴다니. 열심히 사는구나, 너네."
얼핏 듣기로는 여태껏 내뱉어온 것과 다를 것 없는 조롱의 멘트일 뿐이다.
하지만 그 눈은 평소의 독기마저 어느 정도 빠져있을 만큼 진심어린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고맙다. 여태까지 그렇게 버텨줘서. 중간에 포기하는 일 같은 거 없어서 다행이야. 덕분에 이렇게 만났잖아? 운명의 상대로 찍은 보람이 있었다고."
"……."
저쪽은 슬슬 대꾸해주기도 귀찮은 것이겠지. 도펠코프 역시 슬슬 이야깃거리가 떨어져가고 있을 텐데도, 입은 자꾸만 간질간질해왔다.
지금껏 적지 않은 상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방적으로 험한 욕이 날아들기도 했고, 허세 넘치는 도발을 서로 주고받기도 했고, 듀얼과는 별 상관없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눈 적마저 있었다. 물론 저렇게 무시로 일관하는 상대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런 곳에 오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어떤 계기로 이끌려왔을까. 그것이 궁금해질 때도, 딱히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누구도 봐주지 않을 어둠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즐긴다는 방식이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 한 명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존재하는 법이다.
대부분 지워버려야 마땅할 꼴도 보기 싫은 놈들 천지였지만, 가끔씩은 상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도 했다. 가끔씩은 어둠의 듀얼이라는 무대에서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상대들을 꺾어주고 난 뒤의 조치는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 마지막 일격에 깔끔히 묻어버리고 조용히 잊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승리의 순간만을 상쾌하게 받아들이고 그 최후를, 그 작별을 뒤로 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사라진 목숨에 별다른 미련 따위를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믿었다. 목숨을 지켰다는 안심을 즐기는 방법이란 그러한 것이니까.
그러나 이번엔 어쩐지 다르다. 이 녀석만큼은 그렇게 쉽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딱히 알려질 일도 없을 위험에 영웅놀음이랍시고 뛰어든 녀석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눈앞의 그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즐긴다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재미없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매너리즘이 찾아올 법한 인조이 라이프에 어느 정도 자극이 되어주는 것도 사실. 기꺼이 악당 노릇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마찬가지로 그들을 묻어버리고 과거의 기억으로 삼아왔다.
저 자도 그런 재미없는 상대로 끝날줄 알았거늘, 이 희열을 뭐라 형용하면 좋을까.
하는 짓만 보면 진즉에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 몸뚱아리까지 내줘가면서 악착까지 버틴 끝에 이 정도의 승부를 치르고 있다니. 그걸 즐겁지 않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니.
성실함도 정도가 있다. 이 정도 근성은 광기의 영역이다. 이런 미련함의 극치를 어떻게 잊으라는 말인가. 그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속여넘길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번 같은 빅 이벤트만 아니라면 어둠의 듀얼이라는 걸 하는 상대를 찾기도 힘든 와중에 이러한 케이스를 또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잠시나마 옆에서 그녀를 지켜봐버린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그 하나하나의 감상이 곧 즐거움이 된다.
그 전진을 확 눌러버리는 것은 분명 통쾌하겠지만, 얼마간의 후회는 따르리라 직감했다. 파멸이든 성취든 그들에겐 무언가 이야기가 더 있어야만 할 것 같다.
더 길게 이야기할 것은 없을 텐데 그들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아가고만 싶다. 하마터면 살려줘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어찌됐든 답은 나오지 못했다.
둘 중 아무도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엄밀히는, 서로가 사이좋게 무너지는 중이라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아직 끝난 건 아니거든. 묘지에 있는 '카오스 룰러'의 ②의 효과를 발동. 패에 있는 '철기룡 티아마톤', 묘지에 있는 '레비오니아'를 제외하고 자신을 부활시킨다!"
[혼돈마룡 카오스 룰러: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2500]
"배틀! '카오스 룰러'로 '엔보이드 나이트레이'를 공격!"
양쪽 진영의 용이 서로 격돌한다. 경계선으로부터 잔광을 주변에 퍼뜨리는 어둠을 손에 모으며 서로에게 부딪혔다. 그 결과 서로 공멸.
그 충격의 여파는 소음과 바람으로나마 유진에게도 전해졌다.
별 거 아니네, 라며 도펠코프는 사라진 리퍼의 몬스터를 두고 코웃음친다. 자신의 덱은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질 수준이 아니다.
자신이 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이길 길을 모색해주도록 카드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질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설령 얼마 안 남았을지라도, 승부 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평소에 하던 것 처럼.
"카드 1장을 세트. 이제 네 턴이야."
"그래."
[리퍼: 패 2장]
[도펠코프: 패 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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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세상에 어떤 작자가 다음 파트를 끊어놓고 2달씩이나 밀려서 내놓냐고ㅋㅋㅋㅋㅋ
네 재송함니다
어찌 됐든 다음 파트가 끝일 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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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니 두 달 넘게 연중인 제 글무더기가 생각나서 매우 쪽팔리기 그지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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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야쿤... | 23.07.23 15: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