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택풍수와 음택풍수의 차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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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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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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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
양택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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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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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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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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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론 위주의 논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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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택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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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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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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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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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세론과 이기론이 골고루 발전 |
한국은 음택풍수로 발전하였고, 일본은 양택풍수로 발전함
한국 - 음택풍수는 효사상이 바탕이 되어 죽은 자를 위한 무덤으로,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자 함
거기에는 주자의 산릉의장의 영향이 있음
주자 : “자손으로서 그 조상의 유체를 장할 때에는 반드시 중히 하고 삼가면 성경의 마음에 이르니 이로써 안정되고 굳건하며
오래 먼 대책을 삼습니다.
만일 그 형체가 온전하고 이에 신령이 편안함을 얻으면 그 자손은 성하고 제사는 끊이지 않으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가령 그 형신(形神)이 안정치 못하면 이에 자손 또한 사망˙절명(死亡˙絶滅)의 우환이 있으니 심히 두렵습니다.”
주자의 ‘산릉의장’은 조선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효사상을 고취시키며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장사를 지내는 지침서로 그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됨
풍수가들은 효사상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동기감응론을 통해 발복론과 길흉론을 제시
일본 - 양택풍수는 산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그 활용성을 가지며, 도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
중국의 황제택경은 양택풍수서인데 이것이 일본으로 넘어가 작정기에 영향을 미침
양택풍수와 음택풍수의 구성에는 모두 음양오행론이 있음
구궁도
낙서에 응한 구성(九星)에 중궁(中宮)과 팔괘(八卦), 팔문(八門)을 배합을 하여 그 운행하는 9방위의 자리
동북, 동남, 서북, 서남 4개 구역은 우수로 음에 속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중요 건축물을 건축하지 않음
양택풍수와 음택풍수 논리 구성의 특징 비교 분석
(A Comparative Analysis on the Feature of Logical Construction between Feng Shui for the Housing and the Grave)
국토연구 제84권(2015. 3): pp95~109 발췌
일본의 양택풍수
저작 연도는 헤이안 시대(794~1192) 후기인 11세기,
저자는 궁궐의 건축과 수리를 담당하는 수리대부를 역임했던 다치바나노 도시쓰나橘俊綱일 것으로 추정
이 사진은 1964년 판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전통 정원 작정가들에게는 바이블로 여겨지고 있다고 함
번역이 되어서 요즘에도 손쉽게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가 가능함
작정기에는 귀문과 같은 불길한 방위를 회피하기 위한 기법이 등장
작정기
“오척(五尺) 이상의 돌을 북동쪽에 세우지 말라. 귀문에서 귀신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높이가 4~5척되는 돌을 북동 방향에 세우지 말라. 이는 유령 돌(霊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악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재촉하여 사람들이 오래 거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만 남서쪽에 삼존불석을 세운다면 재앙이 없고 귀신들도 들어오지 않는다.”
일본 풍수에서의 귀문회피(鬼門回避)에 관한 연구 논문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161~187쪽 발췌
일본은 길흉판단을 간(艮, 북동, 귀문)-곤(坤, 남서, 다른 쪽의 귀문)을 기준으로 하는데
예를 들면 이 축선에 화장실 등의 부정한 공간, 혹은 문과 헛간 등이 있으면 주인에게 불행과 병을 초래한다는 것
1947년 일본 문부성의 조사에 의하면 귀문방을 흉방위로 생각하여 이를 회피 하려는 소위 ‘귀문회피율’은 조사 대상 중 66%이나 되었음
오늘날에도 일본의 귀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음
한 예로 일본 한 건설회사의 홈페이지를 보면 귀문에 관한 설명이 있음
https://fukuoka-g.co.jp/kimon.html
일본 풍수에서 귀문을 회피하는 방법에는 크게 네가지가 있다고 함
첫째, 동북 귀문 방위에 절(사찰)을 세우는 행위,
구글지도 참고
교토고쇼(일본의 황궁) 북동쪽에 위치한 赤山禪院(세키잔젠인 888년)과 延曆寺(엔랴쿠지 788년에 창건된 일본 천태종의 본산 사원)
일본 황궁과 헤이안성을 수호하기 위한 절
1625년 지겐대사(慈眼大師)에 의해 도쿠가와 막부의 안녕과 만민의 평안을 기원
둘째, 신사(神社)를 세우는 행위
1826년 9대 번주 다치바나 아키가타(立花鑑賢)가 창건
고마츠성(小松城)의 귀문 방향 (북동쪽) 고마츠텐만구(小松天満宮)
카가번(加賀藩)의 3대 번주(藩主) 마에다(前田利常)가 1657년에 건축
고마츠 성, 가나자와 성의 귀문에 만들어져 귀신(怨靈)으로부터 카가번을 지키려는 것이 목적
1583년 축성
마쓰야마성의 본단(천수곡륜)의 귀문을 지키는 텐진
셋째, 동북방위의 건물 모서리를 함몰시키는 행위
동북쪽의 지형이나 건물의 모퉁이를 함몰시켜 귀문을 방어하거나 기피
교토황궁 안내판을 보면
북동쪽 귀문방이 함몰되어 있음
북동쪽을 의도적으로 함몰시켜 귀문방위를 회피
모서리가 움푹 들어간 가고시마성
항상 닫혀 있었다는 구마모토성 북동쪽 귀문
https://castle.kumamoto-guide.jp/ko/about/
나가노현(長野県) 우에다성(上田城) (1583)
에도 시대에 그려진 히메지 성의 그림
넷째, 특정한 입지. 유리(遊里)를 건설하여 이에 대비하는 등의 행위
일본의 유리(遊里)란 일정한 구획을 나누고 ㅁㅁ, 가게가 모인 지역. 유곽(遊廓) 또는 색리(色里)
에도의 요시하라(吉原) 유곽 (1617년)
시마바라(島原)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 재건을 위해
1589년 개장한 교토 최대의 막부 공인 최대의 유곽
시마바라는 교토황궁에서 볼 때 남서쪽에 위치
교토의 경우 북동쪽은 엔랴쿠지(延曆寺)와 세이칸젠인(赤山禪院)과 같은 사찰을 두고
남서쪽은 유리를 두어 귀문방위를 회피
로차야(西茶屋)
https://www.kanazawa-kankoukyoukai.or.jp/spot/detail_10199.html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배치된 유곽으로 주술적인 관념으로 선정
성(性)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계적(異界的)인 의미를 가지고 영역의 결계성과 밀접하게 연관
귀문방의 불길한 방위에 이계적 공간적인 장치로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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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일본이 사용했던 풍수
야에야마군도: 『기타기산풍수기』(1864)
카미에스 가(지방 관리 클래스)가 무덤 신축 시에 풍수사에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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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풍수
무라야마 지쥰이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20여년간 조선을 조사해 펴낸 책이 10권이 넘음
저서 『조선의 귀신』에는 “조선의 풍수설에서 자손의 운명은 조상 묘지의 좋고 나쁨에 영향을 받는다”
『조선의 풍수』 (1931)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조선 산맥에 쇠못을 박아 왕기를 제압했다”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인재가 너무 많이나면 아니된다하여
병졸로 하여금 선산읍 뒤 산맥을 자름과 동시에 쇠못을 밖아 왕기를 제압했는데 그후 이렇다 할 인물이 나지 않았다는 것
일제는 한국의 풍수에 대해 공식 보고서를 만들 정도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은 '조선이 풍수에서'
(거팔내팔형과 십자통기형은 같은 뜻)
거팔내팔형: 지맥[龍]이 무덤 뒤에서 좌우로 八字 모양으로 나뉘고 무덤 앞에서 다시 거꾸로 팔자 모양으로 모여 마름모꼴이 되는 것
하지만 홍유릉은 명당이 아니고 풍수적으로 매우 좋지 않다는 얘기가 있음
고종의 무덤(홍릉), 순종의 무덤(유릉), 이를 합쳐 홍유릉이라고 함
https://www.youtube.com/watch?v=7GnYrsHCp5I
당시 조선의 왕 묘자리는 조선총독부에서 이왕직 사무관 직원들이 관련하였음
이왕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대한제국 황족의 의전 및 대한제국 황족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
https://sillok.history.go.kr/id/kzc_10412002_001
이 사람은 1910년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중 한명
왕의 묘에 친일파들이 관련함
홍유릉은 겉으로 보면 일제가 신경써서 만들어 준 것처럼 보이는데
풍수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위치라고 함
고종의 무덤인 홍릉과 순종의 무덤인 유릉은 일제에 의해 조성이 됨
태조산은 천마산(810.2m), 중조산은 백봉(587.2m), 소조산은 수리봉(485.5m)
수리봉에서 고종이 묻힌 홍릉 뒤편까지는 맥이 힘차게 변화하며 내려오는데
용맥은 홍릉 자리를 향해 오지 않고 반대로 나아감
홍릉은 용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위치
풍수에서의 반주(反肘)
반주는 집안이 망하여 가족이 모두 흩어지는 땅
홍릉에서 보면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앞으로 쭉 빠져나감
수구가 열려 있다는 뜻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수구가 좁게 관쇄되지 않고 열려 있으면 다음 대를 잇지 못한다고 함
얼핏 보면 좋아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나쁜 자리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자리는 과룡처
지나가는 능선 위에 묘를 쓰면 삼대를 못가서 망한다는 뜻
조선시대 왕들은 용진처라는 맥이 끝나는 곳에 거의 묘를 썼는데
순종의 묘는 과룡처의 위치라고 함
홍유릉은 오늘날 풍수로 볼 때 도시혈(盜屍穴 soil creak)에 속한다고 함
도시혈:
시신을 매장한 이후 땅속이 움직여 시신이 묘 봉분 밑에 있지 않고 이동해 다른 곳에 있게 됨
https://www.youtube.com/watch?v=2BN91h6VbKE&t=32s
https://www.hankyung.com/article/2014010503691
대한제국의 기를 꺽기 위해
기맥을 달리 조성한 것으로 추정
홍릉의 석릉은 다리가 막아져 있음
이렇게 동물들의 다리가 막아져있는 것이
하지만 유릉은 특이하게 다리가 노출되어 있다고 함
조선의 석릉이 다리를 통으로 붙인 이유는 더 오래가게 하기 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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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신문, 메이지 신궁 등을 만든
이토 주타에 의해서 경복궁 흥례문 구역이
조선총독부 부지로 선정되고 지어지게 됨
- 조선신궁 (朝鮮神宮, 1925년, 현존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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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풍수' (1931) 에서 안동 임청각을 명당으로 소개
'임청각의 평면도는 동쪽서 봐서 용자형(用字形)이다. 집 뒤로 상산(象山)이 있고,
동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풍수상 지극히 좋은 구조를 가진다.
무릇 집을 지을 때 일자(日字), 월자(月字), 길자(吉字)와 같이 좋은 글자 모양으로 지으면 복이 들어온다.
임청각은 아래쪽 반은 일자이고 위쪽의 반은 월자다.
이 일형과 월형의 합형인 용자형은 하늘의 해(日)와 달(月)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를 받고자 한 것이다. 일, 월을 합친 글자는 밝을 명(明)자가 맞겠지만,
용자로 한 것은 명자의 경우 일과 월이 따로 떨어져 병렬로 되어 있으나,
용자는 완전히 합쳐져 하나의 글자로 되어 분리하면 독립된 문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080206020262731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5/2017082501811.html
1763년, 임청각의 11대 주인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이 그린 임청각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 집안이 대대로 살던 임청각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
철길이라면 대개 직선이 원칙인데,
10여 km를 더 돌아 3개의 터널을 뚫고 옹벽과 축대를 쌓아 두 번이나 급하게 휘면서 마당으로 철로를 뚫음
99칸 대저택이었지만 철로로 50여 칸이 허물어지고
남은 칸도 진동과 소음으로 크게 훼손됨
https://www.minjok.or.kr/archives/75908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50271#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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