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 아구(dudu agu, 王杲)는 히타라 씨족 출신의 건주 추장이었다. 그는 강력한 세력을 구가하면서 명의 요동 변경 지역을 위협하는 동시에 명과의 협상과 화의를 통하여 그들로부터 관직을 받거나 조공 거래를 하고, 무상을 지급받았다.
아구의 요동 변경 지역 위협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명에게 있어서 아구는 위협적인 존재였고 그렇기에 명은 그를 설복하는데에 더더욱 노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무력으로 대응할 일이 생긴다면 강력히 대응코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아구의 명의 변경에 대한 공격은 점점 그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아구로서도 무력충돌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융경 6년의 가여익 문제로 또 다시 촉발된 아구와 명조간의 대립은 2년 뒤에 벌어진 명의 무관 배승조 살해사건으로 다시 한 번 크게 촉발된다.
1574년 발생한 비어 배승조 살해사건과 그로부터 시작된 아구의 난1으로 인하여 아구는 몰락하게 되었다. 배승조 사건의 1차적 책임은 배승조 본인에게 있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구가 명의 관원을 살해하고 반기를 든 것은 사실이었기에 명군은 이를 이유로 아구를 토벌했다. 하지만 아구의 사후 그의 아들인 아타이와 아하이가 그의 사후 반란을 일으키는 등 그의 핏줄은 여전히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그의 명의 변경에 대한 약탈은 요동순무를 역임하고, 그 벼슬이 태자태보에 까지 이른 장학안의 상주문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이를 도표화 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침범시기 |
침범지역 |
명측 피해 |
가정 36년(1557년) 음력 10월 12일 |
무순 인근 변경 |
비어 팽문수 전사 |
가정 37년(1558년) 음력 2월 30일 |
동주 인근 변경 |
제조 왕삼접, 파총 왕수렴, 수보 추국진 전사 |
가정 37년 음력 3월 22일 |
회안보 |
파총 장주병, 비어 왕세적의 차남 왕공 포함 11명 전사 |
가정 37년 음력 7월 21일 |
위령영보 |
수보 원록병 전사, 남녀 315명 사망 |
가정 37년 음력 8월 27일 |
무순 인근 변경 |
남녀 192명 살해, 남녀 173명 포로, 101명 비전투 사망(화재), 누대 2좌 및 집 60칸 손상 |
가정 37년 음력 9월 18일 |
일도장 |
제조 이송, 수보 강공외 수십여명 |
가정 40년(1561년) 미상일 |
백애자 |
천호 탕란, 백호 우란 |
가정 41년(1562년) 음력 5월 28일 |
탕참 |
부총병 흑춘, 파총 전경, 유일명, 지휘 진기학, 대면 살해 |
가정 42년(1563년) 미상일 |
요양 일대 |
지휘 왕국주, 양오미 |
가정 44년(1565년) 음력 5월 26일 |
고산 |
지휘 이세작, 사망자 및 포로 다수 |
융경 6년(1572년) 음력 8월 12일 |
무순소 관리산하 만예둔(가여익의 여진 탄압 문제로 촉발) |
지휘 왕중작, 왕환, 강진, 주세록 등 85명 살해.
추가 부수적 사망자 35명, 남녀 200여명 포로 |
만력 2년(1574년) 음력 7월 19일 이후 (아구의 반란) |
오미자충등 요동 변경 일대 다수 |
음력 7월 19일 비어 배승조, 파총 유승혁, 관대백호 유중문 살해. 군사 2백여명 살해 및 생포. |
출전 : 『무요부초건주이추왕고소략』 내 헌부소(장학안 상주, 국내 역 신해진, 2018, 역락) 외 청사고 권222 왕고 열전
아구의 반란에서, 아구는 요동총병 이성량에게 일차적으로 패배하여 자신의 근거지를 상실했다. 이후 재기를 노리며 1575년 음력 2월 또 다시 명의 변경을 침범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으나 결국 모두 실패하고 동해 명군에 의해 생포된 뒤 의례를 밟아 처형당했다.
『만주실록』서 아구의 딸로 기술되는 어머치는 탘시와 혼인했다.
탘시와 어머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의 이름은 '누르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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