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목은 어그로가 짙고 약간의 보론이다.
2차 고려거란전쟁(1010~1011) 당시 안북도호부사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던 박섬(朴暹)은 거란군이 통주에서 고려의 본군을 무너뜨린 뒤 곽주를 함락, 남하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무를 버리고 도망쳤다. 이후 그는 개경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피난을 가다가 도중에 길이 겹친 현종의 몽진 행렬에 합류했고, 나주까지 그를 호종했다. 그 와중에 현종을 이용해 이권을 취하려 하는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에 대해 현종에게 조언등을 하다가 얼마 뒤 사직했고, 그러다 개경 환도 이후 다시 현종을 배알했다.
현종은 박섬에 대해 비록 안북도호부사로서의 의무를 방기한 점이 있으나 호종공신으로서의 공을 사서 사재경(司宰卿)에 임명했다. 전란 중 공을 세운 이들, 특히 자신의 든든한 지지세력으로서 역할을 할 만한 이들에 대한 논공행상 및 인사 배치를 통해 무너진 조정의 기강을 회복하고 향후 국정 운영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선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1
그러나 박섬의 기용은 당시 여론의 많은 질타를 받았다. 박섬이 비록 남행호종공신으로서 현종의 몽진에 참여하고 그를 보좌하는 공적을 세웠다고는 하나, 전쟁 도중에 본인의 책임지역인 영주 안북대도호부를 방기하고 도주한 커다란 과실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안북도호부는 도호부사가 자리를 방기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저항 조차 할 수 없이 거란군에게 점령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서경 이북의 방어선이 빠르게 붕괴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 때문에 여론은 박섬의 이러한 전적을 지적하면서 그의 책임론을 끄집어 낸 것이다.
현종 역시 이러한 여론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섬을 사재경에 임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은 그를 장작감(將作監)으로 임명했다.2 관직 위계서열상으로만 보면 해당 위치로의 재임명은 박섬의 관직 품계상 위상을 재고하여 박섬에 대한 질타 여론을 조금이나마 무마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얼마 전에 어사중승 탁사정(卓思政)과 그 외의 인물들을 강조의 당여로 지적하며 유배보낸 것 역시 전쟁 발발 및 전쟁 중의 책임론 문제를 의식한 것으로도 파악된다.
그러나 박섬의 장작감으로의 임용은 단순히 관직 품계상 장작감의 위치가 더 낮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당시 장작감은 전후 복구에 관련하여 중요한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사재경의 역할은 어량(魚梁)과 천택(川澤)이었다. 반면에 장작감의 역할은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이었다.4 두 유형의 국무 모두 국가에 있어 중요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장작감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그 책임이 컸다. 전후 개경의 복구와 관련한 최고 책임자 중 한 명이 바로 장작감이었기 때문이다.
2차 고려거란전쟁 당시 서경을 우회하고 개경을 함락한 거란군은 곧이어 자신들이 함락한 개경을 불태웠다.5 현종이 파천한 상황에서 개경을 그대로 남겨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그들은 개경을 부숨으로서 고려에 물적 피해를 주고 길어진 전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해소했다. 이 때문에 궁궐과 태묘, 민가의 상당수가 손상되었다.
웹툰 <별을 품은 아이>, 개경 화재.
박섬의 장작감 기용은 전후의 개경 복구와 관련한 현종의 인사 배치였다. 현종은 1011년 8월서부터 송악성(발어참성)을 보수하기 시작했으며 10월서부터는 상서 장연제(張延䄞)로 하여금 궁궐을 다시 건립하게 했다.6 이를 전후로 한 시기인 9월에 박섬을 장작감으로 임명한 것은 그 의도가 명확하다. 전쟁으로 인해 손실된 개경의 복원과 관련하여 박섬에게 역할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장작감의 경우 소규모 토목공사와 관련한 업무를 전담했다는 분석도 있으나(金載名. 「고려시대(高麗時代) 사(寺)ㆍ감(監) 관사(官司)와 국가재정(國家財政) -대부사(大府寺)와 장작감(將作監)을 중심으로-」『청계사학』 14. 1998, 65쪽.) 당시 개경의 경우에는 복구가 전반적으로 시급한 상황이었으므로 장작감 역시 그 책임역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 나아가 친위세력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박섬에게 개경 복구와 관련한 책임을 맡긴 것은, 현종이 그에게 전쟁 당시의 과실에 책임을 지고 공적을 세울 기회를 쥐어주는 동시에 박섬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에 대한 여론의 비난을 공으로 종식시키게끔 한 의도로 보인다.
물론 박섬의 능력이 좋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은 파천·호종 당시에 비록 박섬이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역량 자체가 그리 나쁘지 않음을 살폈기 때문에 박섬에게 이런 기회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더불어 장작감이라는 위치가 가지고 있는 품계는 외부적 시각에서 볼 때에는 사재경이나 대도호부사 아래였기 때문에, 그의 위치 조정 그 자체로 민심 역시도 어느정도 다독인 것은 아닐까 한다.
박섬은 본인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개경의 복구는 궁궐의 건립을 비롯해 문제 없이 이루어졌다.7박섬과 관련해서도 이후의 중간과정과 관련한 사료는 보이지 않으나, 최종적으로 그는 상서우복야라는 고관직에 올랐으며, 문종은 그의 행적을 호평했다.
특히 문종이 박섬의 역할을 호평했을 때에 단순히 호종신으로서의 행적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개경의 수복 이후 사직을 안정시킨 것에 대해서도 지목하며 그의 초상을 공신각에 안치하라고 지시한 것을 보건대7, 박섬은 개경의 복구와 관련하여 자신에 대한 현종의 기대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백성들의 자신에 대한 질타를 가라앉힐 정도로 훌륭히 자신의 책임을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박섬 본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고 현종의 인정과 입지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만, 박섬 개인의 자책과 반성 역시도 존재했을 수 있을 것이다.
1.자세한 것은『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1월 29일 참조.
2.『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9월 6일.
3.『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8월 15일.
4.『고려사』 권76 권제 30 백관지 1, 선공시. 사재시.
5.『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1월 1일. .『요사』 본기, 성종 본기 6권, 11월 경자일.
6.『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8월, 10월 26일.
7.『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5년 1월 7일.
8.『고려사』 권7, 세가 권제7, 문종 6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