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 11월 통주 대전에서 거란의 야율분노(耶律盆奴)와 야율적로(耶律敵魯), 야율홍고(耶律弘古)등에 의해 도통사 강조(康兆)의 고려의 대군이 붕괴되었다. 지휘부의 일부는 전사, 일부는 도주, 일부는 포로가 되었고, 그 중에서도 총책임자였던 강조는 거란의 포로가 되었다가 처형당했다.
고려 주진의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고려군은 완항령 전투에서 거란군을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하는 등 저항을 시도 했지만 거란의 남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거란은 12월 6일 방어사 조성유가 도주한 뒤 우습유 승이인(乘里仁)과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신영한(申寧漢),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彥)등이 통솔하던 곽주의 방어군을 섬멸하고 곽주를 점령했다.
곽주보다 후방에 위치하던 영주 안북도호부의 도호부사 박섬(朴暹)은 이런 상황에서 지레 겁을 먹고 영주 사수를 포기, 도주했다.1 안북부는 곽주와는 다르게 박섬의 도주 이후 그대로 방어체계가 붕괴되었고, 거란군은 영주로부터 항복을 받으며 무혈로 점령할 수 있었다.2
박섬은 도주 이후 개경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무안현으로 피신을 하려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전쟁 중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의무를 방기한 관료의 군상 중 하나로 남았을 테지만, 박섬의 행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010년 12월의 서경 전역 끝에 거란군이 서경 함락을 포기하고, 전쟁 목적 수행을 위해 개경을 향하여 계속해서 남하하자 현종은 예부시랑 강감찬(姜邯贊)의 건의를 받아들여 파천을 결정했다.3 그렇게 파천을 떠난 현종 앞에, 박섬이 다시금 등장한다.
박섬은 남쪽으로 몽진하고 있던 현종과 합류하여 지채문(智蔡文), 채충순(蔡忠順), 장연우(張延祐) 등과 함께 그를 호종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함께 한 것은 아니었고, 도중에 현종의 몽진을 조우하여 함께 하게 된 것이었다. 이미 먼저 개경을 떠난 박섬이 도중에 거란군을 따돌리고자 빠른 속도로 남하한 현종과 맞물린 것으로 생각된다 .4
박섬은 전주에서 발생한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의 이상 징후를 포착하고 현종에게 전주행을 만류하는 등의 역할을 하며 나주까지 현종을 호종하다가 이후 사직하였다.5 이 사직에 대해서 영주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진 것이라는 시각도, 현종과 함께 할 시 거란군 또는 이반 세력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 했다는 시각도 모두 가능하다. 무엇이 되었건 이후 박섬은 거란이 물러간 뒤 개경서 다시 현종을 배알했으며, 남행호종공신으로서 사재경에 임명되었다.6 현종은 전후 포상과 그를 통한 공신의 직무 배치를 통하여 무너진 조정과 관료관계를 회복코자 한 것이다.
비록 현종을 호종하는 공을 세웠으나, 안북도호부를 방기하고 도주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재경에 기용된 것에 당시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꼭 그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현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섬을 다시 장작감으로 옮겼다.7 관제상 사재경은 종3품이었고 장작감은 정4품이었으므로8 ,단순 '관직'의 품계로만 보자면 사재경 이전 도호부사였던 시기보다도 입지가 좁아진 것이었는데, 아마도 그의 위치의 재조정을 통하여 그에 대한 불만을 어느정도 무마하고자 했다고 보여진다.
박섬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에도 불구하고 박섬이 '강조의 당여'로 몰린 탁사정, 최창 마냥 숙청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의 부재로 그 중간의 과정을 확인할 수 없으나, 도리어 후에 문종 시기에는 공신각에 그 초상이 걸렸으며, 최대 상서우복야라는 고위 직책에 오른 것이 확인되는 것을 보건대9 군신 및 신료들간 신뢰를 회복하고 본인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종 역시도 공신각에 박섬의 초상을 걸라는 명을 내리면서 그의 전쟁 이후의 노력을 지목하며 그 역할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10
아마도 박섬은, 비록 본인이 남행호종공신이라고는 하나 2차 고려거란전쟁 중 저지른 실책으로 인하여 불안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입지 확보와 방어를 위하여 성실히 직임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본인의 개인적인 양심적 가책이 작용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존재한다.11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이러한 박섬의 모습이 묘사된다. 남하하는 거란군을 피하여 영주 안북대도호부를 버리고 도주하는 박섬의 모습, 이후 전쟁이 끝난 뒤 현종에게 재기용되는 모습, 재기용후 사직을 청한 박섬의 모습, 이후 현종 앞에 불려가 어찌하여 사직을 청하였는지에 대해 답하며 자신의 과오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모습, 그러므로 자신은 정사를 돌 볼 자격이 없다고 하는 모습, 그런 박섬에게 그 부끄러움을 고려에 대한 헌신으로 씻으라고 하는 현종의 모습등으로 박섬의 서사가 구축된다.
<고려거란전쟁> 中, 박섬.
일견 문제가 없어 보이는 서사이지만, 이 부분 역시 자잘한 문제가 존재한다. 극의 전체적인 서사와 얽힌 문제들을 제외하고 오직 박섬의 서사에 집중해서 살펴보자면, 박섬의 중간 행적인 '호종공신'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실제의 현종은 남행 도중에 박섬과 합류하여, 호종을 받으며, 그의 조언을 받으면서 나주까지 함께 했다. 덕분에 박섬은 그 과정에서 호종공신으로서의 입지나마 다질 수 있었고, 현종 역시도 박섬이라는 인물의 됨됨이를 조금이나마 평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의 현종은 몽진 도중에 박섬과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이, 전후에야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과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개혁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김은부의 조언에 따라, 박섬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한 제대로 된 숙고 없이 그저 박섬이 자신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다' 하는 말만을 믿고 그에게 관직을 맡기고 조정으로 돌아오게끔 했다.
문제가 그 뿐은 아니다. 박섬이 현종의 남행을 호종하는 모습이 사라진 탓에, 시청자들은 그가 안북도호부를 버리고 도주한 모습을 본 상황에서, 그가 제대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마음을 머금었는지에 대한 판단을 고작 박섬이 현종 앞에서 하는 말만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박섬역을 맡은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은 차치하고서, 그의 행적이 아닌, 배우의 연기를 보고 그 서사를 납득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박섬'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서사로 지나치게 작품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이보다 큰 문제는 많고 많으며, 박섬의 서사 정도면 16화의 양규 사후 시작된 어마어마한 서사, 연출, 왜곡 문제들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괜찮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특히 박섬은, 하공진과 더불어 '죄를 저질렀지만 그 죄를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해 나가는 공훈신'으로서 창작될 수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드라마 속의 김은부와 현종의 논리-해당 논리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를 뒷받침해 줄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중간의 호종신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쉽기 그지 없다.
1.『고려사절요』 권3, 현종 1년 12월 8일.
2.『요사』 본기, 성종 본기 6권, 11월 을유일.
3.『고려사』 권94, 열전 7 지채문 열전. 蔡文奔還京, 奏西京敗軍狀, 群臣議降, 姜邯贊獨勸王南行.
4.『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1월 29일, 挈家往其鄕務安縣, 道逢車駕.
5.『고려사』 앞과 같음, 『고려사절요』 권3, 현종 2년 1월 8일.
6.『고려사』 권125 열전 권제38 간신전 박승중 열전, 『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1월 29일.
7.『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9월 6일.
8.『고려사』 권76 권제 30 백관지 1, 선공시. 사재시.
9.『고려사』 권7, 세가 권제7, 문종 6년 5월 14일.
10. 『고려사』 앞과 같음, 比及收復京城, 終始一節, 以安社稷.
11. 임지원은 박섬에 대한 엄격한 군법 집행이 이루어 지지 않고 그가 사재경을 거쳐 장작감으로나마 재기용된 부분을 다른 사례들과 함께 살핌으로서 2차 고려거란전쟁 종전 직후까지 고려의 군령의 조문과 처벌 규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추정했다. 또한 『고려사』 형법지의 군율 기사를 통하여 2차 고려거란전쟁 이후 전쟁의 복기와 그 이후의 고려와 거란 간의 수 차례의 전쟁 과정에서 제대로 된 군법이 제정되고 다듬어 진 것으로 보았다. 임지원, 「고려 현종대 軍律 제정과 戰歿者 예우」, 『대구사학』 137호, 대구사학회, 2019, 1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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