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5년 정축(1637) 5월 21일
연려실기술 제26권
안부종사(按部從事)도경유(都敬兪)란 자는 제멋대로 행동하여 평소 군사들의 신망을 잃고 있던 자인데,
경상 감사의 종사관 도경유를 정배했는데 누군가에게 살해되다
헌부가 아뢰기를,
“병란 때 경상 감사 심연(沈演)이 종사관 도경유(都慶兪)를 좌우 병사의 진중에 보내 전투를 독려하게 하였는데,
“병란 때 경상 감사 심연(沈演)이 종사관 도경유(都慶兪)를 좌우 병사의 진중에 보내 전투를 독려하게 하였는데,
접전이 시작되자 도경유가 먼저 도주하여 전군을 놀라 무너졌으므로 온 도내의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심연은 사정에 구애되어 즉시 효시(梟示)하지 않았으므로 물정이 분하게 여김이 오랠수록 더욱 격렬합니다. 도경유를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하니, 상이 따랐다.
마침내 평해군(平海郡)으로 정배되어 양지(陽智)에 도착했는데,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
. 이보다 앞서 도경유는 합천(陜川) 사람 박충겸(朴忠謙)과 혐의가 있었다.
심연의 종사관이 되었을 때 박충겸은 마침 민영(閔栐)의 관하에 있었는데, 도경유가 머뭇거린다는 핑계로 박충겸을 참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도경유의 아들 신승(愼昇)이 자기 아비의 죽음은 박충겸의 아들 유길(有吉) 등 세 사람의 보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며,
격쟁(擊錚)하여 옥사를 일으켰는데, 끝내는 증거가 명백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여러 해가 되도록 결정을 못하다가
대신이 의옥(疑獄)을 가볍게 단정할 수 없다고 하여 마침내 모두 풀어주었다.
처음에 심연이 전 서윤(庶尹) 도경유(都慶兪)를 종사관으로 삼아서 군중의 일을 경유에게 일임하였다.
경유가 우병사의 군관 박충겸(朴忠謙)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이고,
너무 급하게 진군하기를 독촉하여 먼 고을의 군사는 반 이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군량(軍糧)이 후방에 있었으나 부득이 진병하였다.
군졸이 의장(衣裝)을 모두 버리고 입고 있던 홑옷도 짧게 자르고 해가 질 때까지 행군하니,
얼고 굶주려 군사들의 마음이 이미 무너져 쌍령(雙嶺)의 패전 원인이 모두 경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기언 별집 제19권 |
그자가 각 군에 독촉하여 아침이 밝기도 전에 병력을 진군시켜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군사들이 멀리서 왔고 차가운 날씨에 춥고 굶주렸으니, 윽박질러 싸우게 한다면 필시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도경유가 그 말을 듣지 않고 먼저 우영 군관(右營軍官)의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겁을 주니,
공이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로다. 대사(大事)는 끝장났도다.”
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오랑캐의 복병(伏兵)들이 크게 일어나 양 군영의 군사들이 모두 패하였다.
공이 적들과 치고 박고 싸우자 군사들이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우기는 하였으나 휘하의 군사들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적들이 승세를 타고 밀려오자 공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전사하니, 정축년(1637) 정월 3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