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칼부림 中, 작가 고일권)
16세기 압록강 이북과 동서 지역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그 지역을 주름잡던 여진의 각 부족들은 얼마 없는 자원과 영토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위해 정말 피터지게 싸웠다.
명과 조선의 사이에 끼어 큰 확장성을 가질 수 없는, 한 곳에 모인 수백만의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얼마나 처절히 싸웠을지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당시의 그 땅-지금의 만주-는 약탈과 살육이 횡횡한 곳이었을 것이다.
명나라는 이들 여진이 구심점을 두고 큰 세력을 형성치 못하도록 여진의 각 세력들을 이간시키고, 또 한 쪽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면서 적당히 통제 정책을 펼쳤다.
조선 역시 압록강 인근의 동해 여진을 상대로 예방 전쟁이나 방어전, 역습등을 행하면서 그들을 통제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16세기 후반, 아타이(Atai)의 난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아구(Agu)가 명군에게 패퇴하고 이후 처참히 죽임을 당한 것에 분노하여
1582년 구러성(Gure Hoton)을 거점으로 하여 명군에 공격을 감행하고 주변 명나라 영토를 약탈한다.
그러나 명의 대응은 빨랐다. 광녕 총병 이성량은 야전에서 아타이를 격퇴한다.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아타이는 자신의 거점으로 후퇴한다.
그러다가 이듬해 아타이가 다시 몸을 회복하고 동맹자인 아하이(Ahai)와 함께 군대를 일으키자,
다른 친명 여진 부족장들 -특히 퉁갸 부쿠루- 를 앞세워 아예 그의 거점 구러성과 아하이의 거점 샤지성(Saji Hoton) 포위한다.
먼저 함락된 것은 샤지성이었다. 부쿠루의 군대에 의해 샤지성을 지키던 군대의 절반은 도륙당하고 절반은 도망쳤다. 성주 아하이는 살해당했다.
이후 이성량과 부쿠루의 군대는 함께 구러성을 공격한다.
여기서 여진의 또 다른 친명파 부족장, 기오창가와 그 아들 탘시가 등장한다. 이 둘은 명나라 편에 서서 아타이의 난 진압에 종군하다가 명군에 의해 오인살해 당한다.
(오인살해설이 다수설이기에 이렇게 표기한다. 단순 전투중 전사, 부쿠루에 의한 오해를 가장한 의도적인 살해등 다른 가설들도 존재한다)
이성량은 이 둘이 죽자, 기오창가의 손자이자 탘시의 장남에게 둘의 유산을 배분하고 위로의 뜻과 자신이 줄 수 있는 피해 보상금을 전한다.
순식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청년은, 보상을 받은 뒤 조용히 명에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청년의 마음속엔 이미, 수십년동안 계속해서 불타오를 업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누르하치.
후일 여진 세력을 제패하고 만주를 통일하는 이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
총병 이성량과 친명 건주 여진 부족장 부쿠루가 토벌군 지휘관으로, 아타이가 저항군으로서 싸운 구러성 전투에서
친명파 여진 부족장 기오창가와 그 아들 탘시가 명군에게 살해당하여 죽었다.
그것은 오인살해의 가능성, 다른 여진부족장 퉁기야 부쿠루에 의한 계획된 모략에 의한 살해의 가능성등 여러 가능성이 존재했다.
기록상 가장 주류가 되는 가설은 오인살해의 가능성이라지만, 적어도 사서를 볼 때에 기오창가의 손자이자 탘시의 아들인 누르하치 본인은
부쿠루가 계략을 짜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아타이의 난 진압 이후 부쿠루가 건주 여진의 실력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누르하치는 잠자코 자신의 속을 감추고 있었다. 당시의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최소한 부쿠루에 대한 원한만은 무척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명의 광녕 총병 이성량은 그런 누르하치를 불쌍히 여겨 보상을 주고 아버지의 세력을 일부나마 이어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성량은 원래도 누르하치와 나름 안면식이 있던 인물이었기에 이런 조치를 행한 것이다.
사실 안면식 정도가 아니라, 누르하치는 이성량과 함께 꽤 긴 세월을 함께 했다. 그의 밑에서 종군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누르하치의 뒤를 봐준 이성량과는 달리, 다른 명나라의 사령관들은 누르하치 나부랭이(당시만 해도 누르하치는 영향력도 힘도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보다는,
명에 보다 충성적이면서도 강한 세력을 가진 부쿠루를 무거이 여기고 또한 지원했다.
누르하치는 이 조치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지만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부쿠루가 누르하치에게 귀부하라고 종용했어도 다만 따르지 않을 뿐이었다.
누르하치는 복수의 칼날을 조용히 갈아나갔다.
그에게는 오직 100명에 불과한 장정과 13벌의 갑주만이 있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동맹자들 역시 있었다.
그렇기에 준비는 착착들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누르하치는 복수를 시작했다. 그는 우선 명나라 측에 부쿠루에게 복수를 하게 해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당연히 명나라는 이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들은 고작 100여명의 장졸만 있는 애송이 따위의 서신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필요성도 못느꼈다.
누르하치는 그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이들 역시 우후죽순으로 들고 일어나게 했다.
어느정도 군대가 갖추어지자, 1583년 5월 누르하치는 그들을 이끌고 부쿠루가 있는 투런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내부의 배신자, 사르후성의 주인 노미나와 그 동생 나이카다가 이것을 부쿠루에게 노출하여 부쿠루는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는 부쿠루가 없어진 투런성을 끝내 함락시키고 그 곳을 점령했다. 그것은 누르하치의 패도를 향한 첫 발이었다.
----
북유게 글리젠이 망해서 이거라도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