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변호사입니다.
원고나 피고를 대리하여 법정에서 당사자의 권리를 실현하는 일을 합니다.
자문도 해주고 출장도 가고 미팅도 하고 재판에 부수되는 조정이나 화해도 참가하지만 변호사의 주된 업무는 소송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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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주간은 휴정기여서 재판이 없었는데 최근에 조정(판사가 아닌 조정관이 당사자를 불러 다툼을 합의시키는 절차)하러 갔다가 피고한테 한소리 들었습니다.
피고에게 6000만원 정도의 채무가 있는데 자기가 너무 힘드니 봐달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천만원 정도 말을 꺼내더라구요.
바로 조정 불성립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왜 내가 이렇게 힘든데 나도 충분히 성의를 보이는데 이렇게 야박하게 구냐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원고 대리인이고 원고가 몇천을 받아야 하는데 고작 천을 얘기하면 조정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씀드렸죠.
서로 짐을 싸고 조정실에서 나가려는데 너무 답답해서 제가 한마디 더 했습니다.
재판으로 돌아가면 당신 무조건 전부 진다, 나도 조정실에 온 이유가 약간은 양보하기 위해서다(의뢰인의 허락은 받았죠),
여기서 사오천 정도 내겠다고 하는게 낫다라고 했는데 자기도 너무 힘든데 그게 무슨 말이냐라면서 변호사면서 왜이리 사람 사정을 모르냐라고 해서 입을 닫고 말았습니다.
제가 답답해서 한마디 한 이유는, 사실 이러면 안되는데 의뢰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고가 불쌍해서였습니다.
피고가 전부 패소할게 '법리상' 분명한데, 왜 굳이 판사님한테 재판을 받고 6000만원 전부를 부담하려드는지 알수 없습니다.
나중에 원고가 지불한 제 변호사선임비용에 더해 6000만원 전부 패소해서 이자까지 부담하게 되면, 판사를 욕하겠지요.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법이 잘못되었다고 다시 세상을 원망하겠지요. 제가 기록을 읽어본 바 피고 잘못이 맞는데 그렇게 저를 죽일듯이 삿대질을 하니 한숨만 나옵니다.
저는 당신을 배려한거고,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는것 같으니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린건데.
조정실에서 다음 기일이 곧 잡힐테니 그때 뵙겠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2
미성년자가 무면허로 오토바이를 운전하여 신호를 무시하여 과속하다가 자동차을 들이받고 사망하였습니다.
오토바이 운전자 뒤에 동승한 미성년자 친구는 불구가 되었고 자동차 운전자도 크게 다쳤습니다. 자동차 운전자가 제 의뢰인이자 원고입니다.
오토바이 운전자의 부모를 피고로 하여 법정에서 만났는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도 너무 힘들어서 초췌해 보이셨는데, 그나마 장례를 치르고 온 곳이 자식'이' 다치게 한 사람에게 배상하기 위한 법정입니다.
판사님한테 돈이 없다고 읍소하고, 저한테도 봐달라고 하는데 저는 그럴수 없습니다.
돌아가신 당신 아드님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죠.
그날 변론이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이 부부도 변호사 선임할 돈이 없으니까 상대방(!)인 저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미성년자인 당신 아들에 대한 책임은 당신 부부가 직접 부담하기 때문에 상속포기로도 면책이 안된다구요.
왜 그렇게 인정이 없느냐, 변호사님이 젊어서 자식이 없더라도 누군가의 자식일 것이고, 우리는 자식을 막 가슴에 묻고 온 상황이 아니냐.
상대하기 괴로워서 다음 기일에 뵙겠다고 하고 도망치듯 법원에서 나왔습니다
#3
제가 원고 대리인일때 피고가, 제가 피고 대리인일때 원고가 저에게 법률적 조언을 구할때가 가장 괴롭습니다.
이 사람들은 삶에 찌들고 힘들어서 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책임지라고 소장과 서면을 쓴 사람이 바로 변호사인 저인데, 저한테 법률적 조언을 구하면 솔직히 뭐라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무감각하게 기록을 검토합니다. 바빠서 기록에 나타난 사람들이 갑이나 을로 보여요. 이러면 절대 안되는데, 저는 송무에 맞지 않나 봅니다.
아니면 오히려 그래야 송무판에서 더 오래 살아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판의 진행은 구술주의라고 해서 재판장 앞에서 말로 구두변론하는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재판은 법정에 나가서 미리 제출한 서면을 진술한다고 하고 바로 변론을 끝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이 재판 출석의 구두변론을 원칙으로 삼은 이유는, 소송에 나오는 당사자를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천 개의 서면보다 더 와닿는 무엇인가가 고려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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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일은 당연히 안봐줍니다. 그런데 타인의 삶에 무관심해지면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되는게, 좋은 변호사는 아닌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 면이 분명 있어요. 그게 사람이 닳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IP보기클릭)116.120.***.***
간만에 너무 멀쩡한 글이라 당황.
(IP보기클릭)115.23.***.***
고생 참 많으십니다...
(IP보기클릭)121.140.***.***
법원 공익인 친구가 해준 말이 있었는데 ‘법원이 엄숙한 곳일 줄 알았는데 바닥과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 쏟는 오물통이었다’ 고. 힘내세요. 참 힘드시겟어요..
(IP보기클릭)180.229.***.***
저는 사회복지사 일을 12년 정도 했는데...... 대학 3학년, 4학년 방학 중 실습나가서 클라이언트 대면하고 intake 진행하다보면 감정이입하고 꼭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으로 판단을 흐리곤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위한 실습이겠지만) 졸업하고 상담면접의 방법 등 과정 수료하고 필드 업무나 클라이언트 사례나 개입 등 선배(는 솔직히 별 도움이 안되었고)나 전문가 훈련과 점검으로 좀 바로 잡혀 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변호사분들도 비슷할 것 같은데, 저 같은 경우는 상담면접의 7원칙을 상기하면서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개별화 의도적 감정표현 (객관적 상황파악과 라포형성을 위한) 통제적 관여 수용적 태도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나 표현, 태도 등을 다 받아준다기 보다는 허용) 비심판적태도유지 (선입견 배제) 자발성 유도 비밀보장 (중요) 사회복지사 10년 넘게하다보니 오히려 상황에 냉정해지더군요. 사회복지사 하는 동안 씁쓸도 했지만 참 재밌었는데, 경제적으로는 너무 재미가 없어 그만두고 지금은 식당 운영하네요 ^^ 혹시 번아웃이 아니신지...... 변호사분들도 직무상담이나 심리상담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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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참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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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공익인 친구가 해준 말이 있었는데 ‘법원이 엄숙한 곳일 줄 알았는데 바닥과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 쏟는 오물통이었다’ 고. 힘내세요. 참 힘드시겟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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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일은 당연히 안봐줍니다. 그런데 타인의 삶에 무관심해지면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되는게, 좋은 변호사는 아닌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 면이 분명 있어요. 그게 사람이 닳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 19.01.04 17: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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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분이시네요, 아직은 때(?)가 타지 않으신 분 같아보여서 부럽기도하고 걱정도 되고 하지만 알아서 잘 하실거 같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항상 정의를 변호하진 않아서 더 씁쓸해지는 것 같습니다. | 19.01.04 19: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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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너무 멀쩡한 글이라 당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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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회복지사 일을 12년 정도 했는데...... 대학 3학년, 4학년 방학 중 실습나가서 클라이언트 대면하고 intake 진행하다보면 감정이입하고 꼭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으로 판단을 흐리곤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위한 실습이겠지만) 졸업하고 상담면접의 방법 등 과정 수료하고 필드 업무나 클라이언트 사례나 개입 등 선배(는 솔직히 별 도움이 안되었고)나 전문가 훈련과 점검으로 좀 바로 잡혀 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변호사분들도 비슷할 것 같은데, 저 같은 경우는 상담면접의 7원칙을 상기하면서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개별화 의도적 감정표현 (객관적 상황파악과 라포형성을 위한) 통제적 관여 수용적 태도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나 표현, 태도 등을 다 받아준다기 보다는 허용) 비심판적태도유지 (선입견 배제) 자발성 유도 비밀보장 (중요) 사회복지사 10년 넘게하다보니 오히려 상황에 냉정해지더군요. 사회복지사 하는 동안 씁쓸도 했지만 참 재밌었는데, 경제적으로는 너무 재미가 없어 그만두고 지금은 식당 운영하네요 ^^ 혹시 번아웃이 아니신지...... 변호사분들도 직무상담이나 심리상담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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