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아즈리는 17~18세기 유럽 왕족과 귀족들이 열광했던 중국풍 취미를 말합니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으로 도자기, 비단, 차 등 중국 문화가 대거 유럽에 유입되면서 유럽에는 말 그대로 중국 열풍이 불었습니다. 특히 중국의 자기를 소유하는 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중국풍 의상을 입거나 '차이나 룸'을 만들어 그 안을 전부 중국풍으로 꾸미는 것도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동양의 예술이 유럽의 미술과 건축, 가구, 의상 등 다방면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죠.

Giovanna Garzoni
China Bowl with Figs, a Bird, and Cherries
1651-62
17세기 유럽은 중국 예술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도자기, 그중에서도 순도 높은 백색의 자기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려 구워낸 청화백자가 있었습니다.
중국의 도자기는 14~5세기 오스만 제국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크로드를 거쳐 술탄의 궁에 도착한 도자기들 중 소량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간 것인데 당시 중국의 도자기는 예의를 갖춘 선물로서 국가 간 외교 도구로 활용됐을 만큼 최고급으로 대접받던 물건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왕실에서 사용한 물품을 분류 정리한 자료를 보면 당시 중국 청화백자 화병 하나의 값이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싸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죠. 한마디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사치품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Giovanna Garzoni
Chinese Vase with Flowers, a Fig, and a Bean
1625-50
17세기 이탈리아 여성 화가 지오반나 가르초니(Giovanna Garzoni, 1600~1670)의 그림에는 청화백자가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Willem Kalf
Still-Life with a Late Ming Ginger Jar
1669
네덜란드 정물화가 빌렘 칼프(Willem Kalf, 1616~1693)의 그림 속에서도 중국 도자기는 매우 분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Willem Kalf
Still-Life with Chinese Porcelain Bowl
1662
이 그림에서도 청화백자가 주인공입니다. 우윳빛 백자의 은은한 광택과 코발트빛 화려한 문양의 도자기는 그 자체로 동양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이었고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유럽의 투박한 자기와 달리 특유의 희고 윤기 있는 중국의 도자기는 '하얀금(white gold)'이라 불리며 사치가 취미였던 유럽 귀족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고 이에 따라 상인들은 목숨을 건 항해를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Jan van der Heyden
Still-Life with Globe, Books and Chinese Silk
1669
동시대 네덜란드 화가 얀 반 데르 헤이덴(Jan van der Heyden, 1637~1712)의 그림을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색의 자수가 수 놓아진 붉은 비단 테이블보 위에 책, 지구본, 나침반, 지도, 컴퍼스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습니다. 모두 네덜란드 사회의 경제 부흥에 대한 자부심과 과학의 발전,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동방 세계에 대한 지적 관심을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인 변화를 유도할 만큼 높아졌습니다. 상류층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고 병풍과 부채는 집안을 꾸미는 주요 장식품이 되었죠.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마이센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지요. 당시 유럽 공방 장인들은 중국풍과 인도풍이 섞인 동양풍 도자기를 만들어냈고 제작된 자기들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시누아즈리가 시작된 것입니다

Benjamin Block
Portrait of Count Ferenc Nádasdy II / Portrait of Princess Anna Julianna Eszterházy, Wife of Count Ferenc Nádasdy II
1656
이 두 초상화는 17세기 독일과 헝가리에서 활동했던 화가 벤자민 블럭(Benjamin Block, 1631~1690)의 작품입니다. 그림 속 두 주인공은 헝가리 백작 페렌츠 나다스디 2세와 그 아내 안나 공주로 나다스디 2세는 악녀로 유명한 바토리 여왕 이야기에 등장하는 검은 영웅 페렌츠 나다스디의 아들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백작이 입고 있는 황금빛 문양이 수 놓아진 붉은색 옷과 백작 부인의 꽃무늬 공단 드레스는 한 눈에도 이국적입니다. 특히 백작이 입고 있는 검은 띠를 둘러 구분한 상하의와 표의라고 불렸던 겉옷의 자수, 끈 단추 모두 중국을 연상케하는 것들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복식과 중국 복식 문화가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인데요, 비단으로 만든 슬리퍼와 테이블 위에 놓인 장식장도 이국적입니다. 헝가리는 유라시아 무역 루트의 중요한 연결점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동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나라였는데요, 당시 시누아즈리가 회화와 공예를 넘어 복식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네요.

Godfrey Kneller
The Chinese Convert
1687
시누아즈리는 문화뿐 아니라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매개로 중국의 지식과 사상이 유럽에 소개되었고 이는 중국에 대한 관심을 넘어 유럽의 사유를 깊이 성찰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국에 대한 관심은 종교 문제, 종교적 관용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유럽 교회는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했고 개종하는 현지인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1693년에는 중국 황제도 개종을 허용했고요. 문제는 해당 지역의 전통적인 제례와 종교적인 관습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에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제사'가 있었지요. 논쟁은 유럽으로 번졌고 마침내 교황청과 중국 황실 사이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었죠.
이 사건은 유럽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의 중국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고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문화상대주의적 시각을 견지하는 동시에 자기비판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 대두되기도 했습니다.

Francois Boucher
Lady Fastening Her Garter
1742
로코코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 프랑스와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의 그림은 당시 시누아즈리 열풍을 그대로 보여준다.
귀부인들이 화장에 열중하고 있는 방은 병풍과 도자기 등 온통 중국에서 건너온 사치품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Francois Boucher
The Chinese Garden
1742
같은 해 그려진 <중국식 정원>이라는 작품.
당시 유럽의 정원은 중국적인 탑을 세우고 다과를 즐기기 위한 정자까지 만드는 등 중국식으로 꾸미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한 것은 프랑스였다.
1670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 정원 한편에 중국의 청화백자를 본뜬 자기와 도판으로 내외를 장식한 '자기(磁器)의 트리아농'을 만들었고 루이 15세는 샹티이 성 입구를 시누아즈리 스타일로 꾸며 놓았고 정원은 중국식 운하, 조각, 정자 등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특히 루이 15세는 중국식 정원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궁전 격식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때로는 의상 부터 소품까지 모두 중국풍으로 꾸미고 중국 하인을 거느리며 소풍을 즐기기도 했구요. 중국인처럼 보이는 그림 속 인물들 중 귀족들은 실제로는 서양인들이었다는 얘기가 되는데요, 로코코 시대가 만들어낸 수많은 판타지 중 중국의 이미지는 가장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이었고 부셰는 그러한 판타지를 그림으로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Francois Boucher
The Chinese Garden
1742
역시 부셰의 작품입니다. 중국식 전각과 나룻배, 물지게 남부 지방 전통 모자와 변발을 한 사람들까지 배경을 모르고 봤다면 18세기 프랑스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풍이 가득합니다. 부셰는 그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했던 화가였습니다.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단연 '예쁜 것(le joli)'에 대한 탐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심에는 시누아즈리가 있었습니다.

Chinoiserie porcelain from Frankfurt, 1700
170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생산한 시누아즈리 스타일 도자기 접시

Plate. British. Bow Porcelain Factory, 1755
1755년 영국에서 만든 중국풍 도자접시

Charlottenburg Palace II, Berlin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내를 위해 지은 여름 궁전인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의 도자기 방 일부

The Chinese House is a garden pavilion in Sanssouci Park in Potsdam, Germany, 1755-1764
독일 포츠담 상수시 궁전 정원에 있는 중국식 하우스

The Pagoda, Kew Gardens, England, designed by William Chambers, 1761-2
중국식으로 꾸며진 런던의 큐가든 왕립 식물원

Nymphenburg Palace, Munich, Germany
청화백자 스타일의 자기로 벽을 장식한 독일 바이에른 왕가의 님펜부르크성

Tea Casket, British, Staffordshire. White enamel on copper painted in polychrome enamels. met museum, 1770
1770년 제작된 차 보관상자

Chinese Folding Screen. 18th century. Wood, glass paper, Imperial Furniture Collection, Vienna
18세기 중국 병풍

BOUCHER, François
Chinese Dance
1742

RODE, Bernhard
The Empress of China Culling Mulberry Leaves
1773

ROESTRAETEN, Pieter Gerritsz. van
Still-Life with Chinese Teabowls

STREECK, Juriaen van
Still-Life with Fruit and Chinese Porcelain

Willem Kalf
Still Life, Chafing Dishes and Dutch
18세기 전 유럽을 휩쓸었던 토마스 치펀데일(Thomas Chippendale, 1718~1779)의 가구 역시 중국풍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요. 18세기 프랑스 작가 볼테르는 저서에서 중국 문화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예술은 정교하게 완성된 예술이다. 그들의 의례는 베르사유보다 더 정교하고 문명적이다…우리가 읽는 법도 모를 때 중국인들은 이미 4천 년 전부터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문화는 고대 로마 그리스와 비견될 만 하다."
시누아즈리 열풍은 19세기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이 유행하면서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아편 전쟁으로 중국이 급격하게 몰락하면서 중국 문화에 대한 인식도 함께 곤두박질치게 된 것도 이유였지요. 중국은 수출과 수입을 닫았고 시누아즈리는 과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포니즘이 채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