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시기 백유양이라는 동인 소속 인물이 있었는데 아들 백수민이 정여립의 조카 사위였고 정여립과 절친한 사이였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백유양이 정여립에게 보낸 서찰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문제의 서찰에서 백유양이 선조를 좀 많이 디스했다 실록과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런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권, 광해 1년 2월 5일 정사 3번째기사 1609년
백유양의 자식은 여립의 조카 사위로 일가(一家)의 인연을 맺어 조정의 시비와 임금의 거조를 통지하지 않음이 없어 〈오가는〉 간찰(簡札)이 〈수백 리 밖에〉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이 총애를 잃었고 주상(主上)의 혼미함이 날로 심해진다."는 등의 말로 편지를 써서 여립에게 주었으니, 그가 적과 함께 일을 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의 부도(不道)함이 심하다.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 5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1690년
백유양은 역적 정여립(鄭汝立)에게 가까이 사귀었다. 정여립에게 보낸 글에 부도(不道)한 말이 많이 있었는데, 선조(宣祖)가 그 가운데에서도 심한 것을 진한 먹물로 문질러 없애고 국청(鞫廳)에 내렸으나, ‘이 사람은 시기하고 혼퍅하여 임금의 도량이 조금도 없다.[此人豺忌狠愎少無人君之量]’는 열 두 자는 먹이 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전하였고, 드디어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다. 선조가 역률(逆律)로 논단(論斷)하라고 명하였을 때에 정철(鄭澈)이 간쟁(諫爭)하기를, ‘경악(經幄) 사이에서 한 정여립이 나온 것도 이미 불행인데 어찌 다시 두 정여립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므로 임금이 함부로 군다고 꾸짖었는데,
연려실기술
백유양(白惟讓)이 여립(汝立)에게 보낸 편지에, 임금에게 대하여 부도(不道)한 말이 많이 쓰여져 있었는데 임금이 그 중 가장 심한 것만 골라내어서 국청(鞫廳)에 내려 보냈다. 그 편지에, “이 사람(임금)이 시기심이 많고 모질며 고집이 세다.” 하였고, 또 “이 사람은 조금도 임금의 도량이 없다.” 하였으므로 임금은 백유양을 역적으로 처단하라고 명하였으나 정철이 아뢰기를, “경악(經幄)에서 여립같은 역적 하나가 난 것만도 큰 변고인데, 백유양이 비록 못되었으나 어찌 다시 여립같은 역적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대신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한다고 말하였다.
즉 서찰의 내용들을 보면 백유양은 선조가 공빈김씨 소생 인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은 무시하고
인빈 김씨 소생 자식들만 귀여워 하고 날이 가면 갈 수록 선조의 정신이 안 좋아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선조를 가리켜 그냥 이 사람이라고 호칭하면서 시기심 많고 모질며 고집이 강하고 임금으로서의 도량이 없다고 디스하였다
즉 백유양은 선조에게 임금의 자질이 없고 사람으로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서찰들을 본 선조는 크게 분노하였다 정철이 백유양을 죽이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오히려 분노한 선조에게 정철은 욕이나 얻어 먹었다
결국 정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유양은 곤장에 맞아 죽었고 백유양의 아들들인 백진민 백흥민 백수민 역시 곤장에 맞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