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36권, 영조 9년 11월 7일 갑신 2번째기사 1733년
"나는 번저(藩邸)에서 입승(入承)하여 궁중(宮中)에서 생장(生長)하였으므로 일찍이 예(禮)를 읽지 못하였고, 다만 조종조(祖宗朝)의 예법(禮法)을 따랐을 뿐이다. 일찍이 경자년575) 대상(大喪) 뒤에 전도(前導) 없이 대궐로 가다가 길에서 대신(大臣)을 만났는데, 앞에 있으면서 끝내 길을 비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뒤따라 가지 않으려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갔었다. 내가 왕자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에 저사(儲嗣)가 없고 종실(宗室)은 고단(孤單)하여 세력을 부릴 만한 기운이 없는데 또 제재하고 억누르고자 하니, 내가 붙들어 주지 않으면 누가 다시 돌아보겠는가? 선묘(宣廟)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 꽃이 피고난 뒤에는 다시 꽃이 없다’ 하였으니, 매번 이 하교를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자연히 평안치 않았다. 내가 해흥군(海興君)의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영조의 어머니는 잘 알려줬다 싶이 무수리 출신이었음 그런 천한 출신 때문에 왕자였지만 여러 사대부들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하고
영조 본인이 왕자 시절에 대놓고 조정 대신에게 무시를 당한 일이 있었다며 서러워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존재 함
그리고 잘 알려줬다 싶이 숙종 때문에 당파가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음 노소론 갈등이 극에 치달았고
영조도 처음부터 싸패라서 가족들에게 개지랄 떤게 아니라 어찌보면 이쪽도 엄연히 환경 때문에 정신병이 존재했던 인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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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신병을 아들에게 물려준거였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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