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먹으면서 더 써보는 고려 이야기 시간
유게이들 다들 한국사 배울때 고려는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진 국가다! 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
그런데 이게 건국 당시의 고려를 중앙집권국가냐, 연합정권국가냐고 보는 견해는 아직도 정해진 건 없어.
그래도 이런거 알아두면 어디서 나무위키라도 읽고 오란 소리는 안 들을 수 있어!
일단 먼저 고려 건국 당시 호족들의 특징에 대해서 한번 가볍게 살펴보자
호족들이란 무엇인가, 특정 지역을 세력, 재정적 기반으로 해서 독자적 무력을 가지고 있는 지역 유지들을 의미해.
후삼국시대 유명 호족들은 위에 지도에서 보이다 시피 왕륭, 아지태, 양길...뭐 아무튼 꽤 많지.
신라 말기에 중앙 통치에서 벗어난 호족들은 각자 궁예, 견훤 등 유력 세력 밑으로 들어가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거야.
그리고 고려가 통일한 이후애도 이들의 세력은 상당히 강했는데, 전쟁과정에서 그 이익으로 확보한 재정이나 사병, 혹은 왕건을 비롯한 왕실과의 혼인 등으로 세력을 불려왔어.
개중 일부는 고려 건국 후에 반란을 모의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고려 건국 직후에 반란을 도모하는 등, 전체적으로 정국이 불안정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었어.
그래서 왕건은 이런 호족 세력을 중앙에 흡수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근데 여기서 견해가 갈리는 건 고려가 중앙집권국가냐, 호족연합정권국가냐. 이거야.
우선 중앙집권국가라고 보는 시각을 한번 살펴보자.
다수의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했어. 이쪽 견해에서는 이 '귀부'가 명목상의 귀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중앙에 편입되려는 신속이라고 보고 있어.
또 고려 극초기에도 이미 정치적, 군사적 제도면에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어있었어. 물론 당나라, 신라, 태봉 등 이전 국가들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거지만 어쨌든 중앙집권체제 자체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고 있다는거지.
반대로 호족연합정권이라고 보는 시각은 다음과 같아.
방금 얘기잔 '귀부'는 단순히 '명목상'이었다는 거야. 이 호족들은 귀부 이후에도 나름대로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전술한 반란모의도 가능했고, 고려가 후백제랑 싸우는 동안에도 호족들은 여기붙었다 저기붙었다 할 정도의 자유성을 유지했다는 거야.
또 이들은 통일 이후에 왕조체제에 편입된 이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했어. 방금 '정치, 군사적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됐다는 얘기를 한거랑 안맞는거 아니냐고? 어디까지나 정치적으로 편입된거지 나름대로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거야.
어처럼 호족들은 고려 건국과 통일 이후에도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 후에 태조가 이들을 흡수하고 통제하려고 그렇게나 노력을 했고, 또 태조 사후 혜종/정종/광종 동안 호족들의 왕위쟁탈전이 벌어진거 아니냐는게 이 견해야.
두 견해는 아직도 신명나게 싸우는 견해지만, 확실한 건 이런 견해가 나올 정도로 고려 초기 왕권은 미약했다는 거야. 왕권이 강했으면 이런 얘기가 나오겠냐고 ㅋㅋㅋㅋㅋ
그래서 최근에는 고려를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이 짙은 중앙집권국가'라고 보기도 해. 모순되는 말 같지만, 귀부 시기에 따라서 타협과 통제의 강도 차이가 존재했다는 걸 근거로 들고 있지.
아무튼 이런 호족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태조가 한 노력들은 뭐, 수능 수준에서도 나오는 얘기지만 일단 한 번 해볼까.
먼저 유명한 결혼정책이야. 여기서 왕건이 혼인한 유력 호족 가문들과 그 세력 기반을 분류하면
정주 유씨, 나주 오씨 – 서해 해상 세력
충주 유씨 – 중부 내륙지역
황주 황보씨 – 예성강 서북, 패서 내륙지역
신라왕실
대략 이정도로 분류해볼 수 있어. 물론 이들 사이에도 세력의 수준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장자인 혜종의 왕권이 약한거기도 해. 혜종의 외가인 나주 오씨 집안은 기록에 따르면 측미했다고 적힐 정도로, 다른 세력들에 비해 약했던 걸로 보이거든.
다음은 사성(賜姓)이야. 태조는 공신, 유력 호족 가문에 왕씨 성을 하사했어. 이걸 학계에서는 '의제가족적 관계'라고 하는데, 피는 안이어졌지만 일단은 가족이니까 배신하지 않기!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돼.
사심관, 기인 제도도 짚고 넘어가야지.
우선 사심관제도는 공신 등 권신을 지방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이들을 통해서 지방통제를 시도했다는 거야.
기인제도는 유력 지방 향리, 호족 등의 자제를 '기인'이라는 관직을 주고 개경에 인질로 잡아두는 제도고.
두 제도를 묶어서 설명하는 이유는 정치적 방법으로 중앙-지방을 엮어서 통제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라고 보면 돼.
마지막으로 서경, 즉 평양을 개발하는거야. 뜬금없어 보이지만 은근 중요한 내용이야.
고려 왕실이 개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건 여러번 얘기했어. 그렇지만 태조는 개경 외에도 멀티로 쓸 기반을 만드려 했던 거 같아. 그 기반으로 서경을 선택한거고.
이렇게 서경을 개발해서 고려 왕실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이자,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려 한거지. 이건 다른 의미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서 호족 세력을 통제하려 했다는 걸로도 볼 수 있어.
이렇게 고려 초기 호족 세력과 왕실의 연관, 그리고 태조의 對호족 정책에 대해 간략하게 써봤어.
다음 내용을 뭐 써볼까...나중에 공부하면서 써봐야지 싶은걸로 써볼래
아니면 고려시대사 관련해서 궁금한 주제 댓글로 달아줘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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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는 그게 아니라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세종은 편년체. 김종서는 기전체를 주장했는데 옛날에는 이걸로 세종은 왕의 관점에서 김종서는 신하의 관점에서 어쩌구 했음. 근데 걍 실록 읽어보면 세종이 건강이 안 좋은데다가 자꾸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니 살아 생전에 고려사를 보고 싶은 욕심에 빠른 편찬이 가능한 편년체를 고집한 거고 김종서는 사료를 체계적으로 찾아보려면 시간이 걸려도 기전체가 나으니 그걸 고집한 거. 결국 김종서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한 세종이 고집을 꺾으면서 고려사는 기전체로 쓰이게 됐고 근데 막상 문종 1년에 고려사를 완성하고 보니 너무 버려지는 사료가 많은 거임. 그래서 김종서 등이 건의해서 남은 사료를 다시 다 살려서 편년체 사서를 낸게 바로 고려사절요. 세종 : 야 발 진짜 어차피 편년체 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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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동시대 국가들에 비해 중앙집권이 철저했던거지 그 시기 고려도 시대에 맞는 국가라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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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다 있어 그런데 현종때 개경함락당할때 보통은 7대실록이 탔다고 얘기해서 어느정도 가감하면서 봐야하는 부분임 성종대 개혁들은 표같은데서 상호보완이 되는데 정치사들은 잘해야 열전이나 행장 이정도나 교차가 되니 실체를 알기가 쉽진않지. 태조실록만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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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를 찬전하는 전 에 보면 기존 고려사에는 잡다한 내용이 많아서 핵심만 뽑습니다 하는 식으로 써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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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수님은 현종에 대해서는 '억지로' 왕위에 올라서 그런것도 있을 거다...라고도 하시더라고 | 24.04.22 18:2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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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책? 실록? 절요? | 24.04.22 18: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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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요 | 24.04.22 18: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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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데... | 24.04.22 18: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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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요는 원래 고려사 원전을 축약한거야! | 24.04.22 18: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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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를 찬전하는 전 에 보면 기존 고려사에는 잡다한 내용이 많아서 핵심만 뽑습니다 하는 식으로 써져있어 | 24.04.22 18: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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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마워 | 24.04.22 18: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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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왕 고루시쨩
아냐 다 있어 그런데 현종때 개경함락당할때 보통은 7대실록이 탔다고 얘기해서 어느정도 가감하면서 봐야하는 부분임 성종대 개혁들은 표같은데서 상호보완이 되는데 정치사들은 잘해야 열전이나 행장 이정도나 교차가 되니 실체를 알기가 쉽진않지. 태조실록만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 24.04.22 18:1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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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내가 예전에 봐서 잘몰랐던 부분도 있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 24.04.22 18:2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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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에 덧붙히자면 고려사가 조선사에 비해서 꽤 자료가 소실된 것도 많아 예를들면 조선은 말직이라도 그 업무가 다 나오는 반면 고려는 이 직책은 무슨 일을 한거지? 싶은것도 꽤 있을 정도로 조선에 비해서 내용이 부실한것도 사실이야 | 24.04.22 18:2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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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왕 고루시쨩
고려사절요는 그게 아니라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세종은 편년체. 김종서는 기전체를 주장했는데 옛날에는 이걸로 세종은 왕의 관점에서 김종서는 신하의 관점에서 어쩌구 했음. 근데 걍 실록 읽어보면 세종이 건강이 안 좋은데다가 자꾸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니 살아 생전에 고려사를 보고 싶은 욕심에 빠른 편찬이 가능한 편년체를 고집한 거고 김종서는 사료를 체계적으로 찾아보려면 시간이 걸려도 기전체가 나으니 그걸 고집한 거. 결국 김종서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한 세종이 고집을 꺾으면서 고려사는 기전체로 쓰이게 됐고 근데 막상 문종 1년에 고려사를 완성하고 보니 너무 버려지는 사료가 많은 거임. 그래서 김종서 등이 건의해서 남은 사료를 다시 다 살려서 편년체 사서를 낸게 바로 고려사절요. 세종 : 야 발 진짜 어차피 편년체 내잖아! | 24.04.22 18:2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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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읽어보면 고려사절요가 편년체 구성에 고려사보다 가벼우면서도 정작 고려사에 빠진 내용이 상당수 들어있음. 그래서 읽어보면 상호 보완적임. | 24.04.22 18:2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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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고려사 공부하는 우리는 둘 다 켜놓고 봐야한다...이 무슨 악덕! | 24.04.22 18:2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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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는 어차피 편년체 낼거면 편년체 내고 기전체 냈으면 내가 살아 생전에 고려사 봤을텐데...하고 빡치신 세종 대왕님이 더 억울하실거임(..) | 24.04.22 18:3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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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그러니까 이거다 하고 확실하게 정할 수 없는거지 | 24.04.22 18:2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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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에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태봉국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했을때 패서 호족 연합이 왕건을 추대한게 아니라 태봉국 중앙군부의 장군들이 왕건을 추대한거임. 역사 기록을 보면 역성혁명을 일으킨 왕건을 적극적으로 도와준건 패서 호족 연합이 아닌 태봉국의 중앙군부의 장군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김락, 염상, 환선길, 견권, 마난, 연주, 능식 등임. 왕건과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태봉국의 왕 궁예를 몰아낸것도 바로 이 장군들이고 이 장군들은 패서 호족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 역사 기록을 보면 패서 호족 연합이 딱히 무언가를 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음. 918년에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에 왕건을 도와줘서 고려를 건국할때 공을 세운 개국공신 목록을 보면 1등, 2등 개국공신 자리를 위에 언급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김락, 염상, 환선길, 견권, 마난, 연주, 능식 같은 실제로 왕건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태봉국 중앙군부의 장군들이 차지했고 패서 호족들의 이름이 없음. | 24.04.23 16:12 | | |
(IP보기클릭)115.140.***.***
조선이 동시대 국가들에 비해 중앙집권이 철저했던거지 그 시기 고려도 시대에 맞는 국가라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