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2월경 허투 알라로의 이동을 시작한 동해여진계 암반들은 뜻밖의 사람과 함께였다. 그 '뜻밖의 사람'이란 바로 1616년 음력 5월, 그들의 종용을 받아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후금에 패배한 인물이자, 후금군에 항복한 다른 동해여진 암반들과는 달리 지금껏 후금군에게 붙잡히지 않았던 배반자 보지리였다. 보지리는 지난 1년여의 망명 생활 동안 자신을 따르는 수십명의 반란 생존자들1과 함께 큰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항복을 결심, 이번에 허투 알라로 집결하는 동해여진계 암반들을 따라 후금에 항복하려 한 것이었다.
보지리가 동해여진계 암반들이 허투 알라로 간다는 정보를 거의 즉시 접하고 그들의 행렬에 동참한 것을 보건대, 아마도 보지리는 후금에게 항복한 동해여진계 암반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이전에도 한 차례 간접적으로 언급했던 가설이다.
지난 1617년 음력 1월부터 음력 6월까지 진행된 후금군의 '보지리의 난' 탈주자 수색에서도 보지리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장소 혹은 후금군이 수색을 하지 않을 만한 곳에 몸을 숨겼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지리는 후금군의 반란 토벌로부터 생존한 동해여진 암반들로부터 그런 은밀한 장소를 소개받고 그들로부터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금에 항복은 했으나, 보지리 자체는 반란의 동지였던데다가 사실상 자신들이 반란 지도자로 추대했을 정도로 인망 있던 인물인 만큼 후금에 항복한 동해여진 암반들이 보지리를 지난 1년여간 보호해 주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해당 가설을 신뢰할 경우, 후금에 신속된 동해여진계 암반들이 허투 알라로 이동할 무렵인 1618년 음력 2월에 보지리가 그 소식을 접하여 그들의 여정에 동참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가 그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던 탓이라 생각할 수 있다. 마땅한 근거지 없이 수십여명의 수하들만 데리고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는 후금령 동쪽의 혹독한 자연환경 아래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 역시도 도피생활중이던 그가 과거의 반란 동지들로부터 도피장소를 제공받거나 보호받고 있었을 가능성의 고려대상이다.
한편,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후금측에서도 보지리가 후금에 대한 합류를 위해 움직이던 동해여진계 암반들과 함께 허투 알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누르하치는 보지리가 자신에게 항복하고자 하면서 죽을 것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입었던 겨울용 털옷을 사람을 시켜 그것을 보지리에게 전하게 했다.2
새 옷을 전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가 굳이 본인이 입었던 옷을 보지리에게 전달코자 한 것은 자신이 보지리를 죽일 뜻이 없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한(汗)이 입고 있던 '군주의 옷'을 보지리에게 선물함으로서, 첫째로 자신이 보지리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둘째로 후금의 다른 인물들 역시도 감히 한의 옷을 한의 뜻에 따라 선물받아 입은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인식키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옷의 선물에 더불어 누르하치는 보지리가 타고 온 말이 먼 거리를 이동하여 지쳤을 것이라고 말하며 안장과 굴레등 마구를 완전히 갖춘 말을 보지리에게 보내어 그가 완전히 안심하게끔 했다.3
누르하치가 보지리를 용서한 까닭은 크게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첫번째 이유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보지리가 누르하치의 휘하 암반의 사위, 혹은 누르하치 자신의 어푸4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보지리가 통설대로 후금내 특정 암반의 사위였다면, 항복한 보지리를 죽임으로서 해당 암반의 실망 혹은 불만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어푸라면 죽이는 것이 감정적으로 껄끄럽기도 할 뿐더러 거기에 더불어 친족내에 보지리의 처분에 대한 불만자가 생길 수도 있었기에 죽이는 것을 자제하였다는 추론이다.
물론 누르하치에게는 자신의 친동생 슈르가치나 장남 추영을 숙청했던 전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경우 숙청치 않으면 추후 누르하치에게 다시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후술하겠으나 보지리는 투항 당시 아무런 힘도 없었고, 후금에 항복한 뒤에는 누르하치가 허락한 힘을 초과하는 힘을 절대 가질 수 없었으므로 당시의 누르하치에게는 지금이나 미래에나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보지리를 계속 살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기에 더불어 두 번째 이유로 보지리가 도주하거나 저항하다가 '포로'로서 생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항복'하기 위하여 허투 알라로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이미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누르하치에게 신속하여 자비를 구하려는 대상을 죽이는 것은 지금까지 항복자들에게 '관대함'을 표방해 온 누르하치 스스로의 처분기조를 어기는 것이었다. 분을 풀겠다고 투항을 결심하고 항복해온 보지리를 처형해 버린다면, 지금까지 쌓여온 누르하치의 '관대함'의 인상 기반에 균열이 가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추후 적대 세력에 소속된 자들로 하여금 항복 대신 결사저항을 선택하게끔 만들 수 있었다. 비단 명나라만이 고려대상이 아니라, 거대 여진 세력중에도 아직 여허가 그 숨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르하치로서는 항복자를 죽여 자신의 대외적 이미지에 손실을 입힐 수는 없었다.
세 번째 이유로, 보지리가 이번에 후금에 정착할 예정인 동해 여진계 암반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에 제거하기가 힘들었기 때문도 있다. 보지리를 용서치 않고 처형한다면 그것은 막 후금에 정착하려는 동해 여진계 암반들과 그 식솔, 백성들에게 안좋은 인상을 남길 수가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신속한 동해여진인들은 보지리와 친분관계가 존재했으므로, 보지리를 단번에 죽인다면 그들로서는 누르하치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에 더하여 오랜 도피생활 끝에 항복이라는 어려운 결심을 하고서 찾아온 이를 처단하는 누르하치의 냉혹함에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누르하치로서는 전혀 반가운 현상이 아니었다. 후금에 막 정착하려는 이들이 누르하치에게 지나친 공포를 느껴서는 그들의 활용 역시 어려웠다. 그러므로 누르하치는, 보지리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자비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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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록상 emu udu boigon 으로 표기된다.
2.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2월 8일
3.만문노당 상동
4.여기서 어푸는 친딸과 혼인한 사위뿐 아니라 조카사위나 양녀의 남편 역시 해당된다.
5.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92694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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