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란 기사가 지켜야할 덕목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만, 기사 계급을 정확히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사와 귀족의 계급을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12세기 후반 이전인 11세기경에는 기사 계급은 귀족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기사들은 비자유민에서 뽑힌 자유로운 자유민이자 귀족의 무력 수행을 맡았습니다.
11세기 이후 기사의 권리는 나날이 신장되었습니다. 12세기부터 농민들의 무장이 금지되었지만 기사들은 여전히 무장을 하고 말을 탔으며 봉토를 상속하는, 소귀족 형태가 되어갔습니다.
12세기 후반에는 교회에서 기사들을 그리스도의 투사라 칭하며 기사라고 칭하기 시작하며 기사들의 호전성을 억제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의 투사라는 감투는 왕과 귀족들도 기사 서약을 하는 계기가 되면서 기사 계급은 곧 귀족 계급이 되는 걸 뜻하게 됐습니다.
12세기 후반 즘, 기사도 문학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사도 문학은 우리가 아는 약자 보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약자는 귀족 여성이나 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1세기 기사.-
12세기 후반 이전인 11세기의 기사는 귀족과 기사의 구분이 있었습니다. 단편적인 예로 12세기 중반까지 귀족과 기사는 혼인 관계를 맺지 않았고 법적으로도 귀족인 아닌 자유민이었다고 합니다. 호르스트 푸어만은 기사들을 "말을 타고 싸우는 사람"이라고 단편적으로 말했습니다.
-신의 평화. 신의 휴전-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는 극심한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제후들의 권력이 팽창하던 시기였고 방화, 약탈이 끊이지 않았으며 부조리한 징수가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교회는 제후들의 무소불위 속에서 기도하는 자들과, 밭가는 자들을 지켜야함을 강력하게 느끼며 그들을 묶어둘 안정장치가 필요로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먼저 왕권에 힘을 실어주고 설교와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이걸 나르본 2차 공의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이러한 노력은 내정을 다지기 시작한 왕들과 큰 힘을 보유한 제후들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이루어졌고 공권력 부재와 혼란하던 유럽이 안정기를 되찾는 가운데, 급속히 냉각되는 열기 속에서 인구와 부동산의 포화가 불만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1차 십자군이 터져 이런 불만을 외부로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사.-
12세기 이전부터 기사 계급이 수도사 계급으로 위계를 바꾸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부상이 심해서, 임종을 눈앞에 둬서, 삶이 무의미해져서,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무서워하게 돼서, 살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해서, 등등으로 기사들이 수도사가 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런 기사들을 그리스도의 투사라고 칭했습니다만, 이건 오르데릭 비탈의 생각이었고 '새로운 기사를 위한 찬가'를 쓴 성 베르나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한때 기사의 삶을 살았던 베르나르가 생각하는 기사의 이상은 무력으로 교회와 무장하지 않은 자를 보호해야한다는 쪽이었습니다.
이런 이상은 1차 십자군 이후 2차 십자군을 통한 무기를 들지 않은자와 교회의 보호가 곧 베르나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기사의 이상에 부합했습니다.
1차 십자군 이후 성전 기사단의 발족은 성 베르나르의 이상에 부채질을 했습니다. 싸우는 수도승이란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켜 '기도하는 자'들이 '싸우는 자'들 처럼 싸울 수 있다는,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기사단의 모습은 완전 모순이었지만 여튼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성 베르나르의 친척이 성전 기사단의 창립 기사이기도 했기에 적극적으로 옹호해주었습니다.
이때 쓰여진게 '새로운 기사를 위한 찬가'입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세속 기사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과 성전 기사단에 입단할 것을 종용하는 글이었습니다.
-기사 계급의 변천과 기사도.-
2차 십자군 이후 기사들은 무력을 이교도에게 쏟아내며 그리스도의 기사라는 명칭으로 변모해갔습니다. 왕들과 귀족들도 십자군에 관심을 가지고 무기를 들지 않은자를 보호하며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사 서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기사 서임식이 차차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무기를 수여하던 의례가 지금 우리가 아는 기사 서임식으로 다채롭게 바뀌어갔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기사 계급이 더이상 자유민이 아니라 귀족이라는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기사도 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사도 로망의 거장인 그레티엉 드 트루아가 쓴 아더왕 이야기를 보면 무기를 들지 않은자의 보호는 계급적 한정적이고 교회 색체는 빈약하여 교회의 영향력이 그렇게 크지 않으며 귀족적-세속적 색체가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 논문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에 관한 고찰
-중세 프랑스 귀족의 기원과 변천사 -신인의 상향유동 및 귀족으로의 통합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로망에 나타난 기사도
-11·12세기 그리스도의 기사에 관한 고찰 - 오르데릭 비탈과 성 베르나르를 중심으로
내가 정리한거니깐, 자작이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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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퀸
내가 어떻게 알아;; | 23.09.21 01:2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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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따라 사용이 달라서 확실하게 단정짓지는 못하지만, 영국에선 귀족을 바론으로 퉁치기도함. 남작 전쟁을 귀족 전쟁이라고도 번역하거든 | 23.09.21 01:3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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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23.09.21 01:3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