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채.
조선 초기 문신.
권신인 권근의 아들.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형조 판서 노한(盧閈)이 계하기를, "신(臣)이 길에서 한 노복이 무슨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형용과 비슷은 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놀라서 물으니,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가비(家婢)인데, 권채가 그의 도망한 것을 미워하여 가두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본조(本曹)에서 이를 조사했으나 마치지 못하여 즉시 계달(啓達)하지 못했사오니, 그의 잔인(殘忍)이 심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권채를 성질이 안존(安存)하고 자세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가 그렇게 잔인했던가. 이것은 반드시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조사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0일
형조에서 계하기를,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는 일찍이 그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여종이 병든 조모를 문안하고자 하여 휴가를 청하여 얻지 못하였는데도 몰래 갔으므로, 권채의 아내 정씨(鄭氏)가 권채에게 호소하기를,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자 하여 도망해 갔습니다.’ 하니, 권채가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 속에 가두어 두고 정씨가 칼을 갈아서 그 머리를 베려고 견주니, 여종 녹비(祿非)란 자가 말하기를, ‘만약 이를 목벤다면 여러 사람이 반드시 함께 알게 될 것이니, 고통을 주어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므로, 정씨가 그 말대로 음식을 줄이고 핍박하여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더니, 오줌과 똥에 구더기가 생기게 되므로 덕금이 먹지 않으려 하자 이에 침으로 항문을 찔러 덕금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는 등, 수개월 동안 침학(侵虐)하였으니, 그의 잔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원컨대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그 아내와 함께 모두 잡아와서 국문하여 징계할 것입니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4일
이상 나무위키
권채는 권고사직 후 1년뒤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도승지 우의정을 거친다.
황희의 경우도 그렇고 과거사의 판단기준에
지금 우리의 관점을 갖다대는건 몆 번의 재고를 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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