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6년 음력 6월 28일 보지리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허투 알라에 전해진 이후 누르하치는 거의 곧장 보지리와 그의 연합 세력에 대한 응징을 주장했다. 버일러들과 암반들이 지금 원정군을 파견하면 기후와 동해 여진의 세거 지역의 환경상 원정군의 기동이 극도로 힘들어진다고 말하며 누르하치의 의견에 대해 '연기'를 건의하였으나 누르하치는 그들을 빠르게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후금군에 대응할 전략체계를 세우고 그로 인해 반란이 장기화 된다고 주장하며 원정의 즉각적인 단행을 밀고 나갔다.
절대적인 권위를 소유한 누르하치의 강력한 주장에, 원정의 강행은 결국 관철되었다. 하지만 누르하치 역시 지금 시점에서의 원정이 가질 리스크를 알고 있었기에, 원정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첫째로 2천여명의 원정군이 편성되었는데, 이는 지난 자쿠타 공략전과 어허 쿠런 공략전과 비슷한 규모의 원정군였다. 동해 여진에 대한 원정군 치고는 큰 수준이었으나 반란의 규모에 비하면 큰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러한 군대의 편성에는 여허와의 대치 문제 탓도 있었으나 보급과 기동의 원활함을 위함도 있었다.
둘째로 '숑코로 바투루' 칭호를 받은 안피양구와 '다르한 히야' 칭호를 받은 후르한을 원정군 지휘관으로 기용했다. 둘 모두 누르하치의 최고위 신하였으며, 수십년 동안 전쟁지휘 경험을 쌓아 온 이들이었다. 특히 동해 여진 원정에 특히 관록 있는 인물들이었다. 누르하치는 해당 원정에 자신의 아들들을 인선하지 않고 동해 여진 원정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인 실무자들만을 배치함으로서 원정이 본래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했다.
셋째로, 누르하치는 수로와 육로를 통해 동시에 군대를 움직이도록 하여 진군 및 기동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버일러들과 암반들이 원정의 연기를 주장하며 논거로 들었다시피, 여름에는 동해 여진 세거 지역의 땅이 진흙밭이 되는데다가 강들이 얼어 있지 않은 통에 원정군의 진격과 작전이 힘들었다. 동일 거리를 이동하는데에도 겨울보다 훨씬 오랜 시간과 수고가 소요될 수밖에 없었고 기동중의 취약성 역시 높아졌다. 비록 버일러, 암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원정을 관철하긴 했다지만 누르하치 역시 그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상의 문제점을 육-수로로 동시에 군대를 진격시킴으로서 해결코자 한 것이었다. 특히 원정 투입 병력의 3분의 2 에 해당하는 1400여명의 군대는 수로를 통해 이동시키고 3분의 1 정도인 6백여명 정도만을 육로를 통해 행군하게 했는데1, 이는 주지한 상황으로 인해 육로로의 기동이 수로를 통한 기동보다 훨씬 더딜 수 밖에 없었으므로 강이 해빙된 상황을 역이용하여 수상수송을 통해 병력의 다수를 이동시키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수상을 통해 모든 군대를 이동시키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당시 후금군이 병력수송에 사용했던 배와, 후금군의 주력을 구성하는 병종인 기병대의 상관관계에 따른 문제탓이었다. 강을 이용해서 이동할 부대의 경우 당시 후금의 사정상 작은 배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후금은 당시까지 수상작전을 진행한 적이 별로 없었고 덕택에 함대 역시 없었다. 급하게 결정된 수상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서 배를 건조한다고 해도 시간상 문제나 건조 경험등의 문제로 작은 배만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2 이렇다보니 전투에 필요한 다수의 기병용 말을 수송하는데에 무리가 있었다. 말이 차지하는 부피나 말 자체의 무게 탓이었다. 그렇기에 보병전력 대부분과 일부 기병들만 배를 통해 움직이고 대부분의 말은 육군 부대를 통해 움직이려 했음으로 풀이된다. 만문노당에도 육로로 움직인 부대는 기마부대(morin i cooha)라고 서술되었으므로 이러한 해석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3
이러한 방식으로 원정의 리스크를 억제키로 한 누르하치는 곧 자신의 조치들을 실질적으로 시행했다. 그는 수상 이동 부대를 위하여 통나무배를 그 즉시 건조하게 했고, 기병들에게도 작전에 투입될 1천여필의 말들을 살찌울 것을 지시했다. 이후 동해 음력 7월 19일에 드디어 안피양구와 후르한이 2천여명의 군대와 함께 허투 알라를 출발, 통나무배가 건조되었던 울기얀 강 상류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원정을 시작했다.
7월 26~27일4 울기얀 강 상류 인근에 도착한 후르한과 안피양구는 군을 둘로 나누어 본래의 계획대로 1천 4백여명의 군대는 강을 통해, 나머지 6백여명은 말과 함께 육로를 통해 진군케 했다. 여기서 지상 진군로를 통해 움직인 기병대가 6백여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들어서 4백여마리의 말들이 배로 운송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기병들의 경우 각각의 병사들이 저마다 한 필씩의 말만을 대동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또한 앞서 언급했다시피 당시 동원된 배의 수준을 생각해 보자면 많은 수의 말들은 지상로로 움직였을 것이 유추된다. 물론 유사시를 대비하여 강으로 움직이던 부대 역시도 어느정도의 군마는 대동했겠으나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각 군대가 갈라진 지 18일째인 8월 14일5에 합류한 두 군대는 이후 4일6에 걸쳐 진군한 뒤 8월 19일 무렵 드디어 반란 세력의 세거 지역에 도착했다. 흑룡강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보지리와 그 반란 세력의 세거 지역은 비교적 넓게 흩어져 있었으나 1천에 달하는 기병전력을 보유한 원정군과 기병의 운용 및 동해 여진에 대한 공격에 있어 능숙하기 그지 없던 안피양구, 후르한의 작전이 시작되자 방어자에게 유리한 작전환경에도 불구하고 곧 빠른 속도로 각개격파 되기 시작했다. 음력 8월 19일 당일부터 시작된 작전은 1달 반 정도가 지난 시점에 36 곳의 촌락을 함락하는 대성공의 결과를 냈다.7
연합군은 엄청난 속도로 자신들의 전력이 각개격파되기 시작하자 결국 더 이상 후금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도주하기도 전에 발각되어 후르한, 안피양구의 화공에 당해 궤멸적 피해를 입고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혔으나, 보지리를 포함한 일부는 인다훈 타쿠라라로 도주했다.8
한편 흑룡강을 끼고서 저항하던 사할리얀계의 일부 마을들은 본인들의 세력에 속한 마을들을 포함한 36곳의 마을이 함락된 뒤에도 여전히 항복치 않았다. 그런데 안피양구와 후르한으로서는 거기에 대해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까지도 강은 여전히 얼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 때문에 그들을 공격하기에 조건이 여러모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후르한과 안피양구에게는 이전에 수상으로 이동하던 군대가 이용했던 쪽배들을 끌고오는 방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해당 배들의 경우 말그대로 수송만을 목적으로 임시로 배들이었기에 그것들을 사용한다 해도 상륙작전을 무리하게 진행할 시 피해가 커진다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배를 가지고 온다면 그것을 목격한 적대 세력이 도주할 가능성 역시 존재했다. 여기에 더불어서 해당 배들은 말들을 많이 실을 수 없었으므로 원정군의 주력인 기병이 토벌전에 참전할 수 없다는 문제점 역시 존재했다.
흑룡강 유역에서 새로운 배들을 건조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를 건조하는 것이 목격되면 그 역시도 적대 세력의 도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배를 다시 만든다고 쳐도 그 수준은 이전에 만든 쪽배에서 큰 진전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여러모로 난처한 상황이었기에, 후르한과 안피양구의 진격은 잠시간 돈좌되었다
1.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7월 19일
2.실제로 건조된 배들은 1척에 7명의 병사가 탈만한 배였다. 물론 보급품들 역시 실렸다는 것을 감안해야겠으나 다수의 말들을 수송하는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단, 이렇게 건조된 배들의 경우 누르하치의 지시로 인해 다수의 말들을 수송하는 것을 고려치 않고 준비속도에 치중해 건조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후금군은 보다 대형의 선박을 건조할 기술 자체는 존재했다. 물론 그 배의 수준을 명나라나 조선, 일본등의 대형함선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3.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7월 19일
4.허투 알라를 출발한 날(7월 19일) 로부터 8일째 행군일 범주
5.7월 28일로부터 18일째 행군일 범주
6.구만주당, 만문노당에는 이틀 낮, 이틀 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자칫 이틀로 파악하기 쉬우나 시간을 계산해보자면 4일인 것으로 판단된다.
7.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8월 19일, 만주실록 천명 1년 7월 19일(출병일기준)
8.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10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