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화
====================================================================================================
그날은 어제와, 그저께와, 지난주와, 지난달과 다르지 않은 똑같은 날이었다.
챗바퀴 돌 듯 여의도 빌딩 숲에서 터덜터덜 거리며 지하철을 타고 퇴근 후 저녁 해먹기도 귀찮은 몸을 이끌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선반에서 초코시리얼을 꺼내 타서 먹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삶이자 내가 사회인이 된 후 절대 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삶에서 약간의 감미료처럼 나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맛을 내주는게 바로 내가 하는 유일한 게임인 라스트오리진이었다. 뭐... PC로 다른 게임도 할 순 있겠지만 요즘은 PC로는 유튜브랑 넷플, 디플 같은거 보기에 바쁘고 게임다운 것은 라오가 유일했다. 그리고 PC는 직장에서 지긋지긋하게 마주보는지라 눈이 아프다.
나는 여의도에 있는 금융사의 자산운용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그래 맞다. 남의 돈을 가지고 마치 내 것인 마냥 이리저리 굴리는게 나의 일이다. 남들 보기엔 화려해 보이는 직업 맞다. 그리고 다들 그 실체를 알고 있는 직업 또한 맞다. 실적 못올리면 나가떨어지는 직업말이다. 자, 이쯤 되면 내가 왜 내 직업에 대해 얘기를 꺼냈는지 짐작할 것이다. 그만큼 나의 삶은 팍팍하고 무미건조하며 내가 라오를 내 삶의 감미료라 여길 정도로 빠져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라오의 수많은 바이오로이드 중에서 난 금란이라는 바이오로이드에 호감을 느꼈다. 왜냐고? 성격이 유순하잖아. 다른 캐릭은 뭔가 드세거나, 나사가 빠져있거나, 극단적이거나 하는데 금란은 그냥저냥 둥글둥글한 성격같아서 좋았다. 그리고 과거 이야기 또한 적절히 신파적이라 좋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캐릭에다가 옆트임 각선미. 이걸 어떻게 참느냐 말이다.
아무튼 난 금란을 특히나 아꼈고 다른 캐릭으로 모은 자원을 금란에 죄다 쑤셔 넣곤 했다. 덕분에 매번 전장에서 금란에게 쓸 자원을 캐갖고 오는 리리스만 고생이다. 어쩌겠나, 리리스가 딜이 높은데 당연히 계속 굴려야지. 대신 리리스 레벨 높아지고 좋잖아... 흠흠, 각설하고. 아무튼 나의 서약 1호 예정자는 당연 금란이었다. 이제 오르카 갑판으로 불러서 서약식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약식 버튼을 누르기 전에 나는 배가 출출해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휴대폰을 소파에 잠시 두고 초코시리얼을 타먹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짐작하는 그 사건이 벌어졌다.
뭔가 휴대폰 액정에서 희끄므리한 빛이 퍼져나오더니 내가 익히 알던 캐릭의 단발마가 들려왔다. 나는 시리얼을 먹다말고 사고가 정지한 체 내 휴대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휴대폰에서 튀어나와 소파 앞으로 내동댕이쳐진 한 여성을 보고 나는 그만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어진 숟가락 소리를 들었는지 여성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당연히 그녀의 시선에 나의 모습이 잡혔고 우리는 첫 대화를 했다.
나: “뭐여...금란?”
금란: “누...누구시옵니까?!!!!”
극적으로 당황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여성. 그리고 찰나의 시간에 그녀가 금란임을 짐작한 나.
어떻게 그녀가 금란임을 알았냐고? 생각해보자. 현실의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만화나 게임처럼 떡하니 단서가 있음에도 밑도 끝도 없이 “누구세요?” 하는 경우는 드물다. 금란은 내가 진짜 누군지 몰라서 그런거니까 넘어가지만 난 그녀의 옷, 목소리, 그리고 휴대폰에서 튀어나온 광경을 실시간으로 본 것을 토대로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차치하고 1차적으로 그녀가 금란이라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게임상의 금란과 다른 점이라면 2D그래픽으로 되어있던 모습이 아닌 현실의 인간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 뿐. 그럼에도 얼굴이나 전체적인 모습은 게임상의 그것과 별 차이 없이 위화감 없게 현실적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튼 금란은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내며 나에게 재차 물었다.
금란: “여기가 대체 어디입니까?! 오르카호는?! 주인님은?!! 당신은 누구냔 말입니다!!”
나는 그녀의 격정적인 질문에 뭔가 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진 숟가락을 주으려 했다.
그 순간.
[스르릉 삭!!]
나는 직적으로 알았다. 이건 누가 들어도 칼을 발도한 소리라는 것을.
나는 다급히 금란을 쳐다봤다. 역시 게임에서 보인 것과 같이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향해 환도를 빼들어 겨눈 채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칼을 빼든 모습은 영락없는 금란의 모습인데 어째 칼을 굉장히 버겁게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팔을 부들부들 떨며 공격은 커녕 금방이라도 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모습말이다.
금란: “어... 내가 왜 이러지...?? 당신, 저에게 무슨 짓은 한 겁니까?!”
움직임도 굉장히 꿈뜬 모습이었다. 내가 상황을 살피려 조금씩 위치를 옮기려 하자 그녀도 따라서 움직이려는데 게임에서 보면 섬광과 같던 민첩함은 온데간데 없고 마치 무거운 짐을 들다 지쳐 힘이 다 빠져버린 사람마냥 몇 박자 느리게 느릿느릿 반응하고 있었다. 이건 뭐 내가 당장 금란 앞에 가 서있어도 칼을 피하기보다 맞는게 더 어려울 정도다.
잠깐, 칼을 피하기보다 맞는게 더 어려울 정도라고? 그러면 칼부터 뺏어야지.
나는 일단 위험상황을 차단하기 위해 재빠르게 금란 옆으로 접근했다.
역시나 금란은 나의 접근에 대응하기 위해 내 쪽으로 칼을 돌리려 애쓰지만 칼의 무게를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는지 이내 칼을 든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지친 숨을 헥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로부터 칼을 빼앗아 검집에 넣고 거실 구석에 세워놨다.
그녀는 겨우 자신에게서 멀어진 환도를 바라볼 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어 보였다.
나: “저기... 괜찮아?”
난 그녀의 몸 상태가 염려되어 물었다.
금란: “한번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금란의 몸은 지쳤을 지언정 표정은 원래 금란의 그대로였다.
나: “난 이세환 이라고 해.”
금란: “이세환...? 인간님 입니까...?”
나: “음...그래. 인간 맞아.”
나의 대답에 금란은 살짝 놀라움의 감정이 실린 표정을 지었다. 뭐... 당연하겠지. 그녀가 살던 세계... 그러니까 라오 게임에서는 인간은 사령관 한명 뿐이니까.
금란: “인간이라면 어찌하여 뇌파가...”
나: “안느껴지지?”
금란: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이상 인간님은 뇌파가 느껴져야 합니다.”
나: “그건 게임에서나 가능한 설정이니까.”
금란: “게임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금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 “너 뒤에 휴대폰 봐봐.”
나는 손으로 그녀 뒤에 놓여져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그녀는 조심히 휴대폰속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2D그래픽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자매들이 똑같이 2D그래픽으로 이루어진 오르카호에서 생활하는 모습과 각 캐릭터의 능력치, 앞으로 예정된 사령관의 대사, 그리고 이따금씩 올라오는 게임 제작사의 공지.
금란: “꿈입니다... 꿈일 것입니다!!! 저항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인님을 지켜드려야..!!”
그녀는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자기가 나왔던 문을 찾기 위해 허공을 더듬거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나: “정신차리고 진정해.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금란 너는 현실세계로 넘어왔어. 지금까지 너가 살아온 세계는 우리 현실세계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픽션의 세계야.”
금란: “뭐가 픽션이란 말입니까?! 꿈입니다. 어서 빨리 깨어야... 아얏!!”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금란의 볼을 꼬집었다. 꼬집어서 깨어나면 꿈이고 그대로 아프기만 하면 현실이라 했잖은가.
나: “아프기만 하고 그대로인거 보니 현실 맞지?”
금란: “아... 어째서 저에게 이런 일이.... 아아아아아......”
금란은 결국 주저앉고 멍하니 집안 천장만을 바라보며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고민을 필사적으로 해결하려 애쓰고 있었다.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1.209.***.***
에이스는 그나마 쇼라도 같은 세계선에서 끝났지만 이 작품의 금란은 아예 그 세계선 마저도 허구임을 깨달아버려서 충격이 클 것입니다 ㅎㅎ | 22.09.29 12:59 | |
(IP보기클릭)118.235.***.***
(IP보기클릭)222.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