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09년 닝구타 인근에 동해 여진의 후르하 세력의 군대 1천여명이 쳐들어왔다. 건주는 이에 대해 사치쿠에 주둔하고 있던 1백명의 군대를 닝구타 방면에 지원투입, 닝구타에 쳐들어온 후르하군중 1백여명을 사살하여 그들을 격퇴했으며, 그들이 버리고 간 말 4백필과 갑옷 1백여벌을 노획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포로들 역시도 확보했다.1
이 때 후르하 세력에게 공격을 받은 닝구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시 건주의 중심 거점 허투 알라가 포함된, 건주의 중심지 닝구타 지역(현재의 요령성 신빈현)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동해 여진의 세력이자 후일의 대 동해 여진 세거지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한 닝구타 라는 설이다.
첫 번째 설부터 살펴보자. 원래 누르하치의 거점인 허투 알라의 근처에는 총 다섯개의 성(신 허투 알라 인근의 성을 포함하여 6개)이 존재했는데, 이는 곧 누르하치 세력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대외적으로 흔히 '닝구타'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
사실 그 지역 자체를 당대에 '닝구타'라고 칭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 지역에 웅거하던 여섯명의 버일러-즉슨 누르하치의 친조부와 그 형제들의 연합세력을 지칭하면서 '닝구타의 버일러들', '닝구타의 부'라고 지칭한 정황은 확실하다. 만약 해당 지역이 '닝구타'라고 불렸다면, '닝구타의 버일러들', '닝구타 부'가 존재했기에 해당 지역에 '닝구타'라는 지명이 정착되었을 것이다.2
어쨌든, 필자가 생각컨대 이 때 후르하가 군을 내어 습격한 곳이 이 첫 번째 닝구타는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후르하 세력의 본거지 지역으로부터 누르하치의 거점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강력한 통일 세력을 구축한 누르하치 쪽에서는 동해 여진을 공격할 수 있었으나 여럿으로 나뉘어진 동해 여진쪽에서는 어느 한 세력이 다른 세력들의 영토를 통과해 누르하치쪽을 공격하기란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고작 1천명의 군대로 건주의 거점인 허투 알라 인근을 타격할 동해 여진 세력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동해 여진 각각의 세력보다 훨씬 강력한 해서 여진의 울라와 여허 조차도 이 시기에는 건주에게 완전히 밀린 모양새를 보이며 건주에 대한 선제 공격을 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느 특정 동해 여진 세력이나 동해 여진 세력의 연합이 다른 부족들의 영역을 통과, 누르하치 세력에 대한 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뭣보다도 당시 건주군의 참전병력으로 확실시 되는 것은 사치쿠에 주둔하고 있던 건주군 1백여명 뿐이었다. 정녕 누르하치의 거점 인근이 공격당했다면 사치쿠에 주둔한 군대가 출격하기보다는 허투 알라를 지키는 직속 부대가 투입되었을 것이며 투입 규모 역시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후 후자의 닝구타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1.만문노당 기유(1609)년 음력 9월
2.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pp.184~186.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서는 림고타가 언급되는데 아마 닝구타의 음역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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